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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Mar 16. 2024

2.3.2. 인자가 죄를 용서하는 권세

6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도록 하겠다." 그런 후 예수께서 그 중풍 환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어나서 네 침상을 들고 네 집으로 가라." 하시니, 7그가 일어나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8무리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마태복음 9:6-8, 바른)


 6절에서  예수님은 인자(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인자의 뜻에 관해서는 이미 앞에 살펴보았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면서 하나님으로 용서하신 것이 아니고 아담의 후손 즉 두  번째 아담으로서 권세를 사용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을 듣고 9절에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이를 증거하고 있다. 그들의 말은 ‘이런 권세를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였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에게 주신’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주신’이라고 하였다. 앞에 설명한 대로 예수님이 원래  말씀하신 말씀은 헬라어가 아닌 히브리어 벤아담이었다. 벤 아담 즉 인자는 아담의 후손이라고 해서 개인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아담의  후손 즉 인류를 뜻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당시 유대인들(갈릴리인들)의 대답이 이를 증거 한다. 예수님은  ‘인자’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그 말을 ‘사람들’ 원어로 토이스 안쓰로포이스(τοις ανθρωποις)로 알아 들었다.  예수님은 ‘인자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자의 뜻을 해석할 때 인류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인자’라는 말을 하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 개인이 아니라 ‘인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성경 자체가 인자의 뜻을 자증하고 있다. 인자는 어떤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자신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그 뜻을 해석하기 어려운 은밀한 밀어가 아닌 것이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듣고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누가 보아도 벤 아담은 아담의 후손 즉 사람 또는 사람의 대표명사 인류라고 해석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아담의 후손 즉 두 번째 아담으로 소개하신 것이었다. 그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여 주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사람이 죄를 용서하여 준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속으로 참람하다 비난한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아담의 자손인 자신이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담의 자손인  인류가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음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그 놀라운 권세를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님이  이 본문에서 인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셨다. 서기관들이 이 단어를 듣고 어떻게 공격할 것인지 분명히 알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일반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사람들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일반 사람들도  알아들은 것을 성경해석에 탁월했던 서기관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서기관들도 정확하게 벤 아담이  아담의 후손 즉 사람 또는 그 집합명사인 인류라는 것을 알아듣고 사람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하시면서 사람으로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를 적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 본문의 의도는 그 신성모독이 옳지 않음을 말씀하고 있다. 사람에게 이런  권세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죄를 사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아담의 후손 즉 사람으로서 죄를 사하여 주신 것이다. 이 해석에 대해  서기관들과 같이 신성모독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데 이 말씀을 하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서기관들과 같이 예수님께  신성모독이라고 말할 것인가? 거듭난 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심판을 행할 자들이다. 그렇다면 심판의 권세가 있다는 것은 결국 사면의  권세 즉 용서의 권세가 있다는 것이 된다. 아직 이 부분은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인간이 심판의 권세가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 가설이다. 인간이 용서를 한다고 하더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심판의 자리에서 용서를 실행할 것이다. 또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용서를 하나님의 법에 의해 선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실제로 인간의 죄의  대부분은 인간들끼리 저지르는 것이다. 그것을 용서하는 것은 피해를 당한 피해자다. 물론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께서 책망하심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피해자인 인간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피해자가 용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기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야지 하나님께서도 그 인간을 용서하겠다고 하셨다. 이렇게  인간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


이 해석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면 다음 구절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최소한 하나님께 기도하여 타인의 죄가 사하여졌다는 감동을 전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기능은 인정하기 쉬울 것이다.


14너희  가운데 병든 자가 있으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여라. 15믿음의 간구는  병든 자를 구할 것이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실 것이다. 비록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용서해 주실 것이다. 16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며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간구하여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17엘리야는 우리와 본성이 같은 사람이었으나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니,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않았으며, 18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내리고 땅이 열매를  내었다. (야고보서 5:14-18, 바른)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기 자신에게 타인이 죄를 지었을 때 용서해 주는 것이다.

둘째는  사람이 하나님께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간구하여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감동을 전하는 것이다. 또 죄를 고백한 자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하심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용서를 선포하는 행위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상에서 하나님의 보내신  대사로 하나님의 뜻을 집행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말씀하시거나  행하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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