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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Mar 16. 2024

2.3.3. 안식일의 주인은 인자

27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28그러므로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라고 하셨다. (마가복음 2:27-28, 바른)

 

문맥상으로 보면 여기서 막 2:28절의 인자는 사람들(인류)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27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28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막 2:27~28 바른) 


여기서 핵심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위의 바리새인들의 안식일과 관련한 대적은 모두 율법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율법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


또한 동시대의 유대인들은 ‘막 2:28 바른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다’을 들으면 마 9:8절과 같이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알아들을 것이다.


(막 2:28 가상의 1세기 유대인역) 이러므로 사람들(인류)은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이와 관련한 번역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마 9:8 관련내용을 사복음서를 비교해 보겠다.


(마 9:6 [바른])

그러나 인자(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도록 하겠다." 그런 후 예수께서 그 중풍 환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어나서 네 침상을 들고 네 집으로 가라." 하시니,


(막 2:10 [바른])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도록 하겠다." 예수께서 그 중풍 환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눅 5:24 [바른])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도록 하겠다." 하시고 그 중풍 환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말하니, 일어나서 네 침상을 들고 네 집으로 가라." 하시니,


(마 9:8 바른)

무리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들에게(τοις ανθρωποις)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마 9:8 TR)

ἰδόντες δὲ οἱ ὄχλοι ἐθαύμασαν, καὶ ἐδόξασαν τὸν θεὸν τὸν δόντα ἐξουσίαν τοιαύτην τοῖς ἀνθρώποις



마  9:1절부터 나오는 이 복음서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지칭하면서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너희가 알도록 하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바리새인들에게 걸림이  되어 예수님께서 신성모독을 하셨다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심으로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셨다. 그리고 마 9:8에서는 무리들은 사람들에게 이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이  나온다. 마 9:6의 ‘인자(사람의 아들)’ 할 때 사람의 아들은 단수 그리고 마 9:8은 ‘사람들’이라고 복수를 쓰고 있다.  단수가 왜 뒤에 가서는 복수의 다른 단어로 해석되었을까? 예수님은 인자라는 단수를 쓰셨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왜 복수인  사람들이라고 이해했을까? 그 당시 사람들의 어법에서 사람의 아들(히 아담의 후손)이 라고 말하면 단지 예수님만을 가리킨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인류를 뜻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이해에 따르면 인자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을 들었을 때 인자라는 말은 예수님 자신뿐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의 아들 즉 인류의 보편적인 호칭으로 이해된 것이다. 즉 아담의 자손 즉 인류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지막  사람들의 반응은 “사람(예수님)에게 이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이런  권세를 주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단수(예수님)가 아닌 복수(사람들, 인류)에게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에 대해 사람들 인류라고 이해한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인류 즉 아담의 후손을 뜻하는 것이었다. 


 현재  우리는 예수님이 사용하신 인자라는 말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을 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추측이 아니라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원래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이것이 석의인 것이다. 석의의 원리에 따라 밝혀보면 예수님이 사용하신 인자(사람의  아들)는  아담의 후손 인류 즉 보편적인 사람을 뜻하는 보편명사다. 예수님 자신만을 지칭하여 사용된 특정인의 호칭 고유 명사가  아닌 것이다. 물론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사용하신 적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 의도가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는 고유 명사로 인자를 쓰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사람의 아들로 오셨음을 강조하시려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로 오셨기 때문에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셨다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도 되지만 인류전체를 말한다.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과 아담의 후손인 우리가 안식일의 주인인  것이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인간으로 자신을 등장시키신다. 결코 하나님으로서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을 하시게 된 동기가 자신의 제자들이 이삭을 안식일에 베어 먹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고 율법주의적으로 유대인들이 정죄하자, 안식일의 참 주인이 누구인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함인지, 아니면 인간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를 알려주시는 것이다. 안식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인류  안에 자신을 포함시키시어 말씀하고 계신다. 심지어 안식일의 주인을 언급하면서도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쓰시다가 갑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단어를 쓰심으로 자신이 인간으로서 그 자리에서 말씀하심을 강조하려 하셨다. 이는 수사학적으로 효과적인  기법이다. 사람들과 사람의 아들의 공통점은 모두 사람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복수라 불특정 다수이지만 사람의 아들은 한 사람  예수님을 지칭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사람의 아들은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인류 전체를 뜻하는 사람들로 번역될 수도 있다.  이 의미의 이중성을 통해 예수님은 결국 자신이 인간으로서 인류에 속하여 안식일의 주인 됨을 강조하셨다. 이를 통해 자신이  인간으로 그 자리에 서셨음을 드러내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역하실 때에 온전한 인간으로 사신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인류가  원래 가진 모습이 현재 자신이 인간으로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임을 알게 한 것이다. 결국 인류도 아담의 후손이고 예수님도 아담의  후손인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인자 즉 인간으로서 그렇게 사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된 거듭난 자들도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고 사셨던 것처럼 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사람에게 맡기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모든 능력으로 완전한 창조를 하시어 사람이 쉴 수 있게 하신 것이다. 태초의 인간의  통치는 완전한 쉼이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다 해주시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닌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인간은 완전한  쉼을 누리게 된다. 그것이 안식의 의도인 것이다.

6일 동안 만나를 내려 주시고 인간들이 7일에는 쉴 수 있게 하신  것이 안식일이다. 이 안식일은 그 율법 준수를 통해 구원받는 자기 의를 얻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그 율법과 자의적인 조항들로  인간을 옥죄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쉼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인간이 하나님의 완전한 보호아래서 쉼 즉 안식을 얻음을  깨닫게 하려고 주신 것이다. 그래서 그 쉼은 인간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진정한 쉼을 주려고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것은 그분의 능력이 부족하시기에 우리의 노동력을 착취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은 자기 충족적이신 완전한  분이시다. 그러나 자신의 필요가 아닌 인간의 필요에 의해 즉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간들에게 쉼이 필요하기에 자신의 목숨을 대신  주시어 쉼을 주셨다. 그것이 진정한 안식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의 편지들에 은혜와 평강을 인사로 반복하고 있다. 은혜에  의해 주어진 평강인 것이다. 이렇게 안식(일)의 주인도 인간이 된 것이다. 



새 하늘 새 땅


하나님이  우리에게 창조하여 주시고 예수님을 통해 회복하여 재창조하시는 새 하늘 새 땅은 온전히 우리를 위하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는 필요치 않다. 하나님은 피조들이나 사는 이 세상이 필요하지 않다. 오직 피조물인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는 공기가, 물이 필요치 않다. 오직 피조물인 우리는 숨쉬기 위해 공기가 필요하다.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물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과 땅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신 것이다. 타락한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그냥 멸해버리시면 되지만 불쌍히 여기시어 새롭게 해서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다. 새 하늘 새 땅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아담의 후손들 만유의 상속자들을 위한 것이다. 실로 우리는 하나님께 엄청난 존재로 대접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우리에게 완전한 안식을 주시기를 기다리신다.

 

하나님의 아들 아담의 권세

 

1[지휘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다윗의 시] 여호와 우리 주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님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습니다. 2주께서는 주님의 대적자들 때문에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을 통하여 권능을 세우셨으니, 이는 원수와 복수하는 자들을  잠잠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3주님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님의 하늘과 주께서 자리를 정하신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 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십니까? 5주께서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6주께서 그로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양 떼와 소 떼와 들짐승과 8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물길 따라다니는 것들입니다. 9여호와 우리 주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8:1-9, 바른)


18그러자  예수께서 다가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나에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도록 하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8:18-20, 바른)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 이는 아담이 태초에 가졌던 권세였다. 이는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을 포함한  것이었다. 그 보이지 않는 세상을 포함하고 있음을 고전 15장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성경에 구약 안에 이미 우리는 인간이  눈에 보이는 새나 땅에 기는 것들과 물고기만 다스리는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시편 8:6절에서 ‘6주께서 그로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시편 8:6, 바른)’라고 말씀하셨다. 피조세계 즉 만물을  다스리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스리는 것들이 하늘과 땅과 바다에 속한 것들이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에 관해서만 이라면  앞의 6절에서 만물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권세를 상실하는 과정에서 사탄과의 서열의 우위가 인간에게  있음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천사계급인 사탄이 인간의 아래의 권세에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 즉 상속자들을  섬기라는 종들이라는 것이 히브리서를 통해 이미 밝혀졌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래의 본문을 본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도 아담의 아들(벤 아담, 인자)과 다른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누가복음과 창세기의 계보를 보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의 관계는 3위 하나님 안의 두 위격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아니다. 단지 창조자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으로  보내지신 사람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다. 즉 신격과 신격의 관계가 아닌 1위 하나님 신성과 2위 하나님의 인성의 관계인 것이다.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과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러나 1위 성부 하나님과 2위 예수님의 신성과 신성 사이에는 이 관계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 어디를 봐도 그 근거가 없다. 이것을 억지로 짜 맞추기 위해 끌어들인 것이 성자의 영원발생설이다.


27사람들이  놀라며 말하기를 "도대체 이분이 누구이시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복종하는가?"라고 하였다. 28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들어가셨을 때에 악령 들린 두 사람이 무덤들 사이에서 나오다가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들은 대단히 사나워서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었다. 29그때에 그들이 외치며 말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오기도 전에  우리를 괴롭히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마태복음 8:27-29, 바른)


하나님의  아들을 그리스 로마 종교에서처럼 신의 아들 즉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 헤라클레스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종교의  신들은 인간형 신들이다. 그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아들 즉 하나님의 아들의 사상은 인간이 신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인간의  하나님 되고자 하는 타락한 욕망과 사탄의 북극성

[1]을  향한 욕망이 뱀들의 야합처럼 뒤엉켜진 괴물적 종교에서 나온 발상이다. 성경에 나와있는 삼위일체 안의 두 위격이신 하나님들  사이에는 이런 관계가 없다. 성자의 발생과 성령의 발출은 사실 신플라톤주의의 유출론을 성경적 근거 없이 가만히 신학에 끌어들인  심각한 오류다. 이런 거짓 이데올로기(ideology)를 증명할 어떤 성경구절도 없다. 구약에서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언하는  구절들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만 나타내어지신다. 그리고 아들로 표현되는 부분은 시편에서 솔로몬을 지칭한 시편 2편으로 솔로몬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아버지가 되시는 약속을[2] 가지고 시편을 지은 것이다.  


솔로몬은 파괴될 유한한 지상의 성전을 짓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의 영원하고 완전한 성전을 지으신다. 


솔로몬은 완전하지 않은 양의 피로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 제사장을 통해 반복해서 제사를 드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단번에 완전한 제사를 드리신다. 


솔로몬의 인간 제사장은 죽고 새로 세워져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장이 되신다. 


그리고  하나님과 솔로몬의 관계는 예수님의 예표로서 받아들여지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종의 형체 즉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을 예표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솔로몬의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의 관계다. 이 예표를 가지고 오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이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인 것이다. 즉 성육신 하신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인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억지로 성부와 성자라는 관계를 설정하고 이것을 3위의 하나님 사이의 신격이신 두 하나님 사이의 관계로 억지 설정을 하려다  보니 성경에도 있지 않은 성자의 성부로부터의 발생설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모두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생긴 스스로 파멸에  이르는 모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3]


우리는  항상 성경이 가는데 까지만 나아가고 성경이 멈추는 그곳에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언제든지 성경에 비추어 우리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의 기준을 벗어난다면 다시 우리를 성경의 다림줄 앞으로 이끌어 우리를 새로 개혁(Reform) 해야 한다. 


Sola      Scriptura 

Solus    Christus 

Sola      Gratia 

Sola      Fide 

Soli       Deo  Gloria


 사람으로서  자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계보와 창세기의 계보를 보면 첫 아담의 아버지가  하나님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새 창조의 과정을 거쳤으나 사람인 여자 마리아의 몸을 입고 오신 두 번째 아담 예수님의 아버지도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이는 3위 하나님 안의 두 위격이신 하나님 중 성령님을 제외한 두 위격 사이의 관계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몸에 잉태케 하신 하나님과 사람으로 성육신 하시어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인간 예수님 사이의 관계인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구약에 하나님과 인간 아들인 솔로몬의 관계와 같아지는 것이다.


천사들  사이에도 이러한 ‘자식을 낳는다’던지 ‘결혼한다’던지 하는 인간적인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에 관해  사두개인들에게 변증 하실 때 말씀하신 부분이다. 하물며 천사들 사이에도 그러한데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이런 불경한 관계를  대입시킨다는 말인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오직 자식을 낳는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관계다. 그래서 하나님과 성육신 하신 예수님  사이의 관계로 설정되는 것이다. 구약에도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로 설정되었다. 즉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관계인 것이다.  예표의 문맥이 이렇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1]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구약의 비유


[2] 14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니, 그가 만일 죄를 지으면 내가 사람들의 막대기와 인생의 채찍으로 훈계할 것이나, (사무엘하 7:14, 바른)


[3] 16그가 모든 편지에서 이것들에 관하여 말하였는데, 그중에 어떤 것들은 이해하기 어려워서, 무식하고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들처럼 이것들을 억지로 해석하다가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있다. (베드로후서 3:16,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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