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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Apr 20. 2024

3.1.3. 인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다 -4

다윗 전능자의 그늘 아래의 왕, 다니엘 샤한샤 아래의 최고 통치자


3.1.3.6. 다윗 전능자의 그늘 아래의 왕


다윗은 왕궁에서의 천 날보다 성전 문지기로의 하루의 삶을 사랑했다. 그는 하나님께 사랑받은 자였다.[1] 그리고 그 사랑을 받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다. 그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아름다움을 알기에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다. 그러나 다윗은 예수님과 같이 건축자들의 버림받은 돌이었다. 다윗은 버림받은 자였다.


3.1.3.6.1.  아비가 버린 자 다윗


다윗은 아비 이새에게 버림받은 자식이었던 듯하다.[2] 어미는 죄 중에 다윗을 잉태하였기에 다윗의 편이 되어줄 수 없었다. 이것을 증거 하는 흔적이 성경 여러 곳에 보인다. 


어린 막내를 양 치는데 보내는 아비는 없다. 그곳은 광야다. 언제 비탈 절벽에서 양과 함께 목숨을 잃을지 알 수 없는 곳이다. 또 곰과 늑대와 사자의 위험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양치기들은 홀로 양을 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위험한 곳에서 다윗은 버려지듯 양을 지키고 있었던 것 같다. 다윗이 양을 지키기 위해 사자와 싸웠다는 것은 다윗의 용맹을 증명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다윗의 절박한 처지를 반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어떻게 어린아이가 양을 위해 사자에게 달려들 수 있었을까? 그만큼 절박해서였을 것이다. 그 양을 잃었을 때 그에게 쏟아질 형들과 아비의 비난은 죽음의 공포보다 더 무서웠을 것이다. 

이를 증거 하는 장면들이 성경에 등장한다. 골리앗 사건에서 형들은 전장에 자신들을 위문 온 동생을 향해 교만과 방자함이라는 말도 안 되는 평가의 비난으로 일관한다. 이때 다윗은 이미 사무엘에 의해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였다. 형들의 반응은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동생을 향한 반응이 아니었다. 

또한 어린 자식을 전장에 보내는 아비는 없을 것인데 이새는 다윗에게 치즈 덩이와 음식들을 주면서 형들을 보고 오라고 한다. 형들의 안위는 중요하지만 어린 다윗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다윗은 이스라엘 군의 진영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고 종과 함께 따로 다닌다. 그렇게 따로 다니다가 적군에게 잡히거나 죽임을 당할 수 있다. 전쟁터의 상황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다윗이 가는 길이 언제 전쟁터로 변할지 모르는 것이다.

 또 유목 민족의 특성상 잘 훈련된 정찰 기병들이 항상 전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들은 따로 훈련시킬 필요도 없이 유목을 하며 말이나 낙타를 타고 다니며 살아온 그대로 타고난 정찰대들이었다. 이런 기마 정찰 부대를 보고 유럽도 따라 한 것이 동유럽의 후사르다. 정찰 부대들이 항상 주시하고 있는데 전쟁터에서 아군의 진영에서 따로 떨어져 이동한다는 자체가 죽음 앞에 나아가는 어리석은 행동일 수도 있다. 전쟁터에서는 차라리 군대의 진영 안에 있어야 안전하다. 그곳에서는 따로 적군에게 사로잡히거나 죽임을 당할 위험은 없다. 단지 군대와 군대의 싸움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위험한 전쟁터 한가운데로 어린아이를 군대와도 떨어져 따로 다니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친자식들이라고 여겨지는 다윗의 형들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자기 아들이 아닌 어린아이를 보내는 것이다. 이런 아비는 없다. 이것은 아비가 자식에게 하는 행동이 아니고 아비가 종에게나 하는 행동일 것이다. 만일 아끼는 종이라면 종에게 조차 이런 위험한 일을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식으로 데리고 있지만 자기 자식이 아닌 무언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는 것 같은 행동들이다. 

또 사무엘이 아들들을 찾았을 때에도 이새는 다윗을 부르지 않았다. 양들을 봐줄 사람이 없어서 막내가 지켰을 수도 있다. 그런데 골리앗 사건 때 보면 분명 다른 양치기들이 존재한다. 다른 양치기들에게 양들을 부탁하고 다윗을 부를 수 있었는데 부르지 않았다. 이것도 같은 것이다. 자식으로 여기지 않은 것일 수 있다. 사무엘이 다른 아들에 대해 묻지 않았다면 이새는 다윗을 부를 생각이 없었던 듯하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전무후무한 사사요 선지자였던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에도 형들과 아비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아비 이새는 위험한 곳에 아이 다윗을 보냈다. 결코 이스라엘의 왕이 될 귀한 아들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형들도 왕이 될 다윗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심지어 그냥 자신들의 동생으로도 사랑해주지 않았다. 골리앗을 죽이기 직전의 전장에서도 형들의 그 야유와 비난은 이어졌다. 골리앗을 죽인 이후에도 가족들의 평가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가족들의 비난이 다윗에게 양 한 마리도 잃으면 안 되는 절박함을 만들어 내었을 것이다. 상식적이면 자기 양이 죽더라고 그 양과 자신의 생명을 바꾸지는 않는다. 목숨을 걸고 어린아이가 양을 위해 싸울 만큼 양이 소중한 것이 아니다. 주변에 어른들이라도 있었다면 그런 무모한 선택을 하는 다윗을 막아섰을 것이다. 양이 잡혀갔다고 해도 어른들이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무리가 중무장을 하고 자신들의 안위를 돌볼 수 있을 때라야 사자에게 달려들어 양을 구하는 것인데 다윗은 맨 몸에 지팡이 하나와 돌멩이를 들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가족에게서 버려진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절박한 곳에서 다윗은 친구도 거의 없이 지냈다.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 그곳에서 사자와 늑대와 곰에게서 그리고 형들과 아비에게서 그리고 자신을 버린 세상에게서 어린아이 다윗을 구원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용사의 기름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버려진 그곳에서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그래서 세상 화려함이 모인 왕궁도 그 세상의 본질을 알기에 사랑 없음을 알기에 시기와 질투, 그리고 신의 없음을 알기에 그는 자신을 사랑하시는 유일한 분 하나님의 집에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세상에 없는 사랑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사랑으로 자신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서는 것이 세상의 천 날의 영화보다 좋았던 것이다. 세상의 본질을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면 그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지… 그 하나님께 감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1.3.6.2. 온 이스라엘에게 버림받은 자 다윗


골리앗을 죽인 후 그의 삶은 더 큰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하나님의 원수를 처단했지만 그는 사울에 의해 전국에 수배가 내려진 죄인이 되었다. 왕의 명령에 의해 온 백성들이 그를 발견하면 신고해서 죽음으로 내모는 죄인의 처지가 된 것이다. 이제 가족의 버림뿐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버린 자가 된 것이다.[3] 나중에는 이방의 왕 앞에서 미친 것처럼 침을 흘려야 목숨을 부지하는 처지로까지 떨어졌다.


3.1.3.6.3. 버림받은 자들의 왕


그런데 그 버림받은 자 다윗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 같은 왕으로 삼으셨다. 버림받은 그에게 버림받은 자들이 아둘람 굴에서 모여들어다. 그는 버림받은 자들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의 모든 고난은 스스로 길 잃고 버려진 하나님 백성, 즉 목자 없는 양들의 구원을 위한 준비였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이스라엘 땅 안에 있는 원수들을 정복하셨고 외부에 있는 적들도 정복하셨다. 다윗이 십자가와 같은 고난을 통과해서 마치 부활하여 살아나듯 기적적으로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은 하나님 백성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버려진 백성의 모습으로 오시어 고난을 당하시고 왕이 되시어 그 백성을 구하신 모습의 예표가 다윗인 것이다. 다윗의 승리는 인자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원수를 정복하고 그 백성을 구속하는 장면인 것이다.


3.1.3.7. 다니엘 샤 한 샤[4] 아래의 최고 통치자


우리는 다니엘과 같이 높은 자리에 올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한다고 소원한다. 교회에서 어느 집 아들이 명문대를 들어가고 대기업에 들어가면 축복받았다고 생각한다. 내 아이들이 다니엘과 요셉처럼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를 바란다. 아니면 다윗 같은 왕이 되거나 또는 사도 바울 같은 멋진 전도자가 되기를 바란다. 다니엘도 요셉도 다윗도 사도바울도 그 삶이 우리가 그리는 삶과는 많이 달랐다. 그들은 버려진 삶을 살았다. 다니엘도 요셉도 다윗도 사도바울도 버려진 삶을 살았다. 하나님께 자기 십자가를 제외하고 성공을 꿈꾸는 기도를 한다면 그 사람은 우상숭배자다. 그런 기도를 드리려면 절에 가기를 추천한다. 무당에게 가서 굿을 하고 치성을 드리기를 바란다. 제발 교회에서 수능기도회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해 일천번제라는 우상숭배를 하려면 절에 가서 천 배를 하기를 권한다. 제발 교회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기를 권한다. 이 말에 반발심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냥 추악한 탐욕에 젖은 입을 닫고 진정한 회개와 회심이 자신 안에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하여 자기 영혼을 지옥에서 건짐 받기를 권한다. 하나님의 양이 되는 것은 세상의 적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이 이해되지 않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그런 기독교는 없다. 


세상이 사랑하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세상이 사랑하는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자기 십자가는 지고 싶어서 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핍박이 함께 한다. 이 말에도 의문이나 반발심이 생긴다면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당신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당신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에게 필수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핍박인데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이유는 당신이 세상과 벗한 세상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신을 위해서는 지옥의 불길만이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목사이건 장로이건 평신도이건 당신의 길은 지옥의 불로 달려가는 불나방의 길이다. 당신의 교회 전체가 이렇게 믿더라도 그 전체가 틀렸다. 한국교회 전체가 그렇게 믿더라고 그 전체가 틀렸다. 당신들 모두가 모여도 하나님 한 분을 이길 수는 없다. 겉으로 하나님 따르기 원한다고 하지만 속으로 당신들이 고난을 피하고 세상을 따르기 원한다면 당신들은 모두 지옥의 불쏘시개 일뿐이다. 당신들은 구원받지 못했다. 이 말을 대적하기를 원한다면 당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대적하는 것이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고백을 부인하는 것이다. 조셉 얼라인이나 리차드 박스터의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경고(Call to the unconverted)』를 한번 읽어 보기를 권고한다. 저 모라비안들의 저작들과 조지 폭스의 일기, 요한 웨슬리의 일기를 읽어보고 그들이 어떻게 거듭났는지 읽어보기를 바란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읽어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드를 통해 선포된 부흥의 시대에 회심을 독촉하는 경고의 메시지를 읽어보기 바란다. 참고로 조나단은 자신이 설교했던 교회에서 부흥 이후에 쫓겨났다. 진리를 선포한다고 항상 사람들이 환영하지는 않는다. 


저 독일의 개혁자 루터가 어떻게 회심했는지 자세히 살펴보기를 바란다. 여러분은 루터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하나님의 의를 몰라서 그렇게 오랫동안 방황하며 자신의 죄를 사함 받고 구원받는 길을 찾았다고 생각하는가? 그가 어느 날 롬 10:10을 성경 안에서 처음 발견하고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신앙고백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는 신학교 교수였다. 그것도 그는 책을 읽으면 중요한 구절과 페이지를 외워버리는 탁월한 지성을 지녔다. 그런 그가 성경의 기본진리를 몰랐겠는가? 그런데 그는 왜 그토록 고행까지도 자처하며 구원을 갈망한 것인가? 그는 수 천 km를 걸어가서 로마 교황청의 계단을 기어올라갔다. 그는 수많은 고행과 헌신을 자처했다. “자신의 구원” 오직 그 확신을 얻기 위해. 그러나 그는 그 믿음을 얻는데 실패했다. 자신의 모든 노력으로도 지옥의 불길로 인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신의 바로 옆에서 벼락을 맞고 죽어간 친구가 간 그 길을 자신도 가야 한다는 두려움은 그를 공포에 떨게 했다. 루터처럼 고심해 본 적이 없다면 단언컨대 당신은 거듭나지 못했다. 신앙고백자인 당신은 거듭나지 못했다. 성경을 읽고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읽고 세례문답을 하고 세례를 받았을지라도 당신 안에 사람으로서는 생성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불덩이가 당신의 전생을 사를 정도로 타올라 당신을 휘몰아치지 않는다면 당신은 거듭나지 못했다.

그 선진들의 글을 읽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그때는 생명을 걸고 일천번제를 드리며 기도하든 30일 작정 새벽기도를 하기 바란다. 40일 금식기도를 하기를 바란다. 그런 기도들은 이런 목적을 위해 하는 기도들이다. 당신들의 더러운 탐욕을 위해 하는 기도들이 아니다. 아니면 당신들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중국 지하 교회의 윈 형제 그룹의 통곡하며 눈물이 터질 때까지 기도하고 예배하는 회심집회에 가기를 바란다. 그곳에서 복음사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기준을 듣고 자기 영혼을 위한 탄식으로 통곡이 나올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기로 작정하고 기도하라. 그것이 당신이 살 길이다. 당신들이 교회와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기도해서 능력을 받고 성도들에게 인정을 받고 성도들이 당신을 높이는 자리에 갔다면 당신들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서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니다. 그 마음이 속에 숨겨져서 겉으로 말해진 적이 없어도 그것은 어둠에서 온 영적인 힘이다. 그 은사는 출처를 의심해봐야 한다. 당신의 길은 지옥의 길이며 당신을 추종하며 당신에게 복채를 바치는 자들도 지옥의 불쏘시개들이다. 이 말에도 의혹이 든다면 저 영국의 웨일즈 대부흥을 주도했던 에반 로버츠의 『성도들 안에 있는 전쟁(War on the saints)』을 읽고 깨닫고 돌이켜 구원받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은 당신들이 고난당하기 원하시지 않는다. 단지 당신들의 정체성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지는 순간 세상의 핍박은 함께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피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풀무 불과 사자 굴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란다. 성경에 있는 모든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의 가치를 알기에 하나님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면 하나님을 선택하라. 그렇게 하나님을 선택했을 때 당신은 진정한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것이다. 누군가 지옥의 불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세상의 모든 것 세상 모든 행복을 포기하고 평생 고난만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렇게 돌이켰다. 다시 세상을 사랑하여 탐욕으로 돌아갔다면 당신은 다시 빛에서 어둠으로 돌아가 지옥 행 하이웨이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길은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주신 죽음이 이르도록 돌이키지 않는 길이 아니다. 오직 비참한 인생의 처지를 인식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의 구원을 얻고 그 감격에 불타올라 사망의 골짜기도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고 수많은 영혼을 주님께 드리는 생명의 길이다. 

이 글은 당신을 비방하기 위해 적은 글이 아니다. 그렇다면 특정인을 들어 비판했을 것이다. 불특정 다수를 향해 이 글을 쓴 것은 당신이 비난받지 않기 원하는 마음에서다. 순교의 현장에서 영문 밖에서 불사른 바 되신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간절한 기도를 올리면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한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 우리를 거듭나게 할 것이다. 사람으로서는 성경의 기준에 맞는 삶을 살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시면 그 삶을 살아야 저녁에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이룰 수 있게 된다. 그 본질이 변화되어지는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의 삶은 사도행전에서 튀어나온 사람의 삶이 될 것이다. 우리의 교회와 옆 교회에서 우리들은 사도 바울들과 스데반들을 볼 것이다.


3.1.3.7.1. 민족과 함께 버림받은 자 다니엘


다니엘은 자신의 죄가 아닌 민족의 죄에 휘말려 포로가 되었다. 그 민족의 죄가 차면 죄인이나 의인이나 그 민족과 함께 심판의 운명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해서 다니엘은 귀족들의 행렬에서 철사에 묶이고 코는 큰 낚시 바늘 모양의 갈고리에 뚫리고 옷은 벌거벗겨져서 알몸으로 포로의 길을 걸어서 바벨로니아로 끌려갔을 것이다. 행렬에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코를 뚫고 있는 갈고리는 코를 찢어놓을 것이 분명했을 것이다. 다니엘이 어린아이라서 코를 꿰뚫리지는 않았더라도 벌거벗겨져 철사 줄에 묶여서 갔을 것은 분명하다. 다니엘서의 초반에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간 장면이 언급되지 않아 그 실상을 우리가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3.1.3.7.2. 바벨니아 포로로 버림받은 자 다니엘


다니엘은 포로의 삶을 살았다. 그가 왕의 소년들로 뽑히고 총리가 되기도 했지만 그는 여전히 식민지에서 끌려온 포로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쓰임을 받는 것은 자신의 민족에게 잘못하면 매국노로 낙인찍힐 수 있는 일이었다. 일제의 앞잡이가 일제에 부역했듯 다니엘도 원수 바벨론에 부역한 매국노로 취급당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바벨론과 이방 민족들에게는 일제가 조센징을 경멸했던 것처럼 경멸당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로 치면 조선인이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 총독부의 수장이 된 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는가? 잘못된 시각으로 보면 다니엘은 그렇게 비춰질 수도 있는 삶을 살았다. 또 포악한 바벨로니아의 왕들을 생각하면 다니엘이 왕의 진미를 거부하고 신상들에 절하기를 거부한 선택은 사지가 사자에 의해 찢길 수 있는 죽음의 길이었다. 다니엘은 그 길을 포로의 몸으로 걸어갔다. 


3.1.3.7.3. 죽음에 버려진 자 다니엘


그는 높은 자리를 구한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높은 자리를 구하며 다니엘의 생을 바라보고 그 삶을 흠모한다. 그러나 다니엘의 삶은 대적이 호시탐탐 죽이려고 함정을 파고 기다리는 전쟁터였다. 처음 남 유다 왕국이 망하는 과정에서 그의 목숨은 위협을 받았다. 느부갓네살의 소년들로 발탁되었을 때 왕의 진미를 거부할 때도 그의 목숨은 위협을 받았다. 느부갓네살의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을 때도 그는 풀무불에 던져졌다. 페르시아 왕 다리오(다리우스)의 시대에도 그는 왕에게만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사자 굴에 던져졌다. 그의 삶은 항상 죽음에 노출되어 있었다. 우리가 기대하는 총리의 부요와 힘의 편리성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그는 목숨의 위협 속에서도 항상 하나님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풀무 불과 사자 굴과 같은 죽음을 선택하는 길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선택했지만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항상 죽음의 길이었다. 그는 바벨론과 페르시아라는 대 제국의 왕 중 왕들 아래의 최고의 통치자가 되어 영화를 누린 것이 아니었다. 항상 죽음의 칼날을 마주하고 서는 칼바람아래의 낭인 사무라이의 삶과 같은 삶을 살았다. 언제 길거리의 주검이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불확실한 내일을 품고 잠에 들어야 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들도 둥지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하신 예수님처럼 의지할 곳이 없는 삶이었다. 자신이 있는 나라는 자기 민족의 나라가 아니었다. 적국에 포로가 되어 그곳에서 쓰임을 받더라도 여전히 경계의 대상이 되었고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언제든지 그 대적들의 음모가 목을 조여올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는 대적들과 같이 불법과 거짓을 사용하여 대적들의 음모를 방어할 수도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법 안에서 진실을 사용하여 움직여야 했다. 법정 공방을 벌여본 사람이라면 거짓의 올무 앞에서 진실만으로 대항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력한 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다니엘은 그것이 함정임을 알고도 그 함정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예루살렘을 향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절할 수 있는 신앙을 가졌기에 왕의 신상 앞에 절하는 것을 거부하고 죽음으로 달려가야 했다. 다니엘 그의 삶은 화려한 권력자의 삶이 아니라 죽음에 버려진 삶이었다.[5]


다니엘을 하나님은 샤 한 샤(왕 중 왕)라 불리던 제국의 황제들 아래의 최고 통치자로 삼으셨다. 그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준비하셨다. 70년의 형벌 이후 회복의 통로를 준비하신 것이다. 이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은 고레스 왕의 포로귀환 칙령을 발표하게 하셨다.


이것도 왕 아래의 최고 통치자 다니엘 즉 왕의 우편에 앉은 자와 같은 다니엘을 통해 백성을 구원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예표다. 그 구원을 위해 다니엘은 포로로 버려졌다. 그리고 사자굴과 풀무불에 버려졌다. 불사름과 같은 고난에 버려진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버려지셨다. 영문 밖에서 불사름과 같은 고난을 당하셨다. 그 버림받은 왕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왕이 되셨다. 이 모든 것은 인자들을 통해 행하신 하나님의 기록이다.



[1] 다윗의 이름 뜻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였다.


[2] 어미가 죄 중에 잉태하였기에 다윗은 자식 취급을 받지 못한 듯하다. 위대한 왕 다윗의 어미는 그래서 성경에 이름조차 등장하지를 않는다. 추측 키로 간음으로 낳았거나 그 당시 자주 침략했던 암몬과 같은 이방 침략자들에게 몸을 더럽혀 다윗을 낳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실질적인 아버지가 이새라고 해도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는 한 그 친자관계를 입증할 수 없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듯하다. 삼하 17:25절에 다윗의 누이들인 스루야와 아비가일의 아버지가 이새가 아닌 나하스로 나오는데 삼하 17:27절 이후에 이 나하스가 암몬 사람이며 그 암몬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함께 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다윗과 그 백성을 먹인다. 백성들을 먹일 정도면 이들이 일반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던 듯하다. 삼하 10:2에 등장하는 나하스 왕의 아들과 그 주변인들인 듯하다. 그런데 나하스 왕은 이방 암몬의 왕이었다. 그의 아들이 다윗과 그 백성을 먹인 것도 그렇고 삼하 10:2절에 다윗이 나하스를 존경하여 그의 장례식에 사신을 보낸 것도 일반적이지는 않다. 다윗과 나하스가 의붓아버지와 아들 관계이거나 아니면 다윗의 친부가 나하스 왕일 수도 있는 것이다. 유대대백과에도 이런 주장이 나온다. 그리고 일부 랍비들도 이러한 주장을 하는 랍비들이 있었다(Nahash p142 Jewishencyclopedia)  이렇게 보면 성경에 나오는 이새의 납득할 수 없는 행동들이 이해가 갈 수도 있다.


[3] 물론 다윗이 사울 왕에 의해 쫓기게 되었을 때 가족들은 아둘람굴에 있는 다윗에게 내려갔다. 그러나 가족들이 다윗에게 갔다고 해서 다윗을 사랑해서 간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왕의 대역죄인이요 지명수배범인 다윗으로 인해 모든 가족이 위험에 처해졌기에 어쩔 수 없이 다윗과 함께 도망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증거 하는 성경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아둘람굴에 모여든 자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모두 세상에서 지명수배 당하거나 버려진 자들이었다. 이런 자들이 모이는 곳에 가족들이 간 것이다. 결코 영화로운 자리로 나아간 것이 아니고 버림받고 쫓기는 도망자의 신세가 된 것이었다. 결코 목숨의 위험을 당하는 급박함이 없으면 가족들이 가고 싶지 않을 길이었을 것이다.


삼상 22:1-2 바른 1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니,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거기에 있는 그에게로 내려갔으며, 2환난을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모두 그에게 모여들었고, 그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니, 그와 함께 있는 자가 사백 명가량 되었다.


[4] 샤 한 샤는 페르시아어로 왕 중 왕이라는 뜻이다.


[5] 아마 우리의 어리석은 관점으로 이 시대에서 다니엘 같은 사람의 삶을 보았다면 우리는 죄로 인해 또는 조상들의 죄로 인해 저주받은 삶을 사는 줄 알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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