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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Apr 27. 2024

3.1.3. 인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다 -5

3.1.3.8. 십자가의 왕 예수님


표면상 하나님의 가장 큰 수치는 십자가다. 이 관점은 세상적 관점이다.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실패한 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그곳에 무슨 영광이 있겠는가? 또한 사탄의 계략의 성공에 의해 하나님께서 실패를 당하고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이것은 사탄의 관점이다.

그러나 그곳은 진리의 관점 안에서 보면 하나님의 지극한 영광이 가장 빛나는 장소다. 미물을 위해 죽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는 없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빛나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십자가로 인해 가장 많은 감사와 감격과 사랑의 고백을 하나님께 드린다. 

그 어떤 존재도 미물을 위해 그리고 그 미물들에 의해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자리에 자신을 내놓지는 않는다. 그것은 가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땅을 기는 지렁이를 구하기 위해 교통사고를 감수하고 자신의 목숨을 잃었다면 그 죽은 자를 과연 의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신이 인간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도 그와 같다. 

그러나 그런 미물인 우리 인생들을 사랑해서 자신이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인간으로 오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셨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죽음에 내어 놓음으로 그 죄에 대한 형벌의 대가를 지불하셨다. 그 죄의 육신을 멸하시고 승리하셨다. 그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드님이 부활하셨다. 죄의 몸은 죽고 의의 몸으로 다시 사셨다. 하나님의 아들로 완전히 새롭게 나셨다. 그리고 그 최종 승리의 자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인간으로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자리에 오르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을 대신하셔서 원래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지위를 회복해 주신 것이다. 이전에 그 지위를 가졌던 첫 아담은 실패하는 인간이었지만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완전한 분이시기에 타락하여 그 지위를 잃어버리실 수가 없다. 그래서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지위 즉 만물의 통치자로서의 지위는 견고하여 불변한 것이다. 


3.1.3.9.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인자


이것이 사탄과 세상은 몰랐던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의 포석이었다.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인 것이다. 

십자가의 왕 그것은 수치가 아니다.

십자가의 왕 그것은 예수님의 지극한 영광의 이름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 속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다. 만물의 통치자로의 지위도 회복이 되었다.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아담의 후손으로 즉 인자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다. 그 우편에 앉아 만물 안에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위해 기도하며 헌신하며 하나님의 온전한 종으로 자신을 산제사로 드린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 지옥의 불길에서 구원해 주시고 말로 다할 수 없는 더러운 죄인을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가 감사해서 날마다 감격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로 자신의 전생을 주님을 위해 드린다. 저 맨발의 전도자 최춘선처럼 세상은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이 가라시면 비방받는 표적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라 고난에서 죽음으로 나아간다. 그가 무식해서[1] 그렇게 전도한 줄 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지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던지시는 불길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하나님의 마음을 멀리 떠난 사람들일 수 있다.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강력하게 역사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길을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가지 않는다면 여러분 속에 주어진 하늘과 땅의 권세는 쓰임을 받지 못할 것이다. 


버림받은 통치자 십자가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고난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부활로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그 길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정도다.


3.1.3.10. 하나님의 형상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


3.1.3.10.1. 하나님 보좌 우편의 통치자 아담


원래 하나님 보좌 우편의 통치자 자리는 아담의 자리였다. 그래서 성경에는 벤 아담 즉 인자를 하나님(엘로힘)보다 조금 못하다고[2] 했다. 만물의 통치를 하나님께서 맡기셨다고 했다.[3] 이 표현의 다른 표현이 바로 하나님 보좌 우편인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동산에서 하나님의 거니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았다.[4] 인자는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가 되어 하늘과 땅과 바다의 권세를 가지고 다스렸다.


3.1.3.10.2. 스스로 타락을 선택할 권세


이 땅을 통치하는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위임하셨다. 인간이 스스로 선택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을 선택한 것도 인간의 권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자들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처음 만들어진 순진한 인간들을 잘 보호하지 못하셔서 인간이 사탄에게 속아서 죄를 짓고 처참한 지경에 빠지게 하셨는가? 이것이 그들의 원망의 내용이다. 그런데 그런 원망은 그들이 인간의 타락에 대해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태초의 인간은 타락하기 전이어서 그 권세와 지혜가 지금의 인간과는 다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함께 하셨기에 모든 것을 통달하고 알았다. 솔로몬과도 비교도 할 수 없는 완전한 지혜와 명철을 소유했다. 자신이 마취되듯 자고 있었을 때 자신의 갈비뼈로 만든 여자를 만들었다. 그 후 여자를 보았을 때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그 본질을 보는 눈으로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은 자가 아담이었다. 인간은 만물의 통치자였다. 우리가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인간은 티라노사우르스를 짐꾼으로 부리고 익룡을 타고 다녔을 수도 있다. 태초의 인간에 대해 이런 해석을 하는 학자들도 많이 있다. 그런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모든 것을 알고 한 행동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거의 하나님과 같은 존재였던 인간이 생각하기에 선악과만 먹으면 북극성에 올라 전능하신 자와 비길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그 타락을 성경 여러 곳에서는 교만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결코 순진해서 사탄에게 당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정했다면 피조물 중 그 어떤 것도 인간을 강제로 끌고 가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3.1.3.10.3. 악독한 인간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인간은 스스로 선택해서 하나님을 배신하고 악독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한 인간을 하나님은 사랑으로 대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명확하고도 그 증거가 확고부동한 반역의 죄를 묻지 않으셨다. 그들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했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자기 자식인 인간을 위해 자신이 대신 죽는 것이었다. 짐승의 피를 흘려 그에게 가죽옷을 입히셨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의 피를 흘려 의의 옷을 입히셨다. 그 누구도 자신의 자식을 죽음의 자리로 내 몰 수는 없다. 자신이 죽어도 자신의 아이를 죽음에 내어놓지는 않는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이다. 그런 사랑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자식 인간을 사랑하셨다. 자신을 내어 놓으셨다. 삼위 하나님 중 한 분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 놓으셨다. 그것이 미물과 같고 안개와 같은 인생들을 위한 십자가의 사랑이었다. 십자가는 하나님 최후의 포석이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인간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 왕의 자리로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로 회복되어진다.


3.1.3.11. 버림받은 자들의 왕 예수님


이 모든 것은 십자가의 왕 예수님께서 회복하셨다. 자신은 버림을 당하시고 버림 당한 자들의 왕이 되시어 그 버림받은 곳에서 부활하시어 그들을 구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버림 당함과 형벌의 상징이지만 그 십자가는 왕의 상징이다. 세상의 권세를 깨뜨린 진정한 왕의 상징이다. 그리고 죄의 권세를 깨트린 진정한 왕의 상징이다. 또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린 진정한 왕의 상징이다. 그가 왕이 되신 것은 자신의 권세를 회복하시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직 버림받은 잃어버린 인류의 왕권을 회복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인간으로서 만유의 왕권을 찾으셨다. 예수님을 통해 다시 회복한 만유의 왕권은 버림받은 자들을 통해 세상에 역사한다. 예수님을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들의 삶을 통해 세상에 그 왕권을 역사한다. 진정한 권세는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 십자가의 피를 통해 역사한다. 그 피가 뿌려진 그곳에 왕의 권세는 발동하고 어둠의 권세는 부서진다. 오늘도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버림받은 자의 피 권세를 발동할 강력한 군대를 찾으신다.



          


[1] 그는 부요한 집안에서 태어나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일본 유학파 출신의 학자 풍의 사람이다. 그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그가 탁월한 지성을 소유했고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해석은 다른 곳에서 들어본 적도 없는 수준이었다고 증언한다. 그 증언을 하는 사람들도 일반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지성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그런 그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정신이 온전치 못한 노숙자의 모습으로 전했다.


그런 그가 집에서 개인적인 대화를 나눌 때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는 영혼을 전율케 하는 힘이 있었다. 체계적이고 정상적인 대화들을 나눴다. 부족한 지적 수준으로 인해 그렇게 광인처럼 외치고 다닌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쉽게 광인으로 보았다면 그렇게 본 사람들은 먼저 관찰력이 부족한 것이다. 그리고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급한 성격의 소유자들임에 틀림없다. 


 또 영적으로 죽어있거나 잠들어 있는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김우현 감독의 팔 복 속에 나오는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는 영혼을 전율케 하는 힘이 있었다. 평생을 하나님을 향해 달음질했던 노 사도의 혼 속에서 나오는 기이한 힘이었다.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달음질을 해본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영혼의 힘이었다. 일상적인 말에도 강력한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의 전생을 통해 하나님의 길을 추구한 흔적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깊이가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느껴졌다. 그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저자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인해 사람들 속에 있는 그러한 것들을 볼 수 있는 감각이 발달했다. 그 안에 있는 것을 나는 세상의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었다. 그렇게 꾸밈이 없고 온화하면서도 강력한 그 빛을 다른 곳에서는 본 적이 없다. 죠지 폭스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읽을 때와 같은 그런 감동이 있었다. 죠지 폭스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 그것은 글들이었고 팔복 영상은 살아있는 인격의 실체였으므로 더 생생했다.


 하나님은 그 안에 있는 것을 사도들의 행전을 쓰시듯 김우현이라는 감독을 통해 기록하게 하셨다. 그 기록들에는 이 시대를 질타하는 그리고 깨워서 하나님께로 다시 돌이키는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있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그 전체 영상 속에 배어있어 마치 배경처럼 그려져 있었다.


[2] 시 8:5 바른

5주께서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3]  시 8:6-8 바른

6주께서 그로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양 떼와 소 떼와 들짐승과


8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물길 따라다니는 것들입니다.


[4] 창 3:8 바른

8날이 서늘할 무렵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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