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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Apr 13. 2024

3.1.3. 인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다 -3

요셉 왕의 버금수레를 탄 통치자, 모세 이스라엘의 The Prophet


3.1.3.4. 요셉 왕의 버금수레를 탄 통치자


3.1.3.4.1. 형제들에게 버림받은 자 요셉


요셉은 아버지를 떠나 형들에게 버림을 받고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서 비참한 노예의 삶을 살았다. 어려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도 받았다. 요셉의 삶이 그 어린 시절의 목가적인 풍경으로 이어졌다면 행복한 생이었을 것이다. 그의 조상들은 계속 목자의 삶을 이어갔고 형들도 그런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가족들이 누렸던 평범한 일상이 허락되지 않았다. 요셉은 성경에서 가장 비참하게 버림받는 삶을 살게 되었다. 형제들이 죽이려고 달려든 것이다. 옳지 않은 시기심 때문에 그의 생명을 끊어 놓으려고 했다. 르우벤과 유다의 도움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노예로 팔려 머나먼 땅 이집트로 끌려갔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신을 배신했을 때다. 다윗도 비슷한 고백을 했다. 자신의 벗이 자신을 해치려고 함정을 파고 기다린다고 했다. 버림받는 고통은 인간이 느끼는 고통 중 가장 강렬한 고통이다. 가족을 잃었을 때도 사실 그 고통의 본질은 죽은 사람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는 고통과 동일하다. 실연을 당했을 때도 그 고통의 본질은 연인이 자신을 버렸다는 버림받음에 대한 고통이다. 인간이 이러한 경우들에 느끼는 것은 존재를 거부당하는 거절감인 것이다. 그 거절감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다.

예수님도 십자가 상에서 ‘아버지 어떻게 저를 버리실 수 있습니까?’라고 고통을 쏟아놓으셨다. 그분은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십자가 이후에 단 3일 만에 부활이 있을 것을 아셨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의 대속물로 단지 3 일 동안만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신 것을 분명히 인식하셨다. 그러나 그분의 입에서는 고통의 신음이 새어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버림받는 고통이었다. 바로 삼위 하나님 안에서 버림받는 고통이었다. 하나이신 하나님 안에서 버림받는 고통이었다. 십자가형은 로마 안에서 받는 형벌 중 가장 극심한 고통을 동반하는 가장 비인간적인 형벌이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고통보다 더한 것이 버림받는 고통이었다. 그 입에서 새어 나온 신음은 ‘아프다’가 아니었다. ‘어떻게 저를 버리실 수 있습니까?’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버리운 자였다. 그리고 온 세상이 버린 자였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셨다. 그래서 그분은 버림받은 자들의 왕이 되셨다.


3.1.3.4.2. 주인에게 버림받은 자 요셉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주인의 인정을 받는 노예가 되었다. 자신의 최선을 다해 주인의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 주인이 또다시 요셉을 버렸다. 거짓 모함에 대해 한 번의 확인도 거치지 않고 이집트 안에서 가장 악독한 감옥에 투옥시켰다. 왕에게 죄를 지은 자들이 갇히는 감옥이었다. 가장 큰 죄(대역죄)를 지은 대역죄인들과 같은 죄수의 자리에 버려진 것이다.


3.1.3.4.3. 왕의 신하에게 버림받은 자 요셉


 거기서 그의 버림받음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파라오의 술 맡은 신하에게 버려졌다. 목숨이 오가는 파라오의 재판을 앞둔 술 맡은 신하에게 꿈을 해몽해 주고 그 대가로 자신의 억울함을 파라오에게 호소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신분이 회복이 된 술 맡은 신하는 요셉을 잊어버렸다. 버려져 감옥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버려져서 잊혀진 존재가 된 것이다. 버려진 것도 억울한데 아무도 자신의 사정을 들어주는 자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온 세상이 버린 상태인 것이다. 버려져서 그 존재마저 잊혀진다는 것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상실의 비참함이다. 


3.1.3.4.4. 온 세상이 버린 자 요셉


술 맡은 신하에게 까지 버려져 모든 희망을 빼앗기고 가족과 세상에게 완전히 잊혀졌다. 그리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방법이 없었다. 그 말은 그 감옥에서 언제 나올 수 있을지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셉에게 씌워진 누명대로 그 죄목이 확정된다면 그는 주인의 아내를 강간하려던 강간범이었다. 그는 평생 주인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바로(파라오)에게 호소하려 한 것도 그 주인 보디발의 권세를 능가해 자신을 자유케 할 수 있는 권세자가 바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좌절되고 종신형을 살게 된 것이다. 아니면 최악의 경우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한 날에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런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한 곳이 요셉을 가둔 보디발의 감옥이었다. 그러한 절망의 기간이 만 2년이었다. 만 2년이라는 것은 그냥 2년이라는 표현과는 다른 표현이다. 그냥 2년을 꽉 채웠다는 뜻이다. 보통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 1주일도 버티기 힘들다. 그곳에 살아남더라도 모든 소망을 잃고 죽지 못해 사는 삶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2년을 꽉 채웠다. 만 2년은 요셉의 절망에 완전함에 이르기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2년이 완전히 찼을 때 요셉은 완전한 절망에 이르렀다. 그는 폐인이 되었다. 수염이 길어서 턱을 가렸다. 그 시대 사람들은 수염을 깎았는데 그는 수염이 턱을 가린 것이다. 그 표현 자체가 요셉이 만 2년 만에 절망에 이르러 폐인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3.1.3.4.5. 죽음의 감옥에서 부활하여 왕의 버금수레를 탄 자 요셉


온 세상이 버린 자 요셉은 만 2년 만에 파라오의 부름을 받는다. 2 년을 꽉 채우고 나서야 왕궁에서 일이 벌어졌다. 파라오가 꿈을 꾼 것이다. 일곱(7) 마리 살진 암소와 일곱(7) 마리 마른 암소, 일곱(7) 잘 여문 이삭과 일곱(7) 여물지 못한 이삭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파라오가 그 꿈의 해석을 구하자. 술 맡은 관원장이 보디발의 감옥에서 꿈을 해석을 하던 요셉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요셉을 불러낸 파라오는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삼았다. 그리고 파라오의 버금수레를 태우고 요셉에게 최고의 지위를 내렸다. 파라오의 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꿈을 파라오에게 주지 않았다면 요셉은 평생 죽기를 기다리며 감옥에 있어야 했다. 

이 장면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요셉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바로가 어떻게 그를 하나님의 완전한 대리자로 신뢰했을까?라는 의문이다. 그 질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 째, 요셉은 다니엘과 같이 바로가 말하지 않은 꿈의 내용을 맞힌 것이 아니었다. 다니엘은 왕이 말하지도 않은 꿈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알게 되어 맞혔다. 그러나 파라오는 요셉에게 꿈의 내용을 맞히라고 문제를 내지 않았다. 그 내용을 스스로 다 말해 주었다. 여기서도 요셉은 파라오에게 특별한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파라오는 왜 요셉을 특별한 존재로 인식했을까?

둘째, 요셉이 한 꿈의 해석이 맞는지 틀렸는지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해석의 내용만을 듣고 바로는 요셉과 요셉의 꿈의 해석을 믿었다. 그 꿈의 내용대로 7년의 풍년과 흉년이 실제로 일어난 것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는 요셉의 꿈의 해석이 맞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삼았다. 그리고 파라오의 버금수레를 태우고 요셉에게 최고의 지위를 내렸다. 파라오는 단지 2년 전에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에게 꿈을 해석해 준 대로 술 맡은 관원장이 다시 복권이 된 것 하나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요셉이 한 모든 말을 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믿었다. 어떻게 처음 본 요셉을 믿고 그런 대단한 권력을 맡겼을까?

파라오가 이렇게 행동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파라오의 행동을 잘 관찰하다 보면 우리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파라오는 요셉에게 사브넷 바네아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 뜻은 ‘신이 말씀하신다. 지금도 말씀하신다’였다. 요셉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은 신의 말씀임을 고백한 것이다. 요셉이 모세와 같이 지팡이가 뱀이 되는 기적을 보이거나 10가지 재앙을 일으키지 않아도 그의 말만 듣고 그를 신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신의 대리자로 인정을 한 것이다. 모세를 대적한 후대의 파라오와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인 것이다. 파라오에게 이런 믿음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파라오에게 꿈을 주고 그 꿈에 대한 요셉의 해석을 신뢰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셨다. 또 요셉을 극한의 상황에 버리시어 그에게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기적들로 함께 하심으로 증거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바로의 믿음은 이런 요셉의 과거의 행적에 그 기반을 두었을 것이다. 요셉의 모든 말은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그 모든 말이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요셉은 ‘신이 말씀하신다. 지금도 말씀하신다’(사브넷 바네아)였다.


요셉이 기근에서 온 세상과 이스라엘을 구하고 앞으로 출이집트 할 때까지 300년이 넘는 시대를 준비하려면 파라오의 완전한 지지와 신뢰가 필요했다. 


요셉은 마지막 2년을 감옥에서 세상에서 버려져 죽은 것과 같이 완전히 잊혀진 폐인으로 살다가 3년이 되는 날 파라오의 부름을 받았다. 파라오는 요셉을 감옥에서 건져냈다. 폐인이 된 요셉의 수염을 깎아주고 새 옷을 입혀 주었다. 요셉은 죽음과 같은 감옥에서 부활하여 파라오 바로 우편의 버금 통치자가 되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죽으셨다.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표한 장면이었다. 


예수님과 같이 요셉은 자신을 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었다. 자신을 버린 자들에게 원수를 갚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보다 좀 더 나아가면 그 원수를 용서할 수 있다. 그 정도만 해도 성인의 반열로 추대될 것이다. 그런데 요셉은 그 원수들의 생명을 대기근에서 구원한다. 그도 배신의 아픔을 아는 인간이었다. 이집트로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왔을 때 가장 이성적인 기질로 추측되는 요셉도 그 터져 나오는 원망과 아픔을 통제할 수 없어 통곡을 했다. 그러나 요셉은 예수님과 같이 자신을 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을 산 요셉은 그 삶의 목적이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음을 알았다. 그는 앞으로 다가올 이스라엘의 후대 즉 출이집트(Exodus)까지를 믿음으로 준비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그에게 필요한 지위가 바로 이집트의 총리였다. 바로 왕의 버금수레를 탄 통치자가 된 것이다. 이 모습이 인자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모습이다. 그 자리는 요셉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야망에 찬 자들이 서울대 법대를 가고 또 정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요셉에게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의 어미도 자식을 위한 최고의 스펙을 기도로 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구원자 예수님의 예표로서 구약의 이스라엘이 작은 부족에서 국가단위로 커지는 요람 역할을 한 이집트에서의 시기를 준비하는 구원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온 땅의 기근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했다. 그를 통해 온 땅이 구원을 받고 그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은 큰 민족으로 성장할 요람이 될 고센 땅을 얻었다. 이러한 세상의 구원을 위한 구원자로 그는 왕에 버금가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것이 구원자 예수님께서 사람으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이유인 것이다. 사람으로서 사람의 대표가 되시어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을 위해 그 권세를 위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 권세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얻으신 권세를 동일하게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인자로서 그 자리에 오르시어 동일한 아담의 후손들에게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자들에게 그 권세를 주시어 그들이 원수들을 이기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사람으로서 앉아 만물 위의 교회로 다스리는 것이다.[1]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몸이 되어 하나님의 명령에만 복종하여 만물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두 번째 아담에게 속한 아담의 후손들이 할 일들이다.



3.1.3.5. 모세 이스라엘의 그 선지자(The Prophet)


3.1.3.5.1. 나면서부터 버림받은 자 모세


모세는 나면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의 출생은 파라오에 의해 금지되었다. 태어나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존재 자체가 부정된 것이다.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해야 하는 위협에 놓였다. 상담을 하다 보면 엄마의 태에서 낙태를 당할 위협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깊은 곳에 사람의 만짐과 상담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지독한 거절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세상이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지독한 거절감에 시달린다. 그래서 사랑을 비정상적으로 갈구하게 되고 그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을 망가트리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을 거부하고 생명을 빼앗으려 했던 엄마와 비슷한 사랑을 줄 수 없는 대상을 골라서 사랑한다. 그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갈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대상을 골랐기에 더 큰 거절을 맛보게 된다. 그러한 잘못된 대상을 선택하고 버림받는 일을 반복해서 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생을 살면 살수록 더 망가져갈 수밖에 없다. 모세의 안에도 이러한 깊은 거절감이 있었을 것이다. 


3.1.3.5.2. 부모와 형제에게 버림받은 자 모세


히브리 산파들을 통해 많은 히브리인 사내아이들이 구원을 받았다. 모세도 레위인이었던 부모님의 목숨을 건 도움으로 출생과 동시에 맞을 죽음은 피했다. 그러나 아이가 커가고 울음소리가 커지면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된다. 아이의 생명을 위해서라고 아이를 집에서 떠나보낼 수밖에 없다. 갈대 상자에 석유가 포함된 코르타르를 발라서 물이 스며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파라오의 공주가 목욕하는 나일강의 목욕탕 조금 위에서 아이를 물에 버렸다. 버렸으나 버리지 않았으니 그 아이의 생명이 불안해서 들켜도 의심받지 않을 자신들의 어린 딸 미리암을 시켜서 아이가 공주에게 잘 도착하는지 지켜보게 했다. 아이는 공주의 양자가 되었지만 결국 부모와 형제에게서 버려져 고아가 된 것이다.


3.1.3.5.3. 이스라엘과 이집트 온 세상에게 버림받은 자 모세


 공주의 양자가 되어 이집트의 왕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고아였다. 고아가 입양이 되었다고 고아가 아닌 것은 아니다. 양부모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양부모다. 그는 파라오의 다른 왕자들과 다른 대우와 다른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유모가 된 친모를 통해서 자신이 히브리인임을 알게 되었지만 히브리인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살 수는 없었다. 그런 정체성의 고민을 하던 중 자신의 백성 히브리인의 고난을 보았다. 한 형제가 억울하게 매 맞는 것을 보다 견디지 못한 모세는 우발적인 살인을 저질렀다. 그런데 그가 구해주었던 그 히브리인 형제가 자신을 배신했다. 자신이 이집트인을 살해한 것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떠벌렸던 것이다. 아무리 다른 히브리인과 싸움 중이라 흥분했다 하더라고 그 말을 하는 순간 자신을 도와주었던 모세는 체포되어 사형당할 것이라는 걸 생각해야 했는데 그는 너무 쉽게 입을 열어버렸다. 이제 모세는 죽게 되었다. 


3.1.3.5.4. 죽음에 버려진 자 모세


모세의 인생에 죽음의 위험은 항상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태어나자마자 그는 왕의 명령에 의해 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갓난쟁이로 부모의 곁을 떠나 양모인 공주에게 가는 길에도 그는 물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공주에게 발견되었을 때도 히브리인이라는 그의 신분이 그를 죽일 수도 있었다. 죽음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그 죽음의 위협에 그는 급히 이집트를 떠났다. 


3.1.3.5.5. 문명에서 버려진 자 모세


파라오가 그를 채포 하여 죽일 것이기에 이집트의 힘이 닿는 모든 곳을 떠나야 했다. 모세는 이집트의 힘이 미치는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을 떠나야 했다. 그는 도시에서의 안락한 삶에서 떠나야 했다. 자신의 유모였던 어미를 떠나야 했다. 파라오의 공주였던 자신의 양어머니를 떠나야 했다. 자신의 형제 아론과 미리암을 떠나야 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왕궁에서 누렸던 모든 것을 떠나야 했다. 그뿐 아니라 문명의 혜택을 조금이라도 받을 수 있는 모든 도시를 떠나야 했다. 척박한 미디안 광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모세는 자신이 알던 모든 세상에게 버림받은 자가 되었다.


3.1.3.5.6. 세상이 버린 자를 세상의 구원자로 삼으신 하나님


모세는 세상에서 버림받고 40년을 미디안에서 목동으로 지냈다. 청장년 시절의 민족을 향한 열정도 80이 되니 모두 사그라들었다. 하나님이 모세 자신의 민족을 구원하러 가라고 해도 그는 반복해서 거절했다. 그는 살았으나 그의 꿈과 열정은 이미 죽어버린 죽은 자였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의 The Prophet(위대한 선지자)이 되게 하셨다. 심지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한 본문에서 모세가 예수님을 나와 같은 선지자라는 표현했을 정도다. 가장 큰 하나님의 기적과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민족으로 형성되게 한 가장 위대한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다. 그를 통해서 나타내신 크기의 역사는 구약의 어떤 다른 선지자를 통해서도 나타내신 적이 없다. 그는 버림받은 자였으나 자신을 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 오른편에 앉은 것처럼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선지자요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모든 고난은 자기 백성을 구하기 위한 길을 예비하는 길이 되었다. 자신이 40년 동안 살면서 훈련받은 그곳에서 그는 40년을 자기 백성을 이끌었다. 광야는 죽음의 길이지만 그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에 이른다. 이러한 참 구원의 길을 나타내는 선지자로 그는 이스라엘에 왕 같은 선지자가 되었다.




          

[1] 계 3:21 바른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나의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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