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스겔 Apr 06. 2024

3.1.3. 인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다 -2

스데반, 왕의 보좌 우편, 하나님 최후의 포석, 요셉

3.1.3.1. 하나님 보좌 우편(스데반)


아담의 후손 즉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 사도행전 6~7장은 스데반의 순교에 대한 기록이다. 스데반의 순교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장면들과 많이 겹쳐진다. 예수님 때도 스데반과 같이 거짓증인들을 사서 거짓으로 참소했다. 스데반에게 참소한 내용과 예수님에게 참소한 내용도 거의 같다. 심지어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상에서의 말과 스데반의 순교의 마지막 말도 거의 같다.



3.1.3.1.1. 마지막 말씀


3.1.3.1.1.1.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34[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시여,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으니, 저들을 용서하소서." ]라고 하셨다. 그들이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옷들을 나누었다.(눅 23:34 바른)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말씀하셨다. "아버지시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누가복음 23:46 바른)

 

3.1.3.1.1.2. 스데반의 마지막 말


59그들이 스데반을 돌로 치니, 그가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으소서." 하고,


60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외치기를 "주님,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하고, 잠들었다.(행 7:59-60, 바른)

 

또 죽음의 원인이 되는 말들도 비슷하다. 사도행전 7:55~56에서 "보아라, 내가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본다."라고 스데반이 말을 하고 그 말과 동시에 유대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자신들의 귀를 막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성읍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스데반을 쳐서 죽였다. 이 한마디의 말이 스데반의 죽음을 불러왔다. 예수님께서도 인자가 보좌 우편에 앉게 될 것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하심으로 성문 밖에서 마지막 십자가형에 처해지셨다. 


3.1.3.1.2. 십자가형을 부른 결정적인 말씀


3.1.3.1.2.1.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부른 결정적인 말씀

 

69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자의 오른쪽에 앉게 될 것이다."

70그러자 모든 이들이 말하기를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말한 대로 내가 그이다."라고 하시자,

71그들이 말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느냐? 우리가 이 사람의 입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라고 하였다. (눅 22:69-71 바른)


3.1.3.1.2.2. 스데반의 순교를 부른 결정적인 말


55그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서 계신 것을 보았다.


56그가 말하기를 "보아라, 내가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본다." 하니,(행 7:55-56, 바른)


물론 그 이전에 여러 가지 말씀하신 것도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십자가형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인자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것을 말한 것이었다. 이것이 무엇이 문제이기에 유대인들이 이렇게 발악을 하며 예수님을 죽이고 스데반을 죽인 것일까? 먼저 이 세대의 사람들이 인자라는 단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아야 한다. 인자는 앞에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고치신 사건을 다루면서 해석했듯이 일반적인 사람 즉 인류를 사람을 뜻하는 단어로 유대인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렇다면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보좌를 나란히 하고 그 오른쪽에 앉는 것이다. 이것은 신성모독이다. 어떻게 인간이 감히 하나님과 나란히 앉는다는 말인가? 사도바울은 유대교에 있을 때의 자신의 열심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스데반의 처형 현장에서 청년들이 그 겉옷을 놓아 맡긴 자가 바울이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산헤드린에도 있었다. 이 두 장소에서 모두 신성모독이라는 죄를 단죄하는데 참여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이 인간으로 받아들인 분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분은 참으로 아담의 후손 인간이셨다. 그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이것은 신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이다. 그런데 그 앉으신 분을 지칭하는 용어가 하나님이 아니고 아담의 후손 즉 인간이었다. 이것을 유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갈릴리 출신 평범한 이웃집 목수의 아들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 즉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인자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의 자격으로 그곳에 앉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즉 사람으로 오신 분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해지고 있는 부분인 것이다. 최소한 그 시대의 사람들 즉 유대인들이 받아들인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다고 받아들였다는 것이다.[1]


3.1.3.2. 왕의 보좌 우편


먼저 성경에서 왕의 보좌 오른쪽에 앉는 것에 대해 언급한 다른 본문들을 살펴봄으로 그 뜻을 찾고자 한다.


3.1.3.2.1. 밧세바 솔로몬의 우편에 앉다


왕상 2:19 바른

19밧세바가 아도니야를 위하여 부탁하기 위해 솔로몬 왕에게로 나아갈 때 왕이 맞이하기 위해 일어나 굽혀 절하고 자기 보좌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왕의 어머니를 위해 한 자리를 마련하여 자기의 오른쪽에 앉게 하였다.


솔로몬이 자신의 어머니 밧세바를 위하여 자기의 오른쪽에 한 자리를 마련한다. 이것은 왕의 어머니를 앉히는 자리인 것이다. 왕의 오른쪽에 앉는 자의 신분을 짐작하게 한다. 왕의 어머니는 왕보다 지위가 높은가? 사실 법적으로 왕의 어머니가 왕을 능가하는 자리는 아니다. 그러나 왕이 예의를 갖추고 대해야 하는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사실 왕보다 높지만 정치적 영역에서 왕보다 높지는 않은 것이다. 사실 이런 관계들은 우리가 뭐라고 정확히 말하기에 쉽지가 않다. 왕이 존대를 하고 왕이 자신보다 높은 대우를 해주는 사람임은 틀림없다. 이런 경우 개인적인 관계와 공적인 관계가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3.1.3.2.2. 너는 내 보좌 우편에

 

 110:1,5, 바른

1[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받침대로 삼을 때까지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

5주님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 분노의 날에 왕들을 치시고

( 110:5, 바른)

여기서 오른쪽에 계신 주께 여호와께서 ‘앉아 있어라.’하고 명령법을 쓰신다.

오른쪽에 앉았고 호칭은 두 분 모두 ‘주’이지만 한 분이 다른 분에게 명령하고 계신 것이다. 이 관계가 동등하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명령이지만 일반적으로 동등한 관계에서도 이런 ‘앉아라’ 하는 말을 쓰기도 한다는 것도 고려해보아야 한다.

 그런데 너는 멜기세덱과 같은 영원한 제사장이다라고 하심으로 이 관계가 단순히 동등한 관계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관계도 동등한 관계에 대한 표현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이 관계는 하나님과 메시야이신 예수님에게 적용되어진 것이다.[2]


이 관계에서 신격이신 두 위격의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와 사역적인 공적 관계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관계가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 본문에서 인자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는 것이 된다. 그러면서 그 인자는 또한 하나님과 같은 주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인데 다윗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향해 주라고 부르느냐 즉 여호와께서 내 주(그리스도)께 라고 했느냐라고 질문을 하실 때 인용하신 본문도 이 본문이었다. 유대인(바리새인)들이 참으로 답하기 어려운 문제였을 것이다.[3]


예수님은 그 시작도 끝도 없는 우리의 지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 자체가 사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부분이다. 우리가 그냥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말할 수 없는 은혜를 헤아리지는 못한다. 이 부분을 어느 날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셨을 때 말로 할 수 없는 그 은혜에 감격하여 몇 시간을 울었다. 그 후로도 그 은혜를 생각하면 그 감격으로 죄인은 항상 감격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 오셨기에 일어난 신비이기에 인간이 그 깊이를 미루어 짐작하기에 한계가 있다. 


3.1.3.2.3.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다


 20:20-21 바른

20그때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께 다가와서 절하며 무엇인가를 요청하였다.

 

21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니,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 중 하나는 주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말씀하소서."

( 20:20-21, 바른)

 

여기서도 예수님과 동등한 관계로 앉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지위가 결코 일반적인 신하의 자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최소한 왕의 사촌이나 그 이상 되는 자리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왕과 완전히 동등한 자리는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3.1.3.2.4. 양은 우편, 염소는 좌편

 

33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둘 것이다.

34그때에 왕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자들에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아, 나와서 세상의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상속하여라. 

( 25:33-34, 바른)


여기서는 왕의 오른쪽 자리에 앉히는 것이 아니라 왕의 오른쪽에 두는 것이다. 이것은 왕의 오른쪽 보좌에 앉는 것과는 다른 표현인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본문들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왕의 오른쪽에 앉는 것은 왕과 같은 귀한 신분인 것은 확실하지만 왕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왕보다 친인척 관계에서는 상위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법적인 지위로는 왕의 신하인 사람들이 앉는 곳이다. 때로는 왕의 어머니와 같이 왕보다 더 높은 분이 앉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다른 나라의 왕과 왕이 서로 보좌를 나란히 하고 앉을 수도 있다. 이 경우는 서로 대등한 지위에서 서로 같은 높이에 같은 자리에 앉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 누구의 오른쪽에 앉는다는 개념은 없을 것 같다. 누군가의 오른쪽에 앉는다는 것은 그 누군가가 중심이고 왕이라는 뜻이다. 물론 그분이 하나님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만 왕의 왕, 만 주의 주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계시고 그 우편에 앉는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고 그 우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으로 앉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하나님으로 앉는다면 우편이 아니라 나란히 또는 옆에 앉는다고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대등한 왕과 왕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3.1.3.2.5. 신성모독


유대인들이 말한 것과는 다르게 인자가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는 것은 신성모독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는 것은 영광의 자리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여기서 그 자리에 앉으신 분은 원래 그 본질이 하나님이신 3 위격 중 한 위격의 하나님 예수님이심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신성모독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의 의도와는 달랐던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스데반에게 그러한 장면을 보이시고 감동하셨던 성령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3.1.3.2.6. 주님과 인자


시편 110편과는 달리 예수님과 스데반의 죽음을 앞두고 이를 인용할 때에는 ‘주님(여호와님)과 주님’이라는 인칭을 쓰지 않고 하나님과 인자라는 용어를 썼다. 이것이 특이하다. 사실 여기에 하나님의 의도, 예수님의 의도, 성령님의 의도가 있는 것이다. 시편 110편은 주께서 내 주님의 우편에 앉으시는 것인데 그것을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속에도 계시의 점진적 발전이 있는 것이다.

첫 번째는 최소한 신적인 두 분의 관계인 듯하다. 그러나 두 번째는 인자와 하나님 즉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로 묘사되어진 것이다. 사실 시편 110:4절에 여호와께서 그 오른쪽에 앉으신 주님께 멜기세덱과 같은 제사장이라 칭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시편 110:4절은 제사장인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로 시편 110:1절에서 보다 명확한 형태로 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인자에 대한 표현은 시편 110:1절을 다르게 인용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맥락에서 인용한 문맥적 인용이 맞는 것이다. 


3.1.3.3. 하나님의 인간 구원을 위한 최후의 포석


그런데 왜 ‘주(여호와)께서 내 주께’를 ‘하나님과 인자’라는 용어로 표현했을까? 그것으로 인해 신성모독이라는 참람한 평가를 받아 순교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데도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데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포함되어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마지막 최후의 포석이 바로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성경을 살펴보겠다. 먼저 시편 110편에서 여호와님의 우편에 내 주께서 앉으시는 장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10:1-7 바른

 

R  1~2 여호와께서 내 주님(멜기세덱, 의의 왕)을 왕으로 삼으시고 원수들을 다스리게(밟게) 하심

1[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대로 삼을 때까지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 하셨습니다.

 

2여호와께서 시온으로부터 주님의 능력의 지팡이를 보내실 것이니, 주님은 그 원수들 가운데서 다스리소서.

 

M  3~4 제사장 멕기세덱 백성은 자원헌물, 초태생의 대속물(히브리어 참조)을 주님께서 취하심

3주님의 권능의 날에 주님의 백성은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주님의 청년들이 새벽이슬같이 주께 나옵니다.

 

4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너는 영원히 멜기세덱 계열을 따른 제사장이다." 하셨으니, 변치 아니하실 것입니다.

 

 

r  5~7 공의의 왕(멜기세덱)께서 원수들을 밟으심

5주님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 분노의 날에 왕들을 치시고 6민족들을 심판하셔서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며 넓은 땅의 우두머리를 치실 것입니다.

 

7그분께서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머리를 높이 드실 것입니다.

 

R과 r로 표기한 부분은 원수를 정복하시고 다스리심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M으로 나타낸 부분은 제사장으로서 백성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부분이다.

이러한 구조는 아래와 위에 심판(정복과 다스림)을 그리고 가운데에 제사장의 직무를 두심으로 그 구조상 핵심이 제사장의 직무에 있게 되어있다.

이 본문은 의의 왕이 제사장으로 백성들은 취하고 나머지 땅의 반역자들은 심판하신다는 내용인 것이다. 그중 핵심은 당연히 의의 왕(멜기세덱)이 제사장으로 백성들을 자원헌물과 초태생의 대속헌물로 취하심[4]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인용하고 있는 시 110:1절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어라’는 정복과 다스림에 관한 부분이다. 즉 예수님을 통한 심판과 관련한 부분인데 그 시작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올려지심부터인 것이다. 또한 그 올려지심으로 심판을 위한 모든 근거가 완성되어짐을 뜻한다.

이에 관해서 구약의 예수님을 예표하는 본문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셉과 다윗 그리고 다니엘을 통한 예표를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장면의 뜻을 설명하겠다.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은 것을 봄으로 순교를 당한 스데반의 마지막 설교에도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버림받은 자들의 하나님 그리고 그 버림받은 자들의 왕 예수 그리스도님을 주로 삼으신 하나님을 설교한 스데반의 설교의 주제와도 연관되어져 있다. 스데반(헬 Στέφανος, 스테파노스)은 그 이름 뜻이 승리의 면류관이라는 뜻이다. 보통 그리스(헬라) 지역에서는 월계수의 줄기와 앞을 엮어 만든다. 올림픽의 우승자에게 주는 승리의 상징이다. 그가 예수님과 거의 흡사한 모습으로 순교를 하고 그를 통해 열방을 휩쓸 부흥이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예수님의 순교의 길을 따라갔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보이신 것은 인자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이다. 그 인자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보좌 우편의 자리에 있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버금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은 것을 뜻한다. 그 자리는 만유의 통치자 왕의 자리다. 바로 면류관을 쓴 자의 모습인 것이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께 복종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갔다. 그러한 자는 결국 영원히 하나님 안에 살아 영원히 만유의 통치자 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머리 되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게 된다. 그의 순교를 통해 열방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오게 되었다.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는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확장되게 되었다. 스데반은 예수님과 같이 버림받는 자리인 순교의 자리에 나갔다. 예수님께서 아사셀 양이 되시어 버림받고 희생의 제물이 되어 순교하셨듯 그도 죽음의 자리에 나갔다. 이제 구약 성경을 통해 예표로 드러난 버림받은 자와 그들의 면류관(승리의 월계관)을 살펴봄으로 인간을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로 다시 만유의 통치자로 삼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더 확실히 깨닫자.







      

[1] 사실 이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은 하나님의 자리와 동일한 자리는 아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 보다 못한 신하의 자리인 것이다. 동등하다면 왕과 같은 자리에 앉을 것인데 이미 중심이 왕좌로 정해지고 그 우편이라고 했으므로 왕의 자리는 아니다. 단지 왕과 아주 가까운 왕자나 왕비의 자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는 왕의 사촌쯤의 자리가 될 수 있는 자리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은 하나님의 자리는 아니다.


[2]히 5:6 (바른)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 ″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히브리서 6:20 (바른)

앞서 가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곳에 들어가셔서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셨다.


히브리서 7:17 (바른)

이는 "너는 영원히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른 제사장이다."라고 확증되어 있기 때문이다.



[3] 마 22:41-46 개정

41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 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마 22:41-46, 개정)


[4] 이 해석은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함으로 취할 수 있는 해석이다.



이전 09화 3.1.3. 인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다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