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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Oct 13. 2022

​1.1.1. 구약의 인자

구약의 인자는 벤 아담 즉 아담의 후손


구약에서 인자라는 말에 대해 살펴보자. 구약에서 쓰인 인자는 벤 아담(בֶּן־אָ֝דָ֗ם)이다. 여기서 벤은 아들 또는 후손을 말한다. 어순이 비슷한 영어로 옮기면 son(벤) of man(아담)이다.


1.1.1.1. 히브리어 아담의 특이성

여기서 사람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특이하다. 

사람은 히브리어로는 아담이다.


1.1.1.1.1. 아담 고유명사

그 당어가 일반적인 개인을 지칭할 때도 쓰인다.


사람=아담

 지금 여러분의 머리에는 '어 아담 이건 첫 사람 아담의 이름이잖아' 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맞다. 첫 사람 그 아담을 지칭하는 말이다. 처음 창조되었던 그 아담이다. 하늘과 땅과 바다를 다스렸던 아담이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그 아담이다.


1.1.1.1.2. 아담 일반명사

그 단어가 일반적인 개인을 지칭할 때도 쓰인다. 일반적으로 사람이라는 개인을 나타내는 명사도 히브리어는 아담이다. 

'그 사람 참 사람 좋지'

 앞의 사람이라는 단어는 특정한 한 개인을 뜻한다. 그리고 뒤의 사람은 일반적인 사람을 뜻한다.  구체적인 뜻은 사람의 인격 또는 사람의 본성을 뜻한다. 이 문장을 사람이라는 단어만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그 아담 참 아담 좋지' 

이 문장을 아래에 해석해보자

(                                              )


 우리말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장을 그냥 읽으면 문장에 두 번 나오는 아담 중 첫 번째 아담은 첫 사람 아담으로  해석될  것 같다. 그리고 두 번째 아담은 그 뜻이 무엇인지 해석 불가일 것 같다. 이런 혼동이 오는 것은 우리말의 사람은 특정  개인의  이름으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1.1.1.1.3. 아담 집합명사(군집명사)

아담은 인류의 종을 말하는 집합명사로도 쓰인다.

 '인류는 동물의 분류에 속하는가?'                    

이 문장도 히브리어로 인류라는 단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아담은 동물의 분류에 속하는가?' 


1.1.1.1.4. 아담=고유명사=일반명사=집합명사=사람

아담은 첫 사람 아담을 뜻하는 고유명사다. 그런데 이것이 일반적인 사람을 나타내는 일반명사가 되는 것이다. 거기다 인류의 종을 나타내는 뜻까지 있어 종의 전체 집합을 나타내는 집합명사로도 쓰인다.  


아담이 등장하는 것은 첫 창조인 창세기 1장이다. 히브리어로 사람은 아담이다. 창세기 1장에 ‘사람을 창조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를 반영하면 아담을 창조하다가 된다.


한글성경에는   여자가 창조되었을 때 그 여자와 구분 짓기 위해서 아담이라고 처음 번역했다. 사실 번역이 아니라 그 단어의 음을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다.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는 처음 시작인 창세기 1장부터 사람을 그냥 아담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여자가 창조된 창세기  2장  이후에도 동일한 단어인 아담으로 그는 계속 불린다. 그는 처음부터 아담이었고 계속해서 아담이었다. 


1.1.1.1.5. 아담 그 단어의 특이성

히브리어에는 사람이라는 말 자체가 아담이다. 사람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모두 아담인 것이다. 남자뿐 아니라 여자까지도 아담이다.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에서 만들어진 존재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아담의 형상대로 아담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음을 뜻하고 모두가 아담의  후손임을  뜻한다. 아담은 첫 사람 아담을 뜻함과 동시에 인류를 총칭하는 말도 되는 것이다. 


1.1.1.1.5.1. 아담=고유명사=종(Species)

이 점이 좀 특이하다. 아브라함이 조상이라고 해서 아브라함의 자식들 개인을 가리킬 때 아브라함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하면 이삭도 아브라함이다. 그 종(Species)의 이름이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인 것이다. 이삭은 개인의 이름이고 아브라함은 종의 이름인 것이다. 

이것은   집에 개를 기르는데 그 개의 이름이 해피였다. 그런데 이제 그 종(breed)의 이름이 해피가 되는 것과 같다. 해피의  새끼들의  종이 해피가 되는 것이다. 각 강아지들의 고유한 이름은 루나, 루시, 썬 등 다양하게 있을 수 있지만 그 종은 해피가  되는  것이다.


1.1.1.1.5.2. 특이한 종(Species)의 이름

성경에서   12지파의 이름이나 암몬, 모압등 족속의 이름에 조상의 이름에서 파생된 단어를 쓰기는 했다. 그런데 그 이름이 그대로 쓰지는   않았다. 종족을 나타낼 때 모압족속, 암몬족속이라고 하지 모압, 암몬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한글성경에 이러한 번역이 있어도  그것은  원어성경과는 관련이 없는 번역의 문제다.


여호수아 14:6을 예를 들어 보겠다.


그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 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수 14:6 [개정_strong])

 여기서   갈렙은 이방족속인 그니스 족속 아버지 여분네를 두었다고 나온다. 그런데 그니스 족속의 조상인 그니스는   히브리어로 키나즈(H7073 קנז)로 그니스 족속(케니지 H7074 קנזּי)과는 서로 다른 단어다. 그 종족의 명칭이 그 종족의 조상의 명칭에 유래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 명칭이 서로 구분되어진다. 명확하게 다른 단어로 표기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의 경우와 같지가 않다.


1.1.1.1.5.3. 남자(아담)과 비교되는 여자의 종의 이름

여자가 처음 창조되었을 때

여자가 처음 창조되었을 때도 그랬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 2:23 [개정])

 

여기서 여자는 H800 אִשָּׁ֔ה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 이더라(창 3:20 [개정])

 

여기서 아내라는 단어가 원어로는 여자라는 단어와 일치한다. 

아내 즉 여자는 잇샤(ish-shaw') H800 אִשָּׁ֔ה

하와는 하바(khav-vaw') H2332 חוּה


처음 창조된 여자는 종이 여자다. 그런데 이름은 하와다. 종과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다. 아담과 같이 그 종(Species)과 그 종의 조상의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다.


1.1.1.1.6. 아담에만 한정된 고유한 특징

 그런데   사람은 종(species)도 아담이고 그 종의 조상의 이름도 아담이다. 이것은 특별히 아담에게만 나타나는 명칭의 특징이다.   이렇게 이름과 종의 명칭이 일치되게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다. 아담도 아담이고 아담의 모든 후손도 아담인 것이다. 이렇게 사용한   것은 성경에서도 이례적이다. 이렇게 한데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아담의 이름과 그 종의 이름이 일치하기에 모든 아담의 후손은   아담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성경에서 아담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사용한 의도에 관해서는 뒤에 더 깊이 다루겠다.


1.1.1.2. 벤 아담의 해석

1.1.1.2.1. 가능한 해석들

 인자라는 말은 아들을 뜻하는 벤과 아담이 합해져서 벤 아담이다. 이를 아담의 뜻을 두 가지로 해석함에 따라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해진다.

첫 째, 아담의 아들

둘 째, 사람(인류)의 아들

첫 째 아담의 아들은 벤 아담에서 아담을 첫 사람 아담으로 해석한 것이다. 둘째 사람의 아들은 아담을 인류 즉 사람으로 해석한 것이다. 첫 아담이 그 종을 대표하는 이름으로도 쓰인 것이다.


 여기서   아들이라는 말이 또 다른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말 중 대한의 아들에서 아들은 후손을 뜻한다. 이처럼 벤 즉 아들이    후손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앞의 두 가지 해석에서 아들 대신 후손이라는 뜻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첫 째, 아담의 후손

둘 째, 사람의 후손

위의 네 가지 해석으로 나뉘어진 단어가 히브리어로는 한 단어인 벤 아담이다. 


 벤 아담이라는 이 단어를 해석함에 있어 우리는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첫째, 원어의 의미와 정확하게 일치되어야 한다.

둘째, 번역된 단어가 해석에서 혼동을 일으키지 않는 정확한 단어가 되어야 한다.


1.1.1.2.2. 결론적 해석

 성경을 살펴본 결과 인자의 적절한 번역은 아담의 후손이다. 성경을 살펴 찾은 결과들을 이 책에서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인자(히: 벤 아담)의 번역에 대한 다른 견해들도 함께 살펴 비교를 해보겠다. 

사실   구약에서 아담의 후손이라는 말과 사람의 후손이라는 말은 별 다른 뜻이 있을 수 없다. 아담의 아들이 뜻하는 것도 인간이라는  종을  뜻하고 사람의 아들이라고 해도 인간이라는 종을 뜻한다. 아담의 후손, 사람의 후손도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뜻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종을 뜻한다. 

그리고   그 뜻은 아담의 아들, 후손을 뜻한다. 인류를 말하려고 하면 사람의 후손이라는 단어보다 아담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이 훨씬  정확한  표현이다. 모든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후손이라는 말이 사람을 뜻하는 정확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후손 이러면  무엇을  뜻하는지 그 뜻이 분명치 않다. 차라리 사람을 말하려면 그냥 사람이라고 하면 되는데 굳이 사람의 후손 또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지칭할 이유가 없다.

아담의   후손이 사람의 후손이라는 말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아담이라는 단어가 가진 특징을 살리기 위해서도 아담의   후손이라는 번역이 필요하다. 성경을 읽는 독자 중에서 아담을 모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원어인 아담을 그대로 사용해도 문제가   없다. 인류 종의 기원이 되는 아담의 후손이라고 하면 그 해석이 명확해 진다. 그래서 나니아 연대기를 집필한 C.S.  Lewis도  이 단어를 작품에서 반복해서 쓰고 있다. 

이렇게   아담의 후손이라고 지칭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담의 후손이라는 표현과 흡사한 표현 양식이 우리말에도 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강아지, 송아지 망아지, 병아리, 아이를 해석하면 ‘가+ㅇ+아지[1]=개+의+아이(새끼)’,   ‘소+ㅇ+아지=소+의+아이’ 등이다. 

여기서 소의 새끼나 말의 새끼로 표현하는 양식이 아담의 후손, 사람의 후손이라는 양식과 비슷하다. 이것은 

 소의   새끼라서 그 본질과 형태가 소라는 것이다. 


1.1.1.2.3. 아담의 후손의 의미

아담의 후손이라는 말은 아담의 본질과 형태를 가진 아담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는   뜻이다. 이것은 아담의 형상 즉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는 뜻이다.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대리자로 이  피조세계에서  하늘과 땅과 바다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진 아담과 같은 존재를 뜻한다. 첫 아담은 이 지상에서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하나님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이것은 아담이 하나님이고 신이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하나님의  권세를 힘입어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수행하는 수행자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존재로 아담의 아들이 표현되어진  것이다. 아담의 후손은  아담이 그러한 것처럼 하나님의 대리자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인생을 표현하는 단어로  아담의 후손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1.1.1.3. 아람어를 근거로 한 다른 해석들

물론   다른 뜻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다. 인자를 아무개, 나 자신, 나 스스로 등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학자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아람어에서 그 근거를 찾은 것들이 많다. 물론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래한 근동지방 아람어에서 그들 식으로 비슷한 단어를  쓰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은 용례가 다양하다. 주어로 쓰일 때는 나 자신, 그리고 부사구로 쓰일 때는 사람의 아들로서 즉  사람으로서 그  외에도 다양한 변형들이 있다. 그 주장들을 살펴보자.


1.1.1.3.1 아무개

 인자가 우리말 아무개를 뜻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이 아무개를 뜻한다는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킬 때 아무개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으셨다.


시 8:4 바른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십니까?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면 되겠는가?

시편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아무개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십니까?


 번역이 이상한 것을 알 수 있다.


 원어를 보면 앞의 사람이라는 단어는 에노쉬(אנושׁ)[2] 뒤의 인자라는 단어는 벤 아담(בֶּן־אָ֝דָ֗ם)이다.

아담의 아들 셋의 아들 에노스의 이름은 필멸자 즉 쓸모 없는 헛됨을 뜻하는 단어로 사람을 지칭할 때 쓰인다. 그리고 벤 아담은 아담의 후손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위의 정상적인 번역들을 보면 인자라고 모두 번역하고 있다. 한자로 사람의 아들을 뜻한다. 그리고 이 사람을 히브리어 원어로 고치면 아담이다. 그래서 인자는 아담의 아들 즉 아담의 후손이 된다.

좀 더 정확하게 이 구절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시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아담의 후손이 무엇이기에 저를 돌보십니까?


 뜻이   훨씬 선명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담의 후손이라고 하면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원어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오히려 의미전달이 확실하다. 사람의 아들 이러면 뭔가 이상하다. 그 자체로 오해를 낳을 수 있는 번역이 된다.   그래서 이문열이라는 작가가 사람의 아들이라는 소설을 만들어내고 이 인자라는 단어를 이상하게 해석해서 소설에 적용하게 된 것이다.   아담의 후손 이러면 오해의 소지가 없고 명확한 단어가 된다. 



1.1.1.3.2. 나 자신, 사람으로서


단 8:17 바른

그가 내가 서 있는 곳으로 가까이 오니, 그가 올 때에 나는 두려워 땅에 엎드렸더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인자야, 이 환상은 마지막 때에 관한 것임을 깨달아라." 하였다.


여기서 인자를 나 자신으로 번역하면


단 8:17 

……………………… “나 자신아, 이 환상은 마지막 때에 관한 것임을 깨달아라.” 하였다.

사실 말도 안 되는 번역이 된다.

 

다니엘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 자신아 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인자야 즉 아담의 후손아 즉 사람아 하고 부른 것이다.


겔 2:3 바른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나를 반역한 반역의 민족에게 보낸다.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이 바로 오늘날까지도 내게 죄를 저지르고 있다.


여기서 인자야를 나 자신으로 번역하면


겔 2:3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나 자신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나를 반역한 반역의 민족에게 보낸다.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이 바로 오늘날까지도 내게 죄를 저지르고 있다.


말도 안 되는 번역이 된다.


 에스겔에게 보좌에 앉으신 인자와 같은 분이 나 자신아 하고 부르신 것이 아니다. 


1.1.1.3.3. 아람어를 근거로 한 인자 해석의 어리석음

물론   아람어를 근거로 하는 인자에 대한 해석이 신약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인자라는 단어에 제한되어 사용되어진 해석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이 책의 뒤에 언급하고 있듯 예수님의 사역언어는 히브리어였고 그 히브리어로 인자는 벤 아담이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의   가교역할을 하는 70인역을 통해 동일한 단어임이 증명되어진다. 이 내용은 잠시 뒤에 살펴 보도록 하겠다.

 

 아람어를 근거로 인자에 대한 특이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성경에 여러 곳에 대입해서 그 뜻이 정상적으로 통용이 될 수 있는  뜻인지  살펴보지 않은 것 같다. 학자들 중에는 자유주의나 비평주의 학자들이 있다. 이들의 안타까운 점은 성경을 잘라내고 쪼개고 그   편집의 가능성을 논하는데 초점이 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성경을 살펴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성경을 읽지는  않으면서  오히려 성경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 편집되고 조작되었다는 거짓증거 찾기에만 몰두해있는 경우가 많다. 


 위의   이상한 번역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성경을 읽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이상한 번역이 되는데 그것을 주장할 리가   없다. 최소한의 이성만 있어도 위와 같은 이상한 번역 현상이 일어나는 학설을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경이 가짜라고 생각하기에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지 않는 것이다. 단지 성경 외에 다른 근거들에만 초점이 가있다. 다니엘이나 성경의 저자들이 그 현장에서  직접  기록한 성경의 역사적 사실은 의심하면서도 풍문을 주어 모아 설화적으로 말하고 있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사실로 맹신을 한다.  벤  아담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성경 자체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찾지 않고 히브리어도 아닌 외국어인 아람어에서 그 뜻을  찾으려는  엉뚱한 시도를 하는 것이다. 물론 갈릴리 지역에서 유년을 보내신 예수님이 아람어를 쓰셨을 가능성은 있다. 북왕국  이스라엘 지역에  속한 갈릴리와 사마리아는 200년 가까이 포로생활을 했고 앗수르의 혼혈정책에 의해 그 혈통이 희석되고  종교적으로도 혼합주의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아람어가 일상적인 언어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도 성경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언어가  통하고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갈릴리 사람들이 서로 의사가 통하는 것을 볼 때 그 지역의 사람들도  히브리어를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개처럼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썼을 수도 있는 아람어를 공부해서  개들과 의사소통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왕국 이스라엘 지역의 사람들이 아람어를 일부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전체 이스라엘의 공용어는  히브리어였다. 그래야만 성경의 정황이 다 설명이 된다.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가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정상적인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국어를 해석하는데 일본어를 근거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짓들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한가지다. 성경을 절대로 믿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 성경 자체는 아예  근거로 삼을 생각조차도 않는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외국어를 가져와서 말도 안 되는 해석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해석이 구약의 인자가 아닌 신약의 인자에 한정된 해석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과 신약의 인자가 동일한   단어인 것을 간과한 해석이다. 이 책에서 구약과 신약의 인자가 70인역의 번역을 통해서 정확하게 일치함을 드러내 보이겠다. 이를 위해 포로기의 언어들에 관해 먼저 살펴보겠다.


1.1.1.3.4. 포로기의 언어들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같은 뿌리에서 파생된 언어다. 또한 아람어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유다가 포로 생활할 때 썼던 언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포로기의 지배국가였던 앗수르와 바벨론과 메데와 바사가 서로 같은 언어를 썼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히브리어가 아람어의 방언취급을 받는 것처럼[0] 유사한 아람어 계통의 방언들이 사용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와 아람어가 같은 원뿌리에서 파생되었지만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처럼 앗수르와 바벨론의 언어도 소통이 안되었을 수 있다. 문자들은 서로 비슷한 형태를 지녔지만 그 말은 전혀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이다. 또 아람어와 바사 즉 페르시아어는 그 언어가 완전히 다르다. 물론 고레스의 외할아버지의 나라였던 메데 즉 메디아의 언어도 완전히 다를 수 있다. 그런데 그 시기의 지배적 언어가 어떻게 아람어가 될 수 있는가? 물론 이 모든 제국들을 아울러 통용될 수 있는 언어는 아람어였다. 그러나 각 나라마다 그들의 주된 지배 종족의 언어가 있었다. 그리고 백성 모두가 아람어를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제국이 바뀔 때 마다 그 지배 종족의 언어가 지배 언어가 되었을 것이고 아람어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유추했을 때 아람어가 포로기의 지배적 언어였다는 가설은 좀 문제가 있다. 또 구약 성경의 기록 중 일부가 아람어로 기록되었다고 보는 학설이 있다. 다니엘서와 성경의 일부가 아람어만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매일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예배를 드렸던 다니엘이 성경을 아람어로 기록했겠는가? 아람어로 기록하려면 전체를 아람어로 기록할 것이지 대부분은 히브리어로 기록하고 또 일부는 아람어로 기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아람어는 다니엘이 쓴 것이 아니라 아람어 탈굼과 같이 번역되어진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아람어 탈굼들은 포로귀환시기에 돌아오지 않은 유대인 공동체들이 오랜 세월 동안 타국에 살다 보니 아람어만 쓰고 히브리어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아람어 성경번역본과 그 해설이 필요해진 것이다. 우리도 지금 성경을 읽으려면 한글 성경번역본과 성경에 대해 역사와 해설이 함께 되어있는 주석이 필요하다. 그것은 성경이 기록된 시대와 민족적 문화적 시간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일부 아람어로 기록된 성경들은 이런 배경에서 번역된 아람어 역본이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전승과정에서 원본인 히브리어 성경은 소실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것이 고대이던 후대이던 지금은 히브리어 원본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지금 히브리어 원본이 없다고 그 글이 반드시 아람어로 기록되었다는 추측은 억지다. 그것은  마치 전세계의 모든 책이 사라지고 한국어 성경만 남았다고 해서 천년 후의 세대들이 원어 성경은 한국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물론 처음부터 아람어 문서를 기반으로 하여 작성된 아람아로 된 성경의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히브리어가 사멸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또한 유명한 탈굼들이 있다하여 그것이 반드시 유대인들이 모두 아람어를 사용한 증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탈굼이 전승된 지역이 페르시아나 바벨론 앗수르 지역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이 있던 곳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번역된 성경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를 근거로 유대 본토나 모든 지역의 유대인들이 아람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억측이다. 그렇다면 70인역의 헬라어 역본은 히브리인들이 헬라의 식민지로 있었던 시절 이후 히브리어를 잊고 헬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한 증거라 할 수 있는가? 모두 억측일 수 있는 가설일뿐이다.


지금 남아있는 대부분의 아람어로 된 랍비들의 기록은 사실 유대지역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방지역의 회당에서 나온 것들이다. 후대에 아람어를 쓴 랍비들도 사실 북왕국 이스라엘 지역에 있었던 사마리아 지역에서 나온 기록들이다. 그리고 북왕국 이스라엘 지역에서 나온 것들 대부분은 이방지역에서 후대에 돌아온 랍비들의 기록들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람어 기록은 이방지역에서 나온 것들이다. 심지어 이런 아람어도 기원후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는 모두 잊혀졌다. 단지 아람어 방언이 널리 사용되던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아람어를 사용한 기록을 남겼을 뿐이다. 사실 예루살렘 멸망이후 지리멸렬한 유대교에서 예수님 당시에 사용된 언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찾는다는 자체가 힘든 일이다. 결론적으로 지금 아람어나, 히브리어, 심지어, 헬라어를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다는 것은 모두 추측일뿐이다.


   다니엘과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서는 포로기나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의 기록들이다. 그들은 유대로 돌아오기를 소원했고 어떤 이들은 돌아와 유대왕국을  회복하기 위해 힘을 썼다. 그런 그들이 포로기에 썼던 언어를 계속 썼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에스라서나 느헤미야 학개서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원수의 언어가 아닌 자신들의 모국어를 회복한 것이다. 


심지어 자기 자식도 이방여인의 피가 섞이면 이방인 아내와 함께 버렸는데 그들이 원수들의 언어를 그대로 썼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에스라서의 기록에서 우리는 포로에서 풀려나 귀환한 백성들의 모습에서 추론 가능한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아람어


유대(남왕국 유다 지역)

학자들   중에는 인자에 대해 아람어를 근거로 해석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이 당시에 아람어로 의사소통을 하셨고 히브리어는 말할 줄   모르셨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그 계통이 같다. 그러나 서로 의사소통이 되는 언어가 아니다. 즉  서로의  관계가 외국어다. 포로기 이후의 히브리인들이 히브리어를 잊어버리고 아람어를 썼다는 것도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아닌  가설이다.  즉 증명된 바 없다. 포로기가 70년이었는데 히브리인들이 히브리어를 잊어버렸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흩어져 방랑하던 백성이 그들 고유의 히브리어 성경과 민족성을 유지한 것을 보면 70년만에 언어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우리 나라도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우리말을 잃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식민지 시대 이후의 사람들은  일본어를 할 줄  모른다. 이러한 우리의 식민지 시대 경험을 볼 때 위의 히브리어를 잊어버렸다는 학설은 말도 안 되는 비합리적인  판단인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 말을 사용할 수 없는 환경(민족말살정책)에까지 노출되었지만 굳건히 누구나 우리말을 지켰다.  그런데 히브리어를  금지 당하지도 않은 히브리인들이 히브리어를 잃어버렸다고 주장하는 학설은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합리적인  판단은 그 포로  세대의 사람들은 히브리어도 쓰고 아람어도 쓸 수 있었다가 맞을 것이다. 그리고 아람어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에 일본어가 영향을 미친 것처럼, 그리고 포로기 이후에는 대중들 전부가 히브리어를  사용했다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한 몇 백 년이 지난 예수님 시대에는 아람어는 잊혀졌고 히브리어만 남았다가 타당할 것이다. 우리도  식민시대 이후에  일본어를 쓸 수 있는 사람들 조차도 일본어를 잘 쓰지 않았다. 원수의 나라에 대해 이가 갈리는데 그 언어를  계속 쓴다는 자체가  심적으로 거부감이 심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민족보다 선민 사상이 강한 유대인들이 포로기 이후에 아람어를  그대로 썼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포로기 이후에도 돌아오지 않고 페르시아나 세계 원근 각지를 떠돌며 육신적인 부를  쫓아갔던 세속적인 유대인  일부 집단들은 그곳에 살면서 그곳의 언어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에게만 국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외국어인 아람어에서  히브리어의 뜻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사마리아와 갈릴리(북왕국 이스라엘 지역)

 그러나   고려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예수님이 성장하신 갈릴리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영역으로 혼혈정책에 의해 말과 글을 잃었을 수도   있다. 그 포로기간이 200년 가까이 된다. 그러나 포로 귀환 이후에 그 상황은 많이 달라졌고 예수님 당시에는 모두가 히브리어를   공용어로 사용했다. 갈릴리와 사마리아는 공용어로는 히브리어를 그리고 일부 아람어 그리고 코이네 헬라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역할 때 쓰신 언어는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가 모두 알아 들을 수 있는 히브리어를 사용하셨을 것이다. 아람어를   사용하셨다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아람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유대지역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또  갈릴리나  사마리아에도 청중들 중에는 분명 유대지역 사람들이 섞여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이 모든 지역을 통괄하는 국가의 이름이  유대로 된  것을 보면 그 문화의 지배성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남왕국 유다의 포로귀환으로 귀환한 자들과 그 이후 유대의  독립운동과 마카비  왕조의 역사를 보면 왜 히브리어가 공용어가 될 수 밖에 없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라틴어와 헬라어

 또한   예수님은 목수로 활동하셨다. 당시 목수들은 로마의 공사에 동원되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라틴어나 헬라어를 사용 하셨을 가능성도   있다. 그 시대에 예수님이 속한 지역에서 사용될 수 있는 거의 모든 언어를 사용하실 수 있으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역의  언어는 이스라엘 지역 전체가 알아들을 수 있는 히브리어라는 것이 합당한 추론일 것이다. 

 현재도   중국은 소수민족들이 자신들 부족의 언어와 중국어 지역 방언과 중국의 공용어인 보통화(동북지역 특히 북경의 언어)를 함께   사용한다. 그리고 외국어인 영어나 기타 언어를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그 언어들까지 함께 사용한다. 그러나 이들의 의사소통   수단은 당연히 공용어인   보통화다.[3]

중국은 그 영토가 너무 넓어서 같은 중국어를 사용하는데도 그 방언이 거의 외국어 수준이다. 그래서 서로의 방언으로는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중국의 공산정권에서는 보통화를 통해 언어를 통일시켰다. 

모두 함께 말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단일민족 국가에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세계의 대부분은 다민족 국가다. 다민족 국가에서는 위와 같은 일이 흔하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언어는 히브리어였다. 그리고  히브리어로 된 벤 아담의 합리적인 번역은 아담의 후손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증을 앞으로 더 깊게 살펴볼 것이다.


신약 복음서의 증거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예수님 시대 유대에는 히브리어와 코이네 헬라어를 썼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하셨을 때 대중들은 그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엘리를 자기들의 언어인 엘리야로 추측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어를   들었을 때 우리말의 비슷한 소리로 잘못 알아듣는 것과 같은 현상을 보인 것이다. 대중들이 아람어를 알았다면 감히 하나님의   존호를  엘리야와 혼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뜻도 해석하지 못해서 저가 엘리야를 부르는가? 라고 질문을 했다. 그  말을  알아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아닌 것이다. 외국어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다. 여기서 고려할 것은 그 군중들 중에는 사마리아나  갈릴리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지 못한 군중들을 보면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람들도 아람어를 몰랐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아람어를 사용하신 몇몇 본문들을 보면 아람어가 사용되었거나 최소한 아람어  단어들이  우리나라에 일본어가 영향을 미친 것처럼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   자체의 증거가 가장 확실하다. 그런데 성경의 무오성을 공격하는 자들은 반복해서 성경을 신뢰하지 않고 그 신뢰성이 많이 떨어지는   외부 자료들에서만 근거를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람어를 쓰셨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성경에 이렇게 확실한 장면들을   기록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두고 엉뚱한 주장을 하는 것이다. 

회당의 히브리어 성경 낭독

예수님은 히브리어로 된 이사야서를 회당에서 읽어 낭독하셨다. 그글은 분명 이사야의 글이었고 성경이었다. 이 말은 회당에서 히브리어 성경(미크라[4])을 읽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나 제자들은 학식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학식이 있던 그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제사장 그룹들에게 판단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학식이 없던 예수님께서 히브리어 두루마리 성경을 읽어 낭독하셨다면 그 당시 학식이 없던 많은 다른 유대인들도 히브리어를 읽고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은 일반대중들이 말할 수 없는 히브리어를 읽으실 수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학식 있는 랍비가 된다.[5] 

히브리인들은 회당에서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낭독했다. 눅 4장에 보이듯 그들은 정해진 형식대로 히브리어 성경을 낭독했다. 그리고 그 성경을 가져다 주고 다시 보관하는 임무를 담당한 직무가 있었다. 히브리어 성경을 읽는 것은 누가복음 4장에 기록된 외에도 회당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것이다. 물론 랍비들이나 자격이 있는 자들이 읽었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인정된 교육받은 랍비가 아니셨다. 성경을 읽는 것이 랍비들에게만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남아있는 역사적 자료들을 살펴보면 회당에서 아이들에게 히브리어 문자교육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문자를 가르쳤다는 것은 그들이 히브리어를 사용한 것이다.


          


  

십자가의 명폐

또 다른 성경의 증거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걸렸던 명폐다. 


요 19:19-20 바른 

19빌라도가 명패도 써서 십자가에 붙였는데, 거기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 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20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도성에서 가까웠으므로, 유대인들 중 많은 이들이 그 명패를 읽었는데 그것은 히브리어와 라틴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대중들의 언어가 아람어였다면 히브리어 대신 아람어로 된 명패를 사용했을 것이다. 라틴어는 로마의 언어였다. 코이네 헬라어는 로마제국의 동부지역의 언어였다.[6]


그리고   유대의 현지어는 히브리어였다. 히브리어가 사어였고 아람어가 유대의 현지어였다면 명패에 히브리어 대신 아람어가 사용되었어야  했다.  이렇게 명백한 성경 속의 증거들이 있다. 정확 무오한 성경의 증거가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코이네 헬라어


 이것으로   볼 때 예수님 시대의 유대의 대중들은 아람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사역 언어도 히브리어다. 그리고 히브리어로   말했던 것을 후에 성경을 기록할 때에는 헬라어로 기록을 했다. 이미 이방지역에 복음이 편만해진 후에 기록했기 때문에 청중들이  함께  알아들을 수 있는 헬라어로 기록했다. 유대인들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보고 듣고 알았기에 그들에게는 굳이 글까지 써서 설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또 필요에 의해 유대인들에게 썼던 글들도 후에는 이방인들을 위해 헬라어로 번역되었을 것이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글을 쓴 것이 오늘날의 성경이 된 것이다.  

코이네   헬라어는 예수님 당시에 유대의 엘리트들이 구사할 수 있는 외국어였다. 로마의 식민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코이네 헬라어를 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학자들의 주장도 대중들의 20~30%가 코이네 헬라어를 쓰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식민지  통치에  협조하는 자들이거나 정치 경제적으로 로마의 다른 지역들과 접촉할 수 밖에 없는 상위 그룹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복음이  전해진  초기의 사역에서는 헬라어가 공식 사역어가 되기는 어려웠다. 대중의 공용언어는 당연히 히브리어였다. 그러나 복음의 전파가  로마에  편만해진 이후 그 당시 로마세계의 동쪽 지역의 공용어였던 헬라어가 사역의 공용어가 되었음은 당연할 것이다.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해진 후 성경도 그 당시에 유대에서만 통용되는 언어인 히브리어가 아닌 이방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쓰는  세계 공용어인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된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증인들에 의해 구전으로 전파되다가 복음이 로마에 까지 편만하게 전해졌을 때 증인들(성경 저자들)이 기록의 필요성을   느꼈다. 당연히 그 기록은 그 청중들 모두가 공통으로 상용하는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바울 서신서는 이방인들에게   기록했기에 당연히 헬라어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바울 자신도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헬라어를 쓰는 헬라파 유대인이었다. 이로  보건데  신약성경은 처음부터 아람어나 히브리어로 기록되지 않고 헬라어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7] 또는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된 것  같기도 하다. 남아있는 사료나 성경자체의 증거들로는 이 부분을 확정 지을만한 단서가 부족하다. 그런데 사도들을 포함한  성경의  저자들은 히브리어가 모국어였다. 그들의 머리 속에 있었던 언어는 히브리어였다. 초기 사역에는 히브리어로 복음을  전파했다. 그리고  성경을 기록하게 되는 사역의 후기에도 그들 두뇌 속 언어는 히브리어였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감동은 히브리어로  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나 타인의 도움으로 헬라어로 번역했다. 이 번역과정에서 70인역의 역할은 지대했다. 성경의  저자들은 히브리어단어의  번역이나 구약의 인용에서 70인역을 거의 전적으로 의지했다
          

[0]아람어의 방언이 히브리어라고 하지만 사실 이 둘은 그 언어의 계통이 같은 것이지 사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다른 외국어다.

[1]   아지는 아이와 같은 뜻이다. 아이는 사람의 아이에게 쓰이고 아지는 짐승의 새끼에게 쓰인다. 그리고 이런 형태의 변형으로는   병아리에 쓰여진 아리 또는 까투리에 쓰인 우리도 있다. 땅 짐승의 새끼는 아지고 날 짐승의 새끼는 아리 또는 우리다.

[2] 스트롱코드 사전의 원어 뜻을 참고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그 단어의 어원 까지 조사하다 보면 성경에 쓰인 단어들의 뜻이 더 선명해진다.

H583
- Original: אנושׁ
- Transliteration: 'Enowsh
- Phonetic: en-ohsh'
- Definition: Enos = "man" 
1. son of Seth 
- Origin: the same as H582
- TWOT entry: None
- Part(s) of speech: Proper Name Masculine 
- Strong's: the same as ; Enosh a son of Seth: - Enos. H582
Total KJV Occurrences: 7 

H582
- Original: אנושׁ
- Transliteration: 'enowsh
- Phonetic: en-oshe'
- Definition: 
1. man, mortal man, person, mankind 
a. of an individual 
b. men (collective) 
c. man, mankind 
- Origin: from H605
- TWOT entry: 136a
- Part(s) of speech: Noun Masculine 
-   Strong's: From ; properly a mortal (and thus differeing from the more   dignified ); hence a man in general (singly or collectively). It is   often unexpressed in the English Version especially when used in   apposition with another word: - another X [blood-] thirsty certain chap   [-man] divers fellow X in the flower of their age husband (certain   mortal) man people person servant some (X of them) + stranger those +   their tr
tion with another word. Compare . H605 H120 H376
Total KJV Occurrences: 42

[3] 중국어 간체자: 普通话, 정체자: 普通話, 병음: Pǔtōnghuà, 한국 한자음: 보통화

[4]미크라
구약 히브리어 성경인 타나크와 같은 뜻이지만 회당에서 낭독하는 히브리어 성경을 지칭할 때 사용된 단어.

[5]
눅 4:16 바른 예수께서 자신이 자라난 나사렛에 가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나시자,
눅 4:17 바른 선지자 이사야의 책을 드리니, 그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곳을 찾으셨다.
눅 4:18 바른 "주님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들에게 자유를, 맹인들에게 다시 보게 됨을 선포하고, 억눌린 자들을 자유롭게 하며,
눅 4:19 바른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눅 4:20 바른 예수께서 책을 덮어 시중드는 자에게 돌려주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분께 집중되었다.
눅 4:21 바른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여 "오늘 이 성경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성취되었다." 라고 하시니,
눅 4:22 바른 모든 이들이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의 말씀들에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라고 하였다.


[6] 발칸반도의 라틴어와 그리스의 경계를 따라 라틴지역과 코이네 헬라어 지역으로 나뉨, 그러나 로마의 지도층들은 교양언어인 헬라어를 사용할 수 있었음.

[7]   사도들 중 헬라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옆에서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 기록의 도움을 받았을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의 사역이 이방지역으로 전파되고 수 십 년이 흐른 후에 기록을 한 것으로 보아 사도들 중 처음에는 헬라어를 사용할 수 없었던   사람들도 그 선교지의 언어인 헬라어에 능통했을 가능성이 높다.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한 것, 그리고 다른 모든 사도들이   이방지역 즉 땅 끝에서 순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마지막 남은 사도였던 요한의 사역지가 헬라어 사용지인 안디옥   교회였다. 이것도 신약성경의 기록이 처음부터 헬라어였다는 것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은 그 수신자가 아시아 7교회라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헬라어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추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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