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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Jul 06. 2024

3.8 미가 시대의 거짓신앙-2

3.8.    미가 시대의 거짓신앙    
   3.8.1.    상상초월의 헌금과 예배    
   3.8.2.    예배를 거절하시는 하나님    
   3.8.3.    거절의 이유    
   3.8.4.    샤일록의 반박    
   3.8.5.    하나님의 최종판결: 샤일록의 변명은 궤변    
      3.8.5.1.    도적놈의 세상    
         3.8.5.1.1.    현대의 도적    
         3.8.5.1.2.    도적놈 아담 이후의 세상    
         3.8.5.1.3.    도적놈의 논리    
         3.8.5.1.4.    도적놈 록펠러    
         3.8.5.1.5.    큰 도적과 작은 도적    

   3.8.5.2.    시대착오적 발상?          

      3.8.5.3.    이자 문제    
         3.8.5.3.1.    느헤미야서의 이자 문제에 대한 결론    
         3.8.5.3.2.    이자에 관한 성경의 결론적 관점    
         3.8.5.3.3.    현재 이자를 통한 착취    
      3.8.5.4.    부동산 투기    
      3.8.5.5.    거짓신앙인도 도적놈    
      3.8.5.6.    도적이여 회개하라    

3.8.5.2. 시대착오적 발상?

그런 우리를 향한 구약 선지자들의 책망이 과연 시대착오적 발상에서 나오는 고리타분한 설교일까? 

과연 미가, 이사야, 호세아, 그리고 그 이전 시대의 아모스, 그리고 그 이후 시대의 예레미야까지 그들 모두의 메시지는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양피지나 파피루스에나 존재하는 유물일 뿐일까?


이자와 부동산 및 소비를 통한 착취에 관한 문제를 살펴 봄으로 이 원리가 현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지 살펴볼 것이다.  


3.8.5.3. 이자 문제


미가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권력자들이나 돈이 있는 자들이 밭과 집을 빼앗고 그 집의 아이와 아내를 그리고 아버지를 노예로 삼았다. 사실 돈을 빌려 줄 수는 있으나 이자조차 받지 말라고 하셨으니 빚을 핑계로 밭과 집을 빼앗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시 이자와 원금을 갚지 못하더라도 이방인들의 법대로 집과 밭을 빼앗기고 빚으로 인해 노예가 되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 경제제도의 근본에 위배된다. 


3.8.5.3.1. 느헤미야서의 이자 문제에 대한 결론


다음 느헤미야서의 글을 읽어보면 이를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때에 백성이 자기 아내들과 함께 그 형제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여 크게 부르짖었다. 어떤 이들은 말하였다. 

"우리는 아들들과 딸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곡식을 얻어야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말하였다. 

"우리의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전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읍시다."

또 어떤 이들은 말하였다.

" 우리는 왕께 세금을 내기 위해 우리 밭과 포도원을 잡혀 돈을 빌렸습니다. 이제 우리 몸은 우리 형제들의 몸과 같으며, 우리 아들들은 그들의 아들들과 같으나,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 아들들과 딸들을 종으로 내어 주게 되었으며, 우리 딸 중에 이미 종이 된 자들도 있으나 우리에게 속량 할 힘이 없으니, 이는 우리 밭과 포도원이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매우 노하여, 마음속으로 심사숙고한 후에 귀족들과 관리들을 책망하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각자 자기 형제들에게 고리 대금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큰 집회를 열어 그들을 책망하여, 말하였다. 

"우리는 이방에 팔렸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힘을 다하여 속량 하였는데, 너희는 너희 형제들을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에게 팔리게 하겠느냐?" 

그들이 잠잠하고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내가 또 말하였다. 

"너희가 하는 일이 옳지 않다. 우리 대적인 이방인들의 비방을 받지 않도록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행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나와 내 형제와 내 하인들도 그들에게 돈과 곡식을 빌려주었으나, 이제 우리가 이 빚의 이자 받는 것을 그만두자. 너희는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과 집을 돌려주고, 또 너희가 그들에게 취한 돈이나 곡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

12그들이 말하였다. 

"우리가 돌려주고, 당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겠으며,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제사장들을 불러와 그들로 하여금 그 말대로 행하겠다고 맹세하게 하였다.

13내가 또한 내 옷자락을 털며 말하였다. 

"이 말을 행치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이렇게 그의 집과 그의 일터에서 털어 버리실 것이니, 이렇게 털려서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그러니 온 회중이 "아멘." 하며 여호와를 찬양하였고 백성들은 그 말대로 행하였다.

(Nehemiah 5:1-13 바른)


그런데 느헤미야서를 보면 형제들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잊은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형제들에게 이자를 요구하고 이자와 빚을 갚지 못하는 자들의 밭과 집을 빼앗고 그들의 자식들을 노예로 삼겠는가?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 통탄할 사실을 보고 그 모든 것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3.8.5.3.2. 이자에 관한 성경의 결론적 관점


성경에는 형제에게 이자를 받지 말 것에 대해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계신다(출 22:25, 신 23:19~20, 시 15:5, 사 19:20, 사 24:2, 겔 18:7~13, 겔 22:12~13) 심지어 빌려 주지 말고 그냥 주라는 뉘앙스의 말씀도 있다(레 25:35~37)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듣고도 형제들에게 이자를 받고 빚으로 인해 집과 밭을 빼앗고 심지어 빚대신 자녀와 아내와 그 사람의 몸을 노예로 삼은 자들을 모두 멸하실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모두 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한 재테크 때문이었다(사 24:1~3) 그들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 이익과 자기 욕심을 위해 어려움을 당한 형제들을 돌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형편을 이용해 그들의 재산과 그들의 아들, 딸과 아내의 몸을 삼켰다. 그들은 백성을 떡 먹듯 하는 자들이었다.


3.8.5.3.3. 현재 이자를 통한 착취


지금도 우리는 합법적으로 이자놀이를 한다. 금융업과 대부업을 통해 이런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이 이자놀이를 하는 것에 참여하기 위해 은행에 돈을 맡기고 이자의 일부를 받기도 한다. 개인 간의 돈거래도 한다. 그리고 돈과 이자를 제때 받지 못하면 고금리의 이자를 물리고 그렇게 해서 그 돈이 회수되지 못하면 집을 경매에 넘기고 그 사람의 모든 재산을 압류해 싼 값에 팔아버린다. 그래도 빚이 남으면 그 빚을 음지의 추심업자들에게 팔아넘긴다. 그러면 빚에 몰린 힘없는 자는 결국 은행권이 아닌 고리대금업자들에게 돈을 빌리게 된다. 결국 그들은 빚에 의해 집을 경매당하게 된다. 그리고 몸을 저당 잡히고 여자는 창녀로 팔려나간다. 남자들은 새우잡이 배나 염전에 팔려간다. 그것도 안되면 장기를 강제로 적출당한다. 그런데 그렇게 갚아도 빚은 줄지 않는다. 고리대 같은 이자는 원금을 넘어서고 아무리 벌어서 갚아도 이자도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 빠진다. 차라리 중도에 포기하고 길거리에 나앉는 것이 낫다. 그렇지 않고 끝까지 버티려고 일수업자들에게 돈을 빌리는 순간 인생은 위와 같은 완전한 나락으로 떨어진다. 사실 중도에 포기해도 길거리에는 나앉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빚을 완전히 변제하기 전에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게 노숙자가 되거나 장기를 적출당해도 빚은 남는다. 그리고 그 빚은 여전히 그 사람을 추적해 온다. 아무리 여자가 몸을 팔아 빚을 갚아도 이자가 더 많이 불어난다. 그리고 그 갚지 못한 이자에 이자가 붙어 원금이 얼마였는지 알 수도 없을 만큼 빚은 불어난다. 우리는 이런 일들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그러한 업종인 은행들에 돈을 맡기고 그 수익금의 일부를 받는다. 또는 우리가 타인에게 빚을 받지 못했을 때 불법적인 추심을 의뢰하기도 한다. 불법이 아니더라도 합법적인 선 안에서 그들의 집을 경매하고 그들의 월급을 차압하고 그들의 부동자산을 차압하여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헐값으로 팔아버린다. 또 우리 중 일부는 그렇게 경매에 나온 집을 사서 재테크를 하는 자들도 있다. 그 과정에서 그 일을 당하는 당사자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단지 게으르고 능력이 없고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니 사실 그 조차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직 얼마나 싸게 그의 집을 사서 이익을 남길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다. 집을 잃은 자들은 생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들이 회사에 취업을 하더라도 빚이 따라다닌다. 월급을 차압당하니 일을 해도 소용이 없다. 그래서 또 사채를 쓸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인다. 그마저도 큰 돈을 쓸 수 없다. 그런데 사채라는 것이 작은 돈을 빌리고도 갚지 못하면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수십 만 원의 돈이 수백이 되고 그리고 그것이 수천수억으로 늘어난다. 이처럼 원금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사는 집들은 이런 유통과정을 거쳐 매매를 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도 이런 일에 대해 문제를 삼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에 대해 당연히 합법적인 절차로 생각한다. 


3.8.5.4. 부동산 투기


그런데 어떤 자들은 나는 그런 일에는 종사하지 않는다고 핑계를 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자들도 부동산 투기를 한다. 기본적으로 내가 살고 있는 집의 가격이 오르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면 집이 없는 무주택자들은 집을 사기 점점 어려워진다. 그리고 대출로 집을 사는 자들도 은행에 더 많은 빚을 져야 한다. 소위 영끌로 집을 산 사람들은 자칫하여 직장을 잃거나 경제활동을 하던 자영업에 문제가 생기면 대출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집은 경매를 당한다. 이런 사태는 우리가 그렇게도 바라던 집값이 오르는 바람에 생기는 일이다. 그래서 집값을 떨어트리려는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기도 하고 그런 정치가를 비판하기도 한다. 남들은 어떻게 되건 새로운 청년 세대들이 어떻게 되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오직 자신만 잘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여러 번 말했듯이 자신이 잘되는 것도 아니다. 집이 없는 사람이 남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장 내 자식이 결혼하여 분가를 하려면 집을 사야 한다. 나의 동생이 결혼하여 집을 구해야 한다. 타 지역에 새로운 직장을 구하여 취업을 한 가족도 새집을 사야 한다. 집값이 오르면 결코 나는 이익을 얻지 못한다. 오직 건설사와 수십에서 수백 채의 집을 보유한 투기세력만 돈을 벌게 되어있다. 아이스크림 가격이 올라도 오직 아이스크림 공장만 돈을 벌게 된다. 중간 수수료를 받는 판매 업채의 이익은 거의 오르지 않는다. 내가 사서 냉동실에 넣어 놓은 1,000원짜리 아이스크림이 2,000원이 되어도 나는 이익이 없다. 오히려 내가 그 아이스크림을 2,000원에 팔고 다시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려면 2,000원에 사야 한다. 친구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도 2,000원에 사야 한다. 아무도 아이스크림 가격이 올랐다고 해서 돈 벌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직 아이스크림을 쟁여 놓고 파는 자들이나 미리 아이스크림을 싼 도매가에 사서 오른 가격에 파니 이익을 얻는다. 아이스크림 회사도 오른 가격에 아이스크림을 파니 이익을 얻는다. 그러나 소비자는 물건 가격이 오르면 무조건 손해다. 이익을 볼 수 없다. 그런데 오직 주택 문제에서만은 사람들은 주택 가격이 오르면 이익이라 생각한다. 정말 원숭이들이나 생각할 수 있는 조삼모사의 문제인데도 인간들은 자신의 아이스크림(집) 가격이 오르면 기뻐한다. 다시 필요해서 아이스크림(집)을 살 때는 오른 가격에 비싸게 사야 하는데 자신은 소비자인데 무슨 유익이 있다는 말인가? 자신은 이익이 없고 자신과 다른 소비자들은 오른 가격으로 인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기뻐한다. 남들은 평생을 벌어도 집을 살 수 없다고 한탄인데 자신은 자신의 부동산 앞에 붙은 숫자가 바뀐 것에 기뻐한다. 어리석은 인간, 자기 아이스크림(집)을 팔고 다시 같은 아이스크림(집)을 사려면 자신은 똑같은 돈에 사야 하는데 그것이 무슨 남는 장사라는 말인가? 오직 아이스크림 생산회사에만 돈을 벌어주는 상황인데도 기뻐한다. 속은 줄도 모른다. 평생 번 것을 착취당하고도 착취당한 줄도 모른다. 그리고 그 집을 산다고 대출을 내고 대출 이자와 원금을 갚으면서도 기뻐한다. 어리석은 원숭이들일뿐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집을 필요할 때 적당한 가격에 살 수 있건 없건 관심이 없다. 오직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스크림(집) 하나에만 관심이 있다. 이런 어리석으면서도 사악한 자들이 과연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속았으나 결국 속임을 받아들이고 남의 불행을 기뻐하고 자신의 가진 것과 남이 없는 것을 비교하는 쾌감은 모두 자기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무죄하다고 할 수 없다. 남의 피눈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아이스크림 하나의 가격만 신경 쓰는 이런 우직한 작은 악마들을 무엇으로 교화할 수 있을까? 이웃이 대출금을 갚지 못해 집이 경매당하고 인생이 무너져도 자신의 집 값만 오르면 되는 성실한 작은 도적에게 자신이 도적임을 어떻게 깨닫게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내 발받침대이니, 너희가 나를위해 지을 집이 어디 있으며 내가 안식할 곳이 어디 있느냐?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만들었으므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 겸손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로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을 내가 돌볼 것이나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 같고, 양으로 제사하는 것은 개의 목을 꺾는 것 같으며, 곡식 제물을 바치는 것은 돼지 피를 바치는 것 같고, 기념 향을 피우는 것은 우상을 찬양함과 같다.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길을 선택하며, 그들의 영혼은 혐오스러운 것을 기뻐한다. 그러므로 나도 그들을 위해 혹독한 대우를 택하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이 그들에게 임하게 할 것이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이 내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않는 일을 택하였기 때문이다."(Isaiah 66:1-4 바른)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 과연 이대로 우리의 길을 간다면 우리의 결국은 어디에 도착할까? 이대로 우리의 길을 간다면 우리는 지옥에서 눈을 뜨게 되지 않을까?


이사야나 예레미야, 다른 선지자들이 살았던 구약의 멸망당한 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난 폐역한 백성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천천의 수양으로 예배를 드렸으며 절기와 월별 의식들(예배들)과 매일 드리는 기도를 잊은 적이 없었다. 열심을 내었으며 수많은 헌물과 자기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또한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을 어긴 일이 없는 선민이라고 생각했다. 형제들의 집과 터전을 빼앗고 가족들을 노예로 삼았다. 그러나 자신들은 세상의 정의에는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빚을 갚지 못하는 자에게 다른 것으로 변제하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의 논리는 가혹한 세상에 기반을 둔 법에 의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렇게 무조건 빚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공의라고 보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가 아무리 타락해도 부동산 투기를 하여 가격을 올리지는 않았다. 자신이 산 집의 가격을 더 부풀려서 다른 사람에게 파는 악한 행위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부동산을 여러 개 가진 자신은 돈을 벌고 나머지 모두는 피해를 입게 하는 그런 악한 일을 할 만큼 악하지는 않았다. 단지 자신이 가진 땅을 확장하고 집을 큰 저택으로 확장하는 것이 다였다. 그래도 형제의 터전을 빼앗은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책망하셨다. 그런데 그 가격을 수천 배를 올려 다시는 집을 사지 못하도록 막아버리는 오늘날의 악행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어떻게 판단하실까?


우리의 악행은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심해졌는데 이를 하나님은 두고 보시겠는가? 세상의 악행이 그대로 교회 안에서도 행해지는데 그것에 대해 하나님은 무어라 말씀하시겠는가? 참고로 지난 50여 년간 한국의 땅값은 4000배 가까이 올랐다. 이스라엘이 타락했지만 이런 악행은 저지르지 않았다. 물가가 오르고 지가와 주택가가 오르는 것이 정상이라 생각하겠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물가가 오르고 부동산의 가격이 오르는 것은 경제정책과 경제체제의 문제다.[1] 단순히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이를 알지 못하고 이 시대를 살고 있으니 항상 죽을 만큼 일해도 항상 제자리의 삶을 산다. 그리고 풍성해진 것 같지만 환경오염과 농약에 찌들고 유전자 변형에 의해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것들을 먹고 병들어 가고 있다. 많이 먹어서 비만은 되지만 더 병들고 더 많은 약물과 치료를 받는다. 더 많은 소비를 통해 번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빚을 더 많이 지게 된다. 그리고 평생을 모아 산 집도 대출이자와 죽기 직전의 천문학적 병원비를 제외하면 사실 빚을 갚기에도 부족하다. 평생을 살아도 남길 수 있는 것은 빚밖에 없다. 앞으로는 급여는 조금 인상하는 것 같지만 다양한 착취의 수단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 예전에는 대놓고 빼앗아갔다면 지금은 소비를 통해 스스로 결정권을 가지고 사기적 소비를 통해 착취당하게 만든다. 자기 스스로도 이런 세상에 살아야 하고 다른 이도 이런 세상에 살도록 만드는 메커니즘 속에서 우리는 부속으로 작동하고 있다. 결코 우리 자신은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도적놈이 만든 세상에서 착취의 시스템의 부속으로 작동하는 우리가 어떻게 죄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1950년대에 비해 임금이 많이 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때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부채를 가지고 있다. 가계부채의 비율도 놓고 기업 부채의 비율도 높고 정부 부채의 비율도 높다. 임금에 비해 지출이 많아진 것이다. 자연스러운 소비인 것 같지만 사실 임금을 높이는 것보다 더 높게 물가를 특히 집값을 높여 착취를 하는 것이다. 주택가격이 올라가면 사실 돈을 버는 것은 정점에 있는 건설사다. 그중에서도 대형건설사들이 거의 모든 것을 가져간다. 그리고 그들과 야합한 정치세력과 행정세력들에게 정치자금과 로비자금이 들어간다. 나머지 투기세력이나 개인 주택 소유자들은 빚만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투기시장을 조성하는 데 사용되는 수단일 뿐이다. 주택 시장의 거품이 꺼지면 그들은 빚더미에 앉게 되고 모두 무너지게 되어있다. 모두 거품 낀 가격에 속아 부를 가졌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다 주택가격의 붕괴가 시작이 되면 거대한 부동산 투자법인들도 모두 무너진다. 이를 모여준 것이 미국의 모기지 사태이며 중국의 헝다나 대형 부동산 투자 회사들의 붕괴 위기다. 세계의 돈은 정점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착취의 구조에 의해 움직인다. 여러 다원적 경제 단위들에 의해 착취가 이루어지고 그것은 또 국제적인 투자와 무역의 관계에 의해 세계의 경제 정점으로 빨려 들어간다. 사실 불공정 무역에 의한 것도 크지만 현대에는 금융자본의 움짐임을 통한 투자와 투기에 의해 그것이 결정된다. 특히 다양한 투자와 주식 시장의 등락과 관련한 세계적 자본들의 움직임을 통해 세상의 돈은 블랙홀에 흡수되는 것처럼 정점을 향해 모아지게 된다.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인 적자생존의 피라미드의 모양과 같이 항상 최고 정점의 포식자들이 모든 것을 독식하게 된다. 이런 도적놈의 세상의 건실한 도적 구성원으로 우리는 매일을 성실히 일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건실하고 성실해도 우리는 도적의 구성원 일뿐이다. 


3.8.5.5. 거짓신앙인도 도적놈


세상은 그렇다 해도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그렇게 살아간다. 항상 살아있는 신앙이 있고 믿음의 부흥이 왔을 때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세상을 거스르고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로 살았다. 구약의 긍휼의 경제제도가 그러하고 사도행전의 유무상통이 그러했다. 노예제도와 모든 불합리한 착취와 강압적 억압의 시대에도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노예를 풀어주고 형제로서 대했으며 그들에게 살 수 있는 길들을 열어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형제로서 살았다. 


그런데 믿음이 없던 시대에는 교회도 세상과 같이 타락하여 세상의 길로 나아갔고 세상의 착취를 본받아 도적놈의 길로 나아갔다. 그러한 시대에 독일의 루터교인 칼 마르크스는 유럽 전체 인구가 믿던 교회의 악행을 지적했고 그로 인해 무신론적 사회 전복세력으로 낙인찍혔다. 그 결과 그도 폭력혁명을 지지했고 그로 인해 세상은 피로 물들었었다. 만약 그 당시 유럽 전체와 같았던 교회가 회개하고 사도행전의 유무상통이나 구약의 경제제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공평과 사랑만 보여주었어도 세계사의 끔찍한 비극들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베트남과 북한, 캄보디아 등 세계의 곳곳에서 일어난 끔찍한 학살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념갈등으로 인한 전쟁들을 막고 그로 인해 발생한 학살과 강간과 방화와 파괴의 광기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기독교를 대적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가 그 사랑과 공의를 잃고 세상의 착취에 가담할 때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세상에서 그런 유혈사태와 폭력적 혁명과 사회 전복적 사태가 일어나는 것이다. 착취와 억압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어리석은 자들의 선동에 속아 아무 해결책도 될 수 없는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3.8.5.6. 최종 판결: 도적이여 회개하라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사람의 아들로 사는 것은 그냥 교회당에 발을 들이는 것과는 다르다. 미가의 시대나 이사야 시대의 거짓신앙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렇게 거창한 세계 경제와 경세사적 문제들까지 들먹이는 것은 우리 시대의 속임이 너무 교묘하여 다양한 설명들을 통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라 이름을 가진 자들도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기적 착취의 시스템 속에서 도적의 일에 협조하며 그 부속으로 사용되고 있는 한 개인으로서 우리는 참으로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서 요구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살아야 하며 아담의 후손으로서 세상을 공평과 정의와 사랑으로서 다스려야 할 의무가 있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절에 가서 부처에게 빌던 것을 이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비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진리로 모든 생각과 마음의 가장 작은 단위까지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속에서 그리고 세상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는 도구로 아담의 후손으로 우리는 사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늘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도구이며 그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천국의 서기관들이다. 우리는 천국 주인의 아들이며 상속자들이다. 결코 세상을 포기하고 세상을 버려두는 자들이 아니라 세상을 갈아 업고 그 세상에서 순교자가 되며, 거름이 되어 세상을 새롭게 할 자들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그리고 요셉의 삶을 그리고 다니엘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야 한다. 작은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와 세상의 어둠을 파괴하는 정복자로서 살아야 한다.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들의 무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며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 사랑으로 자신의 것을 나누고 세상에 사랑을 보여 도적놈의 세상을 거스르는 강력한 천국의 빛이 되어야 한다. 사랑의 원자폭탄이 되어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 결코 세상은 인간적 교육이나 무력이나 어떤 수단에 의해서도 정화되고 순화될 수 없다. 오직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 모든 것을 내어주신 사랑으로 우리를 내어주고 사랑할 때만 변화될 수 있다. 다시 돌이켜 예수님께로 돌아가자. 바알과 아세라와 맘몬에게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가자. 그리고 자식을 더 이상 밀곰에게 불로 태워 바치지 말고 하나님의 제단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군사로 드리자. 그리고 먼저 그렇게 살 수 있는 참된 회개의 능력을 하늘로부터 부여받자. 위로부터 구할 능력은 샤먼적 휘황찬란한 은사가 아닌 심령을 깨트려 그 심령 안의 어둠이 떠나고 빛이 그곳을 가득 채우는 능력이다. 그 능력이신 성령님께서 하늘로부터 비와 같이, 노아의 홍수와 같이 임하시어 온 땅을 가득 채우고 우리를 회개로 이끄시도록 기도하자.


3.8.5.7. 결론적 제언


그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사회의 전체 시스템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도 변화될 수 없는 것 아닌가? 만약 나 혼자만 성경의 경제법에 따라 산다면 현시대에서 나 혼자만 파산하고 길거리로 나앉는 것이 아닌가?


사실 이 땅에서 답은 없다. 만약 구약의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런 삶을 살라고 요구하고 싶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길을 가야 한다. 구약과 동일할 수도 없고 사도행전의 유무상통을 강제로 실행시킬 수도 없다. 그것은 칼 맠스의 실수를 거듭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최소한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도적질에 앞장서는 돈귀신들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부속품으로 살면서 지혜롭게 행하지만 결코 세상의 어리석음에 동조하거나 그들과 같이 약한 자들과 힘없는 자들을 착취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힘이 있고 돈이 있다면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나그네들을 보살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신의 길을 매일 매 순간 듣고 하나님의 뜻만을 행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삶이 돈을 위해, 안정과 평안을 위한 삶이었다면, 이제는 돌이켜 하나님의 뜻만을 구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며, 믿지 않는 영혼들을 살리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내가 직장인이건, 목사이건, 모두 동일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을 행하는데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교제가 필수라는 것이다. 홍길동전 보고 몇백 년 후에 홍길동의 뜻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아전인수격의 삶을 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도 않았는데 내가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아, 신학을 하고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당을 짓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직장이나 미래의 설계도 모두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양이 아니다. 예수님은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했다.


물론 자기 육신의 음성이나 사탄의 음성을 잘못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별하면 되는 일이다. 이에 관한 것은 여러 훌륭한 저자들의 책이 많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1] 참고로 경제제도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든 세상을 흑백논리로 단순화하는 오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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