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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Jul 13. 2024

3.9.    복음과 대적-1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모든 피조물은 고대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또한 사람의 원형인 아담의 후손이다. 이들이 나타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다. 인자들이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한다. 성경적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하나님의 통치다. 그런데 세상적 욕심과 육신의 정욕과 사탄은 아담의 후손들을 통해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한다. 이는 본능적이요 즉각적이요 지속적이다. 세상은, 대적은 언제나 사라지지 않고 아담의 후손들을 대적한다. 마귀의 새끼요, 옛 뱀의 새끼들인 독사의 새끼들은 언제 어디서나 아담의 후손과 그들을 통해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적한다. 하나님의 통치의 증거인 하나님의 임재를 거부한다. 지금 거짓신앙과 복음의 대적들을 언급함은 이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그의 시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결정체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님을 전파했다. 그는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님의 대적자였으나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을 대적한 것이 하나님의 원수 된 일임을 알았다. 거짓 메시야인 줄 알았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그분이 참 메시야임을 알았다. 광명이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앞을 볼 수 없고 식음을 전폐하는 충격 속에서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자이며 예수님의 제자인 스데반을 죽인 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 하여 죽인 자신은 죄인의 괴수임을 알았다. 자신은 하나님의 율법에 열심이 있어 바리새인이 되었으며 그 바리새인 중에서도 가장 열심이 특심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위하여 한 일들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었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었을 알게 되었다. 그는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었으며 같은 헬라파 유대인인 스데반을 죽인 죄인이었다. 그 스데반을 시작으로 그리스도인의 씨가 마르도록 교회를 핍박한 죄인이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이방 지역으로로 도망을 갔으므로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로 그들을 잡으로 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길이 빛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 빛이 너무 밝아 빛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빛이 얼마나 강했던 지 사울의 눈이 멀어버릴 정도였다.
“사울아, 사울아, 너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그는 예수님의 한마디에 무너져 내렸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그는 예수님을 만났다. 육신으로 알던 그분이 아니었다. 자신이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표를 행사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그분이 아니었다. 영과 영으로 만난 그분 예수님은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자신은 눈이 먼 자였다. 그 눈을 예수님이 뜨게 하셨다. 구약의 모든 것을 외우고 있었던 그는 아라비아의 밤과 다소에서의 낮에 그리고 자신의 작은 가슴속에 빛이 들어오는 여명에 구약의 모든 글들이 예수님을 예언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길을 가며 예수께서 그리스도님이심을 성경을 통해 증언하였다. 그 길에서 자신과 같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의 무리들을 만났다. 그는 이제 핍박자에서 핍박당하는 자가 되었다. 가는 곳마다 그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쫓아다녔다. 그들에게 선동당한 이방인들의 무리도 자신을 죽이려 했다. 바울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러했듯 거짓신앙은 참 신앙을 대적한다는 것을, 자신이 그러했고 지금은 자신의 동료였던 자들이 여전히 예수님과 자신을 대적한다는 것을………

                                                              바울의 2차 전도여행



3.9.1.    빌립보에서


바울이 2차 선교여행에서 방문했던 마케도니아의 첫 성 빌립보에서도 그러한 대적이 있었다. 유대인들에 의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시대의 세상이 바울 일행을 대적했다.

3.9.1.1.    마케도니아로


예수님의 영님이신 성령님께서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서 바울을 마케도니아 속주로 이끄셨다.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 하였으나 그 길을 막으셨다. 그래서 무시아 속주 앞에서 비두니아 속주로 가려하는 길을 돌이켜 무시아 속주를 지나 트로이(드로아)로 갔다. 그리고 트로이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키아 섬을 경유하여 네아폴리스 항에 도착했다.

중동의 터키와 유럽의 터키는 바다에 의해 서로 갈라져 있다. 유럽과 중동의 터키를 갈라놓는 바다는 하나로 이어져 있지만 포스포러스 해협과 다르다넬스해협에 의해 나뉘어 세 개의 서로 다른 바다로 불린다. 맨 위에 있는 육지에 거의 갇힌 바다의 이름은 흑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다다. 그리고 두 해협 사이에 끼여 있는 바다는 마르마라 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있는 바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에게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유명한 비잔티움(이스탄불)은 흑해와 마르마라 해 사이의 좁은 해협인 포스포러스 해협에 위치해 있다. 바울의 항해는 포스포러스 해협의 아래에 있는 마르마라해와 에게해 사이의 좁은 해협인 다르다넬스 해협의 끝에 위치한 트로이에서 출발했다.

트로이에서 네아폴리스 항으로 가는 뱃길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는 가까운 항로가 아니다. 다르다넬스 해협은 지금 현수교 형태의 차나칼레 대교(세계 최장 현수교, 3,563m)가 놓였을 정도로 그 폭이 넓지 않다. 그래서 안전한 항해와 비용을 고려하면 항해거리가 짧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육로로 트라키아 속주를 지나 마케도니아 속주로 가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당시 항해의 위험성을 고려하면 육로로 가는 길이 가장 안전한 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강도의 위험과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바울의 선교 여행을 보면 일반적으로 전도를 위해서 육로 여행을 선택했었다.

그런데 트로이의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트로이아스)에서 출발하여 중간 기착지였던 사모트라키아 섬을 포함한 세 개의 섬을 의지하여 아예 트라키아 속주 하나를 건너뛰어 마케도니아 속주의 네아폴리스 항으로 바로 입항한 것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더 큰 바다를 항해하여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당시의 항해술과 배의 내구성을 감안하면 위험을 감수한 선택이었다. 그나마 중간에 있던 세 개의 섬들이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어 항해가 가능한 항로였다. 또한 비용을 지불하고 배를 타야 하는 만큼 또한 중간 지역의 도시들에 복음을 전할 수 없는 만큼 일반적인 바울의 선교 행로는 아니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님께서 마케도니아로 와서 도우라는 마케도니아 사람의 부름으로 부르심을 듣고 속히 마케도니아로 향했다.

3.9.1.2.    빌립보


바울은 마케도니아의 네아폴리스 항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육로로 마케도니아 속주의 첫 성인 빌립보에 도착했다. 빌립보(필립비) 성은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 2세가 판게이온 산의 금광과 암피폴리스와 네아폴리스(카발라) 사이를 잇는 중요한 수송용 도로를 통제하기 위해 건설한 도시였다. 이 도시는 로마식 건축물들이 있었다. 목욕탕과 극장이 있었으며 로마의 돌 벽돌로 포장한 길도 있었다. 그리스인들이 즐겨 찾아 토론을 즐기는 시장도 있었다. 또한 바울이 갇혔던 감독도 있었다. 이러한 유적들은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이곳은 네아폴리스 항을 끼고 있는 도시로 무역이 발달해 있었다. 금 교역과 자주색 옷감을 파는 자주장사도 있던 곳이다. 자주색 옷감은 로마의 황제들이 둘렀던 망토에 쓰였던 소재였다. 그 가격이 상당히 비싸서 아무나 살 수 없을 정도의 가격이 형성되어 있었다. 페니키아의 티르(두로)에서 소라고동으로 염색한 자주색 천이었다. 자주색 옷을 입었던 황제가 살던 동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그 염색법도 사라져 현대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최고급품의 가격은 석공 임금의 천 배에 해당했다. 황금이 생산되어 모이는 빌립보에는 거부들이 많았고 그들 귀족들과 귀부인들 그리고 거상들에게 자주색 옷감은 인기가 있었다. 이곳에 두아디라 출신의 루디아가 거주했던 것은 자신의 고향인 두아디라에서 생산된 자주 옷감의 판매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자주색 옷감은 금만큼이나 비싼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곳에 자주 옷감 가게를 내는 것은 금으로 인해 거부가 된 자들의 자주 옷감 수요를 수용하기 위한 당연한 공급자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루디아의 고향인 두아디라는 루디아(리디아) 속주에 속해 있는 도시로 자주색 옷감의 염색과 판매로 유명한 곳이었다. 터키 중서부에 속해 있던 계시록의 소아시아 7 교회들의 대부분이 이 지역에 있었다. 두아디라에 있던 에클레시아도 계시록의 7 교회 중 하나였다. 또한 루디아의 이름도 두아디라가 속해 있던 루디아 왕국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1]  

3.9.1.3.    천국의 복종자와 대적자


바울은 빌립보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었을 때 기도처를[2] 찾고 있었다. 그때 강가에 앉아서 모여 앉아 있던 여자 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루디아가 있었다. 그녀는 바울의 말을 경청하였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녀와 그녀의 집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루디아는 바울 일행에게 말했다.

"만일 당신들이 저를 주께 신실한 자라고 여기신다면, 저의 집에 들어와 머무십시오."

그래서 바울은 루디아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의 집에서 모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 교회에는 건물이 따로 없었다. 가난한 성도들의 형편이 그 원인이기도 했고 또 귀족들과 귀부인들, 그리고 루디아와 같은 부요한 상인이 있었어도 마찬가지였다. 건물이 중요하고 신전을 중심으로 종교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것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그리스의 이교도들이나 하는 속임수였다. 높은 지붕과 거대한 기둥이 늘어선 열주 그리고 엄숙한 빛의 조합들 그리고 장엄한 종교 음악으로 사람을 사로잡는 것은 모두 이교도들의 전통이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종교학적 글에도 나오는 것으로 이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중세교회였다. 뮤즈 여신의 사제들을 기르던 방식으로 신학교를 세우고 또한 음악 하는 자들을 세웠다. 그리고 고대의 건축방식을 따라 높은 신전양식의 건축물들을 세웠다. 그리고 사탄이 자신이 뱀의 꼬리를 거꾸로 들고 하늘을 대적하는 탑의 양식들을 따라 교회에 첨탑을 세웠다. 이러한 양식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며 저 앙코르와트의 코브라의 꼬리 형상의 사원들과 그 꼬리를 흔들며 하늘을 대적하는 머리가 깨져 땅에 파묻고 있는 뱀의 형상들이다. 로마 교회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들을 가지고 와서 그 꼭대기에 이상한 이집트 종교의 상징인 앙크를 십자가인양 속여서 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앙크는 십자가가 아니다. 더러운 뱀들의 야합을 상징한다. 이것은 남녀의 성기를 상징하며 그 둘이 교합하는 모습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하나님을 조롱하고 또한 이교도들의 신전에서 창기들을 신녀로 두어 오는 자들과 성적 교합을 이루어 귀신과의 교합을 이루도록 하는 더러운 술법에서 유래한 것이다. 신녀들은 귀신들에 빙의되었으며 남자들은 빙의된 신녀들에게 자신의 몸을 교합함으로 자신을 귀신들에게 제물로 바치는 일을 행한다. 이를 통해 영매인 신녀들과 야합한 자도 신과 교합되어 그 정신이 신에게 빼앗겨 아득한 몽롱함 속에서 귀신들의 환영과 환청을 듣게 되는 소위 신탁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를 좀 다른 형태로 전환한 것이 오르픽 종교의 음악을 통한 환타지아다. 황홀경을 음악과 술과 마약을 통해 경험하는데 그 가장 격앙된 순간들에 결국 귀신들과 교합하여 접신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콘서트나 파티나 페스티벌에서 경험할 수 있는 쾌감이나 황홀경도 이러한 메커니즘에서 나오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과의 정결함을 잃어버린 자들이 인격적 교제 없이 뛰고 춤추는 찬양 집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이러한 곳에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모든 것이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감정과 자신의 흥분 상태가 중시되는 자기도취적 황홀경이 일어난다. 어차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나 귀신들을 만나는 것이나 영과 만남이 이루어지니 유사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인간이 디자인된 특성상 그러한 영적 인카운터에서 감동과 감격이 밀려온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그 영혼을 살리지만 귀신들과 접신하는 것은 그 영혼이 탈취되는 것으로 그 영혼은 귀신들에게 제물로 바쳐지고 결국 스스로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거부하다가 결국 그 영혼이 말라비틀어져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가요나 락을 많이 듣는 일반적인 청소년들이 참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면 축사가 필수적으로 일어나는데 대부분 음악을 매개체로 들어온 귀신들이 그 원인이다. 그런데 대부분 중세 음악과 하나님을 떠난 세속적 교회에서 만들어진 음악들이 이러한 세상의 음악과 같은 작용을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찬양을 하고 목사가 설교와 기도를 하는데 결국 무당들이 하는 짓거리와 같은 결과를 낼 때도 많다. 아마 자신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명확하게 만나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기복적 예언을 성도들에게 남발하는 신비주의 영적 지도자들은 대부분 무당들이 내는 효과를 귀신들에게 주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개인적으로 내가 경험한 거의 대부분의 순복음이나 기도원의 지도자들이 거의 이런 부류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대부분 영적 무감각자들이었다. 이 두 부류 모두 자신들은 알지 못하지만 결국 귀신들의 사환 노릇을 하며 귀신들의 영매가 되어있다. 대부분의 대중음악을 하는 가수들도 자신이 영매인지 알지 못하고 자신이 하는 것이 귀신들과 접신하도록 굿판을 벌이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영적 무감각자들도 이들과 같이 사용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우리가 중세 교회나 다른 종교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는데 현대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를 발견하는 것은 눈이 가려진 우리로서는 상당히 어렵다. 교회는 이런 전통들의 어리석음을 깨트리고 빛 가운데 나와 하나님 앞에서 정통한 관계성을 가진 거룩한 무리가 되어야 한다. 에클레시아는 건물이나 종교성을 일으키는 엄숙한 음악이나 조명을 사용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하는 기술들이 중심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만남의 관계성 안에서 새로 태어난 영혼의 순순함을 간직한 거룩한 자들의 무리다. 바울과 사도들이 처음 개척한 교회에는 이런 살아있는 생명이 있어 그 원형이 드러난다. 루디아의 집에 있던 교회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다시 사도행전으로 돌아가겠다.

바울과 일행들의 거처는 부유한 상인이었던 루디아의 집이 되었다. 그래도 기도는 유대인들의 관습대로 기도처에서 드렸다. 기도처로 가던 도중 귀신들인 여자 노예를 만났다. 그 여자가 바울 일행을 쫓아가면서 소리 질렀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로서 너희에게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있다."

여러 날 이런 일들이 반복되었다. 바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여자에게서 귀신을 내쫓지 않고 며칠을 참았다. 아마 귀신을 내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하루는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어 그녀에게 붙어있는 귀신에게 말했다. 아마 이때에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신 것 같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님의 이름으로 네게 명령하니, 그 여자에게서 나와라."

그 즉시 귀신이 그 여자에게서 나왔다.

그런데 그 일을 들은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붙잡았다. 그리스인들의 토론과 재판의 장이었던 시장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지방 관리들 앞에 세웠다. 고소하는 말은 다음과 같았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로서 우리 성읍을 크게 소란하게 하여, 로마인인 우리가 받아들이거나 행하는 것에 옳지 않은 관습을 전한다."

그들 고소의 표면적인 내용은 종교에 관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 그녀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잡아 고소한 직접적인 이유는 자신들의 돈줄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녀의 주인들은 그녀가 점을 치도록 했고 그렇게 번 돈을 자신들이 차지했다. 그녀의 점이 신통했던 지 수입이 상당히 좋았다. 그런데 바울이 귀신을 내쫓아 버리니 이제 점을 칠 수 없고 수입도 없어진 것이다.

주인들의 고발에 관해 들은 사람들은 선동되어 격앙되었다. 자신들의 종교를 훼방하고 자신들의 모든 신을 부인하고 심지어 황제도 부인하고 예수라는 사람 하나만 신이며 동시에 왕이라 하니 이는 반역죄였다. 특히 로마의 직할 도시였던 빌립보 성은 자신들이 로마 황제의 신민이며 직접 통치를 받는다는 자부심이 있었으므로 기독교의 반역적 사상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반역자는 어느 나라이던 중범죄로 다스리는 죄였다. 대부분 반역자와 그 가족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가벼우면 강제 추방을 당해야 했다. 도시의 관리들은 명령했다.

“저들의 옷을 찢어버리고 채찍으로 쳐라. 그리고 그 후에는 감옥에 가두어 두어라!”

바울과 실라는 겉옷이 찢겨졌고 끝에 뼈와 금속 파편이 달린 로마의 채찍을 맞았다. 채찍을 맞을 때마다 살점이 뜯겨져 나갔다. 바닥과 그들의 몸이 피로 흥건해졌을 때 그들은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발에 족쇄가 채워졌다. 족쇄는 벽에 있는 쇠고리와 쇠사슬로 연결되었다. 보통은 땅을 판 구덩이나 아니면 자연적인 구덩이에 가둬두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빌립보는 왕이 직접 건설한 도시였고 황금이 거래되는 부유한 도시였으므로 이런 감옥이 있었다. 이런 감옥에서 탈출은 불가능해 보였다. 채찍에 맞은 상처는 피 떡이 덮이고 굳어져 쓰라렸다. 낮부터 굶기까지 한 이들은 기진맥진이었다. 기도하러 가던 중이었으므로 낮 12시경에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났고 이 사건이 벌어졌으니 지금 시간이면 배가 고플 만했다. 저녁 해가 넘어가면서 감옥의 돌 벽에 난 작은 창으로 노을이 넘어와 벽을 붉게 물들였다. 자신들의 몸을 덮고 있던 피 딱지와 그 색이 어우러져 몸을 더 붉게 덮었다.

그 핏빛을 보니 바울은 자신이 죽인 예수님의 십자가가 생각이 났을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과 교제하며 대화하던 중 찬양을 시작했다. 이미 시간은 한밤중이 되었다. 조용한 시간에 찬양하는 소리는 돌로 된 감옥 전체에 울렸고 다른 모든 죄수들도 찬양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감옥의 문들이 열렸다. 또 족쇄가 풀렸다. 지진이 일어난다고 모든 감옥의 문이 열리는 것도 이상하다. 그리고 특히 족쇄가 풀린다는 것은 더 이해하기 어렵다. 지진부터 모든 일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어두운 밤 죄수들이 자는 감옥은 캄캄했다. 간수가 놀라 뛰어나왔을 때는 바깥의 열려진 감옥 문만 보였다. 그 안에 있던 죄수들은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순간 간수의 마음은 절망으로 가득 찼다. 이렇게 죄수들을 모두 놓쳐버리면 자신은 분명 엄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또한 군인으로서 명예를 중시했던 간수의 고귀함은 모두 짓밟힐 것이다. 그는 칼을 빼 들었고 자살하려 했다.

그때 바울이 다급히 그를 불렀다.

"너는 자신을 해치지 마라. 우리가 모두 여기 있다."

놀란 간수는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 바울과 신라 앞에 엎드렸다.

"선생님들, 제가 구원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 예수님을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여기 빌립보에서는 루디아와 루디아의 집이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간수와 간수의 온 집이 구원을 받았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이와 같이 모두 구원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대적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욕심으로 인해 복음을 반역자들의 사상이라 흑색선전을 했다. 세상은 언제나 자기 욕심에 속아 거짓을 동원하여 복음을 대적한다. 진실로는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없으니 없는 죄를 만들어 덮어씌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죽인다. 항상 이런 사탄과 세상의 전략은 바뀐 적이 없다. 언제나 동일했다. 언제나 자신들의 욕심에 의한 거짓기준을 만든다. 세상의 거짓 주인들이 항상 쓰는 것이 거짓이다. 진실로 사람들의 주인은 사람일 수 없다. 누군가 다른 이들의 위에 서서 군림할 수 있는 권한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주신 일이 없다.  그런데 불법적 점거자이며 폭군이며 착취자인 자들은 항상 힘과 거짓으로 세상을 억누른다. 그리고 거짓 지배 이념으로 사람들을 세뇌하여 속인다. 자신들의 지배가 정당하다고 설파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세뇌하지만 사실 그들의 주장은 모두 새빨간 거짓이다. 감히 누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자신의 욕심을 따라 착취하고 억압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감히 누가 하나님의 형상을 잡아서 노예를 삼고 종으로 부릴 수 있다는 말인가? 누가 감히 사람을 돈으로 사고팔고 그들은 합법이라는 이름 하에 강간하며 그 자녀들을 짐승과 같이 취급하여 팔 수 있다는 말인가? 누가 감히 중세의 농노와 같이 그리고 현대의 공장 노예와 같이 그들 생산의 대부분을 빼앗고 아주 작은 일부만을 주어 생명을 겨우 연장하도록 착취할 수 있다는 말인가? 누가 감히 조삼모사로 자신들이 임금으로 평생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을 집 하나를 사는 것으로 빼앗아 빚까지 지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순진한 일반 노예들은 자신들이 노예가 되었는지? 얼마나 착취를 당하는지도 모르게 세뇌되어 속고 있는데 이런 끔찍한 짓을 누가 정당화해 주었다는 말인가?

귀신 들려 정신이 나간 여자 아이를 치료해 주고 보살펴주어도 모자라는데, 그 아이를 이용해 돈을 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돈벌이가 사라졌다 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을 대적한다는 말인가? 인간은 이렇게 비루하고도 비참한 존재라는 말인가?

그렇다 인간의 가장 악한 점은 그들이 이런 악을 버리고 선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 악을 사랑하여 악을 선택한다. 그것이 진정한 인간의 가장 사악한 악의 실체다.

악한 인간들과 그 인간들이 만든 세상과 그 인간들을 조종하는 사탄과 귀신들은 항상 이렇게 세상을 악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든 악한 세상에 공평과 정의와 사랑을 가지고 오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복된 소식을 대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악함으로 자신들의 탐욕과 사악한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면 절대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절대다수가 행복해질 수 있어도 자신이 그들을 수탈하여 도적질 하는 쾌감을 포기하지 않는다. 절대다수의 행복은 자기 욕심과는 상관이 없다. 세상은 이런 악인들에 의해, 쏘시오패스와, 그보다 더한 싸이코패스들에 의해, 다스려진다. 그러니 그들이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복음이 오면 그들의 욕심에 의한 탐욕의 작은 돈벌이가 사라지는데 그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탐욕에 눈이 멀어있다. 복음이 오면 정의가 실현되고 공의가 선포되며 공평이 드러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긍휼과 사랑이 넘쳐난다. 그곳에는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것을 내어 나누어준다. 이는 악한 자들의 탐욕과는 상극이다. 악한 자들은 천국이 임한 곳에서는 견딜 수가 없다. 빼앗고 도적질 하고 착취해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을 대적한다. 공평과 사랑을 선포하는 복음 전도자를 대적한다. 자신들의 소망, 자신들의 탐욕을 가로막는 복음은 그들에게는 복된 소식이 아니다. 그들에게 복음은 개소리며 자신들의 이익을 대적하는 악의 총화로 보인다. 그래서 세상은, 사탄은, 전력을 다하여 복음을 대적한다.

목사가 자기는 사랑하고 타인은 덜 사랑하기를 바란다. 누군가 목사에게 자신보다 더 사랑받는 자가 보인다면 견딜 수 없다. 질투가 난다. 누군가 돈이 많아 헌금을 많이 해 목사가 좋아한다면 견딜 수가 없다. 누군가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교회에서 인기를 누리고 교회의 직함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면 견딜 수가 없다.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상대면 그 아래에서 비위를 맞추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언제나 기회가 된다면 자신이 그 자치를 찬탈하고 싶다. 인간의 속에는 이런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그런데 어떻게 그 심령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과연 복음이 와서 공평과 정의를 선포한다면 이 심령은 기뻐하겠는가? 아니면 자기 질투로 똘똘 뭉친 죄인의 악심이 복음을 대적하겠는가? 우리의 심령 안에, 우리의 교회 안에 당연히 이런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거듭나지 못한 자요, 우리의 교회는 거듭나지 못한 사탄의 회다.

만약 우리 자신도 거듭나지 못했다면 동일한 악을 행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의 논리에는 그것이 정당하다고 변명을 할 것이다. 예수님을 못 박았듯이 오늘도 누군가 예수님의 보내신 대사들을 대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정말 겸허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이 거듭나기를 구해야 한다. 회개한 심령이 부어져 더 이상 세상의 것을 사랑하지 않도록 목숨을 다해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본능대로 복음을 대적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대적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당 건물에 드나들다가 어느 날 죽어서 눈을 뜨면 지옥의 불길 속에 고통하게 될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구원받은 자는 신학교 교수였던 루터가 그러했듯 일반적인 어떤 상식도 뛰어넘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바울이 그러했듯 일반적인 어떤 극한의 신앙도 따라갈 수 없는 극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어설픈 흉내나 내는 신앙으로 안심하지 말기 바란다. 자기 교회에서 그나마 낫다는 것으로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착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조선의 성자, 한경직도 지옥에 떨어져 있다. 그리고 능력의 끝판 왕이라 할 수 있는 조용기도 지옥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 헛된 자기의를 내리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기 바란다. 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이 시대의 신앙인인 당신은 완전한 착각 속에 있는 이 시대의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이다.
 나도 거짓 신앙인들이 가득한 이 시대의 교회에서 자랐다. 그래서 누구보다 그 실상을 잘 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시대의 거짓신앙에서 교회당 건물만 밟다가 집에 돌아가는 거짓신앙인이다. 이제 참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님을 만나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의 전심을 사로잡는 회심과 거듭남을 구하자. 그래야 살 길이 열린다. 그 이후에도 성령님께서 성경을 통해 부어주시는 지혜로 우리 안에 있는 구태의연한 악습을 하나씩 제거해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개가 자기 토한 것을 다시 삼키듯이 악한 거짓신앙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1] 위의 지도에서 에베소가 있는 지역이 루디아(Lydia)다. 이 지역에서 소아시아 7 교회 중 일부를 찾을 수 있다. 나머지는 옆의 속주들에서 그 이름을 찾을 수 있다.


[2] 기도를 드리는 장소는 기본적으로 회당이었다. 그런데 그 지역에 회당이 없으면 도시 외곽에 따로 야외로 하늘이 트인 장소를 마련했다. 주로 하천이 흐르는 곳의 옆이나 바닷가에 있었다. 이는 정결을 위해 손을 씻을 물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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