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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Jul 27. 2024

3.10. 그럼에도 사랑하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괴로워하시며 증언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하나가 나를 넘겨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누구를 가리켜 말씀하시는지 몰라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 곧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누구를 가리켜 말씀하시는지 여쭈어보라고 하니, 그가 예수님의 가슴에 그대로 기댄 채 그분께 말하였다.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빵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바로 그 자이다." 

그리고 빵 조각을 적셔서 가룟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그가 빵 조각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러자 예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

식탁에 앉은 자들 가운데 아무도 예수께서 그에게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알지 못하였다.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맡았으므로 예수께서 그에게 "명절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사라." 하고 말씀하시거나, 또는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어라." 하고 말씀하시는 줄로 생각하였다. 유다가 그 빵 조각을 받고 바로 나갔는데, 밤이었다.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영광을 받으셨다면, 하나님께서도 자신 안에서 그를 영광스럽게 하시되, 즉시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자녀들아, 내가 아직은 잠시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곧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내가 유대인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올 수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지금 너희에게도 말한다. 새 계명을 내가 너희에게 주니,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지금은 내가 가는 곳으로 나를 따라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따라올 것이다."

( John 13:21-36 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대적들 가운데 사는 것이다. 세상과 하늘나라는 서로 원수라서 미워하여 공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상에 사는 인자들은 언제나 대적함을 받는다.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도 인자로서 세상에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는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앞에 두신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이것을 새 계명이라 하셨다. 사실 구약의 십계명도 모두 사랑이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를 새 계명으로 주신 것은 무슨 까닭이셨을까? 그리고 지금 예수님이 사라지실 것이 두려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까? 그리고 "네가 지금은 내가 가는 곳으로 나를 따라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따라올 것이다."(요 13:36 바른)는 또 무슨 뜻일까? 제자들도 순교한 후에 따라갈 수 있다는 것인가? 분명 예수님은 이 마지막 순간들의 많은 부분을 자신의 제자 유다가 자신을 파실 것을 아파하시며 보내셨다. 또한 그것을 아시고 유다에게 포도주에 빵을 찍어 주시며 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일을 어서 하라고 하셨다. 또 그때에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고 했다. 이 모든 예수님의 행동들과 말씀들은 상당히 난해하고 또 읽으면서 마음이 무겁다.


요한복음 13장은 다른 복음서와는 다른 내용의 기록들과 관점이 특이함을 형성한다.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포도주와 떡을 나누는 장면도 성만찬의 내용이 중심인데 이곳에는 유다의 배신이 중심이다. 세족식 전에도 이미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신을 아셨다고 나온다. 모든 사건의 깊은 기저에 예수님의 심중에 있는 유다의 배신이 있다. 

그런데 유다의 배신과는 대비되는 사랑이 나온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 13:1) 그런데 이미 그때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셨다. 그것은 그 과정이 유다의 배신에 의한 것임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위해서 죽을 사람들이 자신을 모진 십자가에 못 박고 비웃을 것을 아셨다. 그런데 사랑하셨다. 그것도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리고 종들이 주인을 섬기듯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지금은 세족식이 이미 많이 알려져서 거룩하고 엄숙한 행동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사람을 발을 씻기는 것은 천한 종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인간의 신체 중에 가장 더럽게 여겨지는 발을 씻기는 것은 천한 종이 아니면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놀라서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주시는 것을 거부했다. 그것이 제자라면 스승에게 당연히 보이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팔 유다의 발을 씻기셨다. 그리고 유다에게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자신을 파는 일을 어서 하라고 하셨다. 그 유다에게는 포도주에 빵을 찍어 주셨다. 예수님은 어떤 심정으로 이 일들을 하셨을까?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포도주와 빵을 나누시는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이렇게 말씀하시며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다."(요 13:34~35)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 15:13 바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인자로 오셨다. 그리고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도 사랑하셨다. 심지어 자신을 파는 제자까지 사랑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기도에 자기를 미래에 믿을 사람들까지 사랑하셨다.(요 17:20~21) 그리고 그 사랑으로 제자들이 사랑하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셨다. 사랑으로 타자를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셨다. 그 사랑으로 만유가 충만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만드신 만물도 모두 사랑으로 충만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이 다시 온 만유에 충만하기 원하셨다. 그 일의 시작이 자신이 인간으로 와 사랑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시어 연합하셨다. 하나가 되셨다. 그리고 이 땅에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사랑하셔서 함께 하셨다. 아담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과 함께 거니는 존재였다. 서로 사귐이 있었다. 

하나님은 삼위 안에서 하나가 되셨다. 그리고 그 친밀함의 표현과 연합의 표현으로 우리라는 표현을 하셨다. 그 우리의 사귐 안에 인자들을 초청하시고 그 사귐 안에서 우리를 만드신다. 그것이 에클레시아다. 사귐 안의 하나 된 공동체다. 다음의 구절들을 보자.


John 14:23 바른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로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할 것이다.


John 17:11 바른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키셔서 그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하소서.


John 17:21 바른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모두 하나가 되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이 믿도록 하소서.


John 17:22 바른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으니, 이는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1 John 1:3 바른

3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도 전하니, 이는 너희가 우리와 서로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과 만드신 공동체는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심지어 삼위 하나님의 우리 공동체 안에 인간들을 초청하시어 사랑하는 관계를 만들기를 원하신다.(요일 1:3)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사랑하는 존재시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듭나 사랑하는 존재요, 사랑이다. 그러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자.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을 하자. 원수를 축복하며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하며 숨을 거두신 예수님과 같이 사랑하자. 그 예수님을 꼭 닮아 사랑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울린 스데반과 같이 사랑하자. 모든 존재들을 사랑하며 자신의 울타리에 있던 모든 것을 사랑하는 존재로 물들였던 수많은 선진들의 믿음과 같이 서로 사랑하자. 


대적들이 대적하고 핍박하며 죽이더라도 사랑하자. 사랑하는 존재가 되자. 사랑하는 자가 되어 영원히 사랑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며 그곳에서도 사랑하자.


아담의 후손들은 태초와 같이 사랑하는 존재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하셨지만 세상을 사랑하신 예수님이다. 


John 3:16 바른

16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분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하는 존재가 되어 대적하는 세상을 사랑하자 세상은 아직 어둠이요 뱀에게 속하여 뱀의 새끼들이지만 우리가 뱀의 새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아 서로 사랑하자.


에클레시아는 오직 사랑으로만 가능하다. 하나 됨은 오직 사랑으로만 가능하다. 하나 됨이 없이는 에클레시아가 아니다. 그러니 오직 사랑함으로 완전한 연합을 이루어 하나가 된 것만이 에클레시아다. 그래서 에클레시아는 오직 사랑으로만 가능하다.


3.10.1. 그러나 사랑한 요셉


요셉은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살 곳을 주었는데 바로가 명령한 대로 이집트 땅 중에서 가장 좋은 땅인 라암셋 땅을 그들에게 산업으로 주었고, 또 요셉이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자녀 수대로 양식을 주어 부양하였다. (Genesis 47:11-12 바른)


요셉의 형제들이 아버지가 죽은 것을 보고 말하였다.

"혹시 요셉이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한 모든 악을 반드시 우리에게 갚지나 않을까?" ,

그래서 요셉에게 말을 전하였다. 

"당신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시기를 '너희는 요셉에게 이같이 말하여라. 네 형제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더라도 이제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부탁드리오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시오." 

요셉은 그들이 자기에게 말할 때 울었다. 그의 형제들이 또 가서 요셉 앞에 엎드리고 말하였다.

"저희는 당신의 종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형님들은 저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선을 이루어 오늘처럼 많은 백성을 살리셨습니다. 이제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형님들과 형님들의 어린것들을 양육하겠습니다." 

요셉이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다.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식구들과 함께 이집트에 거주하며 백십 세를 살았다. 요셉이 에브라임의 자손 삼 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무릎 위에서 자랐다.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죽으나, 하나님께서 형님들을 반드시 돌보시고 형님들을 이 이집트 땅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켰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실 것이니, 너희는 여기서 내 뼈를 가지고 올라가거라."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니, 그들이 그 몸에 방부제 향료를 넣고, 이집트에서 그를 관에 넣었다.

(Genesis 50:15-26 바른)


요셉의 마지막에 대한 모세의 기록이다. 요셉의 인생은 형들로 인해 비참해졌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한 행위는 형제의 다툼이 아니라 범죄였다. 살인 미수에 인신매매였다. 친족살해는 형법에서도 가중처벌에 해당하는 중죄다. 그럼에도 요셉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했다. 그 형제들을 기근에서 구원하고 자신이 얻은 지위의 모든 것을 동원해 고센 땅 중에서도 가장 좋은 라암셋을 주었다. 자신이 죽은 후에도 그들이 살 수 있는 모든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래서 형제들은 요셉의 사후에도 몇백 년 동안 이집트에서 번영할 수 있었다.


요셉은 노예로 이집트에 팔린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미리 이집트에 보내어 자신의 가족의 구원을 준비하게 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형들을 용서했다. 그런데 과연 요셉이 이집트에 노예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셨을까? 아니면 그것은 형들이 동생 요셉을 인신매매한 죄의 결과였을까? 하나님은 인간의 죄의 행동도 뒤에 하나님께서 선하게 사용하시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하신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 지은 죄는 그대로 죄다.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의 선한 일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죄로 벌어진 일의 결과 이후에 일을 선한 방향으로 유도하신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다고 해서 인간의 죄까지 선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꼭 이집트에 종이 되어야 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악한 인간들의 대적에 의한 것이다. 다윗도 악한 사울에 의해 대적을 받아 고난을 받았다. 그리고 다니엘도 악한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그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고 악한 인간들에 의해 사자굴과 풀무불에 던져졌다. 그런 대적들의 일이 없어도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대적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을 고난에 빠트린다. 그리고 인자 즉 아담의 후손들은 언제나 세상의 공격아래 놓이게 되어 고난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한 번도 형제의 배신이나 가족의 배신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요셉의 심정을 알 수 없다. 요셉이 왜 총리가 된 이후에도 가족을 찾지 않았는지 대부분의 성경독자들은 고민조차 하지 않는다. 요셉은 총리가 된 이후의 7년의 풍년 기간이 지나도록 가족을 찾지 않았으며 흉년 기간에도 가족들이 굶주릴 것인데도 찾지 않았다. 형제들이 직접 자신을 찾아온 후에도 형제들에게는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에는 이런 요셉의 심경을 드러내는 본문이 아주 길게 묘사되어 있다. 물론 그 중심 내러티브는 이스라엘의 이집트 이주다. 그럼에도 그 서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난 요셉의 심경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보면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들은 기독교 서적과 설교의 관심은 대부분 요셉의 성공에 관한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욕심이 가득 찬 성공신학의 신봉자들에게는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된 것만 보이는가 보다. 

사실 성경의 서사적 주제는 구원이다. 이집트 이주를 통한 이스라엘의 기근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총리가 된 것은 단지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것도 요셉이 스스로 추구하여 얻은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이 주신 기적적인 이벤트를 통해 수동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결코 요셉은 세상적 성공이나 높은 권력을 추구한 일이 없다. 그런데 세상에 속하여 육신에 거하는 자들은 뱀의 새끼들이라 본능적으로 세상의 것을 사랑한다. 그러니 그들의 눈에는 세상의 탐욕 거리만 성경에 가득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혼적, 육적, 영적 구원을 주장한다. 그런데 이들의 구원이라는 단어에 성공이라는 대체어를 넣어도 그 뜻이 변하지 않는다. 육적, 혼적, 영적 성공이다. 사실 이들의 영적 성공은 사탄적 성공이라는 말로 대체될 수 있다. 이렇게 뻔한 데도 눈이 가려지니 알지 못한다. 자신들이 무엇을 신봉하는지, 자신들이 신봉하는 샤먼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한다. 왜 그들이 목사를 섬겨야 한다고 가르쳐 왔는지 알지 못한다. 목사를 섬겨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라 무속종교의 샤먼들로서 늘 자신들이 종교를 통해 사람들을 속여 세뇌하여 지배했던 습관 때문이다. 샤먼을 섬기던 자들도 자신들이 본능대로 해온 거짓 종교의 습관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자들의 신은 자기 배요, 그들은 발람의 길을 따라 유리하는 어두운 하늘의 별일뿐이다. 그들은 바다 거품과 같이 사라질 자들이요. 그렇게 허탄한 것을 좇는 자들이다. 그들은 거짓 목자요, 양을 잡아먹는 삯꾼들이다. 이러한 자들과 이러한 자들에게 붙어있는 마른 가시덤불과 같은 자들은 항상 하나님의 아들들을 대적한다. 아담의 후손들은 이러한 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으며 심지어 진정한 독생자가 찾아왔음에도 두 번째 아담이신 그분도 이러한 탐욕의 악귀들에게 죽임을 당하셨다. 이는 자신들의 복과 성공에 아담의 후손들과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 겉으로 표방하는 이유는 그럴 듯 하지만 속에 숨긴 진정한 이유는 자신들이 포도원을 차지하고 그 상속자인 아들도 죽여 그 약탈을 마무리 짓기 위함이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자들은 그들도 사랑한다. 자신들을 대적하고 죽이는 자들을 사랑한다. 세상은 짐승적 본능으로 자기 욕심을 따라 스스로 인식함이 없이 미친 광증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임을 안다. 그래서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알기에 긍휼히 여기고 사랑한다. 자신도 그러한 존재였기에 자신과 타자 모두를 불쌍히 여긴다. 긍휼히 여김으로 사랑한다.

예수님께서 뱀의 새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과 같이 사랑하자. 사랑하여 원수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을 하자. 사랑의 원자탄이 되어 사랑하자. 그렇게 사랑하면 세상이 우리가 그들과는 다른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알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임을 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게 된다. 그런 사랑은 오직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사랑의 출처로서 가능한 곳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음을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루터가 금지시킨 보여 주기식 세족식은 독사의 새끼들도 따라 할 수 있지만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은 따라 할 수 없다. 그들의 가면 속에 숨겨진 비루한 태생의 어둠으로는 절대사랑은 흉내 낼 수도 없다. 

사랑의 영원한 샘이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원히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자. 그래서 온 세상이 사랑으로 충만하도록 사랑하자. 우리의 모든 목숨을 거두어 가더라도 마지막 남은 그 하나의 목숨을 다하여 끝까지 사랑하자. 그리고 그 목숨도 내어놓아 열방을 휩쓸 부흥을 맞이하자.


“만약 내게 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그 천 개의 생명을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조선 선교사 루비 켄드릭(Kendrick, Ruby Rachel) 


루비는 1907년에 조선에 선교사로 와 단 9개월 만에 25세의 생애를 마쳤다. 열악한 조선에서 급성맹장염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몇 개월의 항해를 거쳐 도착한 조선에서 짧고 허무한 생의 죽음을 맞은 듯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고향 텍사스에 보낸 편지들과 그녀의 순교적 죽음은 고향 모교회의 웹윗청년회의 수련회 기간 중에 전해졌고 그곳에서 20명의 조선 선교사가 다시 일어나 조선을 섬기게 되었다. 마지막 투병 중에 루비가 고향에 보낸 편지에는 다음의 내용들이 들어있다.


“만일 내가 죽으면 텍사스 청년회원들에게 열 명씩, 스무 명씩, 오십 명씩 아침저녁으로 조선에 나오라고 전해주세요. 만약 내게 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의 있다면 나는 천 개의 생명을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겠습니다(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이곳은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들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 같아요.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십 년이 지나면 조선은 주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선교본부에서는 다들 철수하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자기들이 전도한 조선인들과 아직도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유난히도 집에 가고 싶어요….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바로 이것은 조선에 대한 제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선을 향한 열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빠, 엄마, 사랑합니다.”


진정 보석 같은 고백이었고 진정 보석 같은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눈에 이보다 더 어여쁜 사랑이 있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자들의 눈물과 피로 생명을 얻은 민족이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드려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열방을 사랑하여 한 손에는 구호물자를 들고 한 손에는 복음을 들고 열방으로 향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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