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과 가나안(천국) 입성
구약에서는 간음과 성적인 죄들에 대해 구체적인 항목들을 언급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우리(하나님)의 형상인 너희가 우리와의 사귐에서 가장 기본단위인 가정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정이 화목하고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 우리와 사귐이 있고 우리를 사랑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정에서 중심이 되는 부부가 서로를 배신한다면 이는 공동체의 파괴로 이어지고 우리와의 사귐에 있어서도 중대한 분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우리가 우리라고 표현할 때 우리(하나님) 자신들만을 나타낼 때도 있지만 너희 인간들과 함께 한 공동체로서의 우리도 사용한다. 너희가 간음함으로 상대를 배신하면 너희와 함께 한 우리의 공동체는 파괴된다. 결국 우리의 공동체는 미움과 질투와 분노로 휩싸이게 된다. 너희는 감히 신과 함께한 공동체를 파괴하는 죄를 짓게 되고 회개하지 않고 계속 간다면 결국은 심판을 당하게 된다. 미움으로 공동체를 물들이면 공동체 속에서 미움에 휩싸인 모두는 심판에 들어가게 된다.
너희도 너희 주변에 이런 간통의 문제로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만약 너의 배우자가 이런 배신을 한다면 너희 심정은 어떠할 것인가? 너의 어머니나 너의 딸, 또는 아버지나 아들, 남편이 배신한다면 너는 어찌할 것인가? 요즘 너희 세대는 이런 모든 것에 대한 기준이 파괴되고 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며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며 신뢰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과연 그것이 사랑인가? 그렇게 살고 싶은가? 그 비참함을 너희는 느끼지도 못하는 마비된 심장을 가졌는가?
그래서 구약은 간음에 대해 엄중히 다루고 살인한 자와 마찬가지로 돌로 쳐서 죽인다. 혼인서약에서 간통은 상대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의 범죄다. 상대는 죽음을 원하고 모든 세상이 파괴되고 자신이 당한 배신을 지우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어버리고 자신도 버리기 원한다. 그럼에도 너희는 이런 상처를 상대에게 줄 수 있는가? 반대로 네가 배신을 당한다면 너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단번에 살해를 당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을 것이다. 죽음 한 번으로 고통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은 이미 죽은 이후에 우리(하나님) 앞으로 와 내세의 삶을 살면 된다. 그런데 혼인상대자의 배신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다. 한번 또는 하루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죽음 같은 고통이 평생을 지배한다. 혹 그 상대와 이혼한다 하여도 그 상처를 지워지지 않고 다음 결혼에서 또 문제를 가져온다. 아들과 딸 그리고 부모와 형제가 받을 상처는 어찌할 것인가?
무엇보다 사랑하는 존재인 우리(하나님)의 마음은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가정 공동체 내의 모두와 사랑하기를 원한다. 사랑이란 전략적 목표가 아니다. 어떤 다른 것이 없다. 사랑은 강제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사랑할 뿐이다. 사랑을 원하는 것은 그냥 기본이요. 본능이요. 사랑이란 마땅한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속박이요, 의무라고 생각하는 자는 악인일 뿐이다.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은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등불이 빛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 밟히게 된다. 기름이 없어 쓸모없어지면 구석에 처박힌다. 그러므로 사랑은 기본이요, 근원적 욕구다. 그런데 우리의 사랑을 파괴하는 자의 죄와 그 벌은 어떠하겠는가? 한낱 인간들 간의 사랑을 파괴하는 것도 그 징벌이 두려운데 하물며 우리와 인간 간의 사랑을 파괴하는 자에게는 어떠한 징벌이 내려질 것인가?
사랑은 질투다. 사랑하면 질투의 화신이 된다. 폴리 아모리를 말하는 자들은 사랑을 모른다. 육체적 쾌락을 위해서는 폴리 아모리가 합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사랑한다면 상대를 독점하기 원한다. 상대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준다면 견딜 수 없다. 그것이 사랑이다. 결혼의 제도가 일부다처제가 되어도 마찬가지다. 또한 일처다부제에서도 동일하다. 정말 사랑한다면 그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 사랑한다면 질투가 일어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질투는 칠거지악이 아니다. 질투는 인간의 본성이며 사랑의 본성이다. 질투가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차라리 질투 없는 성매매를 하거나 성교를 즐기는 일을 할 수는 있어도 질투 없는 사랑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의 결혼제도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일부일처제다. 환경이나 문화적 성향으로 인해 다른 결혼의 제도들이 존재하고 타락한 이 땅의 고통으로 인해 결혼의 다양한 형태들이 존재해도 언제나 사랑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다. 사랑의 본질은 질투이기 때문이다. 질투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심지어 우리(하나님)도 질투한다. 우리는 질투하는 자다. 우리는 너희 인간이 우리보다 다른 존재를 더 사랑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질투하는 자다. 그렇다고 우리가 너희가 정상적인 관계 안에서 사랑하는 것을 질투하지는 않는다. 남편과 아내가 사랑하는 것과 연인들이 사랑하는 것을 질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상적인 범위를 넘어선 것을 질투한다. 너희가 죄를 사랑하는 것을 질투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상대로 인해 너희가 우리를 배반하는 것을 질투한다. 상대로 인해 범죄하고 상대와 함께 죄의 길로 가는 것을 미워한다.
그러므로 질투와 미움을 일으키는 간음이 어찌 사랑이겠는가? 간음은 사랑을 파괴하는 악이다.
너희는 계명을 생각할 때 지켜야 할 조항과 무거운 짐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계명을 주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계명을 주는 이유는 너희의 행복을 위해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 행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다. 음행에 관한 계명도 너희의 행복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삶이다. 서로 사랑함으로 서로 행복을 누리고 복된 삶을 사는 것이 내가 계명을 주는 의도다.
구약은 행위로 간음하지 않으면 되었다. 그런데 나의 나라에 들어오려면 그 정도로는 안된다.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으로도 간음함이다. 물론 산상수훈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을 말하였으나 이는 남녀 공통이다.
그런데 유혹과 그것을 이기는 순간의 과정을 보고 음욕을 품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나 여자가 매력적인 상대를 보고 성적 욕구가 생기는 것은 우리(하나님)가 만들어 놓은 기본적인 기능이다. 이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 즉 옆집의 남자를 보고 함께 자고 싶은 상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고 해서 그 여자가 이미 간음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본능이다. 그것을 떨쳐내고 순간 올바른 기준에서 생각하는 것은 간음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욕구를 느끼는 것일 뿐이다. 이를 모르고 정죄감에 젖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순간적인 유혹에서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상상을 하고 자위를 하거나 음란한 생각을 계속한다면 그것은 간음이다. 또는 유혹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계속 그 유혹에 지속적으로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도 간음이다. 참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그 죄를 끊어버릴 수 있다. 그런데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죄를 끊을 힘이 없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죄의 유혹에 굴복당한다.
그런데 선천적으로 정욕이 없는 자들이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거듭났다는 것은 아니다. 너희는 언제나 욕심에 이끌리며 들을 귀가 없으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들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선척적인 성욕 결여자들은 다른 곳에서 탐욕이 끊어지지 않는다. 거듭난 자들이 죄와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모든 정욕을 이긴다는 말이다. 결코 일부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죄와 정욕이 끊어짐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행위의 결과를 말함이다. 또한 행위 이전에 그 존재의 변화를 말함이다. 존재가 변함으로 변화된 행동이 나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여자를 거부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위에서 내가 말하는 새로운 계명의 간음하지 않음은 성적인 모든 죄에서 깨끗한 것을 뜻한다. 그 수준이 마음에서부터 그 모든 죄를 이김을 뜻한다. 음욕을 품지 않는다는 것은 남자가 여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도 있지만 이는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사실 여기서 내(예수)가 말하는 것은 모든 성적 범죄를 마음으로부터 저지르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연인이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성적인 범죄라고 하는 것은 근친상간과 동성애와 수간과 아동성착취와 성매매와 추잡한 미디어들과 심지어 생각에서 비롯되는 모든 성적인 더러움을 일컫는 것이다. 이는 다른 이의 가족을 상하게 하는 행위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추잡한 영상들도 타인의 아내와 아이를 돈에 팔린 창녀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하나님)는 네가 네 이웃의 아내나 어미나 딸을 탐하여 가정을 파괴하는 일을 미워한다. 또한 우리는 여인들이 타인의 남자들을 탐하는 것을 미워한다. 이러한 행위는 가정의 파괴로 이어지고 미움과 질시가 가득한 지옥을 퍼트린다. 간음은 그래서 심각한 죄들에 주어지는 처벌과 같이 돌로 쳐서 죽이는 죄다.
이것이 현대의 기준과 다르다 하여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진리는 인간들의 것과 같이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간음이나 음욕에 대해 정죄한다고 하여 우리(하나님)가 성욕 자체를 정죄한다고 생각하면 그것 또한 심각한 해석 오류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관계 안에서의 사랑을 기뻐한다. 심지어 합법적인 관계 안에서의 모든 결합의 형태를 사랑한다. 말과 행위의 결합과 마찬가지로 육체가 하나 되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격찬하다. 또한 그로 인해 태어나는 사랑스러운 너희의 자녀들도 사랑한다. 이를 막는 그 어떤 법도 없다. 합법적인 결혼언약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천상의 사랑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너희가 구약의 아가서를 읽어보았다면 결코 우리가 너희에게 신부나 수녀가 되라고 강요하는 자들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욕 자체를 추하게 여기는 고대 그리스의 어리석은 전통을 따라 성직을 수행하려면 성욕을 버려야 한다는 카톨릭의 어리석음은 우리가 인간에게 준 가정 안에서의 사랑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악마적인 것이다. 신부 제도와 수녀 제도를 만든 자들과 그것을 수행하는 자들은 성경도 우리(하나님)도 모르는 자들로 우리의 나라와는 상관도 없는 규율을 지키는 자들이다.
Matthew 19:1-12 개정
1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2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3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4절) 못하였느냐(*4절)
6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10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11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2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내가 인간으로 갔던 시대에 남자에 대해서만 말한 것은 여자들이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여성은 성적인 범죄에 수동적으로 노출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유목민이나 유대의 반농반목의 경우 이민족들의 약탈문화가 성행했고 그 약탈의 과정에서 성적 범죄의 대상은 여자였다.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팔려 가지만 여자들은 남편과 아들이 죽고 끌려가서 다른 남자의 노리개로 살아야 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여자의 성적 범죄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다. 구약에서도 강간을 당한 경우에 대한 언급들이 대부분이다. 적극적으로 간음을 행한 경우가 언급되는 것도 일부분인데 여기서도 결국 스스로 원한 것인지 아니면 강간을 당한 것인지가 죄의 유무를 가리는 것이 핵심이다. 특히 신약에서는 언급된 부분들은 거의 여자가 남편에게서 버림을 당하는 경우들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성적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은 거의 남성으로 언급된다. 이는 유대문화권에서 여자들의 위치가 낮으며 또한 적극적 성적 범죄의 주체자가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수동적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남자들이 악함으로 늙어서 매력이 없어진 자신의 아내를 부양하기를 싫어해서 버리는 부분에 대한 것은 그 시대의 악습 중 하나였다. 지금도 기독교의 가장 큰 이단 종파인 이슬람에서는 늙은 아내들을 내버린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늙은 아내를 죽여서 암매장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 이유는 젊은 새 아내를 맞아 쾌락을 누리기 위함이다. 이 악습은 이미 내가 인간으로 갔던 시대에도 성행하고 있었다. 중동의 사막이나 스텝의 유목사회에서 버려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유목사회에서 여자가 그것도 늙어서 버려진 여자가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지 않다. 혹 생존할 수는 있어도 굶는 일이 다반사가 된다. 특히 가축도 없이 홀로 버려진 여자의 운명은 뻔하다.
아브라함에게서 버려졌던 하갈의 경우도 죽음뿐이었다. 아브라함은 빵과 물 한 가죽부대를 주고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보냈다. 물론 내보낸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 하갈과 이스마엘의 길은 죽음뿐이었다. 물이 떨어지자 하갈은 화살이 날아갈 수 있는 거리정도에서 앉아 눈물을 흘렸다. 아들의 죽음을 차마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없었다.
멀어져 가는 하갈의 등을 보며 목이 마른 아이는 눈물을 흘렸다. 따라가고 싶었지만 이미 탈수가 심해 일어날 수 없었다. 울음이 솟았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몸에서 빠져나올 수분이 없었다. 우는 소리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목이 말라 갈라져서 나오는 탁하고 헉헉대는 숨만이 광야의 먼지를 일으킬 뿐이었다. 그 먼지가 다시 숨으로 들어오니 폐를 채우는 먼지로 숨도 가빠왔다.
광야나 스텝의 삶은 참으로 혹독하다. 만약 그때에 우리가 어미를 보며 우는 이스마엘의 소리를 듣고 하갈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탈수로 죽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었다. 그의 울음을 들었고 아브라함이 믿는 우리(하나님)를 향한 그의 구원의 부름을 들었다.
우리는 결코 아내 버림을 원하지 않는다. 특히 광야에서 아내와 아이를 버리는 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다.
그러므로 늙은 아내를 버리는 일은 살인행위나 마찬가지다.
원래는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 현대에는 산업의 구조가 재편되어 아내가 병약한 남편을 버리는 경우도 생긴다. 물론 이도 범죄다. 아내나 남편이 간통을 저지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대를 버릴 수 없다. 그런데 원래는 그것도 없었다. 태초에는 악이 없었으며 간통도 없었으니 버림도 없었다. 또 범죄 이후라도 간음을 한 배우자는 회개하고 또 상대는 그를 용서하고 서로 품어야 한다. 그런데 모세의 법에는 인간의 악함을 고려했다. 구약의 율법준수는 거듭난 심령들에게 요구된 것이 아니었다. 거듭난 심령은 신약의 오순절 이후에나 존재했다. 그러므로 구약에는 그런 기준의 법을 요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음행을 이유로 한 이혼은 허락을 했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에 대한 언급은 있어도 아내가 남편을 버리는 것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을 현대의 너희는 알고 있는가? 이는 유목 사회의 특징으로 버림을 당하는 것은 언제나 약자인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유목 사회의 특수성으로 일부다처제가 허락되었기 때문에 남자가 간음 때문에 버림을 당할 일은 없었다. 남자는 원하는 여자가 있으면 새로운 아내로 맞아들이면 되었기에 음행의 죄를 저지를 일이 거의 없었다. 물론 남의 아내와 간통하면 이혼을 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돌로 쳐서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정상적인 결혼 관계 안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예수)가 아내 버림에 대해 말한 연유는 이런 문화적인 배경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를 모르고 이혼 자체를 정죄하여 가정 폭력을 당하면서도 이혼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또한 추악한 범죄자나 마약범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욕정을 위해 현재의 배우자가 아닌 다른 배우자를 얻기 위해 하는 모든 이혼은 불법이다. 사랑이 식었다고 해서 상대를 버리는 것은 남자나 여자나 모두 범죄다. 결국 다른 간음의 상대를 찾아가는 것으로 가정을 파괴하고 자녀의 인생을 파괴하는 파렴치한 짓이다. 이렇게 아내를 버리거나 남편을 버리는 것은 상대에게 간음의 가능성을 열어놓게 된다. 이는 내가 간음하는 것도 죄이지만 상대로 간음하게 하는 것도 엄밀히 말해 죄라는 것이다.
앞의 살인에 관한 계명에서 내가 상대를 미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대도 나를 미워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의무가 지워진 것을 기억하는가?
그런데 간음에도 동일하게 상대에 대한 의무가 지워진다. 그러므로 상대를 버리는 것은 상대가 간음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며 상대가 죄를 범하도록 덫을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죄나 폭력이나 심각하게 반복되는 외도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상대를 버리는 것은 인정할 수 없는 불법이다.
여기서 내가 모든 이혼을 금하고 모든 재혼을 간음이라 정죄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런데 너희가 위의 내용과 같이 상대로 버려지게 하여 간음하게 함도 범죄임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거듭난 자들은 사랑으로 모든 정욕을 이기고 사랑으로 모든 상대의 부족함을 이기고 사랑하여 승리한다. 그러나 상대의 악으로 인해 고통하여야 한다면 나는 너희가 그 고통에서 놓이기를 원한다. 결코 결혼만 합법이고 이혼은 불법이라는 원칙에 얽매이지 않기를 원한다. 결혼의 제도가 결코 파기될 수 없다는 기준은 죄가 없을 당시의 기준이다. 그것을 죄가 가득 찬 세상에서 요구한다면 상대방의 죄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될 모든 이들을 지옥으로 내모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들은 성경을 해석함에서도 성경의 진리를 적용함에서도 신중하여 사랑 안에서 행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간음과 음욕을 버리는 것이든지 타인의 간음과 음욕을 막는 것이든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계명이다. 누구나 사랑이 식어지고 누구나 새로운 상대를 원한다. 그런데 그로 인해 주어지는 성적인 모든 범죄들을 인간이 이길 수 있는가? 바리새인고 서기관과 같이 행위를 통제할 수는 있지만 진정으로 마음의 모든 곳에서 음욕을 막을 수 있는가? 너희가 너희 자신을 돌아보면 알 수 있다. 이것은 불가능의 계명이며 불가능의 항복조건이다. 그래서 이 계명에 관해 들은 유대인들은 차라리 장가가지 않는 것이 낫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성욕은 인간에게 준 가장 기본적인 축복에 해당하는 것이다. 가정을 이루고 후대를 생산하며 사랑을 통해 깊은 유대를 이루는 것은 이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행복 중 하나다. 그러나 이 행복조차도 지킬 수 없는 것이 나약한 인간의 죄성이다. 만약 아내를 갈아치우지 못하기에 결혼을 거부하고 수많은 여자들과 방종의 삶을 산다면 그것은 더 큰 문제다. 차라리 성욕이 태로부터 없었던 자들이라면 가능하겠으나 그것이 아니면 결혼하지 않으면서 합법적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죽하면 당시 하늘나라에 항복하러 온 유대인들이 차라리 장가가지 않는 것이 낫다고 했겠는가? 성경에 우리가 제시한 기준대로 거듭난 자가 아니라면 이 법을 지킬 수 있는 자는 없다.
너희가 느끼는 동일한 절망을 산상수훈 시대의 유대인들도 느꼈다. 그러니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