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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Sep 21. 2024

01.3.2.3.10. 기업을 취한 아들 여호수아 4

여호수아의 연대기

01.3.2.3.10.5.2.2.3. 세상에 무릎 꿇은 배교자들의 교회

그런데 생각하여 보라. 과연 세상 권력에게 무릎을 꿇은 교회가 참 교회였겠는가? 아니다. 참 믿는 자들은 결코 세상의 안전이나 부귀와 영화를 위해 하나님 외의 다른 것들과 타협하지 않는다. 참 믿는 자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무릎 꿇는다. 다른 어떤 대상과도 타협할 수 없다. 성령의 인도 외에 교회를 지배할 수 있는 다른 어떤 것도 없다. 교회 위의 권력은 오직 머리인 나 인간의 대표 인간 예수며 그 위는 우리(여호와)다. 콘스탄틴의 시대와 그 이전과 그 이후에 국가의 권력과 야합한 모든 기독교는 거짓교회다. 참교회는 다른 어떤 것에 야합하거나 무릎 꿇을 수 없다.

세상에 무릎 꿇은 교회는 교회라는 표만 가지고 있지 실질적으로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었다. 부활절을 태양신의 부활일인 춘분으로 정하고 태양신의 탄신일을 크리스마스로 정한 교회가 교회이겠는가? 모든 자들이 신앙이 있던지 없든지 교회에 소속시키기 위해 세례문답을 만들고 형식적으로 그것에 대답하기만 하면 교회에 편입시켜 구원을 얻었다고 승인하는 교회가 교회이겠는가? 현대의 개신교도 이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그 기원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하고 이런 흉악한 짓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짓을 하는 목적은 단 하나다. 모든 자들을 교회에 소속시키고 교회를 통해 모든 백성을 현혹시켜 자신의 목적에 맞게 조종하는 것이다. 현대에도 교회에 있는 리더들 중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여전히 이렇게 교회를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그러한 모습을 가졌다는 것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 자신들이 그러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할 수도 없다. 그러나 세상적 계급(Hierarchy) 제도를 도입한 교회는 필연적으로 국가교회의 병폐에 빠져들게 되어있다.

이런 곳에 부흥이 부어지더라도 그 구조상 얼마 지나지 않아 필연적으로 화석화될 수밖에 없다. 물론 세상 자체가 문제가 있어 세상 속에 부흥이 부어지면 결국은 화석화된다. 그러나 구조자체가 잘못된 곳에 부어지면 부흥의 지속기간은 더욱 짧아지고 그 영향력도 최소로 축소되게 된다. 회중교회는 당대에 가장 강력한 파급효과를 가지고 전 세계를 휩쓰는 부흥을 경험했다. 그들은 다른 교회들과는 다르게 인간적인 체계와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 기록들이 미비하고 다른 교단의 교회사가들에 의해 저평가되었지만 교회사를 연구하는 진실한 학자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와 같은 강력한 부흥은 근대에 오직 회중교회를 통해 온 부흥 밖에 없다. 애꾸눈 흑인 목사 사무엘로부터 시작하여 부어진 아주사 부흥도 강력했지만 회중교회의 죠지 폭스로부터 시작된 부흥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작은 규모였다. 다시 강조하지만 내가 언급하는 것은 단체나 조직을 언급함이 아니다. 내가 언급하는 회중교회는 현대의 회중교회를 말함이 아니다. 단지 부흥이 부어졌던 그 당대의 그 시점을 기준으로 말할 뿐이다. 그렇게 부흥이 강력했던 원인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은 회중교회가 세상적 제도와 구습을 버린 교회였기 때문이다. 원래 회중교회에는 목회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형제요 오직 스승은 나 예수 외에는 없었다. 그들을 이끄는 자는 성령이며 성령 외에 그들의 인도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와 같았으며 최소한의 우리(여호와 하나님)가 세운 전달자들 외에는 없었다. 이들도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에만 전달자로 섰으며 정해진 전달자들은 없었다. 메신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사제적 조직의 하수인인, 목사나, 신부나, 감독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국가교회의 체계 안에서 세워진 교회와 그 교회가 가진 신학이나 전통과 교회라는 모습은 사실 우리의 의도와는 다른 모습이다. 교회가 개혁되어 개신교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 모습은 여전히 국가교회라는 조직의 모습을 굳건히 하고 있었으며 그 속의 내용물도 여전히 카톨릭적 세속 권력에 의해 악한 자들이 결정한 신학적 체계에 기반해 있었다. 대부분의 신학적 핵심은 사악한 정치질에 의해 난도질된 공회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또한 중세 카톨릭적 거짓신앙이 천년 이상을 지배했던 시절에 체계화되었다. 그런 내용물들을 개신교회도 교리라 하여 성경의 권위보다 실질적으로 더 위에 두고 성경을 신학의 권위아래 해석한다. 또한 제도적으로도 카톨릭의 교황 권력 체제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의 그림자인 목사나 감독들의 계급제도에 의해 효율적이고 익숙하다는 이유로 교회는 다스려지고 있다. 이러한 체계에서는 우리의 감동이 누군가에게 부어지더라도 언제든지 차단이 가능하다. 그 감동이 부어진 자를 습관대로 이단심판에 넘겨 억울한 누명을 씌워 이단으로 만들던지 아니면 조직의 권위로 눌러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할 수 있다.


01.3.2.3.10.5.2.2.4. 황제에서 교황으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교회의 수장이 되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교회를 이끌어 갔다. 그가 이렇게 한 유일한 목적은 기독교를 제국의 통치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이었다. 어머니 헬레나를 통해 기독교 신앙에 대해 접했으나 그는 거듭난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그는 교회를 불러 모았고 교회의 일치를 요구했다. 또한 교리적 분쟁이 교회에 있을 때에는 제국 통치에 방해가 되기에 교의에 대한 연구에 충분한 시간도 주지 않은 상황에서 세계 공회를 통해 문제를 졸속처리했다. 황제의 목적은 제국교회가 제국통치를 위해 단일화되기 원했다. 통치의 수단인 교회가 분열한다면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교리에 대해 관심도 없었으며 신앙적 관심도 없었다. 오직 교회를 잘 이용하여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까지 자신에게 복종하도록 만들기 원할 뿐이었다. 콘스탄틴의 관심은 자신의 권력뿐이었다. 교회도 권력추구의 수단 중 하나였다. 예를 들어 니케아 공회에서 교리적 진리로 결정된 나(예수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해서도 처음에는 아타나시우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반대 입장(그리스도는 피조물)을 냈던 아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그런데 황제가 정치적 입장을 달리함에 따라 이는 번복되기도 했다. 아리우스의 교리가 진리로 선언되고 아타나시우스가 추방되는 일도 있었다. 물론 아타나시우스와 입장을 같이 했던 교회와 감독들도 모두 이단으로 정죄되고 감독들은 감독의 직에서 면직되었다. 또한 아타나시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로마에서 강제로 추방되었다. 황제의 결정은 여러 번 번복되어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는 번갈아가며 이단으로 정죄되어 추방을 당해야 했다. 기독교나 기독교의 진리도 한낱 황제의 권력을 위한 편리한 수단일 뿐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추악하게 결정된 세계공회의 교리를 카톨릭과 개신교가 신적 권위를 부여하듯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는 카톨릭의 악습이며 그 영향력 아래에서 독립한 개신교도 그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은 교리가 아니며 황제의 욕심을 따라 졸속으로 처리된 졸작이다. 이것을 도그마화 한 것은 사탄의 결정이라 할 수 있다.

이 말은 카톨릭과 개신교의 교리가 모두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그 안에 문제가 일부 있으며 또한 조직신학적 체계가 그리스나 로마의 어리석은 신론들의 뼈대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교리의 목적이 반대파를 숙청하여 죽이는 수단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이단을 정죄하는데 급하며 아주 잔인한 태도를 취한다. 이는 황제가 자신의 통치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 교회요, 교회 안에서 권력 다툼을 하던 자들이 상대를 무너트리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 이단 정죄였다. 처음에는 황제들에 의해 공회가 개최되고 그 공회를 통해 이단 정죄가 일어났다. 위에서도 계속 말한 대로 공회의 목적은 진리의 탐구가 아니었다. 단지 정치질이었으며 상대를 정죄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반대파들을 숙청하여 제거하여 교회가 단일화하여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면 되는 것이었다. 이 전통이 커톨릭으로 이어지고 중세에는 이단정죄만을 목적으로 하는 도미니크 회의 이단감별사들이 있었다. 이들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단으로 정죄되고 마녀사냥을 당했다. 이단으로 정죄된 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판사들이나 이단 감별사들이 차지했으며 후에는 아예 약탈을 목적으로 이단심판을 자행했다. 마녀 사냥도 이런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러니 이런 자들이 만든 교리와 전통을 점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바로 콘스탄티의 교회 사유화와 종교권력 남용에서 출발했다.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를 가장한 횡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황제는 자신을 주인으로 인정지 않는 성도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이러한 로마 카톨릭의 황제적 공포정치는 후대에도 이어져 중세 동안 600만 명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황제의 이런 권세에 대항하여 교황이 그 권세를 높여 일어났다. 이름도 교회의 황제인 교황(라틴어 폰티펙스 막시무스, Pontifex Maximus)이었다. 원래는 로마의 황제가 로마 내의 모든 종교의 총대주교 또는 최고 사제라는 호칭이었으나 이 호칭을 교황이 자신을 칭하는 용어로 하였다. 사실 자신을 황제로 칭한 것이다. 교황은 종교 권력과 세속적 권력을 동시에 가지는 막강한 기독교 종교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때로는 로마의 황제를 폐위시키기도 하는 강력한 권세를 가지기도 했다. 타락한 종교의 이단교주가 누가 되건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것이 세상의 황제이건 세상과 결탁한 교회의 교황이건 그것이 무엇이 중요한가? 너희는 교황과 황제의 싸움에서 교황이 이기면 교회가 이기는 것이라 생각하는가? 세상과 결탁한 붉은 짐승을 탄 여자(교회)는 지옥의 종일뿐이다. 서로마가 멸망하고 동로마가 쇠퇴의 길을 걷다가 멸망하고 그 이후 로마 카톨릭이 지배하던 유럽에서는 황제의 자리를 교황이 대신하기도 했다. 로마가 무너지고 지역지역의 소국들이 봉건적 형태의 군소난립을 겪고 있을 때는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교황이 세계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되었다. 종교의 권력으로 전 유럽을 장악하고 다스리는 공포정치를 했다.

이러한 길은 교회가 사적 권력의 도구화가 되는 지옥의 길이다. 교회 안에서 정화의 움직임도 있었으나 이 모든 움직임을 교황이라는 사탄의 대리자가 막아버렸다. 다시 온전한 신앙으로 돌아와 참으로 거듭난 자들도 나왔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온 자들도 있었고 최소한 출애굽을 거쳐 시내산에서 우리(하나님)와 언약을 맺고 광야의 길을 가는 자들이었다. 이런 참교회를 거짓신앙의 정점에 있던 교황은 무참히 살해했다. 물에 빠트려 익사시키기도 하고 불에 태워 화형을 시키기도 했으며 목을 잘라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죽어간 자들의 수가 학자들이 집계한 대로 600만 명이 넘는다.


01.3.2.3.10.5.2.2.5. 국가교회의 신학적 기반과 어거스틴
교황에게 이런 적그리스도적 권세를 허용한 신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교황이 신의 대리자로 지상 교회의 왕임을 강조했다. 그 신학적 기반을 예비하고 그 길을 개척하고 결국 교황의 사탄적 왕좌를 공교히 했다. 교황이 베드로의 계승자며 이 지상 교회의 주인임을 승인한 자들이 있다. 소위 교부라 알려진 자들 중에 서로마제국에 있던 라틴 교부들과 그 후대 신학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서로마 제국이 기독교의 주도권을 잡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 서로마제국 수도의 로마 주교가 최고의 권위를 갖기 원했다. 또한 이를 반대하는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의 교회의 주도권을 무너트리려 노력했다.

국가 교회의 신학적 기반을 제공한 교부라는 자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히포의 어거스틴이다. 그는 북아프리카의 교회 정화분파인 도나티안들을 무참히 황제의 권력을 동원하여 제압한 인물이다. 아프리카 북부 정화주의자들은 참 그리스도인만이 교회의 성도가 되며 또한 참으로 그리스인이 된 자만이 세례를 받을 수 있음을 주장했다. 거듭난 심령을 가지지 못하여 세상 황제의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한 자들은 핍박이 끝난 후 교회로 돌아오기를 원했지만 이들은 그들을 교회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배교에서 돌이켜 하나님 앞에 거듭난 믿음을 가진 것이 증명되지 않으면 교회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또 배교한 감독과 주교들을 다시 교회의 목회자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는 정상적인 주장으로 온전한 신앙이 없는 자들이 교회에서 설교하고 신앙을 교육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통치 수단이던 로마 카톨릭은 오직 자신의 통치 수단이 망가지지 않기를 바랬을 뿐이다. 그들이 신앙이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자신의 권력에 충성하는 자면 누구나 환영이었다. 마치 대한민국의 초기에 미군들이 자신들의 기반이 약했던 해방 이후의 정국에서 남한의 주류를 이루던 사회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 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한 것과 같다.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움직여 주기만 한다면 민족의 반역자들도 거두어 유용하게 썼던 것이다. 로마의 황제들도 동일했다. 사제와 주교의 신앙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황제의 권력을 위해 충성을 다하면 되는 것이었다. 한번 배교하여 성도들의 지지를 잃은 사제들은 친일파들이 그러했듯 황제의 권력이 절실했다. 그래서 황제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복종하고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자신의 사냥개들인 배교한 사제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들이 교회 내에서 권력을 형성하고 교회를 장악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심지어 군대를 동원하여 반대파들을 척결할 수 있는 힘을 실어주었다. 여기에 황제의 권력에 아첨하며 앞장섰던 인물이 어거스틴이었다. 이러한 행위를 한 어거스틴은 교회 안에서 치리를 위하여 세상 권력을 동원한 물리적 탄압을 사용해야 함을 그의 저서 하나님의 도성에서 피력했다. 그의 이러한 입장이 교황이나 황제가 교회에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 어거스티뿐 아니라 분별력 없는 많은 신학자들이 이런 어리석은 주장들을 했다.

결국 이런 어리석음이 도그마화 하여 수많은 참신앙인들을 죽이는 도구가 되었다. 그 결과로 중세에 6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로마 카톨릭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렇게 계급적 권력구조를 통해 통제되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들에 의해 움직이는 세상의 조직 중 하나일 뿐이다. 그들이 교회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이런 지배구조를 가진 조직에서는 참 신앙이 뿌리내릴 수 없다.

# 01.3.2.3.10.6. 참 통치와 거짓 통치

참 하늘, 참 가나안 V 거짓 하늘, 거짓 가나안

참 교회는 풀뿌리와 같이 번져나가며 들불과 같이 퍼져나간다. 그 생명의 씨앗이 강물을 따라 흘러 또 새로운 곳에 생명의 싹을 틔운다. 그러니 이들을 통제하거나 하나의 군집으로 묶어 자신의 세력화할 어떤 힘도 존재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풀이며 들불이다. 오직 하늘의 불인 성령만이 이들을 이끌며 이들을 통치한다. 세상의 어떤 이름도 이곳의 주인이 될 수 없다.

01.3.2.3.10.6.1. 구약의 국가와 교회

성경을 자세히 연구한 자들이라면 내가 왕을 세움을 기뻐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왕을 세우지 않기 원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왕국을 세우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있다. 우리(하나님)가 세우는 나라는 오직 우리의 통치만이 있는 곳이다. 우리가 원한 것은 우리가 세운 선지자나 사사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직접 사귀고 그들을 사랑으로 우리가 직접 다스리는 것이었다.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 외에는 어떤 존재도 너희 인간들에게 사랑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무엇보다 우리는 사랑하는 존재며 그래서 사랑한다. 끝없는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하며 너희의 존재 자체를 용납하여 사랑한다. 그런데 너희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세상에는 우리와 같은 존재가 없을 것이다. 세상의 왕들이 왕국을 세우고 왕위를 세습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땅과 피조물과 그것의 지배자인 인간들, 즉 만물을 착취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그런 왕들을 위해 너희가 노예가 되고 그 왕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일시적으로 너희가 소유하나 너희의 소유가 아닌 것을 위해 일해야 하는 비참함을 견딜 것인가? 우리는 왕들이 너희를 종으로 삼고 너희를 착취할 것을 알기에 왕을 세우기를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나 너희 이스라엘은 세상이 추구하는 바를 좇았고 그 결과 왕을 구했다.

물론 다윗과 같은 왕도 나왔지만 너희가 성경을 읽어 역사를 이미 알고 있듯이 타락한 왕들이 권력을 가지고 내 백성들을 떡 먹듯 먹으며 양을 잡아먹는 늑대와 같은 행동을 했다. 그래서 나는 왕과 왕국을 기뻐하지 않았다. 사무엘 선지자의 시대와 사사들의 시대를 기뻐한 이유는 그들은 모두 우리의 사랑과 공평을 이스라엘에 온전히 전달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자신의 탐욕을 위해 스스로 나선 자들이 아니었다. 우리가 사랑하여 세운 우리의 통로였다. 그들은 스스로의 권력과 명예와 재산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오직 우리의 뜻 즉 사랑과 공평과 정의를 전달하는 자들이다. 사사들의 시대나 선지자들의 시대에 문제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들의 문제였지 그 제도 자체의 문제는 아니었다. 사사기에 '그들이 왕이 없으므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사사기에 '왕이 없었다'는 것은 인간 왕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참 왕인 우리를 그들이 떠남으로 이스라엘의 참 왕인 우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자들이 성경의 문맥과 우리의 뜻과는 상관이 없이 사사기의 '왕이 없으므로'라는 말을 곡해하여 잘못된 해석을 하는 경우들이 많다.

구약의 왕정은 나 예수의 나라의 예표일 뿐이다 또한 그곳에 인간 왕이 있던 것은 완전한 형태가 아니다. 사실 왕을 이스라엘이 구하지 않았다면 왕은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백성들이 왕을 구함으로 어쩔 수 없이 왕을 주었고 그로 인해 선지자와 제사장과 사사와 왕이 기름부음 받은 자(그리스도)들이 되어 참 그리스도인 나 예수를 예표하게 되었다. 여기서 왕은 없었어도 될 일이었다. 그러면 너희는 질문할 것이다. 다윗과 같은 왕도 필요가 없었다는 말인가요? 사실 다윗은 좋은 선지자나 사사가 될 수도 있었던 인물이다. 이스라엘이 타락하여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참 왕인 나를 버리고 인간 왕을 구하지만 않았어도 아마 다윗은 더 쉽게 나와 동행했을 수도 있다. 사울왕과 같이 타락한 왕이 없었다면 다윗의 오랜 고난은 없었을 것이다. 사울 왕은 자신이 왕국의 모든 것을 소유함으로 내가 사무엘을 통해 이미 폐했음에도 여전히 왕국을 내어놓고 왕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 왕이 될 선한 다윗을 죽이려고만 했다. 사울이 만약 선지자나 사사였으면 폐하기 훨씬 쉬웠을 것이다. 내가 버리는 순간 권력이나 군대나 신하들이 없었던 선지자나 사사는 그냥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왕은 다르다. 자신의 인간적 지배수단으로 나와 내 선지자를 대적하며 내가 세운 내일의 왕 다윗조차도 대적한다.

다윗에 대한 질문에 계속 답을 한다면 다음이 질문이 결론을 도출할 것이다.

다윗의 왕위를 세습받은 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타락하여 자신의 왕국이 분열되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아버지 솔로몬의 과중한 착취보다 더한 착취를 함으로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국이 둘로 쪼개어졌다. 그 후대의 왕들의 타락은 수도 없이 많다. 이런데도 다윗의 왕좌와 그 왕좌를 이어받은 자들의 왕국이 의롭다고 말하겠는가?

내가 세운 선지자나 사사를 통하거나 신약과 같이 내가 직접 성령을 통하여 모든 성도들을 통치한다면 인간 왕이 개입하여 거짓통치를 지속할 수도 없다. 사사나 선지자는 내가 폐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나의 계시를 그들에게 나타내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인간 왕은 그 자체가 이미 권력이며 힘이므로 백성들이 그 아래 지배를 받음으로 나의 통치를 거스르는 방해물이 된다. 타락한 인간 왕은 언제나 우리와 백성의 사랑을 대적하고 우리가 백성을 사랑하여 보살피는 데에 방해가 된다.

01.3.2.3.10.6.2. 거짓 통치와 거짓 신학

왕정이나 세상의 정치 제도는 타락한 왕이나 권력자에 의해 언제든지 우리의 의도가 차단되고 탈취당할 수 있다.

그것을 본받아 만든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의 국가교회 형태는 사탄적인 것이다.

교회의 머리는 나 예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타락한 인간이 자신을 위해 교회를 사유화하고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세습한다. 성도들을 노예로 만들고 사익을 위해 이용한다.

구약의 일시적이고 타락한 인간의 욕심에 의해 야기된 구약 왕국을 마치 이상적 교회의 형태처럼 여겨 로마 국가교회를 만들고 교황의 단일독제 체제로 만든 것은 타락한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그것을 천년이상 유지한 카톨릭이나 그것을 이어받은 개신교회는 전통과 습관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어리석음에 빠져들었다. 심지어 새로운 교단을 형성했던 감리교회나 침례교회도 이런 함정을 간파하지 못하고 교황제도의 복사본인 국가교회 체제의 독제적 계급구조는 현대 교회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어거스틴을 비롯한 소위 교회의 아비라는 칭호를 가진 교부들이 대부분 이런 간악한 제도의 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교회의 아버지가 우리(하나님) 외에도 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지만 저들은 교부들과 교황 그리고 사제들에게 아비의 호칭을 주고 있다. 또한 그 카톨릭의 조직체계를 그대로 이어받은 개신교회도 개혁했다고 했지만 여전히 개혁되지 못한 수많은 카톨릭의 잔재들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 함정을 간파하고 그 함정을 벗어나 이상적인 교회들을 세운자들은 로마 카톨릭에 의해 핍박을 받았던 소수들과 영국에서 시작된 회중교회 밖에 없다. 그 외의 모든 자들은 이스라엘이 이방인들과 같이 왕을 구했을 때 참 왕인 우리(하나님)를 버렸듯이 우리를 버리고 세상의 조직을 교회에 세웠다. 바로 총회와 교단의 조직들이다. 로마카톨릭 이후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러한 전례를 의심도 없이 계속 사용해 왔다. 그러므로 현재 남아있는 교회의 제도나 전통, 그리고 교회의 교리도 모두 성경과 역사적 검증을 통해 다시 재조명되고 개혁되어야 한다.


01.3.2.3.10.7. 광야에 속한 거짓 통치

너희 대부분은 광야의 백성이며 불평과 원망과 불신앙이 삶을 잠식하는 광야에서 엎드러질 파리한 영혼들이다. 그 이유는 너희 자신의 문제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위와 같은 거짓통치의 체제가 교회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자신도 모르게 타락할 수밖에 없는 구조속에서 개혁을 시도하고 신앙의 정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독제적 권력을 조직화한 제도 안에서는 결코 인간의 타락한 욕심을 벗어날 길이 없다. 거짓신앙 안에서는 결코 온전한 안식에 들어갈 수가 없다. 신앙 자체가 거짓인데 어떻게 온전한 믿음에 이르러 성령이 완전히 통치하는 가나안에 들어가겠는가? 온전히 우리의 통치를 받고 우리의 보호 안에 있어야만 온전히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쉼이 있는 안식이다. 그 안식은 결코 절대신앙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거짓신앙에 의해 통치되는 곳에서는 가나안으로의 진입은 없다. 참 개혁이란 교회가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에 들어가고 자신의 죄악을 이기고 승리하는 이기고 이기고 이기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거짓신앙으로 인해 광야를 헤매거나 아직도 애굽(이집트)에 있는 자들은 참된 개혁에 절대 이를 수 없다.

01.3.2.3.10.8. 참 개혁과 참 교회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 그 뿌리부터 초대교회로 그리고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점령하던 시기의 참된 원형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참된 생명이 뿌리내리고 그 생명의 풀뿌리가 전파될 수 있다. 다시 온전케 하는 성령의 불길로만 타올라야 한다. 다른 불과 다른 권능은 용납할 수 없다. 그래야만 들불과 같이 번지는 강력함이 교회 안에 보존될 수 있다. 성령을 통한 들불은 각자의 마음을 태우고 온 들을 태우고 열방을 태울 것이다. 오직 나의 불이 임한 자만이 교회를 이끌어야 한다. 그 성령이 임한 자가 하루를 지내고 다음에는 또 다른 자에게 성령의 불이 임한 다면 그 자가 교회를 이끌어야 한다. 설교나 예배나 모든 것이 그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구원받아 나와 동행하며 친밀히 교제하는 교회의 성도들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 모두의 감동과 모두의 음성이 하나로 모아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이며 성령은 하나 된 우리의 음성을 전함으로 다른 것은 틈탈 수 없다. 이러한 교회의 모형이 궁금하다면 초대교회나 사사기 이전의 구약 교회를 살펴보면 될 것이다. 최근의 것으로는 회중교회가 있으며 또한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진 에드워드 목사가 추구하고 있는 교회의 형태들을 찾아보면 될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들이 완전하다거나 과거의 성령의 불을 현재에도 유지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이 순수했을 시절의 그때를 살펴보라는 말이다.

여호수아는 순전한 마음으로 나를 따랐다. 나를 신뢰함으로 가나안에 들어갔고 그 땅을 오직 나의 능력으로 정복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따랐으며 자신의 집도 나를 따르기 원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 사사기를 보았는가? 그들의 타락상을 보았는가? 세상의 유한한 공동체들은 언제나 오염되고 타락하여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신으로 마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이 인간의 상태다. 그래서 언제나 옛 시대의 타락한 진 밖의 새로운 회막이 필요하다. 다시 새롭게 우리에게로 돌아온 새불을 받은 자들이 필요하다. 교회는 언제나 새롭게 되어야 한다. 그 새롭게 됨의 기록이 부흥의 기록이다. 부흥은 언제나 광야의 외로운 곳 진 밖의 곳에서 일어났다. 비단옷을 입은 권좌에 앉은 자들의 곳이나 오래된 낡은 거처에는 다윗의 집(장막, 왕국, 하늘나라, 나의 나라)의 훼파된 것은 보수될 수 없다.

그러니 낡은 것이 타락하였다 하여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말자. 온 세상이 타락하고 낡았으나 언제나 진 밖의 회막을 찾는 자들에게 우리는 새롭게 임한다. 강력한 불로 임하여 들불과 같이 온 땅을 불태운다. 오늘도 강력한 불의 혀와 같이 임하여 그 입술의 기운으로 세상과 나의 성도들을 갈라놓을 것이며 세상에서 나의 성도들을 분리하여 새로운 무리로 세울 것이다. 구약의 교회가 타락하면 신약의 교회를, 신약의 교회가 타락하면 중세의 순교자들의 무리를, 그리고 모든 세상이 타락하면 세상의 변두리에 애꾸눈 흑인 설교자 사무엘[^1]과 같은 자들을 세울 것이다. 그 불은 아무도 막지 못하며 그 하늘의 권세는 누구도 꺽지 못한다. 그들 안에 있는 급하고 강한 바람과 같은 기운을 그 누구도 잠재울 수 없다. 그들은 광풍이며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강력이다. 그러니 오늘도 세상에 참 개혁과 참 교회가 없음을 한탄하고 낙망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지시하는 회막에서, 진 밖의 예루살렘에서 우리를 기다리라. 그러면 우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와 같이 언제나 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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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주사 대부흥의 발원이 되었던 사무엘 목사는 애꾸눈의 흑인이었다. 그래서 백인교회 예배에도 참석할 수 없었으며 물론 설교할 곳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예배드릴 곳이 없어 마구간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곳에 우리가 임하여 지난 세기에 가장 강력한 불을 부었다. 그 결과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 분파인 세계 오순절교회가 생겼다. 물론 현재 그들이 온전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시작점이 되었던 순전하고 강력한 불을 살펴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부흥은 진 밖에서 시작되는데 너희는 그곳을 찾으며 자신의 회막과 예루살렘을 찾아야 한다. 구하고 두드리면 찾고 열리고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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