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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Sep 28. 2024

01.3.2.3.10. 기업을 취한 아들 여호수아 5

01.3.2.3.10.9.  종 모세와 아들 여호수아


모세와 여호수아에 대해 설명하려면 아직도 너희들이 눈이 어두워 미리 설명해야 할 것이 있다. 신약 히브리서에는 기업을 상속받을 아들들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기업을 무를 아들들은 오직 육체를 입고 인간으로 온 나 예수와 그리고 나의 형제 된 인간들이다(히 1:2, 5~14). 나의 형제 된 인간들은 오직 우리의 백성이 된 자라야 한다. 나의 백성은 나의 나라에 거한다. 천사들은 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냄을 받은 종들이다. 종과 아들은 다르다. 여기서 아들들이 상속받는 기업을 알지 못한다면 종과 아들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


01.3.2.3.10.9.1. 가나안

  
여기서 기업은 무엇일까? 바로 가나안을 말한다. 가나안에서 기업을 분배받은 구약의 이스라엘은 우리(하나님)가 통치하는 나라로 초청을 받았다. 우리가 왕이 되고 우리가 보호하는 나라다. 바로 우리(하나님)의 나라며 하늘나라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가 거하는 하늘은 눈에 보이는 하늘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하늘과 같이 닿을 수도 없이 지극히 높은 지고한 곳을 뜻한다. 이는 영인 우리가 거하는 영적 장소다. 또한 영적 장소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 있는 것처럼 한 장소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하늘나라는 모든 곳에 동시에 임할 수도 있고 모든 곳에 임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교회의 옆 자리에 앉은 자도 하나는 하늘나라에 있고 하나는 어둠의 나라에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육적 물체가 없는 영적 실체에 대해 설명을 하니 육신적인 세계에 자신의 대부분의 것이 위치한 인간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좀 더 쉬운 설명이 통치다. 통치는 나라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늘나라의 통치를 받는 자는 어디에 있던지 하늘나라에 속한다. 그가 이동하는 모든 곳에는 하늘나라가 함께 이동하며 함께 있다. 이것이 통치의 개념으로 본 하늘나라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장의자에 같이 앉은 두 사람이 각각 다른 나라에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의 실체는 무엇이겠는가? 듣는 너희가 스스로 정의해 보자.
(                                                                   )
하늘나라(천국)는 죽어서 가는 나라인가? 아래의 칸에 너희 대답을 적어보라
(                                                                 )

만약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면 너희가 기존에 교회에서 배운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천국)는 어디인가?
(                                                                 )

너희 대부분은 여기에 대해 명확하게 답할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 안다고 해도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스스로 고민하여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과 친밀함 가운데 함께 하여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지도 못하는 천국을 너희는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

나는 인간으로 갔을 때에 "천국이 가까이 왔다. 돌이켜서 천국으로 들어오라(회개)"라고 했다. 그렇다면 너희는 지금 천국이 어디인지 아는가? 그렇다면 너희는 어디인지도 모르는 천국에 어떻게 들어가려 하는가? 알지도 못한다면 너희는 천국에 들어간 자가 아니다. 혹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명확하게 신학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나 예수가 여기서 이 부분을 언급하는 것은 너희 마음의 교만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너희는 알지도 못하면서 교회에서 많이 들어본 주제들에 대해 힘겨워한다. 사실 알고 보면 너희가 천국의 백성이 아니라 그렇다. 심령이 거듭나지 못했으니 천국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성경도 그냥 대충 성경 읽기 표에 체크하기 위해 읽고 설교도 주석이나 보고 준비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니 그냥 수박 겉핥기식 지식밖에 없다. 또한 성경을 열심히 읽는 자들도 자기들의 관심사에 집중하여 성경을 읽는다. 진정 우리(하나님)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관심이 없다. 단지 성경을 통해 자신의 관심과 욕구를 채우려 한다. 그러면서도 관심도 없는 분야이니 지겨워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단 하나다. 진정 회개하여 거듭난 심령을 가지던지 아니면 그냥 흥미 있는 다른 글을 읽으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화려한 문체와 흥미진진한 것들이 상당히 많다. 그러니 좋아하는 것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기를 바란다.

01.3.2.3.10.9.2. 강 건너편의 신들

Joshua 24:14~15 바른
14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분을 섬겨라. 너희의 조상이 강 건너편과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없애 버리고 여호와만 섬겨라. 15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면, 너희 조상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너희가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가 어떤 신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여라.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다."

여호수아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너희가 강 건너편에서 섬겼던 신들'이라는 말이다(수 24:14). 이 말은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한 말이다. 여호수아의 마지막 장을 읽으면 이 말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찾아서 여기서 말하고 있는 강이 어디인지 찾아보라.
(                                                             )
찾았다면 그 강을 건너기 전에 다른 신을 섬겼다는 것이 무슨 말이겠는가?
(                                                             )

여기서 말하는 강은 요단강이다. 그리고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겼다는 말이다.

너희는 반문할 것이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물론 잠시 금 송아지나 다른 우상들을 섬기기도 했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님을 따라 40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보냈는데 그들이 어떻게 다른 신을 섬겼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여호수아가 말하는 말은 정확한 말이다. 내 백성 이스라엘은 홍해에서 거역했다(시 106:7).

Exodus 14:11-12  (바른)
 11 그들이 모세에게 말하였다. "이집트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데리고 나와 이 광야에서 죽게 합니까?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렇게 하십니까? 12 우리가 이집트에서 이미 당신에게 한 말이 이것이 아닙니까? '우리를 내버려 두어 이집트 사람들을 섬기게 하십시오.' 우리가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우리에게 더 낫기 때문입니다."

내 백성은 이집트에서의 12 기적을 보고 나서도 세상을 섬기는 것이 우리(하나님)를 섬기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어 우리를 시험했다(시 106:14).

Exodus 16:3  (바른)
말하기를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빵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당신들이 우리를 이 광야로 데리고 나와 이 온 회중을 굶어 죽게 합니다." 하였다.

Numbers 11:4  (바른)
그들 가운데 섞여 사는 무리들이 탐욕을 품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울면서 말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는가?

Numbers 11:6  (바른)
지금 우리의 기력이 약해졌으나 우리 앞에 이 만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Numbers 11:33  (바른)
고기가 아직 그들의 잇새에 있어 씹히기도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그 백성을 매우 큰 재앙으로 치셨다.

Psalms 78:18  (바른)
그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여 욕심대로 먹을 것을 구하였으며,

1 Corinthians 10:6  (바른)
이런 일들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그들이 악을 즐겨한 것처럼 우리가 악을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1 Corinthians 10:9  (바른)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당하였으니, 우리는 그들처럼 그리스도를 시험하지 말자.

탐심은 우상숭배인데 내 백성들은 우상으로 가득했다. 질투도 사실 탐심의 다른 형태다. 그것으로 내 백성은 가득했다.

다음 시편을 보자.

Psalms 106:7-43 개정
7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8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9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니 그들을 인도하여 바다 건너가기를 마치 광야를 지나감 같게 하사

10그들을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셨고

11그들의 대적들은 물로 덮으시매 그들 중에서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였도다

12이에 그들이 그의 말씀을 믿고 그를 찬송하는 노래를 불렀도다

13그러나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14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15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16그들이 진영에서 모세와 여호와의 거룩한 자 아론을 질투하매

17땅이 갈라져 다단을 삼키며 아비람의 당을 덮었고

18불이 그들의 당에 붙음이여 화염이 악인들을 살랐도다

19그들이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경배하여

20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21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의 구원자 하나님을 그들이 잊었나니

22그는 함 땅에서 기사와 홍해에서 놀랄 만한 일을 행하신 이시로다

23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리라 하셨으나 그가 택하신 모세가 그 어려움 가운데에서 그의 앞에 서서 그의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아니하게 하였도다

24그들이 그 기쁨의 땅을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25그들의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26이러므로 그가 그의 손을 들어 맹세하시기를 그들이 광야에 엎드러지게 하고

27또 그들의 후손을 뭇 백성 중에 엎드러뜨리며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하리라 하셨도다

28그들이 또 브올의 바알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29그 행위로 주를 격노하게 함으로써 재앙이 그들 중에 크게 유행하였도다

30그때에 비느하스가 일어서서 중재하니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31이 일이 그의 의로 인정되었으니 대대로 영원 까지로다

32그들이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그들 때문에 재난이 모세에게 이르렀나니

33이는 그들이 그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내 백성 이스라엘은 거역의 종자요 반역의 종자며 탐욕과 불의가 가득한 종자다.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이 특별하여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거룩함이나 정결함으로 인해 그들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도 광야에서도 나를 시험하고 나의 분노를 사는 어리석은 백성이었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들이 다시 거듭나야 함은 당연하다.

01.3.2.3.10.9.3. 가나안 7 족속의 의미

가나안에 들어가는 자들은 이미 자신의 마음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자신의 교만과 탐욕을 비롯한 7 가지 죄악을 멸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죄와 악이 죽는 곳은 광야다. 광야에서 옛사람이 죽는다. 광야에서 옛세대들이 모두 죽는데 그것이 바로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그 죄악을 마음에서 이미 멸하여 자신의 마음이 우리의 전 즉 우리의 집이 되지 못한 자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 자신의 마음도 복종이 안되는데 어떻게 외부의 세상을 정복할 수 있겠는가? 세상 만만하지 않다. 세상은 악으로 똘똘 뭉친 원수의 종이며 늑대들의 무리다. 그 세상을 이기려면 철저히 우리를 믿고 철저히 우리의 능력으로 무장하여 세상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강함으로 강화된 심령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광야의 파리한 영혼들과 같이 두려워 떨거나 탐욕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출애굽의 첫 세대는 가데스바네아에서 자신들의 믿음 없음과 공포와 두려움과 원망으로 가나안에 진입하지 못했다. 자신의 마음이 이미 정복되지 않은 자는 외부의 세상을 정복할 수 없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은 외부의 적을 정복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정복되지 않은 자가 어떻게 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겠는가? 어둠의 나라에서 뿌려대는 탐욕에 눈이 멀어서 언제든지 원수의 편에 설 수 있는 자가 어떻게 전장에 설 수 있겠는가? 그는 군사로 설 수 없을 뿐 아니라 적국의 첩자다. 그런 자는 감옥에 가두어 전쟁에서 우리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 심하면 그 죄를 물어 아간과 같이 사형시켜야 한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가서 전투를 하는 자들에게 카톨릭의 7가지 대죄나 적용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다니 너희가 성경을 아는 정도는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수준이다. 원수의 나라의 탐욕을 가진 자는 전투에 참가할 자격은 물론이고 나의 나라에 들어올 수도 없는 자들이다. 다시 한번 말하겠지만 뾰족 지붕 집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 너희가 뾰족 지붕집을 드나든다 하여 나의 나라와 상관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너희 중 혹 십자가의 능력을 절대신앙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다행히 출애굽은 하여 광야를 떠도는 중이다.

그러나 마음이 이미 정복되어 완전히 우리에게 복종되지 않는 자들은 우리의 나라에 들어와 기업을 얻지는 못한다. 아니 원수의 탐욕에 젖어 색깔도 불분명한데 어떻게 군사가 되어 정복전을 펼치겠는가? 그런 상상을 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너희가 나의 나라에 대해 알지 못하는지에 대한 반증이다. 세상에서도 적국의 스파이가 자국의 백성이라 생각을 안 하는데 어떻게 천국에서 그런 것이 가능하겠는가?

이런 기본적인 사항도 성경을 관찰하여 면밀히 살피지 못하는 너희가 누군가의 글이나 신학적 진리를 판단할 수나 있다고 생각하는가? 주제를 넘은 만용일 뿐이다. 겸손히 배워 샛별이 떠오르고 장성한 분량이 차기를 기다리고 더 겸손히 탐구해야 한다. 자신의 주제를 모르는 어리석은 교만은 결국 이상한 성경해석을 만들어낸다. 너희 대부분은 그런 해석들에 갇힌 세속적 종교생활에서 생을 마감한다. 나의 나라에 들어오는 길은 그 길이 좁고 협착하여 그 길이 어렵다. 뾰족 지붕집으로 가는 길은 그 길이 넓고 평탄하다. 국가교회를 앞에서 설명한 이유도 그것이다. 국가교회는 모든 자를 그냥 유혹하여 자기 건물 안에 앉혀 놓고 그냥 성도가 되었다고 세뇌를 한다. 성도가 되기 아주 쉽다. 그 길은 넓고 평탄하여 들어가기가 쉽다.

조셉 얼라인이나 요한 웨슬리, 그리고 죠지 폭스가 말하는 거듭남에 대해 그들은 단지 우리와 신학적인 견해가 다르다고 말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깨닫지 못한 지옥의 자식들이다. 아직도 너희는 중세의 무지몽매함에 사로잡힌 성공회의 아류들이며 죠지폭스와 조셉 얼라인과 요한 웨슬리를 핍박한 개혁주의의 탈을 쓴 카톨릭의 아들들이다.

너희의 뾰족 지붕 집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 너희는 너희가 내가 육신으로 갔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나 무지몽매한 중세 암흑기의 교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너희는 그들과 동일한 선상에 놓여있다. 그래서 너희의 뾰족 지붕 집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

01.3.2.3.10.9.4. 가나안의 의미

너희들은 히브리서의 저자인 바울의 말과 같이 아직도 장성한 자의 분량에 이르지 못하여 단단한 것을 씹지 못하는 자며 보는 눈이 어두워 가려져 진리를 보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자들이 대부분이다.

가나안 즉 나의 나라, 하늘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찬송의 가사가 말해주는 천국의 개념은 이교적 개념이다. 너희가 알고 있는 죽어서 가는 천국의 개념은 이교적 개념일 뿐이다.

성경에는 그런 천국을 말한 적이 없다. 심지어 나의 제자들도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말을 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어떻게 따라오라고 말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우리의 세계와 분리된 어떤 장소가 아니다.

천국은 우리가 있는 곳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무소부재하며 무소부지하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세상 어느 작은 구석이라도 우리의 눈을 벗어나는 곳은 없다. 그러면 모든 세상이 천국이겠는가?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고 하여 천국은 아니다. 육적인 공간개념으로 천국을 이해하는 자들은 특정한 장소가 있어 우리가 그곳에 거하고 우리는 그곳의 보좌에 앉아서 천사들을 파견하여 모든 세상을 다스린다고 생각한다. 이런 무지몽매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이교도들의 천당개념이다.

우리의 나라는 장소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복종하는 인간의 의지에 깃들인 광범위한 영역이다. 우리에게 통치를 받는 인간이 가진 영역 즉 바운더리가 바로 우리의 나라다. 한 인간의 마음이 우리의 통치를 받으면 그곳이 우리의 나라다. 그리고 그 인간이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복종하면 그 인간의 삶의 영역에 우리의 통치가 임한다. 그것이 우리의 나라다.

그렇다면 우리의 계명에 순종하면 우리의 통치를 받는 것일까? 시간의 일부는 순종하고 시간의 일부는 불순종한다면 그 사람의 일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일부는 어둠이 임하는가?

이러한 질문도 어리석은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자기 목숨이나 형제나 그 어떤 것이라도 나보다 더 사랑한다면 그는 우리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나라에 들어오려면 자신의 옛사람의 죄악이 완전히 죽어서 온전히 우리에게 복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나라에는 들어올 수 없다. 적국이든지 우리의 나라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빛의 나라과 어둠의 나라는 서로 원수이기 때문에 결코 둘 모두를 선택할 수 없다.

지금 이런 말들을 다시 반복하여 설명하는 것은 이 글을 읽고 있는 너희가 아직 도의 초보에도 도달하지 못하여 알아듣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반복하여 설명하는 것은 너희에게는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보다 더 나은 결과가 임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Hebrews 4:1-16 개역개정
1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듣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3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4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 보다도 예리하여 혼 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14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 천 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 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그러므로 우리는 긍휼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 히 나아갈 것이니라



01.3.2.3.10.9.5. 산상수훈과 가나안(천국) 입성

01.3.2.3.10.9.5.1.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내가 가서 전한 복음 중에 나의 나라에 들어오려면 어떠해야 하는 지를 설명한 부분을 다시 말해 주겠다. 너희는 읽어도 도의 초보에도 이르지 못하여 그것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항복하고 전향하라. 천국이 쳐들어왔다!"라고 외쳤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그 시대적 배경을 가진 자들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죽어서 가는 천국으로 알아듣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제자들도 나의 나라가 실제로 임하면 한자리 차지하겠다는 욕심으로 내가 죽기 직전까지 다투었다(눅 22:24~30). 이들이 우리의 나라를 인식하는 것은 이러한 개념이었다. 그들이 알아듣도록 외친 것이므로 너희가 알아듣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다.

나는 그들에게 유대인이 세계를 정복하여 다스리게 할 유대인의 왕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을 하였다. 결코 21세기의 너희들에게 말을 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21세기 너희의 관점으로 성경의 글을 읽는 것은 어리석다. 나의 말의 본 의미는 그 시대의 백성이라야 알아들을 수 있다. 그래서 경의 글을 해석할 때는 항상 주의해야 한다.

그들은 내가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을 때 나를 유대인의 왕 메시야라고 칭송하며 나에게 나귀를 태우고 종려나무 가지로 길을 덮었다. 이는 왕에게 하는 것으로 그들은 내가 자신들을 위해 왕국을 세울 것으로 알았다.

그러니 그런 자들에게 천국이란 내가 건국하는 새로운 나라였다. 내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라고 말한 것은 항복의 전언이었다. 그래서 헤롯과 유대의 지도자들이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내가 새 나라를 건국하여 자신들의 것을 빼앗을 것이 두려워 미리 나를 제거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산상수훈을 보면 전혀 다른 해석이 된다.

산상수훈의 시대에 나에게 모여든 자들은 항복하고 나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 나온 자들이다.

그렇게 모인 자들에게 나는 나의 나라에 들어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설명했다. 이는 나의 나라의 통치질서를 의미하며 그 질서를 지키지 않는 것은 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이므로 나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유대인들에게 나의 나라는 구약의 다윗의 왕국과 같은 개념으로 나는 다윗을 능가하는 세계 정복의 군주였다. 또는 나는 종교적인 완벽한 지도자였다. 모세를 능가하는 더 나은 선지자였다. 구약의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완전한 우리(여호와 하나님)의 말을 이 땅에 전할 사자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를 모세보다 더 따르며 더 신뢰했다. 그들에게 나는 종교와 세상의 모든 권력을 장악할 지상 최강의 통치자였다.

01.3.2.3.10.9.5.2. 산상수훈(항복 조건)

그들은 나의 나라의 백성이 되어 함께 전투에 임하고 그것을 통해 막강한 권력과 부와 명예를 얻기 원했다.

나의 나라는 종교적 권력도 함께 가진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의 나라의 종교에 복종해야 한다. 그것은 나의 나라의 법에 복종해야 함을 의미한다.

먼저 산상수훈에서 누가 천국에 들어올 수 있는지에 대한 포문을 열었다. 그것이 팔복이라 일컬어지는 10 문장으로 구성된 새로운 십계명이었다. 이는 투항하는 자가 치러야 할 항복의 조건이었다.


01.3.2.3.10.9.5.2.1. 팔복(항복의 조건)

 

01.3.2.3.10.9.5.2.1.1. 첫 번째 계명(조건)


Matthew 5:3 KJV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그 첫 번째는 영(여호와 하나님, 바로 우리)에 대해 가난한 자[^1]가 천국에 들어올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나라의 왕인 우리(여호와 하나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열렬히 원하여 우리의 통치를 받는 우리의 소유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상 그 시대의 백성은 왕에게는 종과도 같은 것이다. 왕에게는 모든 것을 조건 없이 바쳐야 하고 충성을 다해야 한다. 그러니 우리의 종이 되기를 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결핍이 되고 없어서 죽을 것같이 우리를 원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들이 원하는 왕은 단순히 임금이 아닌 우리(하나님)의 대리자며 종교적 절대자이기 때문이다.

01.3.2.3.10.9.5.2.1.2. 두 번째 계명(조건)


Matthew 5:4 바른

슬퍼하는 자들은 복되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애통해해야 함을 말했다. 그래야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이는 종교적 의미로 바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신의 이전까지 죄와 허물을 회개함을 뜻한다. 이는 자신이 이전까지 세상나라에 속하여 우리(하나님)를 배반하고 죄를 범한 것은 우리의 나라를 대적한 것이므로 그러므로 애통하여 회개하면 우리가 용서하여 위로를 주겠다는 것이다. 이는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회개하라고 선포한 것을 기억하는가? 돌이킨다는 것은 단순히 그냥 나라만 바꾸어 들어오면 되는 것이 아니다. 적국에서 천국으로 넘어가려면 자신이 천국을 적대시한 모든 죄를 고백하고 잘못했음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다음에야 들어올 수 있다. 적국의 백성을 누가 그냥 받아주겠는가? 완전히 전향된 태도가 아니면 받아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통곡하고 울며 죄를 뉘우쳐야 하는 것이다. 중국의 윈형제 그룹들이 이런 주장을 하여 너희들에게 오해를 사는데 그들의 주장은 이런 관점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너희들이 곡해한 것이다.



01.3.2.3.10.9.5.2.1.3. 세 번째 계명(조건)


Matthew 5:5 바른

온유한 자들은 복되다.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겸손한(meek) 태도를 요구했다. 즉 절박하고 심지어 비굴한 자세로의 복종을 요구한 것이다. 실제로 원어상의 뜻으로 온유함은 겸손을 의미한다. 약하고 유약하여 다른 이들에게 잘 보여야 하는 자의 비루한 태도를 의미함이 이 단어의 어원이다. 나라를 바꾸어 전향을 하는데 거만한 태도로 나온다면 누가 받아주겠는가? 그것도 적국의 백성인데 그냥 받아줄 수 있는가? 자신은 지옥에 떨어질 죄인이니 전혀 쓸모가 없는 자이니 살려달라고 절박하게 매달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오직 우리의 눈치만 보고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으려나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아무리 비참해져서라도 살아야 하겠다는 절박함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바로 구약의 가나안 정복과 같이 죄악의 세상 나라들을 멸함을 뜻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하면 멸함을 받는 것이다. 지옥이다. 그러니 절박함으로 매달려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구약에 12지파가 땅을 분배받은 것처럼 우리나라의 땅을 분배받고 우리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01.3.2.3.10.9.5.2.1.4. 네 번째 계명(조건)


Matthew 5:6 바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되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우리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며 그것을 위해 전력투구해야 한다. 즉 무한충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의라는 것은 우리(하나님)의 말 즉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그렇게 굶주린 자가 음식을 구하듯이 간절함으로 우리의 뜻을 위해 전력투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들은 우리의 나라에 들어와 배가 부를 것이다. 그 시대만 해도 일반 백성들은 많이 굶주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몰려들었다.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의 나라에 오는 목적은 배 부르게 살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다. 종교세로 십일조를 내고 로마인들에게는 세금을 수탈당하고 일할 수 있는 땅도 빼앗기니 굶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해방되어 구약 여호수아 시대나 다윗의 시대와 같이 자신들의 땅을 소유하고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세계를 정복하게 되면 자신들은 세계의 지배자가 되어 부유하게 살 것이었다. 그 당시 로마를 보면 그런 지위를 누렸다. 로마는 지구의 일부만 다스리지만 유대인들은 세계를 지배할 것이므로 자신들은 배고픔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치와 향락을 누리는 부요한 삶을 살게 될 것이었다.


10.3.2.3.10.9.5.2.1.5. 다섯 번째 계명(조건)


Matthew 5:7 바른

긍휼히 여기는 자들은 복되다.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다른 이를 불쌍히 여겨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구약 율법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핵심이었다. 모든 유대인들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다른 이를 불쌍히 여겨 돌보기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이 크면 이런 자애과 긍휼이 넘친다. 형제의 재산이나 아내나 손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다. 도적질도 않고 남의 아내를 도둑질하여 간음하지도 않는 것이다. 또한 형제를 거짓으로 음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함께 한 족속 중에 가장 소중한 부모를 잘 공경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이다. 그런데 구약의 계명 모든 것을 이기는 것이 긍휼이다. 이는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것 정도의 율법 준수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보살피고 자애로 섬기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도 우리의 나라에 들어오는 자애와 자선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이다.




[^1]

영어는 원어와 동일한 뜻으로 번역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어 번역은 문제가 있다. the poor in spirit는 영이 가난한 자가 아니다. 이는 영에 가난한 자다. 즉 가난한데 금전에 가난한 것이 아니라, 영에 가난한 것이다. 즉 가난의 원인 즉 궁핍된 것이 영인 것이다. 즉 영인 우리(하나님)에게 가난한 것이다. 영에 가난하다는 표현이 한국어로는 문제가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라서 그렇게 번역이 되었다. 사랑에 결핍이 된 것과 같이 영(우리, 하나님)에게 결핍이 된 것이다. 이러한 어법이 한국어에는 없다. 그런데 헬라어와 영어는 공통으로 영인 우리가 부족하여 늘 고통스럽고 힘겨운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다. 즉 돈이 부족하여 궁핍하고 힘겨운 상태가 가난인데 그 가난의 원인이 돈이 아니라 영인 우리(하나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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