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과 가나안(천국) 입성
Matthew 5:8 바른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복되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룩하다. 그러니 죄인은 우리의 앞에 올 수 없다. 죄인이 우리의 나라에 들어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죄에서 돌이켜 온전히 거룩함으로 무장된 자라야 우리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다. 그가 우리를 본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나라에 들어옴을 뜻한다. 우리의 나라에 있는 모든 백성은 우리의 임재(현존, Presence) 안에서 우리와 얼굴을 보며 대화한다. 바로 그러한 자가 우리의 백성이다. 만약 이러한 자가 아니라면 우리의 백성이 아니다. 구약에는 모세나 특별히 선택을 받은 자들만 이런 만남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 너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올 수 있다.(히 4:16) 이것은 거룩한 내 백성의 당연한 특권이다.
물론 나 예수의 은혜로 너희가 거룩해질 수 있다. 그러나 세례문답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단지 질문에 지식적인 답을 하였다 하여 너희가 깨끗한 것은 아니다. 마 5:48절에 언급한 것처럼 너희는 우리가 완전한 것같이 완전해야 한다. 깨끗하게 되었다고 아무리 세뇌해도 너희 마음과 행동이 현실 안에서 거룩하지 않으면 너희는 거룩한 자들이 아니다. 마음이 깨끗해진 자만이 우리를 볼 수 있다. 이는 나 예수를 믿는 절대믿음으로 죄를 완전히 이긴 자라야 가능하다. 이런 자들은 하늘의 능력을 덧입어 모든 죄와 연약함을 이긴다. 혹 부지중에 죄를 범할 수는 있지만 그 죄를 성령을 통해 깨닫고 즉시 회개한다. 그리고 그 죄를 다시는 반복하여 짓지 않는다. 이는 이미 그들은 그 욕정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네가 형식적인 죄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하였다고 해서 네가 회개한 것은 아니다. 회개는 온전히 그 죄에서 돌이켜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육신이 연약하여 그런 일이 반복된다면 너는 십자가와 오순절도 통과하지 못한 나의 제자들과 같은 자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그보다 못하여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이나 이슬람교도과 같이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종교인일 가능성이 더 높다.
내가 이 말을 할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실 행위를 어느 정도 제어할 수는 있어도 마음을 제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해야 천국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완전한 거룩이란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거룩을 흉내 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들 중에는 이 불가능한 것을 할 수 있는 길을 내가 설명할 것을 기대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은 자신들에게 불가능하므로 어찌 되었건 무리 속에 따라다니다 보면 천국의 언저리에서라도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Matthew 5:9 바른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되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화평케 한다는 것은 적국(어둠)과 우리 하늘나라의 전쟁을 종식시켜 화평케 한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화평은 너희 인간들끼리의 다툼을 중재하여 화평케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너 자신과 타자의 화평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너 자신과 타자의 화평을 말하려면 네가 다른 이들과 화평하다라고 말해야 한다. 네가 다른 이들과 화평케 한다라는 표현은 옳지 못하다. 이는 자신의 행위의 결과로 타자들을 화평케 하는 타동사의 기능과 자신이 다른 이들과 화평하는 자동사의 기능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이에 관한 것은 더 아래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 항복 조건으로서의 계명에 대해 집중하여 보기로 한다.
지금 나는 하늘나라에 들어오는 조건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화평케 한다는 것은 하늘나라에 들어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보면 화평케 한다는 것은 적국의 백성인 다른 인간들을 우리의 나라와 화평케 한다는 것이다. 다음 바울의 에베소에 보낸 편지를 읽어보라.
Ephesians 2:11-18 바른
그러므로 기억하여라. 그때에 너희는 육체적으로 이방인들이었고, 육체에 손으로 행한 할례자라고 불리는 자에 의해 무할례자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너희는 그 당시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에서 제외된 자들이고, 약속의 언약들과 무관한 외인들이며,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때에 멀리 있던 너희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 그분은 우리의 화평이시다. 자신의 육체 안에서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중간에 막힌 담, 곧 원수 된 것을 제거하신 분이시며, 여러 규정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신 분이시니, 이는 그분께서 자신 안에서 그 둘로 한 새 사람을 창조하여 화평을 이루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둘을 한 몸으로 만들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는 것이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화평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도 화평을 전하셨다. 이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우리나라의 백성과 원수 되었으나 이제 그 원수 된 것을 내가 제거하여 이방인들도 우리나라의 백성에 포함된 것을 화평이라 했다. 나는 그 화평을 이루는 자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를 본받아 믿지 않는 자들을 우리나라의 백성으로 이끈다면 너희는 나와 같은 일을 하는 하나님의 아들인 아담의 후손이다. 원래 첫 번째 아담은 누가복음의 나의 족보에서 보듯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타락하였음으로 나는 두 번째 아담으로 왔다. 즉 두 번째 하나님의 아들로 온 것이다. 너희 화평의 직책을 가진 자들은 아담의 후손으로 바로 두 번째 아담인 나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우리의 나라의 백성은 백성인 동시에 우리의 아들이다. 우리와 그 본질이 동일하여 우리의 거룩함과 진실함을 그대로 가져야 한다. 우리의 DNA를 가지지 않는다면 결단코 그러한 형질을 나타낼 수 없다. 이렇게 우리의 형질(DNA) 가진 자는 당연히 우리의 아들들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화목의 직분을 가진 너희는 당연히 우리(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화평케 하여 이방인을 나의 백성으로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세례문답자(신앙고백자)들이 하는 것처럼 세뇌를 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온전히 심령이 거듭나 완전히 거룩한 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완전히 거듭난 심령이 되도록 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성령뿐이다. 또한 그 성령의 역사로 구원을 전할 수 있는 자는 자신이 이미 거듭나 완전히 거룩하게 된 성도라야 한다. 어찌 원수의 나라와 우리의 나라에 동시에 속한 회색분자가 그런 일을 하겠는가? 그의 본능은 이중첩자이므로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또한 성령은 그 본질을 꿰뚫는 자로 모든 것을 통달함으로 죄인을 통하여 구원을 전하지 않는다. 어찌 적국의 첩자가 자기 나라 백성을 회개시켜 원수의 나라인 우리나라의 참 백성을 만들겠는가? 이는 적국의 간첩이면 결코 시도조차 하지 않을 일이다. 그러므로 뾰족지붕집에 있어 완전히 거듭나지 못한 모든 자들(이중첩자 또는 간첩)이 전하여 뾰족지붕집에 세상사람들을 앉히는 것은 우리의 나라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들은 사람들을 뾰족지붕집에는 이끌어도 천국에는 결코 이끌 수 없다.
영혼을 회심케 하여 거듭나게 하는 능력은 인간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내가 모인 무리들에게 이 조건을 제시한 것은 사실상 그들에게는 천국문을 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것처럼 들렸다.
이 해석은 우리와 인간들을 화평케 하는 것에 집중되어있다.
화평케 하는 것에 대한 누가의 다른 해석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관점은 너희와 너희 형제들 사이의 화평이다. 즉 인간과 인간 간의 화평인데 이는 자신과 타인의 화평을 의미한다. 누가는 눅 6장에서 지극히 크신 자(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Luke 6:35 개정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 와 악한 자 에게도 인자하시니라
이 구절의 앞 뒤를 살펴보았을 때에 누가는 우리(하나님)의 자비함과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한다. 이는 모든 사람과 네가 화평하는 것을 뜻한다. 원수도 사랑하고 다른 이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어 자비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속옷을 내어달라고 하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주고 겉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는 속옷까지 주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앞의 표현은 마태의 표현이며 뒤의 것은 누가의 표현이다. 마태와 누가는 내가 한 같은 말을 듣고도 서로 다르게 표현했다. 이는 둘 중 하나는 틀린 기록을 한 것이 아니다. 단지 각자의 기질과 성품과 경험에 따라 같은 말도 다르게 인지가 된 것이다. 또한 세월이 지나서 기록함으로 그 말들의 엄밀성이 무디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잘못된 기록을 한 것은 아니다. 단지 각자의 인격과 개성과 지식을 사용하여 기록함으로 다른 관점에서 나의 말과 나의 행함을 바라보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독자인 너희는 여러 기록자들의 관점으로 동일한 사건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여럿의 기록이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인간임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가 있는 것을 서로 다른 인격의 관점을 통해 상호보완하는 기능이 있다.
누가의 기록에서는 모든 자들에게 자비함으로 모든 자와 화평함을 뜻한다. 누가의 관점에서는 모든 이들과 화평함은 자신과 타자의 화평을 뜻한다. 그런데 마태의 관점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 타자와 타자간에 화평케 하는 것을 뜻한다. 누가는 화평하다 즉 내가 누군가와 화평하다의 관점에서 화평한 자 즉 모든 자에게 자비함으로 화평한 자는 지극히 크신 자(하나님)의 아들이 되리라고 말했다. 또한 누가는 직접적으로 화평하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우리(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표현은 썻지만 그 조건을 모두와 화평한 자라고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우리와 같이 자비로운 자가 우리를 닮은 우리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의미의 내면을 살피면 모든 자를 자비로 사랑하는 자는 모든 자와 화평하다. 의미를 더 넓게 포괄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누가가 말하는 우리의 아들이 되는 조건과 마태가 말하는 우리의 아들이 되는 조건은 서로 다르다 할 수 있다. 누가는 자비한 자가 아들이 된다고 했고 마태는 화평케 하는 자가 아들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포괄적으로는 같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내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말하거나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 된다고 말하거나 또는 배부르게 된다고 하는 것이나 위로받는다고 하는 것 심지어 상이 크다고 하는 것도 모두 사실은 하늘나라에 들어온 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모두 한 가지 사실을 뜻한다는 것이다. 너희가 팔복이라 일컽는 계명들의 뜻를 각각 분리하여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통합적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화평케 하는 마태의 관점이든지 화평한 누가의 관점이든지 인간이 이를 실행하는 것은 불가능이다. 어떤 자가 모든 것을 내어주고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사랑하는 완전한 자비를 행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마태의 관점이건 누가의 관점이건 항복의 조건은 불가능의 조건이다.
Matthew 5:10 바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은 복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의라는 것은 우리(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를 위한다는 것은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일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뜻은 너희 인간들이 구원받기 원하는 것이다. 구원받아 다시 완전한 에덴에서 보호를 받으며 온 우주를 낙원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들에게는 박해가 있다. 왜냐하면 세상과 우리의 나라는 서로 적대관계이기 때문이다. 멀쩡히 너희의 이웃으로 있던 자들도 너희가 나의 참 백성으로 거듭나 나의 뜻을 이루기 시작하면 너희를 대적하기 시작한다. 너희 이웃이 도덕적이며 선량한 사람이라 하여도 그는 반듯이 너를 대적하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성실하고 착한 자일 수록 국가에 충성하게 되어있는데 그는 원수의 나라에 충성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 성실하고 완전한 박해를 한다. 로마의 훌륭하고 뛰어난 황제들이 가장 악독한 기독교 박해자들이었다. 중세와 현대의 대부분의 수도사들의 필독서인 명상록을 집필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로마의 뛰어난 황제였으며 명상록을 집필할 만큼 뛰어난 학문과 성품을 지녔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를 박해한 왕들 중에 가장 극심한 박해를 가한 황제였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의 뜻만이 이루어지도록 충성을 다해야 우리나라(천국)의 백성이다. 당연한 것이 국가에 충성을 다하지 않고 회색인간과 같이 백과 흑의 가운데에서 서성인다면 그가 과연 빛의 나라에 속하였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의를 위해 일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결론적으로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므로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자. 아무리 세상에서 안전을 누린다 해도 결국 사탄의 종노릇이나 하다가, 마지막에는 지옥의 불로 사탄과 함께 던져진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자가 되자.
Matthew 5:11a+12 바른
11a나 때문에 사람들이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11b거짓으로 너희를 대항하여 온갖 악담을) 할 때에 너희는 복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있던 선지자들을 이와 같이 박해했었다."
11절과 12절에도 복되다는 말이 한번 나온다. 그러므로 팔복은 이미 8번의 복을 넘어 9번이 되었다. 또한 문장의 길이가 다른 복들보다 2배는 더 길다. 그래서 이 계명은 하나이지만 사실은 둘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사용된 복되다도 한 번만 사용되었지만 사실은 둘로 보아야 한다. 두 번 사용되어야 할 것을 하나로 사용하여 두 개의 문장을 병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는 수사법이다. 이는 의도된 것으로 10개의 복을 내리는 새로운 십계명이다. 구약에서 우리(하나님)는 우리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복이 있다라고 했다. 이를 그대로 가져와 문학적인 형태로 만든 것이 팔복이라 알려진 현재 언급하고 있는 말들이다.
또한 이 계명들을 이렇게 언급하는 진정한 이유는 나의 백성이 될 이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기 위함이다. 팔복이라 알려진 마지막 여덟 번째 복은 지금 언급하는 11~12절의 내용과 동일한 박해에 관한 내용이다. 즉 박해를 당하는 자에게 복이 있는데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사실 10절의 마지막 여덟 번째 복만을 언급해도 되는 데 반복되는 내용을 길게 언급하며 거기다가. 복되다에 기뻐하라 까지 붙인 이유는 박해받을 때에 하늘나라에 들어온 축복과 기쁨을 생각하고 하늘의 상급을 생각하고 그리고 먼저 그 길을 간 선지자들을 생각하며 싸워이기라는 격려다. 그래서 동일한 내용을 가장 길게 설명했다.
팔복에는 또 다른 구조적 수사법이 사용되었는데 팔복의 시작인 첫 번째 복인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이다. 동일한 구절이 마지막 여덟 번째 복에도 등장한다. 팔복의 시작과 끝은 모두 천국이 그들의 소유임을 확정하는 말이다. 이는 팔복을 말하는 이유가 바로 천국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팔복을 제시한 이유는 모두 천국에 있다. 천국에 들어와 천국을 소유하려면 이 모든 항복조건을 수용하라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오는 것이 복이라는 선포를 함으로 천국에 들어오도록 설득을 하는 것이다. 항복을 권고하는 이유가 모두 천국에 들어와 보호받기를 원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복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사실 우리의 아들들이 되지도 못하며 천국과 지옥 양쪽 모두에 속한 이중간첩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 복 이후로는 모두 동일한 내용인데 이렇게 반복하여 길게 설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도대체 세 개의 계명을 가지고 동일한 말을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 백성이 된 자들이 겪어야 할 고통을 알기 때문이다. 이들이 항복하고 우리나라에 투항하게 되면 엄청난 박해를 받아야 한다.
Matthew 5:11b+12 바른
(11a나 때문에 사람들이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11b거짓으로 너희를 대항하여 온갖 악담을 할 때에 너희는 복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있던 선지자들을 이와 같이 박해했었다."
항복하기 위해 산상수훈 산에 모인 이들이 나라를 바꾸어 전향을 하게 되면 그들은 내가 박해를 받았던 것처럼 엄청난 박해를 당하게 된다.
이미 나라가 세워져 영토와 군대가 있다면 전향한 이후로는 우리나라의 보호가 있겠지만 이 당시에 이들이 보기에는 나의 나라는 이제 건국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으는 단계다. 군대도 영토도 없다. 그러니 이들이 나라를 바꿔 전향하는 순간 이들은 자기 나라에서 반역자로 낙인찍히게 된다. 이들이 전향하여 국적을 변경한다는 것은 이런 것을 의미하는 줄 이들 자신들도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천국으로 전향하는데 가장 큰 장벽이 반역자로 몰려 받을 핍박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하늘나라에서 상이 클 것이고 이것이 선지자들이 간 길임을 보여 본받아 따르라 한 것이다.
사실 우리(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세상에 속한 나라는 필연적으로 착취와 희생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세상 모든 나라들 속에 한 국가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세상의 나라는 왕이나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군대를 통해 영토와 사람들을 지배한다. 사실 세상 나라는 백성을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을 지배하고 그리고 그 지배를 통해 백성들을 소유하고 그들을 착취하는 것이 목적이다. 또 백성을 보호한다는 목적을 가지더라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 군대로의 징집과 그 군비를 감당하기 위한 세금이다. 세상 나라는 어떤 형태를 가지더라고 착취를 벗어나는 형태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 같은 제도를 가질 수 없다. 그래서 구약에서 백성들이 왕을 구했을 때 이런 점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 우려는 현실이 되어 이스라엘 대부분의 왕들은 백성을 압제하는 자들이 되었다. 사사와 선지자들과 같이 그들을 돌보는 목자로서 행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지혜로운 솔로몬에 대한 백성들의 평가가 그 착취가 너무 심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세금을 감면하여 줄 것을 건의했으나 그것을 거절함으로 모든 이스라엘이 유다지파를 제외하고는 반역을 하여 북왕국 이스라엘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유다지파에서 나온 다윗 왕조는 통치할 수 있는 범위가 유다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유다 왕국이란 이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구약에서 우리의 나라를 상징하는 나라도 일반적인 세상의 체제를 가져오니 도적질 하고 빼앗고 멸망시키는 압제가 가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나라는 세상에 속한 왕국과는 다르다. 압제를 위한 군대와 제도들이 없다. 그런데 세상의 임금과 통치자들은 우리의 나라가 자신들의 범주에 속하지 않은 영적인 왕국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반적인 세상 왕국으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에 자신들의 권력을 찬탈당할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우리의 나라에 투항하는 자기 나라의 백성들이 있다면 엄청난 징벌을 가한다. 또한 영적으로는 서로 적국임으로 본능적으로 대적한다.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고 죽여 박멸하려 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나라에 투항한 자들은 이중으로 고통을 겪어야 한다. 세상의 핍박으로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세상적인 군대와 영토가 없는 나라에 속해 있으므로 가는 곳마다 보호해 줄 인간적인 어떤 보호장치도 없이 박해를 고스란히 제 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그래서 나 예수는 핍박받을 나의 백성들을 격려하고 위로했다.
이들은 무슨 이유가 있어서 박해를 받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과 세상은 원수이기에 본능적으로 미워하여 박해한다. 참 믿는 자가 생기면 세상은 여러 이유로 박해를 하는데 그 이유가 타당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박해를 당하는 자가 참 믿는 자라면 그 이유는 모두 핑계에 불과하다. 적이 있는데 그 적을 죽이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오직 죽이는 것이 목적이다. 그 죽이려고 하는 대의는 모두 핑계일 뿐이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점령하려고 하면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핑계로 댄다. 그러나 사실 그 모든 것은 단지 핑계일 뿐이다. 적국을 차지하여 그 땅과 백성을 빼앗으려는 탐욕이 모든 전쟁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나의 백성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이상히 여기지 말라. 세상이 너희에게 온갖 거짓 누명을 씌워 죽이려 해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심지어 그 누명을 씌우는 자가 가족이나 친구라 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그러한 일이 일어나면 온전히 기뻐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를 받았다.
열 가지 복은 구약의 계명의 모든 것을 요약하면서도 또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계명이다. 이는 구약의 율법으로는 따를 수도 없는 깊이의 순종과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박해에 관한 마지막 세 계명들에 대해 들은 무리들은 모든 희망을 내려버렸다. 왜냐하면 이런 항복조건들은 자신들에게 불가능한 조건임을 알았다. 자신들이 그 조건을 충족시키고 싶어도 자신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개중에 항복 10 조항을 잘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자신들이 노력하면 천국에 들어갈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나의 말들을 듣고 그들 모두도 절망에 빠져들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상수훈의 사건은 사실 구약의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이 시내산(호렙)에 모인 것과 같은 맥락의 사건이다. 구약의 모세는 나의 예표(그림자)였고 실체의 형상은 나 예수다.
그런데 모세와 나는 차이가 있다. 모세는 율법의 종이 었고 나 예수는 아들이다. 그러므로 모세의 계명과 나의 산상수훈도 근원적인 차이가 있다. 구약의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 섬겼고 나는 아들로 상속자다(히 3:5~6) 구약의 모세가 부른 세대는 자신이 종이므로 종이 었고, 나 예수는 아들로, 아들로서 내가 부른 세대들도 아들들이다. 모세는 종으로 아들의 기업을 상속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모세 세대의 모든 백성은 기업인 가나안을 상속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하나님)의 나라 가나안은 우리(하나님)와 같이 완전한 자만이 상속받을 수 있다. 우리의 형상 즉 우리의 DNA를 가진 아들만이 오직 상속자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가나안을 취할 자는 오직 나 예수와 나의 형제 된 자들밖에 없다.
그래서 구약에 가나안을 얻는 자의 이름이 여호수아(예허슈아)다. 이를 신약의 헬라어식으로 발음하면 바로 나의 이름 예수다. 둘 다 그 뜻이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여호수아는 자신과 함께 한 세대들과 함께 가나안을 정복했다. 그는 내가 아들이었듯 우리(하나님)의 나라에서 아들이었다. 그래서 아들이 얻는 기업을 얻었고 나의 예표적 인물이 되어 세상을 정복하여 굴복시켜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자가 되었다. 이는 정복자가 되었음을 뜻한다. 신약에 천국은 요한의 때로부터 침노를 당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천국이 침노를 당한 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 진정한 뜻을 살펴보면 천국이 될 가나안을 구약의 이스라엘이 나의 아들로서 침략하여 정복했다. 그래서 그곳에 우리(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왔다. 이와 같이 신약시대에도 나의 아들이 된 자들이 그 시대의 세상을 정복하여 그곳에 우리(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왔다. 마치 가나안을 정복하듯 그 시대의 자신들의 기업이 될 곳을 침략하여 정복하는 것과 같다. 그 정복지는 그 시대에 우리(하나님)가 지시한 영역이 될 것이다. 우리(하나님)가 가라고 하는 그 분야와 영역에서 우리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뜻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에 있다. 원수의 적국에 포로 된 자들을 구원하여 우리의 나라(천국)에 이끄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원수의 진영을 침략하여 영혼을 사로잡아 하늘로 올려 보내는 일이 바로 하늘나라의 일이다. 여기서 하늘로 올려 보낸다는 것은 공간적 의미의 표현이 아니고 영적 의미의 하늘로 올려 보낸다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나 예수는 모세가 인간의 연약함을 고려한 율법적 순종을 가르친 것과 비교할 수도 없는 완전한 순종을 가르쳤다. 인간의 연약함이 죽고 성령의 능력만이 거하는 완전한 순종이 우리(하나님)가 원하는 순종이다. 자신의 심령이 이미 정복되어 완전한 순종을 통해 세상을 침략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일을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모세가 준 계명은 율법을 지키는 종들에게 준 것이다. 그러나 나 예수가 준 것은 율법의 모든 것을 이루고도 더 완전함에 이르러 완전한 순종을 하는 아들들에게 준 것이다. 그러므로 그 순종의 깊이는 마음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완전한 자발적 순종이다. 그리고 그 강력함은 성령을 통한 것으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순종을 막아설 수 없다. 그러므로 거듭난 아들의 믿음을 가진 자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이 정복전에 들어가는 곳이 천국이며 종국에는 세상의 모든 곳이 정복당하여 세상 끝에는 완전한 안식이 찾아온다. 순종치 아니하는 모든 세상은 불타고 온전한 순종의 아들들과 그들에게 속한 새하늘과 새땅이 새롭게 나타나는 것이 완전한 안식의 완성이다.
나의 나라에 들어오는 자들은 소금과 빛과 같아야 한다. 세상에 소금이 되어 세상을 절여서 물들여야 한다. 바로 하늘나라로 물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빛이 되어 세상에 비쳐야 한다. 그래서 세상을 빛의 나라로 물들여야 한다. 그래서 세상이 하늘을 보게 하여야 한다. 그것이 선한 행실로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세상이 하늘에 있는 우리에게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이런 자가 들어올 자격을 가진 자다. 바로 이런 자들이 천국에 들어온다.
-마 5:17~48
내가 산상수훈산에서 전한 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전한 것과 비교하여 완전한 격차를 가진다.
새로운 천국으로의 항복 조건 즉 천국의 진입 조건의 십계명(팔복)을 전파한 후에는 구약과 비교하여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율법의 차이에 대해 설명했다. 이는 천국의 출입증을 가지려면 완전한 천국의 아들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Matthew 5:17-20 개정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 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내가 전하는 법은 구약의 법과 다른 법이 아니다. 단지 모세가 전하여 준 법은 인간의 연약함을 고려한 법(마 19:8)[^1]인데 나 예수가 전한 법은 연약한 인간을 위한 법이 아닌 완전한 우리의 아들들을 위한 법이다. 즉 우리(하나님)와 같이 완전한 자가 아니면 순종할 수 없는 법이다.
구약의 모든 법을 완전하게 지킨 자들이 바리새인이었고 그 바리새인 중에 가장 철저한 자들이 서기관들이었다. 그런데 구약의 모든 율법을 순종한 그들도 나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 모세의 법은 인간의 노력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인데 거듭나지 못한 연약한 인간을 위해 약화된 법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인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기도 힘들다. 그런데 나는 이 땅에 와서 바리새인도 지킬 수 없는 완전한 심령의 변화에 의해서만 지킬 수 있는 법을 요구했다. 구약의 법이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 미완의 법이 되었지만 나는 이제 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인간의 연약함을 완전히 해결하고 완성된 완벽한 법을 선포했다.
천국에 들어올 나의 아들들은 본성이 완전히 거듭나 나의 아들이 된 자들이다. 오직 그런 자들만 천국에 진입할 수 있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 지를 묻는다면 그것은 성령의 능력이다. 전능의 능력에 무엇이 불가능으로 버틸 것인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십자가의 피가 완전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다. 수많은 증인들이 있으며 성경의 사도들과 집사들과 사도행전과 그 시대의 사람들이 그러한 삶을 살았다.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그러한 삶을 살았고 국가교회의 권력이 그들을 불과 물에 죽이고 그들의 기록을 지워도 그들의 피가 땅에서 부르짖어 그 증거를 남겼다. 그들의 증거는 숨겨진 기록으로 또는 그들의 살아남은 후대들의 증언으로 남겨져있다. 근대에는 죠지폭스와 요한웨슬리 등 살아있는 기록들이 있다. 모라비안들과 회중교회의 기록들은 많이 소실되고 축소되고 저평가되었으나 그들의 빛을 숨길 수는 없다. 요한의 말과 같이 나를 믿는 자들은 빛에 거하며 빛에 거하는 자들은 악한 자가 만질 수도 없다. 그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내가 보기에 너희들의 해석은 때로는 우스꽝스럽다. 너희들의 시대에 이렇게 거듭난 자들을 보지 못하였다고 해서 내가 성경에 기록한 일을 하지 못하겠는가? 내가 무능자인가? 우리는 전능자이다. 우리는 야곱의 전능자이며 다윗의 엘샤다이다.
나는 율법을 완전케 하러 왔다. 그 완전케 함은 완전한 법을 지키게 하기 위함이다. 이는 완전한 법을 지킬 수 있는 인간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나 예수 안에서 거듭난 자들은 하늘에 있는 우리(하나님)와 같이 완전하여 완전한 법을 지킨다.
그런데 나의 이 말들은 그 시대 백성들에게 천국으로의 항복조건 중 일부로 들렸다. 그래서 그들은 내가 도대체 어떤 뜻으로 팔복의 문장들을 말했는지 귀 기울여 들었다. 그리고 완전한 율법은 무엇인지 그 율법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과연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는 무엇일까? 그들은 긴장과 두려움에 싸였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 이상의 율법을 위한 어떤 것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이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거는 나의 말을 듣고 절망하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길을 찾으려 하기도 했다. 그 시대의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는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현대의 너희는 아마 답을 가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너희들의 답을 적어보라.
( )
아마 너희는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한 의를 말하려 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 답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결국 너희가 말하는 믿음은 절름발이 믿음이요, 결국 행위가 없는 믿음으로 죽은 믿음이다.
과연 내가 믿음에 의한 의를 말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위에 한 내 말이 어떤 문맥 속에서 사용되었는지 파악해야 할 것이다.
완전한 율법을 말한 위 말의 앞에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의 항복문이 붙었다. 사실 팔복의 항복조건은 인간이 따를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의 박해와 관련한 부분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품고 있었다. 모진 박해 속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아야 한다면 일반적인 인간은 신앙을 포기하고 자기 목숨을 지킨다. 또한 영인 우리에 대해 갈급한 가난은 인간에게는 본성을 거스르는 불가능의 영역이다. 인간은 마음에 우리(하나님)를 두기를 싫어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교만하여 복종하기를 거부하며 복종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다. 그런데 이를 잘 알아 듣지 못하고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하여 자기들이 지킬 수 있는 것으로 외곡시키려는 시도를 하는 자들도 있었다.
현대의 너희는 행함이 없는 믿음에 의한 의와 거짓교리문답과 거짓신앙고백으로 인한 의로 천국의 문을 통과하려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말을 완전히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이는 문맥을 살펴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본문(마 5:1~20) 이후로 구약의 십계명과 나 예수의 완전한 계명의 차이를 보였다. 살인과 간음과 맹세와 원수 갚음과 이웃사랑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그 구체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다음 화에 계속-
[^1]: Matthew 19:8 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