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과 가나안(천국) 입성
Matthew 5:21-26 개정
21 옛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구약에 살인에 관한 십계명은 다음과 같다.
출 20:13 개정
살인하지 말라
신 5:17 개정
살인하지 말지니라
마 5:21~26절과 관련된 구약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다. 구약 이스라엘이 천국의 예표인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지켜야 할 것은 바로 살인하지 말라였다. 그러나 실체인 내가 와서 전한 참 천국에 들어오려면 그 정도 기준으로는 들어올 수 없다. 구약은 심령의 변화가 없이도 지킬 수 있는 수준의 계명을 제시했다. 인간의 심령이 악함으로 심령 속으로부터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행동에 국한시킨 계명이었으며, 그 행동에도 어느 정도 사정을 두었다. 그러므로 구약 계명을 지키는 최선의 길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길이었다. 그들은 행위에서는 완벽했다. 그러나 그들은 행위만 완벽한 회칠한 무덤이었다. 겉은 희지만 속은 썩은 시체와 같이 부패한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로는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
그런데 현대의 너희는 심령으로 법을 지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행위로도 지키지 못한다. 그러함에도 감히 너희가 천국의 문턱을 넘었다는 것은 우리(하나님)가 성경에 기록한 모든 기록을 멸시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나는 지금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구원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이란 원수에게서 구해내는 것인데 먼저 사탄, 그리고 세상, 그리고 육신에게서 구원받아야 한다. 사탄과 세상에 대해서는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사실 사탄과 세상에 대해서도 완전한 구원을 받지 못했다. 단지 법적 선포만을 뜻한다. 그러나 여전히 사탄의 종노릇을 하고 세상을 사랑한다. 이 믿음은 십자가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온전히 십자가를 믿으면 그 십자가에서 우리의 원수 된 너희 육신도 못 박히게 된다. 그러나 너희 믿음은 온전하지 못하다.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이 몸은 이집트를 벗어났지만 마음은 여전히 이집트에 있었던 것과 같다. 너희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벗하며 세상의 소욕대로 살아간다. 그러니 너희는 죄를 끊을 수도 죄를 이길 수도 없다. 너희는 돌이켜 회개한 것이 아니다. 단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십자가에 있음만을 안 것이다. 그러나 죄를 이길 수 있는 완전한 힘이 십자가에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알았다면 죄가 너희를 만지지도 못한다. 그렇게 죄에서 돌이켜야 회개한 것이다. 돌이켜 회개해야 참 전향자가 된다. 너희가 마음으로 돌이키지 못했다면 너희는 북한에서는 벗어났지만 그 사상은 전향하지 못해 감옥에 갇힌 미전향 장기수와 같다. 결국 너희는 천국 백성이 될 수 없다.
너희가 이런 상태이므로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세상에게 짓밟힘을 당한다. 너희는 빛이 없으므로 세상에 너희 빛을 비출 수도 없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의 등불도 아니다.
누군가 말을 하면 그 말을 알아듣는 기능이 있어야 한다. 내가 마 5:13~16절에 소금과 빛에 관해 언급한 것에 대해 너희는 소금의 역할이나 빛의 역할에 관해 많이 언급한다. 그것도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말한 그 문장이 뜻하는 바이다. 나는 세상에서 소금의 기능이 짜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사실 더 강조한 것은 그 기능을 상실했을 때에 너희가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세상에게 짓밟힐 것이라는 것이었다. 참 교회는 박해는 당할 수 있어도 세상에게 짓밟힐 수는 없다. 세상도 비웃을 만한 짓들을 하여 세상에게 조롱을 당하는 것이 교회는 아니다. 대형교회 목사들이 첩들을 두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이의 어미와 아내와 딸과 성적으로 더러운 짓을 벌인다. 그 명분이라는 것이 구약의 다윗과 같은 왕들은 첩을 많이 두었다는 것이다. 너희 논리대로라면 성도들도 첩을 두고 창녀들과 동침하며 남의 소유의 여인들을 농락할 수 있다. 구약의 예를 들면 얼마든지 그런 경우들이 나온다. 그래서 그런지 너희 자칭 성도들도 수많은 성적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그뿐 아니라 온갖 더러운 추문으로 세상의 입에 오르내린다.
만약 국회의원이 자신이 받은 합법적 정치자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아내 이름으로 재단을 만들어 그것도 마음대로 유용하고 신문사를 사서 아들에게 주었다면 그 국회의원의 정치 생명은 유지될 수 있는가? 과연 누가 그를 따를 것인가? 그런데 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고도 자기 사모 누구누구는 교회를 세우는데 고생을 많이 했으니 좀 봐달고 한다. 이게 말이나 될 소리인가? 그런데 자칭 교회에서는 그게 가능하다. 국회의원 자리는 세습을 할 수 있는가? 대통령직은 세습이 가능한가? 그런데 목사직은 가능하다. 뾰족 지붕집이 목사의 소유인가? 그것을 묵인하는 성도들은 제정신인가? 또 그것을 받아들여 아버지를 이어 그 교회의 담임이 된 아들은 정상인가?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하면서도 그것이 교회인가? 집사나 장로 권사가 되려면 돈을 뿌려 불법선거를 해야 하고 그것도 모자라 교회에 돈을 바쳐야 한다. 차라리 중세에는 죄를 사함 받으려는 절박함에 면죄부를 사고 돈을 바쳤다. 그런데 너희는 교회 속에 만들어진 세속적 직책을 위해 돈을 바친다. 이 속에는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탐욕이 가득하다. 너희는 탐욕의 종자들이요, 사탄의 씨앗들이요, 너희 행위의 열매가 너희를 증명한다.
이러한 너희에게 과연 살인과 미움에 관해 설명한다고 너희가 내가 한 말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아담과 같이 자신의 죄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죄를 위해 아내를 팔아넘길 것인가? 나의 잘못이 아니라 내 아내의 죄이니 아내를 벌하라고 할 것인가?
어떤 이들은 이것을 곡해하여 자신의 부모와 자식과 아내를 위해 싸워야 할 때에도 멍청하게 주저앉아 방어권을 행사하지 말라는 말로 듣는다. 그래서 그런 이들은 군대에 가는 것을 거부하며 총을 드는 것을 거부한다. 물론 국가가 나치와 같이 미친 교만과 정복욕으로 전쟁을 명한다면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천국의 백성은 모든 전쟁과 싸움과 의분을 거부하는 자들이 아니다. 이 모든 경우들을 성경에 다 기록한다면 세상을 채워도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세상의 싸움과 전쟁이라는 것이 그 모든 경우가 차이가 있고 각자의 입장에도 차이가 있다. 그래서 그 시대의 그 현장에서 각자가 우리에게 물어야 한다. 왜 성령이 너희에게 보혜사로 있는가? 이 모든 경우에 성령이 너희에게 좋은 상담사가 되며 인도자가 될 것이다.
너희는 말할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이 대화를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나 말하는가? 베드로의 글을 읽지 못했는가?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분의 소유된 백성이다(벧전 2:9). 그런데 너희가 나와 대면하지 못한다면 너희가 과연 나의 지성소에서 나의 피를 뿌림을 받은 자가 맞는가? 너희는 과연 담대함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오는 자가 맞는가? 이 성경들도 거부하고 너희가 여전히 우리와 대화하는 자리에 있지 않다면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 아니다. 또는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모른다고 하는 자들도 동일하다. 너희가 그렇게 핑계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의 책임이 아니겠느냐?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눈을 가리고 보지 않는 너희가 그것이 너희의 죄가 아니라고 하느냐? 성경은 산골의 촌부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했다. 사실 역사적인 배경과 해석학적인 도구들이 없이 읽어도 기본적인 구절들에서 너희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단지 몇 개의 난해한 구절들도 너희가 너희 기준으로 그 성경의 말을 억지로 해석하려 하지만 않고 무지함 가운데 그대로 있는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문자적으로 읽고 그 문장 자체에서 말하는 것만 읽어도 거의 문제없이 성경은 해석될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해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맞는가? 우리의 은혜의 보좌에 담대함으로 나올 수 있는가?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그 모든 것은 핑계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에게 나올 수 있는 완벽한 길을 이미 성경에 공개적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핑계하고 나오지 않는 것은 너희다. 우리가 믿음을 주지 않음도 아니다. 오직 너희가 너희 죄악과 탐욕을 즐김으로 우리에게 나오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기도하면 우리가 물세례의 은혜와 불세례의 은혜를 베푼다. 우리는 한 번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구원치 않은 일이 없다. 단지 너희가 찾지 않고 구하지 않고 두드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너희에게 응답할 수 없을 뿐이다. 내가 말세에 믿음을 보겠는가?
마 5:21~26절을 사용하여 상대를 비난하고 싶다면 나는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나는 단지 라가나, 너희 말로 개새끼라는 말을 썼다 하여 그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유대인들 그중에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지도자들을 향해 뱀의 자식(독사의 새끼)이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은 너희가 사용하는 개새끼라는 말에 비해 더 악독한 모욕이다. 항상 말하지만 너희는 나의 말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자들이다. 나는 그 대상에게 맞는 상태의 표현을 하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히틀러나 악마적 존재들을 처단하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자들은 너희가 아니라도 세상도 그것이 필요함을 알아 제거하려 한다. 왜냐하면 그 하나로 하여 수천만의 죄 없는 생명들이 학살을 당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도 악인들이나 악한 나라들은 심판을 당한다. 나는 그것을 정죄하지 않는다. 나는 의분이나 의로운 전쟁을 정죄하지 않는다. 나는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자들과 전쟁하는 자다.
나는 이기적인 미움에 관해 말한 것이고 그 미움이 순간적이 아닌 지속적인 미움일 때를 말한 것이다. 단순히 보자마자 미운 것과 그 미움을 스스로 인식하는 순간 성령을 의지하고 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기도하여 이기지 않는 것과의 차이를 말한다. 그 미움이 성령에 의해 압도당하지 못하고 광기에 어려 춤출 때를 말한 것이다. 이는 겉으로 보이는 위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압도하여 미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미워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다. 사랑하는 척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이 마음을 압도하여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이 미움이요. 미워하는 모든 것은 어둠에 속한다. 사랑이 압도하는 것도 미움이 압도하는 것과 같이 순간이다. 오직 성령만이 그러한 압도하는 사랑을 기도하자마자 부어 영원히 지속하게 할 수 있다. 너희가 미움을 인해 몇 시간을 씨름하고 있다면 너희는 아직도 미움에 속한 존재요. 사랑이 압도하는 존재는 아니다. 너희가 미움을 노력하여 이겼다고 생각하며 눈물도 흘렸으나 여전히 미움이 마음으로부터 솟아 올라오고 그것을 제압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면 너희는 어둠에 속한 자다. 사랑이 압도하는 존재는 기도하는 순간 그 응답으로 인해 사랑이 압도하며 미움에서 순식간에 눈물이 쏟아지는 회개와 사랑이 넘쳐난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너희가 그런 것을 경험조차 하지 못했다면 너희는 하늘나라의 어떤 분깃도 얻지 못한 자임이 분명하다.
너희는 이를 충분히 알 수 있지만 너희 악한 마음이 다른 것에 관심이 있어 나의 말들을 왜곡한다. 역시 너희는 교만한 종자들이요, 악독한 종자들이다. 나는 마음의 중심과 동기에 대해 말하는데 너희는 그 마음과 중심에 대해 관심이 없다. 단지 너희 악하고 추잡한 욕심에 이끌려 상대를 정죄한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들은 모든 순간에 우리의 지혜를 구하며 우리의 대답을 구한다. 결코 자신의 알량한 병든 양심이나 단편적 성경지식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을 아우르고도 그것을 넘어서는 자애와 사랑의 교훈을 우리에게서 듣고서야 움직인다.
너희는 행악의 종자들이다. 너희는 악하여 누군가 너희를 상담해주고 있는데 너희 편을 들기 위해 너희에게 상처를 입힌 인간이나 다른 인간들에 대해 죽여야 할 놈이라 욕했다고 해서 그가 다른 이를 미워했으므로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고 비난한다. 너희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보라. 너희는 상대가 너를 사랑하여 너와 공감하며 한 말에 대해 그 사랑에 대해 너희가 어떻게 대갚음을 하고 있는지 보고 있는가? 너희 뒤틀리고 병든 마음이 너희 눈도 병들고 뒤틀리게 하며 너희 귀와 마음과 뇌도 뒤틀리고 병들게 한다. 그러니 너희 뒤틀리고 병든 것으로 무엇을 하려는 시도를 버리라. 혹 전도자의 이런 흠들을 찾아내고 있는 너 자신을 본다면 그 즉시 엎드려 회개하라. 살고 싶다면 회개하라. 네 마음 안의 악이 전도함을 싫어하고 미워하여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비난을 퍼붓고 있는 것을 보는가? 늘 그렇게 사고가 흘러가서 그것이 정상인 것으로 생각하고 싶은가? 그러나 네가 핑계할 수 있겠는가? 과연 너의 양심이 그것을 모르는가?
모든 성경을 암기하고 성경 신학에 정통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조차 어린아이들이 알아듣던 것조차 알지 못했다. 이는 유대인들이 알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요 8:47). 그들은 자신들의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요 8:44) 내 말을 깨닫지 못하였고 내 말을 들을 수도 없었다(요 8:43). 만일 그들의 아버지가 우리(하나님)였다면 그들은 나를 사랑하였을 것이다(요 8:42). 그들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육신으로 아브라함에게 나서 아브라함의 나라에 있었으나 그들의 마음은 아브라함에게서 나지 않고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어둠의 나라에게 속했다(요 8:39~40). 그들은 그들의 유일한 아버지가 우리(하나님)라고 했으나 그들의 존재적 아비는 마귀였다(요 8:41~42). 현대의 너희가 크게 착각하는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과 제사장들과 전체 유대인들과 너희는 다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 예수를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고 믿는다고 입술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나 그들이나 동일하다. 그들도 우리(하나님)를 아버지라 불렀다(요 8:41). 또한 그들도 나 메시야 즉 그리스도를 믿고 기다렸다. 그들은 아직 오지 않은 나를 믿는다고 말했으며 너희는 이미 온 나를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둘 다 실상은 믿지 않는다. 너희 말이 아니라 너희 행위의 열매가 너희를 증명한다. 만일 너희가 빛가운데 거한다고 한다면 너희가 형제를 사랑할 것이요, 악한 자가 너희를 만지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를 지을 수 없다. 이 말이 너희에게 너무 생소하게 들린다면 너희는 성경을 읽어본 적도 없다. 그리고 읽었다 하여도 나의 의도를 왜곡하여 읽었음이 분명하다.
1 John 3:1-10 개역개정
1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0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9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 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10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요한이 설명한 것은 심령에 악을 여전히 가진 자가 행위를 고치는 수준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 심령의 사랑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심령으로 사랑하면 빛에 거하고 심령으로 미워하면 어둠에 거한다.
그러므로 살인을 금지하는 것과 미움을 금지하는 법의 간극을 누가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완벽하게 율법의 요구를 충족했다. 그러나 그들의 의로는 우리(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 우리의 나라에 들어오려면 행위뿐 아니라 그 마음의 중심에서도 완전한 순종이 일어나야 한다. 그들의 순종은 살인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의 마음에 미움이 없을 수 있다는 말인가? 또 미워하는 자들을 향해 욕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라가 즉 쓸모없는 놈(식충)이나 바보라고 하는 자는 심판을 위해 재판정(산헤드린 공회)에 잡혀가고 결국 지옥불에 던져지게 된다.
이 심판을 피하고 살인과 미움이 아닌 사랑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나의 새 계명은 타락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이는 사람이 자기 옛 자아가 살아있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 옛자아 즉 죄의 사람이 죽어야만 가능하다. 너희는 일반적으로 죄의 사함을 받는 용서와 그리고 죄에 대해 죽음을 배운다. 그리고 죄의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못 박힘을 배운다. 그런데 그것을 법적인 선포만으로 배운다. 실재적으로 죄에 대해 죽어버리는 것이라 배우지 않는다. 내가 너희를 위해 기록한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말들이 아니다. 내가 죄에 대해 죽는다고 표현한 것은 표현 그대로 죄에 대해 죽는 것이다. 너희 시대에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든지 없든지 그리고 너희가 그런 자들을 보았든지 보지 못했든지 상관없다. 어느 시대에나 가나안에 들어가는 자는 이미 자신 안의 죄와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또한 죄에 대해 죽었다. 그러므로 죄가 만지지도 못하고 죄를 지을 수도 없다. 그 수준이 마음의 중심에서부터 형제를 미워할 수 없으며 형제를 자신의 목숨과 같이 사랑한다. 또한 원수조차 사랑하며 원수를 위해 기도한다.
마 5:21~26절에서는 내가 타자를 미워하는 것에 대해서만 언급하지 않는다.
21~22절은 내가 타자를 미워하지 않는 것에 대한 내용이다.
그런데 23~26절은 타자가 나를 미워하고 나를 고소할 이유가 있을 경우에 대해 말한다.
내가 타자를 미워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자도 나를 미워하지 않아야 한다. 이를 위해 형제와 화해해야 한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앞서 말한 21~22의 내용과 같이 재판에 넘겨지고 그 후에는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된다. 21~22절에서는 심판(재판)에 넘겨지고 결국 불타는 지옥(감옥)에 던져진다고 언급되고 있다. 두 부분은 결국 서로 반복대구를 이루고 있다.
사실 내가 사랑하는 것보다 형제가 나를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 더 어렵다. 형제가 나에게 원한을 품고 나를 고소하려고 한다면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은 그와 화해하는 것이다. 즉 그가 더 이상 나를 미워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는 구약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넘어서 형제도 살인하지 않게 하고 미워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의무가 바로 형제에게 있지 않고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형제의 의지를 변화시키는 것은 한층 더 큰 차원의 어려움을 야기한다. 내가 손해를 입혔다면 그 손해를 물어주고 그보다 더한 보상을 하고 사과를 해야 형제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다.
너희는 아마 이 부분을 깊이 생각하지 못해서 이 구절들이 의미하는 것이 상대와 화해하는 것 즉 상대의 마음을 변화시켜 더 이상 상대가 나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게 하는 관계로 회복하는 것임을 생각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단지 세상을 사는 처세술을 말함이 아니라 지켜야 할 계명으로 부과되고 있음도 생각하지 못한다. 형제와의 화해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안에 포함된 계명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행동의 금지에서 마음속까지 미워하지 않아야 함이 부과되고 거기에다 형제의 마음에서까지 미움을 없애야 하는 의무까지 부과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이를 억지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 한다면 형제가 나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을 알고 형제와 원수 사이로 그냥 지낼 수는 없다. 형제가 화해를 거부하더라도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형제 사랑이다. 만약 이를 등한시한다면 너희는 천국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 진정 거듭난 심령은 사랑이 가득해야 한다. 그런 사랑이 가득한 심령은 형제와 미워하는 관계로 그냥 지낼 수 없다. 당연히 불편하고 힘들어하여 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계명으로 명령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견딜 수 없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이것이 거듭난 심령이다.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라면 심지어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더라도 먼저 사과하고 자신의 잘못으로 문제의 쟁점을 돌려서라도 화해한다. 상대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면 이렇게 해야 화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관점이 왜곡되어 있어 모든 문제를 자신이 아닌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경우에는 내가 죄를 뒤집어쓰고서라도 화해를 청해야 할 경우도 있다. 그것이 거듭난 사람의 심령이다.
이런 내용을 산상수훈 시대의 유대인들이 들었다. 그들은 이것이 불가능함을 알았다. 누가 이렇게 살 수 있다는 말인가? 너희 시대에는 스스로를 포장하고 스스로를 속이는 일에 익숙해져서 위의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이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보지도 않은 자들의 자만이다. 정말 계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본다면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자신의 본성이 어떠한가를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산상수훈 시대의 유대인들은 내가 전하는 계명들을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임을 깨달았다.
Matthew 5:27-32 개정
27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31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내가 왜 살인과 간음에 대해 말하고 있겠는가? 이는 구약의 계명과 나 예수의 계명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가를 보이기 위함이다. 나 예수의 계명을 만족하지 못한다면 나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 그래서 내가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오라고 했다.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 그리고 그 회개의 수준이 서기관과 바리새인 수준이면 들어올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의 의로는 즉 그들이 우리(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수준으로는 들어올 수 없다.
간음에서도 동일하다. 단지 행위를 차단하는 것으로는 순종이라 할 수 없다. 마음 자체에서 간음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어야 한다. 구약과 현대의 너희 삶의 차이에서 아내를 하나를 두구가 여럿을 두는 차이는 있지만 간음의 기준은 혼외의 성교를 뜻한다. 혼외정사 즉 간통을 말하려면 혼인에 대해 기준을 세워야 혼외 성교에 대해 말할 수 있다.
01.3.2.3.10.9.5.5.3.2.1. 혼인의 종류
01.3.2.3.10.9.5.5.3.2.1.1. 일부일처제
결혼의 제도는 아내를 하나를 두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질투나 애증 그리고 자녀들의 적서의 차별등의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는다. 왕족이나 귀족의 경우 누가 권력을 물려받는가가 중요한데 그중에서 첫 아내가 가장 강한 집안 출신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주로 정력결혼이었기 때문이다. 정략결혼은 당연히 유력한 집안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랑을 전제로 하지는 않는다. 사랑을 통해 맺어지는 관계는 주로 후처들일 경우가 높다. 이러한 여러 사정들로 인해 가문 내에서도 가문의 상속문제로 다툼이 많았다. 그래서 가장 강한 가문출신의 첫 번째 부인은 자신의 아들이 가문을 물려받도록 법으로 제도화했다. 그것이 적서의 차별이다.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는 이러한 문제들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일부일처제이다.
01.3.2.3.10.9.5.5.3.2.1.2. 일부다처제
유목민들과 같이 남편들이 잦은 전투에서 죽는 경우는 예외다. 유목민의 삶은 약탈과 방어, 그리고 또 다른 사냥의 연속이나 짐승을 사냥하면 고기를 얻는 것이고 사람을 사냥하면 약탈이 되며 약탈을 통해 식량과 여자와 가축을 얻는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잦은 전투를 치러야 한다. 이렇다 보니 유목민들은 여자들에 비해 살아남은 남자의 수가 너무 적다. 그리고 남편이나 아비가 없는 여자는 다른 유목민 집단의 약탈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다. 그래서 남편이 꼭 필요하다. 그렇게 하여 형사취수제나 여러 아내를 두는 제도가 필요했다. 이러한 결혼제도들을 통틀어 일부다처제라 한다.
01.3.2.3.10.9.5.5.3.2.1.3. 일처다부제
또한 중국의 장가게나 차마고도와 같이 극빈의 환경에서는 공동체를 이루어 여자들이 아이들을 공동양육해야 하는 경우들이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여러 남자들이 한 여인을 아내로 두는 경우들이 있다. 이는 경제적 여건에 의한 것으로 한 여자를 한 남자가 부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여자를 여러 남자가 부양해야 한다. 이러한 때에는 일처다부제가 되기도 한다.
01.3.2.3.10.9.5.5.3.2.2. 혼외정사
시대와 장소와 문화적 배경에 따라 결혼의 제도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는 무엇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결혼에서 간음이란 혼인 외의 간통을 말한다. 이는 서로 간에 맺은 혼인언약에 대한 배신이다.
01.3.2.3.10.9.5.5.3.2.3. 혼전 정사
또한 혼전성관계에 있어서도 언약 외의 성관계는 옳지 않다. 이 경우 아이가 생길 경우 문제가 생긴다. 특히 구약이 기술된 배경이었던 중동의 유목민 집단에서는 임신한 여인이 스스로 생존활 확률은 지극히 낮다. 그래서 구약 법에는 남자가 자신의 죄에 대한 배상을 해야 하고 회개한 이후에는 아내와 뱃속의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신 22:28~29). 이는 임신한 여인을 버리는 것은 살인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미 성관계를 가졌던 남자나 여자와 후에 결혼한 배우자들도 이미 배신한 전적이 있는 남자와 여자를 맞게 됨으로 그들의 과거를 알게 된다면 배신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안전한 환경에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리고 성적인 관계도 서로 책임을 질 수 있는 혼인관계 안에서가 가장 이상적이다. 이를 벗어난 성적 관계를 간음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