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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Sep 14. 2024

01.3.2.3.10. 기업을 취한 아들 여호수아 3

여호수아의 연대기

01.3.2.3.10.5. 거짓 아비, 거짓 신앙, 거짓 통치

현대의 너희는 앞에 언급한 요한의 글(1 John 3:1-10)을 정상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죄를 반복적으로 짓고 늘 죄에 지는 것에 대해 핑계하는 여러 이상한 해석들을 내놓는다. 그런데 이런 비정상적인 해석의 이유는 너희가 대부분 거듭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으로 죄의 권세를 이기는 자들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십자가를 믿지도 못한 교회 안의 세상 사람들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다음으로는 십자가를 믿고 성령의 은혜를 맛보았을 수도 있으나 가나안(=천국=하늘나라=나의 통치)에는 들어오지 못한 육체에 속한 자들일 것이다. 결코 나의 통치에 복종할 수 없는 사탄과 죄의 노예들일 것이다.

01.3.2.3.10.5.1. 거짓신앙

그런데 교회에서는 값싼 모조품 구원을 전파여 너희가 구원에 이르렀다고 거짓 선포를 한다. 세례문답을 하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받았다고 한다. 또 교회나 선교 단체에서 구원에 관해 지식적으로 설명을 듣고 형식적 영접을 하면 구원을 받았다는 것도 동일하다. 이는 지식적 동의에 불과하며 참으로 믿는 믿음과는 다르다. 이런 것들은 단지 신앙고백자들[^1]의 사기극이다. 이러니 너희는 앞의 요한의 글(1 John 3:1-10)을 이해할 수 없다.

01.3.2.3.10.5.1.1. 사기적 세뇌

이미 사기적 복음에 세뇌를 당해 있느니 성경 속 요한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신앙고백자들이 사기군이 아니라 거짓신앙이 사기다. 신앙고백자들도 거짓신앙에 속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믿는 것도 자신의 욕심에 부합하기 때문이므로 핑계할 수는 없다. 신앙고백자들은 진정한 구원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지식적 동의 자체가 구원이라 여긴다.

01.3.2.3.10.5.1.1. 사실과 거짓

그런데 단적으로 나(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통곡이 쏟아지지 않는다면 그는 십자가에 대한 믿음이 없다. 십자가의 사건을 듣고 처음에는 눈가를 적시거나 약간 흐르는 눈물이 난 적이 몇 번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그것도 말라버렸다면 그도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 정도는 슬픈 소설을 읽고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또는 역사적인 사건을 읽고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01.3.2.3.10.5.1.2. 사실과 진실

단순히 나 예수의 죽음이 역사적 사건이라 인정하는 것도 구원을 얻는 믿음은 아니다. 그 정도는 나 예수가 죽었을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그리고 제사장과 사두개인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와 상관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십자가의 서건을 직접 보았으므로 그 누구보다 십자가의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믿음이 강했다. 자신이 직접 본 것보다 더 확실한 믿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구원의 출발인 세상을 나오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이와 같이 지식적 동의는 아무 효력이 없다. 그 사건 속에 있는 진실을 알아야 한다. 그 죽음이 누구를 위한 것이지에 대한 진실, 그리고 그 죽음이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고 흘리는 통곡의 진실, 그것이 없는 사실은 아무 효력이 없다.  


01.3.2.3.10.5.1.3. 거짓 사기의 결과:백배 지옥자식
바리새인들은 천국으로 가는 길을 막고 혹 천국자식 하나를 만나면 백배나 지옥자식으로 만든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너희는 알지 못하겠지만 성경에서 내가 말한 이 구절은 거짓신앙의 무서움을 정확하게 간파한 말이다. 저들이 전하는 신앙은 거짓이라 천국을 구하는 자에게 가짜를 전해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올바른 믿음을 가진 자 하나를 만나면 그 갓 태어난 영혼이 지식이 없음으로 자신들의 율법주의와 인본주의와 기복주의를 주입시켜 그것이 신앙이라 가르친다. 그러면 어린양의 피와 그 은혜를 믿고 전적으로 우리를 의지하여 홍해를 건넌 그 백성이 거짓신앙으로 인해 가나안으로 가는 행로에서 탈선한다. 그래서 평생 광야를 맴돌다 죽거나 아니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구원으로 부어진 열심으로 오히려 거짓신앙을 위해 노력한다. 그러면 그는 사도바울과 같이 참된 교회를 핍박하는 핍박자가 되게 된다. 이것이 백배나 지옥자식이 되는 것이다. 거짓신앙은 필연적으로 참 신앙을 대적하게 되어있다. 본능적이며 또한 필사적이다. 그러니 그것이 백배나 지옥자식이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거짓신앙이다. 동일하고 정확한 교리를 가졌으나 그들이 말하는 교리와 말의 참뜻이 다르다. 그것을 가르치는 자도 그것을 배우는 자도 그것이 그렇게 탈선한 행로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다다르는 곳은 광야의 마른 주검이나 아니면 애굽 노예의 비참한 주검이다.


01.3.2.3.10.5.2. 거짓 사기의 역사:거짓신앙의 연대기


01.3.2.3.10.5.2.1. 거짓 신앙의 연유

교회는 왜 이런 지경에 빠지게 되었을까?

01.3.2.3.10.5.2.1. 태초의 참 통치
구약에는 태초부터 에클레스아가 등장한다. 이들은 부름 받은 자들이다. 세상으로부터 나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으로 간 적이 없는 정결한 존재들이었다. 타락 이전이었으므로 그들은 나면서부터 우리와의 사귐에 초대되었다. 삼위 안의 우리(하나님)의 사귐과 그것에 연합한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자손들의 연합은 아름다웠으며 하나 됨으로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다한 사랑으로 세상에는 천국의 평안과 사랑과 공의가 넘쳤다. 인간 안에 있는 우리의 영, 성령이 그들의 마음을 감동하여 지상의 모든 통치가 사랑과 보살핌과 긍휼이었다. 인간의 속에는 성령의 능력이 있어. 언제나 우리와 간이 완전함을 유지했다. 인간 속에 있는 선함이 만유에 흐르므로 만유는 그 자체로 낙원이었다.

사자와 어린양의 관계가 지금과 달랐으며 독사와 아들들의 관계가 지금과는 반대였다. 남녀의 사랑도 완전하여 결혼은 고통이 아닌 행복에의 지름길이었다.

01.3.2.3.10.5.2.2. 뱀의 거짓 통치
그런데 낙원에 고통을 가져온 존재가 있었다. 바로 옛뱀이었다. 그는 우리의 통치를 대적하여 세상에 미움과 도적질과 빼앗음과 멸망을 가져왔다. 이 도적놈은 우리의 지위를 도적질 하기 원했다. 그리고 아담의 지위도 도적질 하기 원했다. 그래서 아담에게서 아담의 지위를 빼앗고 아담이 통치하는 세상에서 이 세상의 임금 즉 신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이들은 우리(하나님)도 죽이고 인간도 멸망시키기 원한다. 원래 남의 것을 완전히 빼앗으려면 상대를 죽여야 한다. 그래야 다시 힘을 길러 빼앗긴 자신의 것을 찾으러 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에 도적질과 빼앗음과 살인이 움터 온 세상이 이런 것이 흘렀다. 통치의 주체가 바뀌어 세상은 낙원에서 지옥도가 되었다.

인간의 마음은 더 이상 선보다 악을 더 선호한다. 마음의 양심의 호소에 의해 선을 따르기를 원하지만 그보다 더한 죄악의 마음이 인간을 사로잡아 타인을 질투하고 미워하며 타인의 재산과 아내와 종들을 약탈하는 짐승들이 된다. 유목민의 생활은 언제나 이러했으며 농경민족의 속에도 언제나 이런 것이 있지만 이미 강력한 지배자가 있어 자신의 탐욕만을 인정하고 피지배민의 탐욕을 억제했다. 사회 질서라는 명목하에 더 이상 위법한 약탈과 살인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속에는 언제나 이와 같은 욕심들이 들끓고 있으며 터져 나와 반역의 꿈을 꾸며 반역을 통하여 나라 전체를 도적질 하는 악이 역사한다.

01.3.2.3.10.5.2.3. 통치의 회복
나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하여 회복의 길은 열렸다. 나를 온전히 믿고 하늘의 능력을 얻은 자들은 그 능력으로 죄악의 통치를 이기고 선과 사랑과 화목의 삶을 산다. 이로서 다시 세상에 우리의 통치가 임하고 그곳은 천국이 된다. 이 천국의 땅에 구현된 일시적 형태가 가나안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타락으로 죽었던 심령에서 깨어나 부흥을 맞으면 그곳에 일시적으로 천국이 임했다. 그리고 선지자나 욥과 같이 개인적으로 우리의 통치를 받음으로 개인적인 천국이 임하기도 했다. 이렇게 우리의 통치 속에 낙원이 임한 곳이 바로 에클레시아다. 한국어 교회의 뜻과는 차이가 있는 우리와 사귐이 있는 공동체를 뜻하는 단어다. 이 에글레시아를 구약적 용어로 설명하면 가나안에 들어온 민족이라 할 수 있다. 민족이나 부족 자체가 공동체인데 온전히 우리와 함께 하여 우리와 대화하며 우리의 심령이 부어져 우리의 뜻을 행하는 자들만이 있는 곳을 뜻한다. 그것이 가나안의 에클레시아다. 이곳에 들어온 자들은 그 심령이 거듭남으로 죄가 아닌 우리의 사랑과 선의 마음이 가득하다. 그래서 그곳은 낙원이다. 낙원 즉 하늘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다. 살아서 우리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요한복음에 남겼다.

John 11:25-26 바른
"내가 곧 부활이고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01.3.2.3.10.5.2.2. 구약과 신약에 드러난 거짓신앙

그런데 태초의 뱀은 여전히 우리의 나라인 낙원이 임하는 것을 대적한다. 적극적으로는 핍박을 통하여 내 백성들을 박멸한다. 그것이 되지 않고 내 백성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면 그때는 전략을 전환하여 그것에게 거짓 신앙을 퍼트린다. 거짓 신앙은 모양은 기독교지만 복음의 능력은 전혀 없다. 그러니 그들은 세상에서 나오는 유월절 십자가의 능력도 없다. 거짓 신앙 안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교인들은 여전히 세상에 속해 있다. 혹 십자가를 믿어 유월절을 거쳐 홍해를 지나더라도 믿음이 없음으로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평생을 광야의 백성으로 떠돌다. 광야에서 엎드러진다. 사탄이 거짓 신앙과 그 거짓 신앙 속의 교회에서 거짓 통치를 한다. 그의 목적은 언제나 동일하다. 속여서라도 빼앗고 자신의 신의 자리에서 통치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태초에 도적질 했던 것을 여전히 유지하여 교회 속에도 세상을 가져와 여전히 자신의 통치를 이어간다.

이렇게 되면 가나안의 에클레시아에 들어갈 수 있는 백성이 없어진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거짓신앙대로 믿어서는 결코 가나안의 에클레시아에 들어서는 문은 열리지 않는다. 마치 가데스바네아에서 모든 민족이 들어가지 못했던 것과 같다. 사탄은 이를 노리고 거짓신앙을 퍼트린다. 그리고 거짓 신앙 안에서 자신이 교회의 신이 된다. 탐욕과 자기 욕망을 위해 비는 자들의 신은 우리(하나님)가 아니다. 자식을 서울대에 보내기 위해 치성을 드릴 때 나타나 응답하는 신은 귀신들 중 하나인 사탄이다.

이들에게는 구약 성경이 이 구절이 그들의 상태를 깨닫게 할 것이다.

Psalms 106:13-15 개정
13 그러나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14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15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이렇게 탐욕에 눈이 먼 거짓신앙인들은 결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 사탄이 거짓신앙을 퍼트리는 이유가 이것이다. 거짓신앙은 구약의 거의 모든 장소에 등장한다. 그 이름을 명백히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내 백성들을 사냥하여 지옥의 올무로 끌어들인다. 구약의 백성들의 타락의 모든 배후에는 거짓신앙이 숨어 있다. 태초의 에덴에서 타락한 하와에게 있었던 거짓신앙은 다음과 같다.


Genesis 3:3 개정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이 구절에서 여자는 자신의 율법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먹지 말하고 했다. 그런데 여자는 자신의 계명을 만들었다. 만지지도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먹지 말하고 했지 만지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여자가 보인 것이 자기 열심이다. 바로 자기 율법을 만드는 거짓신앙인 율법주의다. 자신의 열심으로 자기가 지킨 율법으로 자기를 스스로 구원하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죽을까 하노라'가 우리가 한 말과 다르다고 하지만 이것은 문제가 없다. 죽을지 죽지 않을지 모른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죽는 것이 염려된다고 하는 우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한 표현이었다. 물론 뒤에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죽지 않을 것이라고 믿은 것은 사실이나 이는 시간 상으로 뒤의 일어날 일이다.

Genesis 3:6 개정
여자가 그 나무를 본 즉 먹음 직도하고 보암 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 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 구절에서 여자에게는 탐욕이 임했다. 그 탐욕은 육신의 정욕(먹음직)과 안목의 정욕(보암직)과 이생의 자랑(지혜롭게)이었다(1 John 2:15~16) 이렇게 탐욕에 젖은 거짓신앙을 기복주의라 한다. 자기 탐욕의 복을 구하는 거짓신앙이다.


Genesis 3:7 개정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여기에 나타난 것은 인본주의라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구절에 한 가지 거짓신앙만 등장하지는 않는다. 거짓신앙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그 연합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명을 위해 특징적으로 드러난 것을 강조하여 나타낸 것일 뿐이다. 인본주의의 특징은 자기가 중심이 되고 자신의 지혜를 의지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들은 우리(하나님)가 의도한 대로 자신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벌거벗은 자신들의 모습에 수치를 느낀다. 이는 자기 스스로의 판단과 지혜를 의존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를 의지하는 것이 인본주의다. 그리고 자기 지혜를 의지해 자기 수단을 사용한다. 자신의 하체를 스스로의 방법인 무화과나무로 가린 것이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이고 자기 보호를 위해 스스로 에녹성을 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가인이 현대의 너희에 비해 신앙이 부족한 것 같은가? 너희는 가인과 같이 얼굴을 맞대고 나와 대화하는가? 너희는 너희 죄의 판결을 나에게 직접 받는가? 너희 중 나에게 표를 직접 받은 자가 있는가? 최소한 너희의 신앙보다는 나은 신앙을 가졌다.
그러나 가인의  신앙은 거짓신앙으로 오염되었다.

타락 이후의 바벨에 세워졌던 탑은 인본주의의 극치를 보여준다. 여기서 사용하는 인본주의가 인간을 사랑하는 박애주의와는 다른 용어임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여기서 사용하는 인본주의는 이기적 인간자아중심주의를 말한다.

성경 속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공동체 속에 거짓신앙의 모습은 수시로 드러난다. 구약과 신약에 등장하는 타락한 교회의 모습 전체가 거짓신앙의 발현이라 보아도 틀린 표현이 아니다.

엘리야의 시대에도 이사야의 시대에도 예레미야의 시대에도 거짓신앙은 등장했다. 그 종류와 특징이 차이가 있었고 그 타락의 양상이 차이가 있지만 그 본질은 동일하다. 내 백성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언제나 출애굽조차 하지 못하도록 막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출애굽 했다면 홍해를 건너지 못하도록 그것도 안되면 최종 목적지인 가나안에는 도착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 일을 위해 모든 자원을 동원하며 미친듯한 열심을 낸다. 성경과 교회사를 관찰하면 모두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거짓신앙에 빠져있던 자들은 자신이 참 신앙을 가졌다고 착각했다. 이사야를 톱으로 켜 죽인 자들이나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고 마지막에는 이집트의 얼음 구덩이에서 살해한 자들도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다. 마사다에서 자살했던 유대인들도 자신들이 지옥에서 눈을 뜰 것이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바리새인들도 나 예수를 죽이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을 죽였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부활했을 때 병사들에게 돈을 주고 나의 부활 사실을 숨겼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도 나의 부활을 숨기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적 행위임을 알지 못했다. 거짓신앙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이 거짓신앙인이라는 것을 절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위클리프의 뼈를 욕보인 자들도 얀 후스를 화형 시킨 자들도 자신들이 거짓신앙이며 그들이 참 신앙을 가진 자들이라는 사실을 절대 알지 못했다. 잔느 귀용을 핍박했던 카톨릭과 그에 속한 사제들도 자신들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참으로 거듭난 백성을 죄인으로 몰아 욕을 보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를 열거하면 끝이 없을 것이다. 이를 열거하는 목적은 하나다. 너희 시대의 거짓신앙인들도 동일하다는 것을 너희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심하고 의심하며 우리에게 구해보아야 알 것이다. 당장의 불안이나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성급한 결론을 내리려 한다면 자신을 성급히 지옥불에 던지는 결정이 될 것이다. 그러니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마지막까지 성경이 증거하고 성령이 증거하여 절대확신이 부어질 때까지 구하라. 하늘의 기운이 내려와 자신을 완전히 사로잡을 때까지 구하라.

이런 거짓신앙의 모습은 구약 전반과 신약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신약 이후의 거짓신앙의 구조로 사용된 국가교회 제도를 주장한 자들은 구약의 다윗왕국이 국가교회라고 주장한다. 사실 국가교회의 체계를 만든 자들이 직접 언급했든지 하지 않았든지 상관없이 그들이 국가교회라는 기괴한 구조를 상상해 낸 모티브는 다윗의 왕국이다. 이 왕국은 이어지다가 타락으로 멸망당했다가 다시 회복되기도 했으며 식민지로 전락하기는 하였으나 나 예수가 갔던 시대까지 존속했다.

그러나 구약의 다윗왕국과 분열왕국인 북왕국과 남왕국 모두는 국가교회의 형태를 가졌다. 그러나 사실 구약의 왕국은 에클레시아가 아니었다. 둘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백성과 같은 조직을 가졌지만 사실 그 조직 자체가 에클레시아는 아니었다. 우리를 따르는 순간에는 에클레시아였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를 버리는 순간은 그들은 에클레시아가 아니었으며 그들은 단지 인간 왕국에 불과했다.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멸망당한 것은 에클레시아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인간 왕국이었다. 우리가 다윗에게 다윗의 보좌가 영원하리라고 한 것은 인간의 혈통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통치를 따르는 우리의 나라를 의미함이었다. 바로 에클레시아다. 다른 말로는 하늘나라며 세상이 이름한 교회가 아닌 진정한 참교회다. 가나안이라 상징되는 완전한 믿음으로 세워진 공동체다.

그런데 카톨릭의 초기에 국가교회를 만든 자들이 만들어 천년 이상을 지속하고 아직도 그 잔재를 카톨릭과 개신교회들 속에 남긴 그것 즉 국가교회는 에클레시아가 아니다. 이들이 구약의 이스라엘을 국가교회의 모티브로 삼은 것도 성경해석의 오류다. 같은 조직과 같은 사람들이라도 그들이 우리를 떠나는 순간 그들은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다. 그러니 교회라는 이름도 에클레시아라는 이름도 합당치 않다.

무엇보다 처음에 우리(하나님)가 의도한 구약 이스라엘의 모습은 왕이 다스리는 왕국이 아니었다. 그것을 요청한 것은 자신들의 어리석은 탐욕으로 자신의 길을 찾았던 이스라엘에 의해서였다. 이스라엘에는 이미 왕이 있었다. 바로 우리(하나님)이다. 선지자와 사사들은 우리의 메신저들로 우리의 뜻을 이스라엘에 전달했고 우리와 함께 한 에클레시아인 이스라엘은 우리의 뜻에 순종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나와 자신의 뜻을 전하는 사귐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한 호칭은 왕이 아니었다. 사실 아버지였다. 그리고 남편이며 또한 친구였다. 왕이라는 칭호가 가진 폭력성과 억압성과 약탈성을 우리는 싫어한다. 그러나 세상이 모두 왕국으로 변함으로 너희가 평소에 사용하던 익숙한 단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단어가 왕이었다. 성경에 우리 자신들에 대하여 왕이라는 표현을 쓴 부분들은 이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그러니 구약 이스라엘 왕국적 제도를 모티브로 한 국가교회는 우리의 의도를 완전히 벗어난 기괴한 괴물이다. 절대 에클레시아에게는 어울릴 수 없는 적대적 단어다. 국가교회는 붉은 짐승의 위에 탄 여자다. 세상의 권력 위에 탄 교회가 에클레시아겠는가? 그러니 그 단어를 에클레시아에게 거론하는 자체가 모독이다. 국가교회라는 이름을 표로 붙인 자들은 짐승의 표를 이마와 손에 새긴 자들이다.[^2]


01.3.2.3.10.5.2.3. 신약 이후의 거짓신앙(국가교회=거짓신앙의 조직)

거짓신앙은 아주 오랫동안 교회를 병들게 한 도적들에 의한 것이다. 영혼을 갈취하고 결국 완전히 갈취한 이후에는 지옥으로 보내는 이 도적질은 신약 이후로는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시작된 거짓신앙이다. 교회의 제도 안에 들어와 제도적 의식을 거치면 구원을 얻는다는 거짓의 뿌리에서 시작된 것을 종교개혁자들도 눈치채지 못함으로 뿌리 뽑지 못했다.

거짓신앙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모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중 참 신앙을 죽이고 거짓이 교회 안에 지배적 세력을 유지하도록 하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 바로 국가교회다.

01.3.2.3.10.5.2.2.1. 국가교회란
국가의 권력아래 교회가 지배받거나 교회의 권력이 국가를 지배하는 것으로 둘 모두 국가와 교회가 서로 야합하여 세속적 통치를 한다. 이러한 형태의 교회를 국가교회라 한다.

01.3.2.3.10.5.2.2.1.1. 유럽의 국가교회
국가가 교회의 교구를 정하고 모든 국민을 기독교에 편입시키며 교구별로 목사를 파견하고 기독교세를 걷어 목사들에게 월급을 지급하던 것은 카톨릭이나 개신교나 동일하다. 유럽의 교회들은 모두 이런 모습이었다.

01.3.2.3.10.5.2.2.1.2. 유럽밖의 국가교회
미국이나 아시아와 같이 후대에 선교를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곳은 국가가 직접 교회를 지배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교회가 교황의 지배하에 조직적인 지배 계급제도를 형성한 것처럼 동일한 지배체제를 형성한다. 장로교는 노회와 그 상위에 있는 지방노회와 그 상위의 총회로 구조화된 지배 체제를 가지며 총회장이 그 최상위에 있다. 감리교는 감독들에 의해 지배된다. 이 모든 것이 민주적으로 움직인다고 하지만 여전히 조직에 의해 통제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국가교회의 흔적을 개신교도 지워버리지 못했다.

01.3.2.3.10.5.2.2.1.3. 계시록의 국가교회
이는 국가교회로 세상의 권력을 타고 앉은 음녀와 같은 모습이다. 바로 계시록에 나타난 붉은 짐승을 타고 있는 여자다. 붉은 짐승을 타고 있는 여자는 세상의 권력 중심인 수도의 권력이기도 하지만 로마카톨릭을 뜻하기도 한다. 바로 국가권력과 손을 잡은 교회이며 타락한 세상적 교회다. 이 교회(여자)가 앉은 곳은 물들의 곳이며 타락한 세상이다. 우리(하나님)의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고 죄를 이기며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을 소유한 공동체인데, 붉은 짐승을 타고 있는 교회는 세상과 벗하며 세상을 사랑하는 음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계시록의 짐승과 여자가 상징하는 것은 세상이다. 세상과 사탄과 세상의 권력의 중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세속화된 교회, 마틴로이드 존즈가 말한 화석화된 교회도 그 세상 속에 속하여 세상을 본받아 세상적인 구조와 방법과 권력들이 난무하게 된다.

01.3.2.3.10.5.2.2.2. 국가교회의 시작
01.3.2.3.10.5.2.2.2.1. 콘스탄틴
국가교회의 시작은 콘스탄틴에 의해 시작되었다. 콘스탄틴은 어머니의 신앙을 통해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전쟁에서 하늘에 나타난 십자가나 표적과 같은 어떤 형태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를 통해 군사들의 사기가 올라가고 결국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이후 기독교를 통해 자기 세력들을 하나의 이념으로 묶었다. 나중에 로마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통일 로마의 황제가 될 콘스탄틴은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게 된다. 이를 통해 국가가 공인하여 국가의 통제에 복종하는 교회를 만들었다. 그 체제가 국가교회다.

01.3.2.3.10.5.2.2.2.2. 국가교회의 목적
국가교회는 그 목적이 신앙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제국의 통치를 위한 지배이념으로 기독교를 선택했다. 군대와 행정조직으로는 사람들의 몸을 지배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의 몸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정신까지 지배하고 모든 삶을 통제하고 심지어 자발적 노예로 만들 수 있는 수단이 종교다. 그렇게 인간들의 정신까지도 지배하는 수단으로 기독교는 아주 매혹적일 만큼 탁월한 이점을 가지고 있다. 타 종교와 같이 흩어진 지배력이 아니라 절대적 지배력을 황제에게 가져다준다. 기독교는 유일신과 그리고 그 아래서 절대복종을 요구하는 종교다. 어린양의 피로 신적 생명의 희생을 받은 인간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졌고 그 빚에 대한 채무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생을 드려서 절대복종과 사명을 수행함으로도 겨우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께 합당한 의무를 다할 수 있다.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해도 부족한 것이 기독교의 순종이다. 이것을 잘못된 권력이 사용하면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한 인생 전체를 종교권력 아래 노예화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국가나 사회단체도 이렇게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라는 구호아래 국가의 모든 전 영역을 지배할 수 있다. 황제가 이런 세상적 교회의 정점에 서면 제국의 모든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

너희는 생각하여 보라. 이단의 괴수들이 왜 그렇게 비열하고 악한 사술과 같은 일을 저지르겠는가? 바로 종교권력의 달콤함 때문이다. 일단 자신들에게 누구든지 세뇌당하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착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과 성과 사람의 정신과 모든 노동력을 소유할 수 있다.


01.3.2.3.10.5.2.2.2.3. 거짓교회가 국가에 무릎 꿇은 연유
그런데 교회가 왜 저런 사악한 목적을 가진 자에게 복종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콘스탄틴 황제가 마음 속의 야욕과는 다르게 겉으로는 교회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교회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던 황제 콘스탄틴은 교회의 영웅이요, 실질적인 대표였다. 핍박 중에 있던 교회는 그를 구세주로 여겼다. 그는 해방자였으며 순교의 위협에서 교회와 교인들을 건진 자비의 권력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회는 황제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며 황제의 권력 앞에 복종을 한다. 기독교인들은 콘스탄틴을 위해 전쟁터에서 생명을 바쳐 싸운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믿는 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유일한 황제이며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해 주는 유일한 군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자신들의 생명과도 같다. 혹시 콘스탄틴이 권력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다시 핍박 가운데 순교의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교인들은 황제가 권력을 잃으면 보호할 자가 없어 순교의 자리에 나가야 한다. 또 황제를 위하더라도 황제를 위한 전쟁에서 목숨을 걸어야 할 수도 있다. 어차피 죽음의 위기에 놓여야 한다. 그렇더라도 교회는 어는 것이 교회에게 이익이 되는 지를 판단하여 그것을 따라야 했다. 그 판단의 결과는 황제를 위한 전쟁에서 잠시 위기를 견디는 것이 헛되이 핍박으로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었다. 황제의 편에서 죽음을 각오한 일시적 전투가 지나면 황제의 인정과 세상적인 지위가 보장이 된다. 더 이상 아무 이유도 없이 핍박받으며 헛되이 죽음의 위기에 놓이지 않고 황제의 인정하에 정상적인 월급과 지위를 보장받고 합법적으로 기독교인으로 살 수 있다. 그리고 또 황제를 위한 전쟁에 나가, 기독교의 대적인 핍박자들을 제거할 수 있다. 황제가 기독교를 지배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으므로 교회 안에서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쥘 수도 있다. 교회 안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세상적인 부와 권력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된다.

콘스탄틴이 카톨릭의 성인으로 추대대어 숭배를 받고 있으나 그는 카톨릭의 성인일 뿐 나(예수님)의 나라와는 상관이 없는 자다. 그가 한 인을 기독교인들의 핍박을 줄여 준 것이 아니다. 단지 핍박으로는 더 이상 걷잡을 수 없는 에클레시아의 들불을 교회의 배교를 통해 막은 배교의 짐승이었을 뿐이다. 그도 여전히 짐승의 열과 일곱에 속한 세상의 왕이었을 뿐이며 결코 기독교 열왕에 드는 구세적 인물은 아니었다. 카톨릭에서 성인으로 추대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참 에클레시아의 관점에서는 가장 흉악한 대적들의 괴수들이다. 사탄과 그의 하부 조직에 의해 세상에 출현한 적그리스도적 영을 받은 짐승의 세포들이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는 참 에클레시아를 사멸시켰으며 우회적으로는 성경적 복음이 아닌 것을 교묘히 들여와 교회를 변질시켰다. 서구 교회는 이러한 변질을 통해 중세 전체가 지옥으로 들어가는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 중세는 교회가 국가였으며 국가가 교회였다. 유럽 전체가 교회가 되었으나 교회라는 명패만 달았을 뿐 그 명패는 사실 적그리스도의 표가 되어 모든 이들은 지옥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가공할 사탄이, 그리스도인 나를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이, 한 일이다. 그런데 그들이 가진 구습과 구조와 신학을 그대로 가진 개신교회가 과연 개혁되어진 신앙을 가진 개혁된 신앙의 교회인가? 카톨릭은 말할 필요도 없다.

01.3.2.3.10.5.2.2.2.4. 개혁의 유일한 해답
개혁된다는 것은 건물로 비유하면 지상의 모든 건물을 허물고 그 잔재를 버리고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땅을 기경하듯 땅속의 부패한 잔재들의 기초들도 뿌리 뽑아 버리고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건물의 거의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외장재 일부와 간판을 교체하는 것은 개혁이 아니다. 개혁이라는 것은 완전히 정화된 상태에서 그 시대에 우리(여호와 하나님)로부터 부어진 새 감동에 의해 새롭게 되어짐을 말한다. 그리고 또 세대가 흘러 그 새롭게 하였던 것도 화석화되면 그 화석화된 곳에서 빠져나와 또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이 말은 모든 진리를 버리고 이단이 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진리와 그것을 담은 성경은 언제나 영원하다. 그러나 인간들이 그것을 통해 그 시대에 체계화시킨 오류가 있는 교리라는 체계는 언제든지 성경을 통해 다시 세워져야 한다는 말이다. 프로그램을 코딩하는 자들은 잘 알 것이다. 또한 운영체제를 운영하는 IT업계의 베테랑들이나 개인 pc의 시스템을 관리하는 초보자들도 잘 알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여 오류가 누적된 운영체제나 어플들은 차라리 완전히 지우고 새로 셑업(setup)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완전히 정화된 상태로 순결한 코드들을 새로 주입하여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와 같은 인간 구성원으로 된 조직은 그 어떤 시스템보다 난해하고 복잡하다. 그러니 옛 시스템을 버리고 언제나 진 밖의 회막을 찾아 새롭게 재건(reset, rebuild)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사실 진 밖의 회막 외에는 해답이 없다.

그래서 모세의 시대에도 타락한 이스라엘의 진을 벗어나 진 밖에 회막(성막)을 세웠다. 엘리야의 시대에도 이스라엘을 벗어나 다시 시내산(호렙)으로 나아가 새로운 만남으로 새롭게 시작하여 새 시대의 왕들과 새 선지자를 세웠다. 또한 나 예수의 시대에도 유대 예루살렘의 중심을 벗어나 갈릴리의 무지랭이들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에클레시아로 새롭게 하였다. 그 후 또 유대인의 구습에 매여있는 예루살렙 교회 밖의 안디옥 교회를 새롭게 하여 세계 선교의 전진기지로 세웠다.

지금 다루고 있는 여호수아의 시대에도 죄악이 관영한 가나안 7 족속을 완전히 멸하고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새롭게 세웠다. 또한 12 지파도 광야에서 완전한 죽음을 통해 새로운 세대를 세워 새롭게 하였다.

이렇게 모든 세대에 새롭게 하여 다시 살리는 부흥(Revival)이 부어짐으로 나의 나라는 순결함으로 존속하였다.

그래서 오늘 너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다. 이 시대에 내가 새롭게 하는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깨어 있어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러했듯이 귀를 열고 항구에 나가 세계의 소식들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가 어디에서 일하는지 유심히 살펴 개인적인 성령의 인도를 따라 우리의 일에 협력해야 한다. 


그러니 먼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어 우리와 만나 사귀는 사랑(신부, bride)이 되자. 그리고 우리의 속삭이는 바람을 따라 바람이 되어 열방으로 불어 우리의 소리와 우리의 눈물이 되자. 그곳에 씨앗으로 또는 풀뿌리로 부어져 어느 날엔가 타오를 들불의 불소시개가 되자.



[^1]: 죠지 폭스가 자신의 일기인 저널에서 사용한 용어. 진정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교리문답적인 지식 습득만을 한 자들을  의미한다. 진정한 신앙고백이 있는 자는 의심이 없는 절대믿음만이 존재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느 곳에서도 의심이란 있을 수 없다.  십자가와 부활과 죄사함과 구원에 대한 티끌만 한 의심이라도 일어난다면 그는 아직 믿음이 없는 자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신앙고백이란 확고부동한 절대믿음을 말한다. 그런 믿음은 세상에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자들은 자신의 세대에서는  유월절을 통과하여 광야에라도 나온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광야의 백성조차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애굽의 백성으로만 구성된 기독교  공동체밖에 그 세대에는 없다는 말이다. 즉 기독교 공동체조차도 애굽에 속한 세상의 사람들로만 가득 찼다는 것이다. 세상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그런 믿음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것이다.


[^2]: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계시록은 1세기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것이 1차적 목적이다. 그리고 계시록의 계시들은 1세기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특정인이나 1세기 만의 특정사건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계시록은 조금 더 근원적이고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근원적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의 표라는 말도 특정 단체나 특정인이나 특정한 모양에 국한한 것이 아니다. 여러 시대에 적그리스도의 영이 활동을 하였고 그 시대에 적그리스도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단어다. 적그리스도는 1세기에나 말세기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특정인을 지칭하지도 않는다. 단지 나(예수 그리스도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자들(세력)을 뜻하며 그렇게 대적하는 개인들을 뜻한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상징들을 특정 사건들에 적용시키되 단지 그 사건에 유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계시록은 1세기에도 현재였으며 중세에도 현재였다. 그리고 현대의 너희들에게도 현재다. 이를 모르고 샛별이 떠오르기 전에 성급한 결론을 내린다면 어리석음에 빠지게 될 것이다. 계시록은 7이 다중으로 사용되어 다층적이며 점층적 반복구조로 되어있다. 이와 같이 그 적용도 다중적 다층적이다. 그러므로 그적용과 해석이 어린아이들에게는 쉬우나 학자들에게는 난해하다. 그러므로 겸손한 어린아이가 되어 그 해석의 결론을 유보하고 찾고 구하는 자세로 있는 자들이 지혜로운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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