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의 연대기-가나안(천국) 정복=우리의 통치=하나님의 나라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은 우리(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가져오는 것이다. 한 개인이 자신의 영역에 우리의 통치를 가져오는 것이며, 또한 개인이 모인 공동체가 자신들의 영역에 우리의 통치를 인정하여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곳은 우리(하나님)의 나라가 된다. 우리의 나라는 하늘나라다. 한자로는 천국이라 한다. 이것이 정확한 천국의 의미다. 이 땅에 이미 우리나라가 와서 우리(하나님)의 나라는 확장이 된다. 죽어서 천당에 들어간다는 불교나 타 종교의 거짓 천국과는 확연히 다른 개념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살아서 우리(하나님)를 만나 영원히 함께 하며 우리의 통치를 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나라에 들어왔으며 우리나라의 백성이다. 그들의 죽음은 잠시 육신을 벗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육신 속에 있을 때에도 그리고 육신을 벗은 후에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여 하늘에 속한 거룩한 자들이다. 이들은 에녹과 같이 우리와 동행하며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같이 우리와 함께 거니는 동산에 존재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우리와 함께 마시며 우리와 함께 살며 길을 걸으며 대화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우리의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이들은 우리와 함께 먹고 우리를 따라 초장을 찾고 쉴만한 물가를 찾는다. 그들은 마치 바람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성령을 따라 이동을 하며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다. 이들을 성도라 부른다.
지금은 성도가 아닌 자들을 성도라 부르는 거짓 기독교 신앙이 세상에 편만하여 있다. 저들은 자칭 기독교라 부르나 그들의 실상은 사탄의 회요.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인의 회이며 또한 가인의 길을 따라간 발람의 회이다. 이는 저들이 거듭나지 못한 심령을 가졌기 때문이다. 저들은 죄를 이길 능력이 없고 죄를 이기고 싶은 마음도 없다. 저들은 중세의 암흑기를 만든 카톨릭에 속한 자들이요. 국가와 결탁한 국가교회 형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독일국가교회며, 영국국교회며 스코틀랜드국가교회(장로교회)다. 그들 중 잠시 빛을 받은 자들이 있었으나 그들 중 대부분은 여전히 중세의 어둠을 벗어나지 못한 무지몽매한 자연인이요. 죄인으로 태어난 죄인이다. 그 시대들에도 진정한 빛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골짜기와 산지와 토굴과 지하굴에서 핍박을 받았으며 도살당하는 양과 같이 죽임을 당했다. 그들은 왈도파였으며 또한 재세례파였으며 수많은 순교의 피를 흘린 화형 당한 자였으며 수장당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참 오순절의 불의 혀와 같이 임한 성령에 의해 거듭남을 주장했고 부활을 기다렸기에 그 징벌로 부활할 수 없도록 그 몸이 불에 태워졌다. 또한 그들은 거짓교회가 준 신앙고백 없는 세례는 거짓이라 주장하여 재세례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세례와 같이 물에 강제로 잠기어 수장을 당했다. 그들은 지상의 국가교회에게 핍박을 당하여 도망하는 모세의 후예들이었으며 도피의 끝은 나 예수와 같이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세에도 부활할 수 없도록 육신을 불에 태우는 화형을 당했다. 그러나 나 예수는 단언하고 단언한다. 그들은 반드시 부활할 것이며 그들의 태워진 육신은 반드시 마지막 날에 첫째 부활로서 살아날 것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믿은 바 된 죽은 자를 살리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는 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죽은 자를 그 타버린 재에서도 다시 살려내는 생명의 주다. 나의 성도들은 작은 자였으며 작은 무리였다. 영생에 이르는 길은 그 길이 협착하고 험하여 그 길을 찾는 자들이 적다.
우리의 나라는 단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율법을 준수하는 자들에게 임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의 나라가 임하는 조건은 단순히 교회에서 세례문답을 하거나 선교단체에서 복음전도를 받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또한 우리의 존재를 믿고 우리를 두려워하는 자들도 그 기준에는 부족하다. 심지어 위대한 기적을 경험하고 물 위를 걸으며 태풍을 소멸하고 태양을 멈추는 믿음으로도 부족하다. 십자가를 믿고 그 구원을 믿는 것으로도 그 기준을 채우기에는 부족하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라고 알려진 모세와 첫 제사장 아론도 그 기준을 채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조차 가나안(우리의 통치)에 들어가지 못했다. 심지어 신인 내가 인간으로 온 모습을 보았으며 그 신적인 수많은 기적들을 목도했으며 나(예수님)와 함께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도 그 기준에 들지 못했다. 제자들 중 나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 도망가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렇게 도망갔다가, 그나마 나를 끝까지 군중 속에서 숨어서 따른 이가 요한이었다. 그러나 요한도 처음에는 도망쳤다. 육체 속에 있는 인간 중에는 아무도 나를 따를 수 있는 자가 없다. 우리의 통치를 따라 우리에게 복종할 수 있는 육체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여자에게서 난 자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날 수 없고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도 요한보다 크다고 했다. 이 말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 말의 참 뜻은 인간 즉 자연인으로서의 인간과 천국에서 난 자들은 다르다는 말이다. 이 땅에서 첫 아담의 죄를 따라 난 자들은 죄성을 타고 난 자들이라 죄를 이길 수도 없고 우리(하나님)와는 다른 속성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결코 죄가 아닌 우리의 거룩과 사랑과 정의를 기뻐하고 그것을 따라 살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부패하여 자기 스스로의 의만 높이며 거짓으로 의로운 척하지만 실제로는 사랑의 나눔과 베풂이 아닌 자기 욕심을 따른 도둑질과 착취와 시기와 질투만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와 함께 사랑할 수 없다.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이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다른 이의 좋은 것은 빼앗아서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악마적 존재들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선하며 좋은 존재들이라 칭찬받기를 원한다. 자기를 높이며 자기를 꾸며 다른 이들에게 자랑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자신을 광명의 천사와 같이 포장하여 자랑하기를 기뻐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죄를 변명하며 핑계하고 자신의 죄를 가리기 원한다. 아담의 본성대로 그 삶을 그대로 이어간다. 큰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거듭나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통치에 들어온 증거다. 우리의 통치란 성경적 용어로 우리(하나님)의 나라다. 구약적으로는 가나안이며 가나안에서 우리의 길을 온전히 따르는 왕이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가장 비슷하게 만든 시절이 다윗의 시대였다. 신약에 내가 육신을 입고 간 이후로는 참 나라가 드러났는데 하늘나라의 왕은 나 예수다.
너희 모두는 성경을 읽으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이후의 베드로와 그 이전의 베드로가 전혀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다윗에 대한 기록은 다윗이 이미 거듭난 이후의 기록이므로 다윗의 삶은 거듭난 자의 삶이었다. 다윗은 우리(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불신앙을 찾아보기 힘든 인물이다. 잠시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바로 회개하여 돌아와 우리의 마음과 하나 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우리와 한마음이었으며 그의 마음에는 성령이 충만하여 거룩과 공의와 사랑이 넘쳤다. 그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보호하며 예루살렘을 축복하는 시편을 쓰기도 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 성경에 등장한다. 불평과 불신앙의 통곡으로 그 모습이 성경에 등장하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엎드러진 모세와 아론과는 대비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우리를 알고 우리를 신뢰하며 그로 인해 우리의 명령과 우리가 인도하는 길을 기뻐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모세 오경의 출애굽기 이후에 여러 번 등장하는 것처럼 우리의 명령을 거역하며 불신앙으로 인한 거역을 드러내었던 인물들이다. 심지어 우리가 명확하게 그들의 거역과 죄를 꾸짖었지만 모세는 자신의 죄를 기록에서 축소은폐하는 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성경 안에는 명확하게 그 증거가 남아 그들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가나안(하늘)의 사람 즉 우리의 통치를 받는 사람은 그 속사람이 거듭났다. 그래서 더 이상 죄가 그들의 마음을 지배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빛에 속하여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요일 5:18) 그들은 우리의 주권과 우리의 능력으로 거듭나 새 마음(성령)으로 충만한 자들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유일한 증거는 그 안에 거룩이 거하는 것이며 육신의 탐욕을 이기고 승리하는 능력이다. 이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자신들의 노력으로 씨름하는 자들이 아니다. 믿음으로 우리를 바라보아 성령의 능력으로 즉각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자들이다. 이들의 심령은 죄를 미워하며 자기 속을 가장 잘 감시하여 그 마음을 우리의 소유로 온전히 드리는 자들이다. 이들은 요한 웨슬리가 만난 모라비안 교도들의 모습으로도 나타나며 거듭난 요한 웨슬리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요한 웨슬리가 지나간 지 50년 이상이 지나간 마을에서도 술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처럼 강력한 것이 거듭남이다. 결코 죄가 만지지도 못하며 죄를 이기는 정도가 아니라 거룩이 그 안에서 완전한 승리를 얻어 그 속이 강성한 진리의 요새가 된 자들이다. 이들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성령)으로 가득하여 우리의 마음과 이심전심의 연합을 이룬다. 그래서 온전히 우리를 따르는 자들이 된다. 그 모습의 표본이 내(예수)가 땅에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성부에게 온전히 복종한 것이다. 모든 거듭난 자들은 내 안에서 온전한 복종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인간이나 어떤 다른 곳을 기원으로 하는 능력에서 나지 않는다. 인간의 능력과 노력의 가장 최상의 모습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이다. 그러나 그런 자들의 마음은 거듭나지 못했다. 그들의 행위는 인간이 보기에 완벽해도 그들의 마음은 죄로 가득하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나라에 들어오는 믿음은 인간의 모습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우리(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의 나라에 속한 자들은 우리가 완전한 것같이 완전하다(마 5:48) 이러한 기준으로 보면 순복음의 삼박자 구원은 구원이 아니다. 오직 성공신학에 기초한 기복주의에 불과하다. 또한 일반적인 교회 안의 거의 모든 이들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지옥의 불길에 속한 죄인일 뿐이다. 거의 모든 기독교의 역사라고 기록된 역사의 집단들이 기복주의와 인본주의와 율법주의와 신비주의에 빠진 거짓신앙의 집합체들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천국 즉 우리의 나라, 우리의 통치에 이르는 길은 그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들이 작다.
앞의 여러 장에서 모세와 아론이 왜 광야의 사람들인가에 대한 성경의 증거를 보였다. 이제는 그들과 대비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통해 가나안(우리의 통치)에 속한 자들의 믿음이 어떠한가를 보이겠다.
여호수아의 등장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였다(출 17:9, 10, 13, 14) 므리바의 반석에서 물을 마신 후 아말렉이 르비딤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싸웠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사람들을 택하여 아말렉과 싸우라고 했다. 모세 자신은 아론과 홀과 함께 산 꼭대기에 올라갔다. 모세가 두 팔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그 팔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겼다. 이 모든 과정에서 칼을 들고 아말렉과 싸우고 아말렉을 무찌른 것은 여호수아였다. 이 사건에서 아말렉은 멸하여져 그 이름을 이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당시 여호수아는 이미 에브라임지파의 우두머리였다. 또한 백성을 이끌어 전투를 지휘하는 대장의 역할을 했다. 이렇게 전쟁에서 직접 칼을 들고 싸우는 장수의 역할을 감당할 정도로 이미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안에서 알려져 쓰임을 받고 있었다. 또한 민 11:28절에 여호수아는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기도 전에 이스라엘 70 장로에 포함되어 있었다.
여호수아는 이 전투 이전에 이미 성년이 되었으며 이미 이집트에서 일어난 모든 기적들과 우리의 일들을 지켜보았다. 또한 믿음으로 홍해를 건너고 갈렙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갈 거듭난 믿음을 가진 유일무이한 둘이었다. 이 둘 중 리더가 여호수아였다. 그의 믿음은 모세를 능가했으며 이미 땅의 사람인 율법의 종, 모세는 따를 수도 없는 하늘 사람의 믿음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율법 아래에 수종을 들며 율법의 사람 모세에게 복종하였다. 이는 우리(하나님) 통치의 기본적인 질서에 복종함이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의 죽음으로 그 질서의 대표가 되어 하늘의 통치를 땅에 가져오는 자가 되었다. 그가 리더가 되었을 때 비로소 이스라엘은 하늘에 속한 믿음을 가진 공동체가 되었다. 전체의 믿음이 모두 그러한 것이 아니라 오직 리더의 믿음을 따라 공동체가 예표적 형태의 하늘 군대가 되었다.
여기서 예표적 형태라는 것은 구약의 가나안 정복의 세대들은 미래에 나 예수를 통해 이 땅에 나타날 오순절 부흥의 세대를 예비적으로 상징하는 구약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을 가졌으며 세상을 두려워 떨게 할 기적을 부음 받은 세대들이었다. 사도행전의 사람들은 지옥의 불길보다 더 뜨거운 사랑이 부어진 부활의 군대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생의 군대였다. 그들은 순교의 피를 이어서 땅끝으로 나가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오순절에 옛사람이 죽고 새 피조물로 태어난 베드로는 예수님을 죽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온 이스라엘의 권력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말했다.
"이 예수님은 '너희 건축자들이 버렸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 이시다. 다른 이에게서는 구원이 없으니, 천하에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보다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인지 판단해 보아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행 4:11~12, 19~20)"
죽음이 두려워 계집종 앞에서조차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는 이제 더 이상 없다. 그 옛사람은 죽었다. 오직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난 하늘에 속한 존재만이 이제 살아있다. 이제 베드로는 새피조물이다. 그는 세상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으며 오직 우리의 말만을 듣는 하늘의 통치를 받는 자다.
여호수아는 처음부터 믿음의 용사로 전투의 리더다. 그는 싸워서 이기고 이기고 이길 승리의 교회를 이끄는 리더였다. 모세와 아론은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우리의 길에서 퇴보하는 모습들을 때때로 보였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결코 전장에서 물러남이 없는 불퇴의 용장들이었다. 성경에서 너희는 여호수아가 우리에게 불평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또한 여호수아는 시내산에서도 모세와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출 24:13) 십계명의 돌판을 받으러 올라갈 때도 여호수아가 함께 했고 십계명 돌판을 받아 내려올 때도 여호수아는 함께 했다(출 32:17) 모세가 분노하여 돌판을 깨버렸을 때도 함께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진 중을 떠나 회막(the tent of meeting)을 진 밖에 세웠을 때에도 그 회막을 떠나지 않았다(출 33:11) 그는 우리에게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는 모세를 보았다. 또한 새 돌판에 십계명이 새겨진 것을 보았고 성막과 지성소가 세워지는 것을 보았다. 여호수아는 모세와 동일한 시간대를 살아가며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빠짐없이 경험한 자다. 또한 그 모든 곳에서 믿음으로 반응하며 믿음으로 우리의 길을 따랐던 자다.
가데스바네아에서는 모세와 아론조차 믿음으로 서지 못했다. 그들은 밤새도록 원망으로 통곡하여 엎드러진 이스라엘과 함께 엎드러졌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의 옷을 찢으며 이스라엘의 믿음 없음을 책망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가나안으로 올라갈 믿음을 나타내었다. 그 결과 그 세대의 20이 넘은 성인 모두가 심판을 당하여 광야에 엎드러졌으나, 오직 둘은 가나안을 정복하는 정복자가 될 것임을 약속받았다.
거듭난 믿음은 이런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오직 둘만이 믿었다. 전 민족이 모두 틀리고 오직 둘만이 맞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전 세계가 다 틀리고 오직 둘만이 옳을 수 있는가? 그것만이 참 신앙이다. 영생에 이르는 길은 그 길이 협착하고 험하여 찾는 이가 적다. 나 예수가 땅에서 십자가를 질 때에는 오직 나 홀로였다. 나와 함께 하던 모든 자들이 두려워 나를 버리고 떠났다. 그곳에서 나를 위해 울던 나의 육신의 어미, 마리아와 그 옆을 지키던 요한이 있었으나 그들도 내가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그들은 내가 죄인으로 몰려 십자가에 신성모독자가 가는 참담한 길을 억울하게 가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도 육신에 속한 나는 그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그 마지막에 함께 한 요한을 나는 잊지 못한다. 나는 나의 육신의 어미 마리아를 그에게 부탁했다. 그는 나의 어미의 아들이 되어 어미를 보호할 자였다. 나는 그가 그러한 자임을 알았기에 사랑했다. 그러나 나의 어미와 요한도 내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때 근원적으로 혼자였다. 그날 나는 혼자였다. 그때는 그랬다. 이와 같이 너희 세대에도 혼자인 자들이 있다. 사명은 각자요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 말한 최춘선도 어느 노숙자의 주검의 길을 홀로 갔다. 이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 모양과 실존했던 시대는 가지 각색이지만 그들은 홀로 우리의 길을 온전히 따랐다(민 32:12)
여호수아는 이미 가데스바네아에서 자신이 가나안 정복자임을 보였다. 갈렙도 동일했다. 그들은 믿음으로 말하였고 그 믿음을 증거 했다. 또한 그들은 거역한 광야의 백성들과 동행했지만 이미 거듭난 심령을 가진 가나안 정복자였다. 그들은 광야의 40년을 불순종의 백성과 같이 보냈지만 그들은 불순종의 아들이 아니요 오직 기업을 얻을 아들의 믿음으로 살았다. 그들은 거듭난 자였으며 이미 그들은 가나안을 정복한 자로 광야에서 살았다. 땅의 구획이 어디든 상관이 없다. 심지어 지옥에서라도 믿음의 사람들은 그 믿음을 입증하여 천국의 통치를 받는 자들이다. 그들의 DNA는 거듭난 여호수아의 DNA다. 그 여호수아의 DNA를 가진 자들이 여호수아의 세대다. 구약은 온전하지 못했지만 오순절 이후에 거듭난 자들은 각자가 이 DNA를 가진 자들로 그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자들이다.
이들의 시대에는 성령을 통하여 수많은 자들이 정복된다. 바로 오순절에 일어난 수백수천의 회심자들의 무리가 돌아온 것이 그러한 정복이다. 가나안 정복자는 부흥을 이끄는 부흥의 기수요. 천국의 추수군이다. 이들은 천국을 침노하는 자들이다. 이로서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 이러한 자들이 역사에 기록되었는데 부흥의 기수로 쓰임을 받은 자들이었다. 이들은 사람들의 심령을 깨트려 그 어둠의 옥에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자들이다. 사람들이 갇혀있는 자기 어둠의 마음에서 그 감옥문을 파하고 그들을 강력한 능력으로 해방시키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있는 곳에는 강력한 천국이 침노(侵擄)한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침노하는 자들의 것이다.
이런 자들은 결코 환경이나 자신들의 처지에 따라 판단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로 인해 좌절하거나 그 전진을 멈추어 후퇴할 자들이 아니다. 믿음으로 전진하여 돌파하는 자들이며 그들은 우리를 의지하여 적의 담을 넘으며 적진을 누빌 자들이다. 저들은 두려워 떠는 약자들이 아니요 저들은 약탈하는 정복자들이다. 저들은 영혼을 어둠의 감옥에서 약탈하여 천국으로 이끄는 침노하는 무리다. 저들 앞에는 거대한 거인도 높은 성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저들은 믿음의 무기로 적의 철병기를 대적하는 다윗이다. 그의 손에 무엇이 있든 그 무기가 모든 무기를 능히 이긴다. 이는 그가 믿는 자가 바로 우리 여호와이기 때문이다. 전능자를 믿는 자는 결코 두려움이나 패함이 없다. 싸워서 이기고 이기고 이길 승리의 길만이 그의 것이다. 죽음도 그를 막을 수 없는 것은 죽음도 그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죽음을 이기고 승리할 부활의 생명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의 길은 승리의 길이었으며 이기고 이기고 이기는 침노하는 무리의 길이었다.
나는 모세와 아론과 같이 두려워서 후퇴하는 자들을 기뻐하지 않는다. 나는 믿음으로 전전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기뻐한다. 그러한 자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여호수아 세대의 리더들이다. 이들의 믿음은 인간에게서 난 믿음이 아니다 오직 우리에게서 난 믿음이다. 여호수아는 그 믿음으로 가나안을 정복하는 자다. 그는 광야의 40년 동안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이미 우리의 나라에 들어와 있었다. 가데스를 떠나 에돔을 돌아서 바란으로 그리고 모압평지로 가는 여정에서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정복명령을 거역한 자들은 모두 광야에서 엎드러졌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살아서 가나안에 들어갔다. 요단을 건넌 유일한 자가 여호수아와 갈렙이었다.
모세와 아론은 지속적으로 불평과 거역을 일삼았다. 그 자신이 기록하여 상당 부분 미화되고 또 은폐되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이러한 것이 드러난다.
모세는 첫 우리와의 대면에서도 불신앙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는 그가 절망에 이른 상태였으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모세는 12번 이집트에서의 기적을 행하는 우리와 함께 하면서도 계속 불신앙과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는 광야에서 업드러진 백성들과 다를 것이 없다. 다음의 성경을 읽으면 모세가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였으나 그도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죄인) 임을 알 수 있다. 밑줄이 쳐진 부분에 모세의 불평과 불신앙이 언급된다.
Exodus 5:19-23 바른
이스라엘의 작업반장들은 "너희가 매일 만들어야 할 벽돌 수량을 줄이지 마라." 하는 말을 듣고 자신들이 곤경에 빠졌음을 알았다. 그들이 바로에게서 나올 때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세와 아론을 그들이 만났다. 그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당신들을 보시고 심판하시기를 바랍니다. 당신들이 우리를 바로의 눈과 신하들의 눈에 혐오스러운 것이 되게 하고, 우리를 죽이도록 그들의 손에 칼을 주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왜 이 백성들이 학대를 당하게 하십니까? 도대체 어찌하여 저를 보내셨습니까? 제가 바로에게 가서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후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욱 학대하였으나, 주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전혀 구원해 주지 않고 계십니다."
Exodus 6:10-12 바른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이집트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의 땅에서 내보내게 하여라."
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말하였다.
"보소서, 이스라엘 자손도 제 말을 듣지 않는데, 어찌 바로가 제 말을 듣겠습니까? 저는 입술이 둔하여 말을 잘하지 못합니다."
Exodus 6:30 바른
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말하였다.
"보소서, 저는 입술이 둔한 자입니다. 바로가 어찌 저의 말을 듣겠습니까?"
Exodus 17:1-4 바른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신 광야를 떠나 그들의 여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마실 물이 없었다. 백성들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였다.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십시오."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그곳에서 백성들이 목이 마르므로 물 때문에 모세를 원망하며 말하였다.
"왜 저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와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합니까?"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말하였다.
"제가 이 백성들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이 조금만 더 있으면 저에게 돌을 던지려 할 것입니다."
Exodus 32:15-19 바른
1모세가 돌아서서 산에서 내려왔는 데, 두 증거판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고, 그판들의 양면, 곧 이편과 저편에 글자가 쓰여져 있었으니, 그 판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그 글자는 하나님께서 그 판들에 새겨 쓰신 것이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의 떠드는 소리를 듣고 모세에게 말하였다.
"진 가운데서 싸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모세가 대답하였다.
"이것은 승리를 외치는 소리도 아니고, 패배를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다. 내가 듣기에 이것은 노래하는 소리이다."
모세가 진에 가까이 가서 송아지와 춤추는 것을 보고서는, 진노하여 그의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 버렸다.
Numbers 11:10-15 바른
모든 백성의 가족들이 각각 자기의 장막 문에서 우는 소리를 모세가 들었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셨고 모세가 보기에도 불쾌하였다. 모세 가 여호와께 말씀드렸다.
"주께서 왜 주님의 종을 괴롭게 하시며, 왜 주님 앞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의 짐을 제게 지우십니까? 제가 이 모든 백성을 잉태하였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았습니까? 왜 주께서 저에게 유모가 젖먹이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셨던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까? 제가 어디서 고기를 구하여 이 모든 백성에게 주겠습니까? 그들이 저에게 울며 말하기를,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고 합니다. 저는 이 모든 백성을 혼자 감당할 수 없으니, 이 짐이 제게 너무 무겁습니다. 만일 주께서 제게 이같이 행하시려면 제발 저를 죽이셔서 주님의 눈앞에서 제가 은혜를 입어 이 악을 보지 않게 하여 주소서."
Numbers 11:21-23 바른
모세가 말하였다.
"저와 함께 있는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인데, 주께서 그들에게 고기를 주어 한 달 동안이나 먹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그들에게 충분하겠으며, 그들을 위하여 바다의 모든 고기들을 모은들 그들이 만족하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이제 내 말이 네게 이루어지는지 아닌지 네가 보게 될 것이다."
Numbers 14:1-5 바른
온 회중이 소리 높여 부르짖었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울었다.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죽었거나 혹 이 광야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어찌하여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시는가? 우리 아내와 아이들이 사로잡힐 것이니,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들이 서로 말하였다.
"우리가 우두머리를 세우고 이집트로 돌아가자."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얼굴을 숙이고 엎드렸다.
Numbers 20:2-6, 12-13 바른
회중에게 물이 없으므로 그들이 모세와 아론을 비방하려고 모였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면서 말하였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너희가 왜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가축들이 여기서 죽게 하느냐?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여기는 씨 뿌릴 땅도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 앞을 떠나 회막 입구로 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주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것을 므리바 물이라 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서 그분의 거룩함을 나타내셨다.
Deuteronomy 1:37 바른
여호와께서는 너희 때문에 나에게까지 진노하여 말씀하셨다.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나
Deuteronomy 3:23-27 바른
"그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나의 주 여호와시여, 주께서는 주님의 크심과 주님의 손의 강하심을 주님의 종에게 보여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에서 주님의 일과 주님의 능력처럼 행할 수 있는 신이 누구입니까? 부디 저를 건너가게 하셔서, 요단 건너 아름다운 땅과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소서.' 하였으나
여호와께서는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셔서 듣지 않으시고, 내게 말씀하시기를
'그것으로 네게 족하다. 이 일로 내게 더 이상 말하지 마라. 너는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Deuteronomy 4:21 바른
여호와께서 너희 일로 내게 진노하시어, 내가 요단을 건너지 못하고,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유업으로 주시기로 한 그 아름다운 땅에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하셨다.
모세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자들이 들어올 수 없다.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들어올 수 없다. 마 5:48절과 같이 우리와 같이 완전한 자라야 들어올 수 있다. 그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한다. 이는 그 속의 사람이 변하여 온전한 우리의 영이 거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사람이 천국의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만이 팔복의 삶을 살 수 있고 산산수훈의 요구를 충족할 수 있다. 그러니 불가운데서 벌거벗은 부끄러운 구원이 아닌 하늘의 기업을 얻는 자가 돼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내가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모세와는 다르게 하늘에 속한 사람이었던 여호수아는 단 한마디의 불신앙이나 불평이 없다.
모든 민족이 가나안 진격명령을 거역하고 반란하였을 때에도 유일하게 믿음으로 반응한 둘 여호수아와 갈렙의 모습을 보는가? 그들에게 불평이 있는가?
성경 어느 곳을 찾아보라. 내 종, 나의 기뻐하는 자, 여호수아 그는 완전한 자였다.
마치 다음 구절들의 욥을 보는 것과 같다.
Job 1:1 바른
우스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였다.
Job 1:8 바른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Job 1:20-22 바른
욥이 일어나 자기 겉옷을 찢고, 자기 머리를 깎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말하였다.
"내가 맨몸으로 모태에서 나왔으니, 맨 몸으로 그곳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여호와시며, 가져가신 분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소서."
이 모든 일에 욥이 죄를 짓지 않았으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Job 2:3 바른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 세상에 없다. 네가 나를 부추겨서 까닭도 없이 그를 해치려 하였지만,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다."
Job 2:9-10 바른
그의 아내가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아직도 당신의 온전함을 굳게 지킬 것입니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리시오."
욥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마치 어리석은 여자가 말하는 것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소?"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자기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
Job 42:7-9 바른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같이 말씀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셨다.
"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진노하니, 이는 너희가 나에 대해 말한 것이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숫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려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해 기도할 때, 내가 그를 기쁘게 받을 것이니, 내가 너희의 어리석은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너희가 나에 대해 말한 것이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했다."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였고, 여호와께서는 욥을 기쁘게 받으셨다.
하늘로부터 난 자들은 다 이들과 같다. 여호수아는 결코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불평도 없었다. 욥도 극심한 고통 중에 자신의 태어남을 저주하기도 하고 죽기를 원하기도 했으나 결코 우리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우리에 대한 절대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난 자들은 다 이와 같다. 이런 자들이 가나안을 정복한다. 이런 자들만이 하늘을 땅에 가지고 올 수 있다.
사도행전의 사람들, 욥, 요셉, 다니엘, 다윗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면 나는 오늘 말한다. 그런 자들이 없다면 우리가 능력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 덧입혀 거룩한 십자가의 피로 세탁한 세마포(린넨, 아마포)를 입은 자들을 세운다. 이런 자들이 없다는 것은 이런 자들을 세울 우리의 능력이 없음을 뜻한다. 또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성경의 구절에 등장하는 주인 우리가 그 성경의 말을 실행할 능력이 없음을 뜻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는가? 우리는 엘샤다이다. 우리는 야곱의 엘샤다이, 전능자다. 우리가 할 수 없겠는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우리가 누구인지를 모르는가? 우리는 말세지말의 흰옷을 입은 무리들을 세울 것이다. 그들이 온 세상을 덮는 날 너희는 볼 것이다. 우리(여호와)를 아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한 것을 볼 것이다.
이것을 믿는 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믿음을 기업을 소유한 참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어떤 혈통이든 어떤 교파이든 이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은 나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한 이방인이거나 광야의 백성이다. 그들의 세상의 종이거나 율법의 종이다. 결코 우리의 기업을 받은 아들은 아니다.
[^1]: 물에 속한 자는 세상에 속한 자며 우리와 교류하는 성령(공기)을 통한 호흡이 없는 자다. 그래서 계시록에서는 음녀가 바다(물)에 앉아있다. 또한 노아의 홍수에서는 물속에 있어 공기 호흡이 없는 존재들은 심판에서 제외되었다. 이는 그들은 이미 우리의 관점에서는 죽은 자들로 이미 정죄를 받았고 심판에 처해졌다. 땅에 속한 자들은 바다 즉 세상에서는 나왔으나 광야에 속한 자들이다. 이들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받았으나 여전히 죄의 본성이 죽지 않은 자들이다. 이들은 광야의 백성과 같으며 오순절의 거듭남을 거치지 않은 제자들과 같다. 이들은 우리와 공기(성령) 호흡으로 교통함이 있으나 우리에게 온전히 속하지는 않았다. 즉 온전히 공기(성령) 안에 속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발이 땅이 닿아 땅에 속하였다. 하늘에 속한 공기(성령)로 호흡은 하지만 완전히 공기(성령) 중에 거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하늘에 속한 자들은 온전히 공기(성령) 안에 거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온전히 성령의 이끌림에 복종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매 순간 죄를 이기며 우리의 뜻을 따라 복종하는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