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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Sep 07. 2024

01.3.2.3.10. 기업을 취한 아들 여호수아 2

여호수아의 연대기

01.3.2.3.10.3. 하늘에 속한 자


가나안 정복자는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이었다. 모세와 아론은 뒤에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결코 정복자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아니었다. 갈렙은 80이 넘었으나 헤브론을 정복한 정복자였다. 모세와 아론이 나이가 많아서 정복자로 서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리더라서 정복자의 전투를 벗어나 후방에 남게 된 것도 아니었다. 여호수아는 리더로서 정복자로 섰으며 전쟁들에 참여했다. 갈렙도 80이 넘었으나 그의 기력이 쇄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용사였다. 그는 80이 넘은 나이에 헤브론 산악지대를 다녔으며 그중 거인족들이 거주하던 철옹성인 헤브론을 정복했다. 그런데 이렇게 모세와 아론이 뒤에 남겨져 직접적인 정복전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우리의 심판이었다. 모세가 주장한 대로 이스라엘이 므리바에서 거역함으로 그로 인해 모세가 화를 입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아담과 같은 본성을 가진 모세 자신의 변명일 뿐이었다. 결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백성에게 화가 나서 우리의 영광을 세우지 않고 백성들이 있는 진을 떠나 나와버린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오지 않고 회막 앞에서 시위를 한 것이다.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신들의 죄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명백하게 자신들의 죄를 지적해도 모세는 아론과 자신은 죄가 없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게 모세와 아론의 불신앙이 드러난 곳이 성경에 한 두 곳이 아니다. 그들은 성경 여러 곳에서 불평을 한다. 백성들을 인해서 불평을 한다. 그리고 고기과 이집트의 음식들로 인해 불평하던 백성에게 한 달 동안 우리가 고기를 먹여 질리게 하겠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냐고 한다. 모세 자신이 자신의 믿음 없음을 잘 은폐하여 그렇지 사실 모세가 믿음이 있어서 이집트의 12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모세는 기회만 되면 불평하고 불신앙에 빠졌다. 바로의 태도가 조금만 강경하여 지면 믿음을 잃고 우리에게 불평했다. 처음 시내산에서 보인 불신앙과 같은 상태를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 물론 조금 진보했다. 그러나 마지막 죽는 날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백성들에게 핑계를 대며 자신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우리 앞에서 원망했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아무리 대단한 기적을 행했어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자연인이며 그것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의 모습이다. 여전히 필멸자이며 썩어 죽을 쓸모없는 자 사람(히 에노스)일 뿐이다. 욥과 요셉, 여호수아, 갈렙, 다윗과는 명백히 다르다. 이들은 원망이 없다. 오직 순종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거듭나서 우리를 만나 우리와 동행함으로 우리에게 듣고 또한 우리에 대한 절대믿음이 있다. 그러므로 어떤 극한 상황에서라도 우리를 원망하지 않는다. 자신의 현재 처지를 한탄할 수는 있어도 결코 원망함은 없다.

가나안을 정복을 하는 특권은 여호수아와 여호수아가 이끄는 광야에서 새로 난 여호수아 세대에게만 주어졌다. 오직 믿음으로 헤브론 산지를 정복한 갈렙에게만 산지를 정복할 특권이 주어졌다. 광야에서의 전쟁과 가나안 정복전은 완전히 다르다. 이들은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받은 자들로서 그 증거는 방언이나 은사가 아니다. 모세와 아론에게도 은사가 임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예언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민 11:28절에 모세와 함께 예언했던 그 시대 70인의 장로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단 한 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데 구약의 이스라엘이 들어간 가나안은 우리의 통치를 받는 우리의 나라였다. 바로 하늘나라인 것이다. 그런데 하늘나라에 대해 그 뜻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01.3.2.3.10.3.1. 하늘의 위치


하늘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하늘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우리가 하늘나라라고 했을 때 하늘은 눈에 보이는 하늘이나 우주공간이 아니다. 하늘과 같이 높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존재하는 우리가 있는 공간을 뜻한다. 이곳은 공간적인 것이 아니며 영적인 통치가 실효적 지배를 하는 곳을 의미한다. 즉 각 개인의 영적 주인에 따라 그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영역의 영적 국가가 달라지는 것이다. 어둠이 소유하고 있는 곳은 어둠의 나라가 되며 빛이 비추어진 곳은 빛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하늘나라는 특정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의 통치가 임한 곳이 하늘나라다. 우리가 거하는 곳이 하늘인 것이다. 우리는 우주에 편재함으로 우리가 없는 곳이 없다. 그러나 그 편재와는 별개로 인간이 우리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곳이 우리의 나라가 된다. 모든 피조계는 인간에게 준 것이므로 인간이 인정하는 그곳만이 우리의 통치가 임할 수 있다. 태초에는 그 통치가 임한 곳의 중심이 에덴이었고 인간이 땅을 정복하여 나감에 따라 그 통치가 확장되었다. 물론 태초에는 인간이 정복하지 않은 땅들도 질서상 인간의 소유였고 그러한 질서를 통하여 우리의 통치가 임하게 되었다. 타락하면서 인간의 미움과 불의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우리는 그 어둠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우리의 사랑과 공의의 나라가 땅에 임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우리의 통치가 태초에 임했던 낙원인 에덴을 사용하여 다시 회복될 낙원을 설명하기 원했다. 에덴의 원래 위치는 가나안이었다. 이에 관한 설명을 이어가겠다. 그리고 에덴이었던 가나안과 그 주변부의 차이에 대해서도 설명할 것이다. 이것을 여호수아와 모세오경의 내용과 비교하여 설명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정복했다. 그런데 분명 요단 동편에서도 정복전이 있었다. 모세가 살아서 요단 동편을 점령했다. 그리고 우리가 약속한 땅은 남과 북으로는 이집트에서 현재의 터키 변경에 이르는 땅이었다. 또한 동서로는 지중해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이어졌다. 그러니 요단 동쪽이나 가나안이나 모두 이스라엘의 땅으로 예비된 땅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기로 한 약속의 땅은 항상 가나안이었다. 이는 땅에 대한 이중적 약속이었다. 아브라함은 갈데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옮겼다. 하란은 사실상 우리가 주기로 한 넓은 땅의 범위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으로 향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그곳의 중심부인 헤브론 산지에서 약속을 주었다. 그 이유는 넓은 땅이 의미하는 것과 가나안이 의미하는 것이 달랐기 때문이다.

땅을 경계 짓고 실효적 지배를 하는 것을 통치라 한다. 이스라엘은 가나안과 주변에 있는 지역들을 통치할 수 있다. 사실 이 지역은 창세기에 나와 있는 에덴동산과 일치한다. 지각 이동에 의해 위치가 변동되어 홍해와 걸프만이 생기고 지중해가 생기는 등 지리적인 변화가 있고 가나안 주변의 지형들이 위치 이동을 했지만 사실 구약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의 위치는 가나안과 그 주변에 붙은 땅들이다. 창세기 2장의 강들의 위치가 현재와 같지 않은 것은 지각변동에 의해 땅들이 위치 이동을 했기 때문이다. 이 지각 이동은 서서히 이루어진 것도 있지만 노아 홍수 당시에는 엄청난 물의 쓰나미로 인해 땅들이 심하게는 수십 미터를 움직였다. 해일에 의해 섬들이 움직인 일은 너희 시대에도 수마트라에 일어나 그 기록을 남기고 있다. 또한 홍수 이후에 물이 증발하기는 했으나 지구에 남아있는 물의 총량이 늘어나 대륙의 낮은 곳들이 모두 바다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 지구 대륙들의 모습들이 생겨났다. 무엇보다 우리가 처음 땅들을 갈랐던 절대적인 힘이 가장 컸다. 이때의 힘이 가장 컸다. 베르너라는 과학자가 대륙 이동설을 주장하기 몇천 년 앞서 성경에는 우리(하나님)가 땅들을 가르고 이동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정확한 세계지도도 없었는데 지구의 지각의 판들이 퍼즐 맞추기 식으로 생겼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또 그 땅들이 서로 붙어 있다가 갈라졌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그런 내용을 몇천 년 전에 성경에 기록했다는 자체가 기적이다. 어찌 되었건 에덴의 주변의 땅들이 이동하고 일부는 바다에 잠기어 강들이 사라지기도 하고 땅이 사라지기도 하였으나 원래 에덴의 위치는 현재 가나안과 주변부의 땅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창세기 2장에는 나와 있는 강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강들 중 2 강은 전체가 물이 차올라 바다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도 합쳐져 지금 걸프만이 있는 곳에 있던 강을 따라 흘렀었다.

01.3.2.3.10.3.1.1. 에덴과 가나안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주변의 땅들을 정복하여 다스리는 것은 다시 에덴의 낙원으로 회복됨을 의미했다. 우리가 가나안 정복을 통해 보여지도록 의도한 것은 우리가 성경 전체에 의도한 구원과도 일치한다. 우리는 죄인인 인간이 에덴에서 쫓겨났는데, 다시 그 에덴의 낙원으로 인간을 회복시키기 원한다. 그래서 계시록의 낙원의 모습은 에덴과 같이 생명수 강이 흐르고 생명나무가 있다. 자식이 원수에게 잡혀갔는데 그 아이를 구해서 원래의 집에서 보호하기를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우리는 계시록의 비유를 통해서만 에덴으로 너희 인류를 회복시킨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있던 그곳이 바로 에덴의 위치였고 그곳에 다시 너희를 불러 하늘나라 즉 에덴의 낙원을 만들기 원했다. 비록 타락한 세상에서는 그것이 완전할 수 없지만 가나안에 회복된 이스라엘을 통해 에덴의 복원을 예표 하기를 원했다. 진정한 에덴의 낙원으로의 회복은 마지막 새하늘과 새땅이 임하고 그곳 위에 교회가 통치하며 나 예수가 교회의 머리가 되고 두 번째 아담인 내가 아버지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모든 질서가 원래 회복됨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을 미리 예표하는 것이 구약의 가나안의 의미다. 타락하기 이전의 선을 행하며 우리의 뜻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던 인간들이 우리의 통치를 순종하여 피조계에 사랑과 공의가 가득한 세상을 만들었던 그대로 회복되는 것이다. 이곳은 완전히 우리와 같이 완전한 자들만 들어올 수 있다(마 5:48) 아담과 하와와 같이 죄로 오염된 자들은 들어올 수 없다. 욥과 같이 완전한 순종의 믿음을 소유한 자들만 들어올 수 있다. 이는 세상에서 나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 들어가는 곳을 의미한다. 그런데 단순히 세상에서 십자가를 믿고 나왔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완전한 순종의 믿음 즉 성령세례의 의해 죄를 이기고 선을 행할 완전한 능력이 주어지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01.3.2.3.10.3.1.2. 가나안과 그 주변부의 차이


세상에서 나올 수는 있으나 진정한 하늘나라(가나안)에 들어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천국(가나안) 밖에서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원은 불속에서 그냥 벌거벗은 채로 도망 나온 부끄러운 구원이다. 이러한 자들은 세례 요한 이전까지의 구원에 속하며 천국을 침노하는 자들의 무리는 아니다. 이들은 모세와 아론과 광야에 속한 무리들과 같다. 그 안에서도 믿음의 차이는 존재한다. 야곱과 모세의 믿음은 그 믿음의 크기가 있다. 그러나 결국 이들 모두는 믿음의 차이는 있어도 땅에서 온전한 우리의 통치를 받지는 못한 자들이다. 이들은 고린도서에 육에 속한 자들이며 이들에게도 기적과 성령의 은사는 나타난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 특히 방언이 우리의 온전한 통치인 가나안 즉 하늘나라에 들어온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모세와 백성들이 밟은 땅인 넓은 땅을 주기로 했다. 그러나 그 넓은 땅 중에서 우리가 특별히 약속한 땅은 가나안이었다. 그래서 성경에 약속의 땅은 가나안이다. 요단의 서편에 있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되었던 땅이다. 십자가의 구원 안에 들어왔어도 가나안이 아닌 땅에 거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진정 거듭난 심령을 가진 나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와 있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오는 자 즉 천국에 들어오는 자와 광야에 속한 자는 분명하게 구분이 된다. 사실 시내광야나 바란광야나 심지어 비옥한 바산과 모압 평지도 모두 가나안이 아니므로 하늘나라 즉 나의 통치가 완전히 임한 우리의 나라는 아니다. 오직 약속된  천국을 상징하는 것은 가나안이다. 그래서 가데스 바네아와 광야 40년을 불평과 불신앙으로 보낸 출애굽 세대와 모세와 아론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01.3.2.3.10.3.1.3. 요단을 건너서 가는 천국

 
요단을 건너서 가는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다. 찬송가에 그런 가사가 있는데 이는 천국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가사다.

천국이 죽어서 가는 곳이라면 어떻게 세례요한의 때부터 천국이 침노를 당하겠는가? 세례요한과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 중 그 누구도 죽어서 천국을 침노한 자들은 없었다.

어떻게 살아있는 나 예수의 제자들은 천국의 서기관이겠는가? 천국이 죽어서 가는 곳이라면 나의 제자들은 죽은 이후에야 천국의 서기관이 될 수 있다.

나 예수는 천국이 이미 너희 손 닿는 곳에 있다고 했다. 살아서 천국에 들어간 자는 죽어 육신을 벗어도 영은 살아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와 함께 거한다. 살아서 우리와 대화하고 우리와 걸으며 우리의 음성을 들었던 자들이 단지 육신만을 벗고 우리와 여전히 함께 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앞에 살고 우리와 함께 하는 자들은 우리의 통치를 받는다. 어떻게 살아서 우리와 말 한마디 하지 않던 자가 죽는다고 하여 우리와 함께 하겠는가? 내 양은 나의 음성을 듣는다. 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내 우리에 있는 내 양이 아니다. 물론 엉뚱한 자의 음성을 욕심과 탐욕으로 따르는 자들도 나의 양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자에게 속하여 나의 우리에 있지 않다. 오직 우리의 음성을 듣고 우리의 뜻대로 따르는 자들만이 가나안에 들어올 수 있다. 신약의 마 5:48절의 용어로는 완전히 따른 자만이 우리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다. "하늘에 있는 너희 아버지가 완전한 것같이 너희도 완해져라"(마 5:48)[^1]라고 했다. 이렇게 완전한 자라야 하늘나라의 백성이며 우리의 아들이다. 오직 그러한 자만이 천국에 들어올 수 있다.

이러한 자들은 하늘의 통치를 땅에 가져온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과 함께 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하늘의 통치를 가져왔다. 하늘의 통치는 하늘나라다. 그 하늘나라가 가나안 일곱 족속이 있던 가나안에 와서 죄악이 관영한 일곱 족속을 멸하고 그 땅에 우리(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한다. 이렇게 가나안은 우리의 나라요, 우리의 통치가 임한 곳이다.

01.3.2.3.10.4. 통치, 사귐, 대화


우리의 통치에 들어오려면 우리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성경을 읽고 그 원리대로 우리의 뜻을 짐작하는 것이겠는가? 다음의 예들을 보고 과연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깨닫기를 바란다.

결코 조선시대에 쓰여진 홍길동전을 읽고서 홍길동의 뜻대로 산다고 하여 홍길동의 뜻을 행할 수 없다. 홍길동의 뜻은 살아있는 홍길동만이 알 수 있다. 오늘 어디 가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지를 정할 때 홍길동의 뜻대로 한다는 것은 홍길동에게 직접 듣고 홍길동의 지시를 받아야 알 수 있다. 그렇지 않고 홍길동전을 읽고 그 원리를 짐작하면 홍길동의 뜻을 알 수 있는가? 홍길동이 오늘 네가 무엇을 하기 원하는지를 그리고 어디에 가기를 원하는지를 너는 홍길동전만을 읽고 미루어 짐작하여 알 수 있는가? 이와 같이 단순히 성경을 읽고 성경의 원리 대로 한다고 하여 우리(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단순히 매뉴얼일 뿐이다.

미국 남침례교의 탁월한 스승인 헨리 블랙까비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예화를 들고 있다.

지역 소방대를 평가하는 대회에서 한 지역의 소방대는 건물 하나에 매뉴얼 대로 불을 지른 다음 진화 매뉴얼에 따라 소화를 했다. 그런데 그 지역 소방대는 평점이 0이었으며 오히려 마이너스의 평을 받았다. 그 이유는 매뉴얼대로 했으나 무전기를 통한 지시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전 자체를 꺼두었는지 무전을 듣지 못하고 건물을 착각하여 엉뚱한 건물에 불을 지르고 끈 것이다.

이와 같이 쓰여진 매뉴얼을 읽는다고 해서 정확한 소방대 일을 할 수가 없다. 정확하게 무전을 통해 지시를 받은 자들만이 정확한 소방대 일을 할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우리의 뜻을 정확히 수행할 수가 없다. 우리가 귀신보다 못한가? 귀신들을 섬기는 무당들과 종교인들도 귀신들의 음성을 듣고 그 지시를 받아 점을 치고 굿을 한다. 귀신들도 살아서 말을 하는데 우리(하나님)가 왜 말을 못 하겠는가? 또 귀신의 음성인지 우리의 음성인지 분별할 지혜를 우리가 주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길로 간 어리석은 자들로 인해 우리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면 더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 엉뚱한 건물에 불을 지른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우리의 뜻을 알지 못하고 엉뚱한 지역에서 엉뚱한 건물을 짓고 많은 사람들을 자신이 생각하는 복음이라는 것으로 모아서 예배라는 것을 드렸다고 하자. 그러나 그들을 모으고 교회 건물을 지은 그 목사 자신부터 나를 만난 적도 없으며 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다. 단지 성경을 읽고 신학을 배우고 자신의 지식을 기초로 하여 설교를 하였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이 나의 음성인가? 그 설교가 나의 뜻인가? 자기 임의의 본문을 선택하여 엉뚱한 말들을 성경 지식에만 맞게 말하면 그것이 나의 음성인가? 우리와 대화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의 뜻을 아는가? 매뉴얼을 숙지했다고 해서 우리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 시대에 쓰여진 모세의 5권의 책이 이미 있었음에도 여호수아는 나의 음성을 듣고 나를 따랐다. 모세의 책을 통해 주어진 계시를 알고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순간순간 우리의 뜻을 파악할 수는 없다. 물론 다른 영에게 다른 음성을 듣듯 다른 자에게 잘못된 무전을 받아 엉뚱한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늘 함께 일하던 사이라면 분명 엉뚱한 자가 무전을 보내면 그 음성이 다른 것을 분별할 수 있다. 그 분별하는 것을 구하고 주의하며 성경의 기준과 자신에게 주어진 우리의 이정표와 같이 지속적인 약속들의 일관성을 통해 원수의 속임은 구분할 수 있다. 성경을 확인하는 것도 우리의 일관적인 뜻과 순간순간 주어지는 음성들이 일관성을 가지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일관성에서 벗어난다면 우리의 음성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성령이 마음에 있어 모든 것을 가르친다. 물론 자기 욕심과 어둠을 따르는 자들은 늘 어둠에 속한 음성을 들었으므로 미혹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듭나지 않아 자신의 탐욕을 통제하지 못하는 거듭나지 못한 죄인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다. 바로 광야의 백성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거듭난 가나안의 백성들은 에덴에서와 같이 우리와 함께 거한다. 그들은 우리와 저녁 서늘할 때에 에덴을 거닐며 우리의 발소리를 듣는다. 자신의 한숨과 나직한 울음을 우리와 함께 하며 견딜 수 없는 슬픔도 우리어 품에서 통곡으로 털어낸다. 그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그곳에 우리를 들이고 그곳에서 우리와 모든 것을 소통한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마음을 알고 우리와 하나가 된다. 우리의 뜻은 그의 뜻이 되며 그의 뜻은 우리와 같아지게 된다.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친밀함으로 거짓이 틈탈 수 없다.

이런 사귐과 바위틈 은밀한 곳에서의 속삭임으로 그는 우리를 따르며 우리의 뜻을 행한다. 그러니 어떤 곳에서든 우리의 정확한 길, 그것만을 고집한다.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 속에서도 꿋꿋이 우리를 따른다. 십자가의 길이건 최춘선의 거지 광인의 길이건 맡은 자에겐 충성밖에 없다. 그 모든 충성으로 자신의 재산과 명예를 버리고 자신의 목숨도 노숙자의 길에 버려 길거리 주검이 되어도 그래도 부족하다. 그래도 자신의 길을 돌아보면 불충성, 불순종 말로 못한다는 말밖에는 마음에서 나오지를 않는다. 애절한 그 어떤 말로도 감사를 다 표현할 수 없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도, 어찌해서도 갚을 길이 없어, 송구함에 늘 눈물만을 흘릴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 그 순간에도 사랑하고 감사함에 그것을 다 갚지도 못하고 죽음이 다가온 것에 안타까워한다.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그분을 만날 마음에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하다, 마지막 숨을 마치고 자신의 사랑인 그분을 만나러 육신을 버린다.

그 사랑을 어찌 다 표현하랴. 그의 사랑에 나(예수)도 감격한다. 그의 그분인 나도 그를 사랑한다. 나도 애절하여 수 없는 시간들을 기다리며 그를 사랑하였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버려 그를 사랑했다. 모든 것을 드려 그를 사랑했다. 나는 나의 마음도 나의 모든 소유도 그를 위해 버렸다. 나는 신의 지위를 버리고 육신으로 갔다. 종의 형체를 가지고 피조물로 다시 태어났다. 나는 그밖에 없다. 그가 없이는 나는 아무것에도 만족할 수 없다. 나의 신의 지위도 나는 그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 어떤 기쁨도 그가 없이는 나에게 의미가 없다. 나의 사랑하는 자[^2], 그는 나의 가엽은 아이며, 가엽은 나의 사랑이다. 원수에게 빼앗긴 나의 연인이며, 아비며, 어미며, 형제다. 그는 나의 무엇이며 무엇인지 알 수도 없을 때에도 그리워하는 그리움이다. 그는 나의 눈물이며 통곡이며 나의 노래며 나의 설렘이다. 그는 나의 무엇의 무엇이며 전부의 전부다. 나의 모든 것은 그로 귀결되며 나는 그로 인해 산다. 신인 내가 어떻게 이렇게 부족한 피조물과 같이 갈구하는 결핍의 존재가 되었겠는가?  나는 결핍할 수 없으나 그로 인해 결핍케 되었고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그가 없이는 만족할 수 없는 비루한 가난뱅이가 되었다. 나는 그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으며 나는 그가 없이는 사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래서 나는 나의 지위를 버리고 오직 그를 살리기 위해 생명을 버렸다. 그가 없이 사는 것은 나에게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인 내가 어찌 이리되었는가? 나는 그에게 미친 광인이며 나는 사랑에 모든 것을 버리는 순진한 시골뜨기일 뿐이다. 내가 어찌 이리되었는가? 내가 어찌 이리되었느가? 그러나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것 외에는 내 안에 그 어떤 것도 없다. 그것 외에는 내 안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와 나 예수는 서로 사랑하여, 서로가 서로의 모든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눈물이며 기쁨이며 아름다움이며 낭만이며 고상함이다. 다른 것은 그 어디에도 가치를 둘 수 없다. 우리의 사랑은 그 어떤 다른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 아름다운 장미원의 가장 화사한 장미의 향기로도 우리의 사랑은 대체될 수 없다. 그 어떤 아름다운 시로도 우리의 사랑은 표현될 수도 없고 흉내 낼 수 없다. 그 어떤 고귀한 것으로도 우리의 사랑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치를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모든 삶을 함께 한다. 그의 삶은 내 삶이며 나의 마음은 그의 마음이다. 그의 삶에는 나의 뜻과 나의 사랑과 나의 공의가 넘친다. 순간순간 그의 삶은 나의 삶이 되며 나의 의지가 그의 삶을 지배한다. 그래서 그가 가는 모든 곳에는 내가 거하며 그의 모든 의지에는 내가 행한다. 그러니 그가 거하는 그곳은 나의 통치가 있고 나의 나라가 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사귐과 대화와 통치다.

그러니 그에게 불평이 있겠는가? 아파서 죽겠어도 그리고 움직일 힘이 마지막 순종에서는 소실되어도 그는 나를 향해 엎어져서라도 나에게 오기를 원한다. 그는 주검의 순간의 엎어지는 쓰러짐으로도 나에게 순종한다. 내가 그를 위해 마지막 십자가의 피를 오롯이 쏟아내어 그를 사랑하였듯 그도 그러하다.


비록 신약의 완전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모습을 예표하는 구약의 광야에서 새로 난 자들과 가데스 바네아의 20세 미만의 아이들은 광야를 통해 거듭남으로 이전 세대와 같이 불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오직 믿음으로 거듭난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믿음으로 거듭난 자들은 불평함이 없다. 우리를 원망하지도 않는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심지어 살 소망을 잃어버릴 만큼 힘들어져도 결코 우리를 원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심령은 거듭났으며 온전히 성령을 통한 이해와 우리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우리에 대해 불신이나 원망을 가지지 않는다. 이것이 거듭난 증거다. 상황이나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분노하고 그 괴로움을 욥과 같이 마음을 토할 수는 있으나 결코 우리를 원망하거나 우리를 떠나지도 않는다. 욥의 믿음을 보았는가? 그는 거듭난 자의 믿음을 가졌다. 그는 영적 가나안에 있던 자였으며 하늘나라의 백성이었다.

이와 같이 하늘나라에 침노한 자는 이미 우리와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우리의 거룩과 사랑과 자비와 공의가 넘친다. 그는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이다. 성령이 그 안에 능력이 되어 죄를 이긴다. 그래서 그는 죄를 짓지 않으며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요일 3)

1 John 3:1-10 바른
1보아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게 하셨느냐? 우리는 과연 그러하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과 같이 될 것을 알고 있으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 3그분을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분께서 깨끗하신 것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 4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는 것이니, 죄는 불법이다. 5그분께서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알고 있으니, 그분께는 죄가 없다. 6그분 안에 거하는 자마다 죄를 짓지않으니, 죄를 짓는 자마다 그분을 보지도 못하였고 그분을 알지도 못하였다. 7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여라.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같이 의롭고, 8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해 있으니,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짓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다. 9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으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그는 죄를 지을 수 없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이다. 10이것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드러나게 된다. 의를 행하지 않는 자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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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atthew 5:48 개정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 하심 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Matthew 5:48 공동개정 48"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Matthew 5:48 YLT 48ye shall therefore be perfect, as your Father who [is] in the heavens is perfect.         


Matthew 5:48 KJV 48Be ye therefore perfect, even as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is perfect.                  

  

Matthew 5:48 WHNU+ 48εσεσθε G2071 V-FXI-2P ουν G3767 CONJ υμεις G5210 P-2NP τελειοι G5046 A-NPM ως G5613 ADV ο G3588 T-NSM πατηρ G3962 N-NSM υμων G5216 P-2GP ο G3588 T-NSM ουρανιος G3770 A-NSM τελειος G5046 A-NSM εστιν G2076 V-PXI-3S                                      


Matthew 5:48 TRa+I 48ἜσεσθεSHALL BE οὖνTHEREFORE ὑμεῖςYE τέλειοιPERFECT, ὡσπερ ὁEVEN AS πατὴρ ὑμῶνYOUR FATHER ὁWHO [IS] ἐνIN τοῖςTHE οὐρανοῖςHEAVENS τέλειόςPERFECT ἐστινIS.                                


Matthew 5:48 UBS5+ 2014 48Ἔσεσθε G1510 V-FDI-2P οὖν G3767 CONJ ὑμεῖς G5210 P-2NP τέλειοι G5046 A-NPM ὡς G5613 ADV ὁ G3588 T-NSM πατὴρ G3962 N-NSM ὑμῶν G5210 P-2GP ὁ G3588 T-NSM οὐράνιος G3770 A-NSM τέλειός G5046 A-NSM ἐστιν G1510 V-PAI-3S.

[^2]: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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