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천국) 정복=우리의 통치=하나님의 나라
모세와 아론과 대비되는 대상으로 여호수아와 갈렙을 예로 들면 좋겠지만 다윗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다. 그 이유는 여호수아와 갈렙에 관한 것은 뒤에 많은 분량으로 기록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호수아와 갈렙에 비해 다윗은 고난에 관한 많은 기록들이 남아 있기에 그 믿음의 모습을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면도 있다. 그래서 다윗을 선정해 다룬다.
불교에서는 연꽃을 진흙탕 속에 핀 가장 거룩하고 고귀한 꽃으로 여긴다. 진흙탕의 물 위에 피어난 꽃이 어찌 그리 아름다울 수 있는지 흐린 물의 색은 전혀 없이 깨끗하고 그 색이 아름다운 담청색의 잎을 피운다. 그 잎은 맑고 깊은 물의 색이다. 깊고 맑은 물의 아름다운 담청이다. 그리고 꽃은 흰색이나 분홍계열의 선명함을 가진다. 결코 물의 흐린 색은 그곳에 없다. 겨울의 흰 눈보다 더 맑고 거룩한 색이다. 또 그 흰색에 분홍이 섞이면 인디언 핑크의 화사함이 잎의 담청색과 대비를 이루며 화려함을 더한다. 꽃의 크기도 잎의 크기도 그 꽃이 물 위에 피어 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할 만큼 크고 탐스럽다. 사실 잎이 물에 뜨기 위해서는 그 면적이 넓어야 하기에 그에 맞게 창조하였다. 그 잎들이 퍼지고 연의 뿌리들이 번져나가면 그 잎들이 진흙탕의 물을 덮어 연못을 담청색의 맑음이 덮는다. 그리고 꽃은 피어나 그 담청으로 채색된 배경 위에 크고 수수하며 그러나 눈과 같은 순백의 화사함을 사람들의 마음에 부어준다. 그리고 분홍 꽃은 인디언 핑크의 화려하며 또 파스텔톤의 수수한 연정을 떠오르게 한다. 그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그러면서도 포근한 사랑을 품은 온유한 여인의 모습과 같다. 이 모든 거대한 잎과 꽃들이 핀 연못에 더 이상 연못 특유의 칙칙하고 어두운 암울함은 남아있지 않다. 아침 해가 뜨고 연꽃과 잎들에 맺힌 이슬들이 빛나면 그 투명한 방울들에 빛이 작용하여 아름다움을 더한다. 그 꽃이 흐리고 때로는 흙탕물로 변하는 연못에 피었다는 것을 모두 잊게 한다. 다윗은 흙탕물에서 피어난 연꽃이었다.
다윗은 외지고 가난한 산골 베들레헴에서도 가장 소외받는 아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암몬 왕 나하스일지도 모르는 씨가 다른 이방 튀기다. 이새는 다윗의 어미가 암몬족들이 유목민 특유의 약탈 시 일어나는 강간에 의해 아이를 임신했다 믿었다. 그래서 다윗은 이새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야기가 유대인 랍비들 사이에 전해 내려온다. 다윗 자신도 성경에 어미의 이름을 언급하지도 않고 또한 어미가 자신을 죄 중에 잉태하였다고 고백했다.
이새는 어린 다윗을 들에 내보냈다. 다윗이 고백한 것을 보면 다윗은 그곳에서 하프를 연주하며 우리(우리)와 시간을 보냈다. 외로운 광야나 산지 들에서 아이가 할 수 있는 놀이는 없었다. 또 양들을 돌보려면 하루 종일을 걸어야 했다. 푸른 초장을 찾아주고 물이 있는 오아시스나 건조한 산지에 가끔씩 있는 샘들을 찾아야 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외로움 속에서 다윗은 우리를 만났다. 어미도 자신이 강간을 당하여 낳은 아이라 다윗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 남편 이새나 다른 아들들이 밥을 먹을 때도 "개잡종은 저 밖에서 개들과 함께 먹으라"며 납작하게 구운 빵 난을 문밖으로 던져 흙이 묻은 빵을 다윗이 주워 먹을 때도 자신은 보호해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목숨을 버려 저항하지 못하고 결국 이방 개에게 당해서 아이를 임신했으니 자신의 죄조차 변명할 수 없는데 그 결과로 생긴 이방 혼혈아를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줄 수 있으랴.
하루는 보다 못해 다윗의 어미가 다른 자식들을 말렸다.
"그래도 형제인데 너희들 좀 그만할 수 없니"
그때 바로 남편 이새의 비아냥이 들려왔다.
"어디 이방인 놈하고 붙어먹은 주제에 주둥이를 함부로 놀려. 이방 개잡종 데리고 그 개 같은 암몬 놈에게나 가!"
그럼 어미는 주눅이 들었다. 그날의 끔찍한 기억이 떠올라 주눅이 들고 남편에게 자신은 이미 더럽혀진 여자라는 말도 안 되는 정죄감에 죽고 싶었다. 자식들도 자신을 어미로 취급해주지 않았다. 아비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몸을 버린 더러운 여자로 취급했다. 그러니 그런 자신이 어떻게 다윗을 보호하겠는가? 다윗이 종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경멸과 모멸을 당하며 예닐곱 살 때부터 양이나 치며 들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을 때도 그래도 가족에서 쫓아내지 않는 것만도 고맙다 여겼다. 다윗만 생각하면 어미는 가슴에 맺힌 것이 숨을 막아왔다. 숨을 쉴 수 없어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아이편인 자신이 살아야 아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해 살아내었다. 남편과 다른 자식들 눈이 무서워 말로는 표현을 못했지만 어미는 늘 아이를 위해 기도했다. 그 마음에 절절한 아픔과 사랑과 연민이 가슴에 암덩이처럼 들어차 고통을 주었지만 그래도 그것들을 몰아낼 수 없었다. 아들인 것이다. 그것도 어리고 어린 막내아들인 것이다. 남편과 다른 자식들 눈치가 보여 젖 한번 배부르게 물리지 못한 애달픈 아이다. 어미는 들에서 울고 있을 아이를 생각하면 잠도 잘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불면의 밤들에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아비 없는 자식에게 아버지가 되어달라 기도했다. 그리고 사자와 늑대와 곰과 표범에게서 아이를 지켜달라고 기도했다. 아이는 들에 혼자 버려져 언제 죽을지 알지 못한다. 들에서 양젖을 얻어먹고 작은 짐승들을 사냥하고 메뚜기도 먹고 석청도 먹고사는 아이가 한없이 가여웠다. 들의 열매로 배를 불리던 아이가 가끔씩 들쥐나 토끼를 잡는 날이면 아이는 가장 풍성한 식사라며 들떴다. 들에 있는 아이에게 빵이라도 주고 싶어도 눈치가 보여 자주 주지 못했다. 그래서 어미의 기도는 눈물과 통곡이었고 늘 슬픈 마음과 아픔이 인생 전체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미는 밤낮을 기도하는 자가 되었다.
그 기도로 다윗이 광야 들에서 자랐다. 우리가 아이의 보호자가 되었다. 우리가 아비가 되어 다윗을 찾아갔다. 들에서 늑대들의 하울링과 칠흑 같은 어둠이 아이에게 공포로 밀려올 때면 우리는 아이에게 환한 빛이 되었다. 밤에도 낮과 같은 밝음으로 아이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낮에도 밤에도 우리는 아이를 지켰다. 한 번은 아이가 양을 물고 가는 사자에게 생각도 없이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양을 잃으면 자신과 어미가 당해야 할 모욕과 수치가 두려웠던 것이다. 이유가 있던 없던 자신과 어미를 욕보이고 괴롭히는 식구들이었다. 그러니 양을 잃으면 또 무슨 모진 짓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하고 오직 양을 찾아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사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대로 두면 아이가 양과 함께 사자에게 삼켜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급히 아이를 구했다. 아이의 팔과 온몸에 성령이 능력을 부었다. 아이의 고사리 손에 성인들의 억센 뼈도 단번에 으스러트리는 사자의 턱이 찢어졌다. 그 입에서 양을 구해낸 아이는 그제서야 양과 함께 안고 두려움에 몸을 덜덜 떨었다. 그 아이를 우리가 안았다. "이 불쌍한 것을 어찌해야 하나. 부모의 사랑을 받을 응석받이 나이에 이곳 들에서 우리가 없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가련한 이 아이를 어찌해야 하나." 그래서 우리는 더 아이를 사랑했고 밤낮으로 들려오는 다윗 어미의 기도 압력에 견딜 수 없어 더 보듬고 품었다.
그렇게 들에서 아이는 우리와 함께 살았다. 우리는 아이와 함께 마시고 먹으며 아이에게 산지와 목초지와 광야에 대해 가르쳤다. 사자나 늑대와 싸울 때면 성령이 힘을 싣고 몸에 민첩함을 주며 머리에 싸워이길 지혜를 부어주었다. 이렇게 아이는 자라 갔다. 아이는 어렸고 힘이 없었으며 광야를 살아갈 힘도 없었다. 그래서 아이가 사는 길은 철저히 우리를 의지하는 것밖에 없었다. 아이가 양 떼를 몰고 풀을 찾을 때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끄는 대로 양을 모는 것이었다. 물과 양식도 그렇게 구했다.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어린 다윗은 의지할 것 없는 자신에게 사랑을 주는 우리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우리와 함께 하며 영과 영이 만남으로 우리의 본질을 보았다. 우리는 아이게게 우리 자신을 나타냈다. 아이는 늘 임재의 빛 가운데 살았고 그 가운데서 심령이 강해졌다. 형제와 아비와 세상에게 멸시를 받으며 아이는 인간의 악함을 알았고 그 가운데 그들을 향한 두려움과 반항으로 자신 안에 일고 있는 풍랑이 자신도 동일한 악인임을 깨닫게 했다. 그래서 자신은 용서하고 사랑할 힘이 없음을 알았다. 두려움이 일고 분노가 터져 나오면 아이는 우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터트렸다. 울고 타인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 환멸을 느껴 고통스러워하던 중에 아이는 거듭남을 경험했다. 더 이상 세상에 있고 싶지도 않았고 그 악한 사람들 속에서 자신도 동일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고 우리는 그에게 거듭난 심령을 허락했다. 아이가 선과 악을 구별하고 조금 더 자랐을 즈음에 이미 아이는 거듭났다. 그리고 자신들의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어떻게 나왔으며 광야의 길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가나안을 정복했는지 들었다. 여호수아와 갈렙에 대해서도 또 그 이전의 모세와 아론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런 것은 대부분 이야기로 전해 들었다. 지나는 다른 목동들과 앉아 쉬면서 듣기도 했고 집에서 함께 붙여준 종들에게서도 들었다.
그 종들 중에 신실한 사람이 있었는데 카데쉬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는 나이가 70이 넘었으나 종이라 쉬지 못하고 들에 나왔다. 목동 일을 오래 해서 목동들의 대장이었다. 다른 목동들은 집에서도 종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다윗을 무시하고 괴롭히는 일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다윗은 너무 어려서 사실 양을 치고 유목을 하는데 그 길을 따라 다니는 것만도 무리였다. 그래서 험한 길이나 먼 거리를 이동할 때면 자신들의 보살핌이 필요했다. 양들만 돌보는데도 힘겨운데 아이까지 떠맡게 되었으니 달가와 할리 없었다. 그래서 다윗은 목동의 무리에서도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다윗이 처음 목동들에게 맡겨진 것은 다윗이 6살이 되었던 때였다. 잠시 맡겨졌다가 다시 집에 가곤 했고 일곱 살이 되고부터는 아예 들에서 양치기들과 자랐다. 집에서도 늘 얻어맞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이곳에서도 그 신세는 동일했다. 그때 그를 돌봐준 것이 카데쉬 할아범이었다. 그는 아람(시리아의 고대국가)의 옛 수도였던 다마스커스 출신으로 예전에 그 도시를 우피나 카데쉬라 부른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아마 그 도시의 이름을 딴 것 같았다. 이름의 뜻은 거룩이었다. 아람어라 히브리어와 발음이 약간 차이가 있었지만 히브리인들도 그의 이름의 뜻이 거룩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어렸을 때 노예 상인들에게 팔려 다윗의 고조부 보아스에게 왔다. 아주 어린 나이에 팔려와서 보아스의 집에서 70년을 종으로 살았다.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룻이 보아스에게 시집오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주인이었던 오벳이 태어나는 것도 보았고 그 아들 이새가 태어나는 것도 보았다. 그렇게 삼대의 주인을 섬겼다. 그러다 나이 일흔일곱에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어린 다윗을 보았다. 어렸을 때 자신도 종으로 팔려와 이방인으로 이스라엘 사람들과 살면서 온갖 멸시와 천대를 다 받았다. 마르고 꼬재재한 다윗을 보면 어릴 적 자신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늦은 나이에 얻은 손주처럼 사랑했다. 그래봐야 함께 들잠을 자고 목동의 거친 음식을 나누는 것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다윗에게는 처음 받아보는 사랑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성경 속 이야기들을 그에게서 들었다. 요셉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과 같은 처지에 공감이 되어 어린것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우상숭배를 하다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윗은 자신도 이방인의 피를 가졌지만 우리(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을 거라 짐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의 우리(하나님)를 만나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 기간도 겨우 2년이었다. 다윗이 8살 되던 해에 노쇄한 카데쉬가 발을 헛디뎌 바위 비탈에서 굴러 떨어졌다. 피가 터지고 뼈가 부러져 들것에 실려갔다. 카데쉬의 옆을 따라오며 우는 다윗에게 그는 '여호와 샬롬'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리고 다윗에게 '나 카데쉬를 평생 돌봐주었던 하나님을 너도 만나'라고 했다. '너를 돌봐줄 분은 그분밖에 없다'라고 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윗은 더 이상 카데쉬를 만나지 못했다. 보름 후 카데쉬가 너무 노쇠해서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윗은 그날 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면 옆의 목동들이 자는데 시끄럽다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래서 숨을 죽이며 밤새 울먹였다. 카데쉬의 죽음 이후 다윗에게는 지옥이 시작되었다. 목동들은 거추장스러운 다윗을 본격적으로 구박했다. 눈치를 봐야 할 카데쉬도 사라졌으니 이제 자신들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악함을 그대로 보여 그를 때리고 학대하며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래도 형들의 구박은 견딜만했다. 그래도 식구였다. 그리고 어미가 옆에 있으니 조금씩 눈치를 봤다. 그러나 여기는 아무도 없었다. 밥도 굶는 일이 허다했다. 얼굴과 몸에는 늘 멍자국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주인 이새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괴롭히는 것을 은근히 원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다윗이 12살 되던 해에 결국 다윗은 일곱 마리의 양과 함께 홀로 지내게 되었다. 불쌍한 아이를 보다 못한 어미가 이새에게 간청해 제발 혼자 양을 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어린아이가 혼자 양을 치는 것은 아주 위험했지만 그래도 매일 학대당하며 거친 목동의 무리에 있다가는 언제 맞아 죽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새도 이상하게 이 일을 허락했다. 그런데 뒤에 눈치를 보니 다윗이 사자나 늑대에게 차라리 죽었으면 하고 허락해 준 것이었다. 다윗의 형들을 시켜 한 번씩 죽었는지 확인하고 오라고 했다. 그러나 어미의 기도대로 우리가 아비가 되어 그를 지켰다. 종 카데쉬의 마지막 죽음의 기도대로 다윗은 우리의 품을 의지하여 살아남았다.
이제 다윗은 정말 혼자가 되었다. 더 이상 괴롭히는 형들이나 목동들이 없는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밤과 낮으로 이제 다윗은 혼자 모든 것을 해야 했다. 7곱 마리 말라비틀어지고 병든 양들과 어디로 가야 할 지도 알지 못했다. 목동들이 나누어 준 양식은 아껴먹어도 5 일이면 없어질 것이었다. 그 5일을 헤매며 밤이면 양들의 품을 의지해 두려움을 이겨냈다. 그 5일 동안은 오아시스의 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그러다 양식이 떨어졌을 때 첫 이틀은 물로만 배를 채웠다. 그리고 도저히 배가 고파서 암양의 젖을 빨아보았다. 그런데 말라비틀어진 늙은 암양에게서 젖이 나올 리 없었다. 양들이 뜯고 있는 풀도 뜯어먹어보았다. 풀을 먹은 다윗은 복통에 배를 움켜 잡았다. 뱃속에 남아 있던 모든 것들이 쏟아져 내렸다. 탈진하고 굶던 아이 다윗은 처음으로 우리를 찾았다. 카데쉬와 어미가 기도하던 우리를 찾았다. 다윗의 기도는 간절했다. 그렇게 다윗은 우리를 만났고 광야와 초지를 누비며 자라 갔다. 다윗은 광야에서 살기 위해 우리를 찾았다. 우리를 찾아 만난 다음에는 우리를 보다 더 의지했다. 우리에 대한 믿음이 자라 가던 다윗은 자신이 진정 믿음이 없으며 우리가 하기 원하는 사랑과 공의는 자신 안에 없음을 깨달았다. 사춘기가 찾아오자 아비와 형들에 대한 원망, 그리고 어미를 향한 갈망, 그리고 자신의 추잡한 출생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다. 그런 분노가 일면 바위를 들어 던지기도 하고 돌을 들어 곰을 쳐 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지금도 자신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보는 형들과 아비에게 곰과 늑대에게처럼 돌을 던지고 싶었다. 한 번씩 형들이 곰팡이가 핀 상한 빵을 양식이라고 가져와 자신의 가슴에 못을 박고 돌아갔다. 형들이 앞에 있을 때는 주눅이 들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형들이 떠나고 나, 고단한 목동의 하루를 마치고 혼자 들잠을 청할 때면 반추의 감정이 밀려들었다. 형들에게 달려들고 싶었다. 그 미움과 경멸이 가득한 눈과 입을 주먹으로 짓이기고 싶었다. 그 미움이 일어나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도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사랑하라, 살인하지 말라 하셨는데 자신의 마음에 일어나는 살인의 충동은 다윗의 양심을 찔러왔다. 다시 사랑하려 마음을 다잡고 있다가도 형들이 왔다 가면 사랑의 결심은 무너지고 원망과 미움의 분노가 타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정죄감이 마음을 괴롭게 했다. 그럴 때면 자신도 사랑받고 사람들에 속하고픈 욕구가 올라왔다. 자신은 왜 들사람이 되어 무리에서 추방된 여우와 같이 방황해야 하는지 한 없이 슬퍼졌다. 사춘기가 되어 여자 아이들에 대한 호기심도 일었다. 옆집의 예쁜 소녀 디나를 보고 미소를 짓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서 자신은 암몬의 튀기였다. 집안의 추잡한 수치임이 소문 나, 디나도 자신을 경멸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그런 일을 당하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머리와 가슴에서 그 생각이 떠나지 않고 분노에 저도 모르게 숨이 가빠왔다. 주먹을 불끈 쥐고 들에서 소리를 지르고 심지어 목동들이 자신을 때리며 내뱉았던 욕을 따라 해 보아도 마음이 시원치 않았다. 그렇게 외로운 당나귀처럼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14살 다윗의 방황은 끝이 없어 보였다.
그 광풍 속에서 잠잠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이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내가 너를 택했다. 나에게 사랑받은 자[^1], 너는 다윗이다."
다윗은 우리에게 물었다.
"정말 제가 택함을 받았나요? 그런데 지금 제 꼴이 보이시나요? 이 지경인데 정말 저를 택하셨나요?"
"제 마음엔 분노와 미움, 그리고 원망만 가득합니다. 저는 죄 덩어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제가 선택받은 것이 맞나요? 무엇보다 제 출신을 아시잖아요. 저는 어미가 암몬 왕에게 강간당해 낳은 잡종입니다."
"이런 저를 누가 인정하겠습니까? 선택할 만한 자를 선택하셨어야죠. 저는 사람들의 놀림감입니다. 혹시 제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귀신들에게 미혹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저 같은 자를 선택하여 쓰시겠어요?"
마음이 온통 움츠려든 들에 버려진 아이 다윗에게 우리 중 성부가 말했다.
"다윗아 나는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가 이방인이든 히브리인이든 내가 원하는 사람을 사랑하여 선택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다윗아 너는 저 광야에 버려진 아이였다. 그런 너를 내가 사랑했다. 내가 너를 먹이고 지켰다. 네가 고기가 먹고 싶으면 내가 들의 짐승들을 보내 주었고 네가 빵이 먹고 싶으면 내가 너의 아비가 되어 다른 들 사람들의 자비를 보내어 너에게 빵을 공급했다. 그리고 너는 이제 빵 굽는 법을 배워 빵을 구울 수 있을 만큼 자랐다. 누가 너를 돌보았느냐? 누가 너를 길렀느냐? 너는 광야에 버려진 아이였다."
"나는 너에게 내 잃어버린 양들을 부탁한다. 네가 버려졌듯 목자 없는 양같이 버려진 내 백성을 부탁한다. 너와 같이 네가 광야에서 처음 돌보던 양들도 모두 마르고 병든 버려진 양이었다. 너는 나를 따라다니며 그 양들을 살찌우고 그 양들의 새끼들을 돌보았다. 그래서 이제 네 양이 너의 집 전체 양보다 많아졌고 베들레헴 어떤 집의 양들보다 많아졌다. 네가 나를 따른다면 이 백성 이스라엘도 양의 무리와 같이 풍성한 생명을 얻어 땅에 충만해질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의 목동이 되어라.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사자와 곰과 늑대와 표범을 무찌르듯 무찔러라. 그리고 이스라엘을 쉴만한 물가와 초장으로 인도하여라."
"너는 네가 버림받아 보았으니 버림받은 자들을 불쌍히 여길 것이다. 네 형과 아비와 너를 경멸하는 베들레헴의 저 추잡한 무리들도 사실 길을 잃어서 그렇단다. 광야에서 방황하는 양들과 같이 나를 떠나 늑대인 귀신과 사탄에게 속해 그들에게 사육당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여 그들의 먹이가 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너를 그렇게 미워한 것은 그들이 미움의 아비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그 마귀에게 세뇌당한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노른단다. 너는 이들을 사랑하여 돌보아라. 원수에게서 구원하여 내라. 너는 저 길을 잃은 무리의 목자가 되어라. 내가 너를 돌보았듯 그들을 돌보아라. 내가 너를 위해 싸웠듯 너도 저들을 위해 싸워라."
다윗은 우리의 말에 답했다.
"하나님 저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하나님 그런데요, 저는 저들을 사랑하기보다 미움과 분노가 더 앞서와요. 저는 그렇게 할 능력이 없어요."
우리(하나님)가 말했다.
"우리도 알고 있다. 네 안에도 아담에게서부터 이어져온 죄의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제단에서 양이 피를 흘리며 죽듯이 네 안의 죄의 사람은 죽어야 한다. 그리고 너는 우리의 아들로 새로 태어나라. 우리의 영을 받아 충만하게 되어라. 그러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으로 너의 안이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사랑이 가득한 자가 될 것이다. 네가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가 될 것이다. 다윗아 너는 사랑받은 자다. 그러니 사랑하는 자도 될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우리의 아들이다. 너는 우리와 같은 목자가 될 것이다. 너는 내 백성을 돌보며 그들로 온 땅에 충만하게 하라. 너의 반과 같이 이방인들도 내 백성이 되게 하라. 그리고 너의 어미의 혈통인 히브리인들도 내 백성이 되게 하라. 너는 그들의 목자가 되어라. 너와 너의 자손들은 열방의 목자가 될 것이다. 그러면 너의 보좌는 내 안에서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다윗이 말했다.
"목자가 되라니 되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안되더라도 새로 태어나고 싶어요. 이 더럽고 악한 죄의 사람이 제 안에서 죽고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으로 새로워지고 싶어요."
다윗은 이미 수많은 기도들을 통해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 자신은 거룩한 사랑의 사람으로 들에서 자신을 돌봐준 우리를 닮고 싶어 했다. 그 오랜 기도의 응답으로 우리는 양의 피가 상징하는 십자가의 능력을 다윗에게 부었다. 다윗 안의 죄의 사람은 그 권세를 잃었다. 이제 죄가 다윗 안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그리고 거룩한 영, 우리의 영을 부어 거룩과 사랑을 다윗 안에 가득 부었다. 그 부어진 것이 넘쳐 사랑으로 흘렀다. 형들에 대한 미움도 아비에 대한 원망도 자신의 불운한 운명에 대한 비관도 모두 사그라들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왜 그렇게 했는지 그리고 자신은 무엇 때문에 이런 운명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요셉이 먼저 이집트로 가 백성들을 구원하는 자가 되었고 모세 할아버지도 광야로 먼저가 백성들을 구원하는 자가 되었다. 자신도 잃어버린 양이 되어 잃어버린 형들과 아비와 베들레헴 친족들과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자가 될 것이다. 원수에게 속아 자신을 괴롭혔던 저 악마와 같은 자들을 구원하는 자가 될 것이다.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 원수에게 잡혀 악행을 하고 있는 저들을 원수에게서 구해내어야 한다. 사자의 입을 찢어 양을 구했듯이 자신은 용사가 되어 어둠에게서 저 백성들을 구해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전을 짓고 피의 구원과 화목의 복된 소식을 전해야 한다. 또 실질적인 적국들에게서도 내 백성을 구하는 용사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나는 이미 광야에서 믿음의 용사로 길러졌다. 아무리 거대한 골리앗이 다시 와도 사자와 늑대의 무리가 달려들어도 자신은 싸워 이길 수 있다. 왜냐하면 다윗은 하나님께 사랑받은 자다. 이런 모든 충만으로 다윗은 충만해졌다.
다윗은 우리의 영으로 충만했다. 성령이 그와 함께 하여 그에게 지혜와 능력을 부었다. 광야에서 거듭난 다윗은 청소년이 되었다. 아마 열일곱 살쯤 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사무엘이 다윗을 만난 것이.
사울이 타락하여 우리를 떠나 여러 번 범죄하여 버림받음으로 우리는 새로운 왕이 필요했다. 우리를 온전히 따르는 우리에게 속한 왕이어야만 했다. 그래야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내 백성들을 사랑과 공의로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왕이라야 우리(하나님)의 나라에 사랑과 공평과 정의를 심어 모든 백성들이 그 사랑으로 먹고살며 행복을 누리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러운 원수의 죄악이 틈타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고 서로 죽이며 서로의 것을 탐하는 지옥도에 살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옆에 있는 아이 다윗을 주목했다. 그렇다. 이 아이라면 우리의 통치를 받아 우리의 뜻대로 사랑의 낙원을 이 땅 가나안에 가져올 것이다. 이 아이라면 자신의 가련한 처지와 같은 내 백성들을 잘 지켜줄 것이다. 동병상련의 마음로 목자 없는 양 같은 내 백성들을 잘 품어줄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 싸워주었던 것처럼 백성들을 위해 싸워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절대적으로 믿는 이 아이라면 우리의 전능이 함께 함으로 패하는 일 없이 백성들을 원수들에게서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무엘을 통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다윗에게 기름부음으로 다윗은 우리 중 성령으로 충만해졌다. 성령은 영으로 다윗과 함께 하며 그 안에서 활동하여 다윗을 충만하게 했다. 다윗은 이제 더 친밀하게 우리와 소통했다. 우리에게 귓속말을 보내듯 늘 대화를 나누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아무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오직 사무엘에게뿐이었는데 사무엘도 처음에는 다윗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다윗의 아비 이새는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는 데도 관심이 없었다. 여전히 양을 치게 들로 보냈다. 혼자 지내게 한 것도 여전했다. 다윗을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윗이 왕이 되든 안되든 관심이 없었다. 이새는 여전히 다윗을 무시했고 형들과 집안의 종들조차 다윗을 비웃었다. 심지어 "네가 왕이 된다니 사무엘 선지자의 말이라 어쩔 수 없지만 네가 어떻게 왕이 되겠냐? 네가 왕이 되면 나라가 개잡종이 나라가 되는 것 아니냐"며 비웃었다. 그래도 이제 다윗은 달라졌다. 이전에는 아버지와 형들, 그리고 베들레헴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다. 그 경멸의 시선들을 마주하면 마냥 마음이 움츠려 들고 우울해졌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의 약속을 믿었다. 의심이 생길 때는 우리와 대화했다. 다윗은 우리와 함께 하면 생기는 확신과 힘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우리 중 성령이 다윗의 안을 충만하게 하여 의심과 불안을 몰아내고 신뢰와 소망으로 마음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거듭난 이후 다윗의 심령은 늘 이런 상태였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어도 그것을 이길 힘이 생겼다. 거듭난 다윗의 심령에는 성령이 늘 가득했기 때문이다.
다윗에게 우리가 함께한다는 소문이 났다. 다윗이 하프를 연주할 때에는 우리가 함께 함으로 귀신들도 도망을 갔다. 사울에게 우리의 영이 떠난 이후 악령이 사울을 괴롭혔는데 다윗은 사울에게 불려 가 하프를 연주하여 악한 영들을 쫓아주기도 했다(삼상 16:23)
얼마 지나지 않아 다윗은 골리앗이 있는 전장으로 갔다. 이새는 다윗이 전쟁터 근처에서 죽거나 다치더라도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장도 하지 않은 다윗을 전장으로 보냈다. 형들도 자신들을 위문하러 찾아온 다윗을 향해 비아냥 거렸다.
"이 교만한 놈아. 이곳에는 왜 왔냐? (네가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된다고 하니 마음이 교만해졌구나.) 감히 여기가 어디인줄 알고 네까짓 것이 이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나 있겠느냐? 교만한 것!"
이 상황에서 이전의 다윗이었다면 움츠려 들었을 것이다. 말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그곳을 떠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다윗은 이전의 사람이 아니었다. 거듭난 새 사람이었다. 우리에게 묻고 다윗은 그곳에서 우리를 비웃고 있던 골리앗을 무릿매의 돌로 죽였다. 다윗은 더 이상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 믿음으로 우리를 따랐다. 그 이후에도 다윗은 수많은 전투와 도피 생활에서 우리를 신뢰했다. 심지어 다윗은 자신과 부하들의 가족이 적들에게 포로로 잡혀간 상황에서도 우리의 뜻을 찾으려 했다. 다윗은 그곳에서 우리(하나님)에게 그 상황에 대해 물었다. 그것은 가족들을 구하지 않으려 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지혜를 먼저 구한 것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옆에 있던 부하들이 다윗을 돌로 치려하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다윗은 신실하게 우리만을 의지했다. 다윗은 그 믿음으로 수많은 역경들을 이겨나갔다.
왕이 되었을 때에도 우리만을 신뢰했다. 그가 자신의 백성들의 인구조사를 했을 때 우리가 그를 심판한 것은 그가 우리가 아닌 자신의 백성들의 수를 신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어느 나라의 왕이나 지도자가 자신의 백성의 인구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심지어 교회의 목사들도 자신의 성도수가 몇 명인지에 따라 어깨에 들어가는 힘이 다르다. 그런데 하물며 한 나라의 왕이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다윗이 백성의 숫자를 신뢰하게 되자, 그를 즉시 징계했다. 이는 역으로 생각하면 다윗은 그만큼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전과 이후에도 다윗은 인간적인 군대나 정치적인 힘이나 경제력을 신뢰하지 않았다. 오직 우리만을 신뢰하고 우리만을 따랐다. 모든 경우에서 이렇게 살았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자신의 결정과 뜻을 따르지 않았다. 오직 우리를 신뢰했다. 우리(하나님)가 다윗을 신뢰한 이유가 이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윗의 성품이나 스스로의 의지에서 나왔다고 판단하여 그와 같이 행동하는 신앙을 가지려고 노력한다면 아무도 다윗과 같이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살 수 없다. 아무리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라 해도 그렇게 살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다윗은 역경 속에서 고통스러워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하나님)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선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그 자신의 힘이 아니라 그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힘이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였다.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옥상에서 보고 그녀를 탐하여 함께 간음했다. 밧세바가 옥상에서 목욕한 것이 정숙하지 못하다고 하는 자들도 있지만 사실 그 당시의 건물의 구조를 보았을 때 옥상에서 목욕을 하는데 다른 집에서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다윗의 왕궁이 높은데 있고 일반적으로 단층인 구조의 백성들의 집과 달랐기 때문에 목욕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다윗은 유혹을 받고 심지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전쟁에서 음모를 꾸며 죽였다. 그런 죄를 짓고 있던 다윗에게 나단이 책망하였을 때 다윗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다. 그 기록이 성경에 기록되었던 것은 그가 자신의 죄를 왕의 지위를 이용해 은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막지 않았다. 실수하고 죄를 지을 수 있지만 그 죄를 이기고 돌이켜 회개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바로 회심한 자 안에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그 죄를 반복하지 않는 능력이 그 안에서 역사한다. 이 사건 이후 다윗의 말년에 남자를 알지 못하는 아비삭이 자신의 침실에 들어왔을 때 다윗은 그녀를 탐하지 않았다. 그 이전의 자신의 실수에서 돌이키고 교훈을 얻어 경계함으로 아예 합법적으로 자신의 첩으로 사람들이 들여보냈으나 손을 대지 않았다. 돌이켜 회개한 자의 믿음의 행위가 이곳에서 나타난다.
이렇게 거듭난 자만이 자신이 속한 곳에 우리의 통치를 불러들일 수 있다. 오직 거듭난 자만이 우리에게 복종할 수 있기에 우리의 통치에 순응할 수 있다. 그런 거듭난 자가 있어야 땅은 그의 믿음으로 정복된다. 믿음이 없이 이루어지는 모든 세상의 다툼과 정복은 그냥 세상 자체 안의 내분일 뿐이다. 그를 통해 세상은 더 악해지며 그 악에 악이 더해져 칠흑 같은 어둠이 되면 그곳에 심판이 임할 뿐이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그곳에 우리의 통치를 가져와 사랑과 공의가 가득하게 한다. 그가 순종함으로 자신의 삶 속에 사랑과 공평과 정직이 가득해진다. 이렇게 우리의 통치가 있는 그곳이 우리의 나라 가나안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하늘나라(천국)이다. 거듭나지 못해 자신의 죄조차 이기지 못하는 자가 정복자가 될 수는 없다. 오직 자신이 십자가의 나(예수니)와 연합해 죽고 새 사람이 된 자만이 죄의 세상에서 거룩을 나타내는 정복자가 될 수 있다. 미움과 슬픔의 세상에서 사랑을 나타내는 정복자가 될 수 있다. 자신과 세상과 사탄의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승리자가 될 수 있다.
[^1]: 다윗은 히브리어로 사랑받은 자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