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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Aug 17. 2024

01.3.2.3.9. 오경적 구원의 서정 3

01.3.2.3.9.8.2. 모세와 다윗: 광야 백성과 가나안 정복자



이미 가나안 땅에 거주했던 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을 기억하라. 그들은 이미 약속의 땅에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에게는 광야에서 외치는 엘리야가 필요했다. 육신적으로 그들은 가나안에 있었다. 그러나 영적으로 그들은 여전히 광야에 있었다. 여호수아가 주었던 가나안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예표였다(히 4:8) 그리고 여호수아 세대에 거듭난 믿음을 보인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증명된 것이 없다. 그 세대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의 힘으로 가나안을 정복하였으나 곧 둘을 제외한 이스라엘 민족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거듭난 자들이 아님을 나타내었다. 사사기의 기록과 그 후대의 기록들을 살펴보라. 그러므로 각 개인이 우리의 통치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각자의 믿음에 기인한다. 결코 무리를 통해 결정될 수 없다. 여호수아의 세대나 또 다른 부흥의 세대에도 동일하다. 그래서 내가 신약에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 협착하다고 했다. 결코 많은 무리가 들어가지 못한다. 무리가 있고 그 무리에 믿음의 용사들이 있다.

가데스바네아에서는 믿음의 용사가 이스라엘 모든 민족 중에 둘밖에 없었다. 심지어 모세와 아론도 용사가 아님이 증명되었다. 그래서 모세는 절대신앙과 절대복종과 절대평안의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하늘나라에 들어간 자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서 기업을 얻었다. 그 예가 르우벤, 갓, 므낫세다. 그러나 하늘나라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심지어 세례 요한조차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보다 작다. 그는 엘리야에게 부어진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고 구약의 모세와 같은 자이지만 그는 하늘나라에 들어온 자가 아니었다. 그는 종이었으나 아들은 아니었다. 그도 광야에 속한 자였다. 구약의 이런 선지자들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리고 그들을 통해 일어난 기적이 대단했다 해도 결코 그들이 하늘나라에 들어온 자는 아니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을 보는가? 다윗의 믿음을 보는가? 그리고 삼손의 마지막 믿음을 보았는가? 또한 엘리야의 마지막 믿음을 보았는가? 또한 엘리사의 믿음을 보았는가? 그러한 자들의 믿음이 거듭난 자들의 믿음이며 그들은 구약을 살았으나 오는 세대인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은 자들이었다. 그러한 믿음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믿음이다. 그들도 인간이었고 동일한 죄인이었다. 그들이 거듭났다 하여  이것이 다윗이나 다른 거듭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완전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과 모세의 믿음을 비교하면 어떤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01.3.2.3.9.8.2.1. 모세와 아론:육에 속한 광야의 사람


모세는 처음 부름을 받을 때부터 우리(하나님)가 명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자주 말했다. 이집트로 가라고 했을 때도 그리고 12 기적이 일어날 때도 뭔가 문제가 생기면 우리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데스 바네아에서도 백성들과 함께 엎드러졌다(출 14:5) 또한 므리바에서 모세는 우리의 명령을 거역하고 백성의 면전을 떠나 회막 입구로 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러졌다. 이는 민수기 20:6절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백성의 앞을 떠난 것이 우리의 명령을 어긴 것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이는 그들의 동기를 사건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글을 기록한 자가 모세 자신이기에 그런 반항적 태도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렸다. 그러나 이런 행동을 한 모세의 동기는 뒤에 나오는 민 20:10의 모세의 말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모세의 말을 들어보자.

"들어라, 너희 반역한 자들아. **우리(모세와 아론)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해야 하겠느냐?"

이 말에서 어떤 행간을 읽어낼 수 있는가? 지금 모세와 아론은 자신들이 화가 난 것에 집중을 하고 있다. 백성들이 불순종하고 믿음 없어하는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한 반응이다. 그리고 그 분노의 주체가 우리(하나님)가 아니고 자신들임이 명확하다. 그 분노로 인해 심지어 바위에서 물을 내는 주체도 모세와 아론 자신들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민 20장의 두 번째 므리바 사건이 아닌 동일한 장소에서 있었던 출 17장의 첫 므리바 사건을 살펴보면 이 사건에서 모세와 아론의 불순종이 더 명확해진다. 심지어 모세가 자신의 사건을 기록함에 있어 기록하지 않고 은폐한 것이 있는 증거까지 드러난다. 모세는 자신들의 불순종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핑계를 대며 원망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출 17장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자.

Exodus 17:1-7 바른

1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신 광야를 떠나 그들의 여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마실 물이 없었다. 2백성들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였다.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십시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그곳에서 백성들이 목이 마르므로 물 때문에 모세를 원망하며 말하였다.

"왜 저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와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합니까?"

4백성들이 이렇게 원망하니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제가 이 백성들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이 조금만 더 있으면 저에게 돌을 던지려 할 것입니다."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백성들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친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보아라, 내가 거기 호렙 산 반석 위에서 네 앞에 서리니, 그 반석을 쳐라. 그러면 반석에서 물이 나와 백성들이 마실 수 있을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 앞에서 그대로 행하였다. 7그가 그 장소의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기 때문이며, 그들이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 하고 여호와를 시험했기 때문이었다.


출 17장에서는 모세와 아론이 백성들의 앞을 떠나지 않았다. 물론 자신들의 분노를 드러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백성들이 거역하는 것이 여호와 우리(하나님)임을 명확하게 했다(출 17:2) 또한 백성들 앞에서 우리에게 기도했다(출 17:4) 그리고 우리가 명령하는 대로 바로 백성들 앞에서 호렙 산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했다.

이러한 모세와 아론의 반응은 뒤에 다시 반복되는 민 20장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비슷한 장소에서 동일한 상황을 맞이하여 백성들은 동일한 불신앙과 원망의 반응을 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의 행동이 달라졌다. 첫 사건에서 이미 백성들 앞에서 백성들을 책망하고 또한 바로 우리의 응답을 받아 반석에서 물을 얻었었다. 이를 백성들 앞에서 행해서 우리의 영광을 드러냈다. 그런데 두 번째 므리바 사건인 민 20장에서는 모세와 아론은 백성들의 앞을 떠났다. 그리고 회막 문 앞에서 엎드러졌다. 이 부분부터 모세가 회막 앞에서 우리의 영광을 보고 우리의 명령을 듣고 반석에서 물을 얻은 것 사이에 있었던 아론과 자신의 불순종을 은폐한 것이 있다.

우리(하나님)는 모세가 민 14장의 가데스에서 아론과 자신이 백성과 함께 불신앙의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 은폐하고 기록한 것을 보았다. 자신들도 동일하게 백성들과 함께 불신앙으로 엎드러진 밤을 보내고서도 자신들의 불신앙은 축소하고 은폐시켰다. 그리고 이 사건 민 20장에서도 자신들이 처음 우리의 명령을 어기고 분노로 백성들의 앞을 떠나 회막 앞에 엎드러 졌던 것을 은폐한 것도 보았다. 그러나 우리(하나님)는 이에 대해 모세에게 침묵했다. 왜냐하면 오히려 그 기록을 은폐하고 축소하여 기록한 모세의 행동이 성경에 남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민수기 14장의 기록을 살펴보자.

Numbers 14:29-30 바른

"29너희의 시체들이 이 광야에서 엎드러질 것이며, 너희 가운데 나이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된 자 모두가 나를 거슬러 불평하였으므로,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손을 들어 너희가 들어가 살게 할 것이라고 맹세한 그 땅에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9절 "모두가 나를 거슬러 불평하였다"는 것은 모세와 아론도 거슬러 불평했다는 것이다. 이 거역함에서 제외된 사람은 오직 30절의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없다.
민 14장에서 모세가 모든 것을 축소하고 은폐하여 기록할 수 있었지만 우리의 말인  위에 인용한 민 14:30을 축소하고 은폐할 수는 없었다. 모세 자신도 우리의 말을 삭제한다는 것이 어떤 죄인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민 14:30에서는 그 시대에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둘밖에 없음이 드러났다. 이는 모세와 아론도 백성들과 함께 두려움과 원망에 사로잡혔음을 뜻하는 것이다(민 14:5, 30) 이를 보아 알 수 있는 것은 모세와 아론이 엄청난 기적을 우리의 대리자로 선포할 수는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거듭나지 못한 심령을 가졌다는 것이다. 심지어 백성들에게 우리를 알리기 위해 기록한 모세의 다섯 책에서도 자신들의 수치를 최대한 가렸다. 자신에 대한 기록을 자신이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는 허용하여 성경에 기록되게 했다. 그렇게 하여 이스라엘의 대선지자라는 타이틀에 가려 모세의 불신앙이 가려지는 일이 없도록 했다. 이렇게 은폐한 흔적이 성경에 남음으로 하여 모세 자신의 믿음이 어떠한가를 숨길 수 없도록 하였다. 명철한 자들은 모세가 어쩔 수 없이 축소하지 못한 우리의 직접적인 말을 통해 모세와 아론의 불신앙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민 14:30) 그를 통해 모세가 은폐하려는 사실은 숨겨지지 못하고 더욱 강조되어 드러난다.

또한 모세가 축소은폐한 기록에서도 그 근거가 남아있다. 바로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얼굴을 숙이고 엎드렸다(Numbers 14:5 바른)"이다. 이 행동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온 회중이 소리 높여 부르짖었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울었다(Numbers 14:1 바른)"라는 상황에서 이들이 백성들 앞에서 같이 엎드러진 것은 바로 함께 불평하고 함께 원망했으며 함께 엎드러져 울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엎드러진다는 단어는 다른 용례에서는 타락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단어는 나팔(נפל)이라는 동사로 바로 네피림의 어원이 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는 타락하다라는 뜻으로도 사용되는 단어다. 또한 이 단어는 죽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죽어서 엎드러진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민수기 14장에서는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다음의 구절들이다.

Numbers 14:3  바른
어찌하여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시는가? 우리 아내와 아이들이 사로잡힐 것이니,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Numbers 14:5 바른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얼굴을 숙이고 엎드렸다.

Numbers 14:29  바른
너희의 시체들이 이 광야에서 엎드러질 것이며, 너희 가운데 나이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된 자 모두가 나를 거슬러 불평하였으므로,

Numbers 14:32  바른
너희는 시체가 되어 이 광야에서 엎드러질 것이며,

Numbers 14:43  바른
너희 앞에는 아말렉 족속과 가나안 족속이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쓰러질 것이다. 너희가 여호와를 등지고 돌아섰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불신앙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엎드러지고 원수의 칼날에 엎드러진다는 단어와 같은 단어다. 모세와 아론도 이들과 같이 엎드러질 자로 행동하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나타낸 수사법이라 할 수 있다. 이 일을 기록한 자가 모세인데 그에게 감동한 성령이 그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에에 이런 수사법적 기교를 삽입해 모세 자신이 숨기려 한 사건의 진실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했다.

다시 민수기 20장의 므리바 시건으로 돌아가자. 모세의 기록에 의하면 모세가 백성들의 앞을 떠나 회막 앞에서 엎드려 있을 때에 우리(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우리가 명령하여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 하였으므로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약 모세의 기록이 숨김이 없는 사실이라면 뒤에 우리가 모세를 책망하는 이 말은 문맥상 없었어야 한다. 그 말은 민수기 20장 후반부에 기록된 것으로 다음과 같다.

Numbers 20:23-24 바른
23여호와께서 에돔 땅의 경계에 있는 호르 산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24"아론이 자기 조상에게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명령을 거역하였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므리바에서 모세와 아론이 우리(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다라고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분명하게 모세와 아론이 우리의 명력을 거역하였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모세의 기록(민 20:1~13)에서는 우리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민 13장의 가데스바네아 사건에서 모세가 아론과 자신의 거역함을 숨겼듯이 지금 이곳 므리바에서도 자신들의 거역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모세가 기록한 민 20:1~13절을 보면 별 다른 거역을 찾아볼 수 없다. 모세가 아론과 자신의 거역을 은폐하고 기록하더라도 최소화하여 기록한 습관대로 성경을 기술한 것이다. 이를 모르고 어떤 자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해석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모세가 우리(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 거역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건의 구분을 위해 동일한 장소인 므리바에서 앞서 일어난 출 17장의 사건을 1 차 므리바 사건이라고 하고 지금 민 20장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2 차 므리바 사건이라고 하자. 2차 므리바에서 모세와 아론이 우리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차 사건을 살펴봐도 특별히 다른 것이 없다. 물론 1 차에서는 우리(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반석에서 물을 낼 때에는 이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다. 사실 모세와 아론이 기적을 행할 때 우리(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은 곳들도 많다. 그렇다고 백성들이나 성경을 읽는 독자들이 그 기적을 통해 우리(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 해석은 이치에 맞지 않는 해석이라고 보아야 한다.

두 번째는 민수기 20장 8절에서 "너는 지팡이를 잡아라. 너와 네 형 아론이 회중을 소집하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바위에게 명령하면 그것이 물을 낼 것이다. 이와 같이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가축이 마시게 하여라."라고 우리가 명령하였는데 모세가 바위에게 명령하지 않고 1차 므리바 사건과 같이 바위를 두 번 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세세한 부분의 차이가 아니다. 모세가 동일한 사건에서 1차 사건에서의 명령을 기억하고 바위를 두 번 친 것이 실수라는 것을 우리가 모를 리 없다. 우리가 실수를 책망하겠는가? 그것으로 인해 모세를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하겠는가? 우리가 너희 모두를 그런 기준으로 판단했다면 인생 중에 우리(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올 자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실수가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된 이유는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런 세세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도를 알려고 하면 우리가 모세와 아론을 책망한 이유를 들어보아야 한다. 우리가 언급한 것은 모세와 아론이 우리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다. 그리고 그 거역을 통해 백성들 앞에서 우리의 영광(거룩)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을 내건 명령하여 물을 내건 우리의 거룩과 영광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또한 물을 내라는 전체적인 맥락은 모세가 순종하였다. 물론 작은 실수가 있었지만 그것은 거역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의도적인 거역이 아닌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하지만 우리가 벌하였겠는가? 또한 앞의 1 차 사건에서도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을 내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영광을 가리는 것도 아니었다. 모세는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자신을 통해 행할 때도 그냥 지팡이만 내밀었다. 어떤 말도 없었다. 우리(여호와)의 이름을 말하거나 다른 어떤 설명도 필요 없었다. 일어난 기적 자체가 이미 우리의 것임이 확실했고 그 나타난 영광이 우리만 할 수 있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표면적으로 우리의 이름을 언급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상황 상 므리바 반석에서 물이 나온 것은 우리의 거룩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하다.

자 무리하고 억지에 가까운 해석을 하려는 조급한 마음을 내리자. 그리고 천천히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묵상하고 연구하고 기도하자. 그러면 글 속에서 행간들이 읽히고 그 속에 숨겨진 기록의 참 문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해석학의 기본 목적인 석의 즉 화자의 본래의 의미를 찾는 것이 우선이다. 우리의 의도(본래의 말뜻)는 다음의 구절들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Numbers 20:12 바른
12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주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할 것이다." 하셨다.


Numbers 20:23-24 바른
23여호와께서 에돔 땅의 경계에 있는 호르 산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24"아론이 자기 조상에게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명령을 거역하였기 때문이다."


Numbers 27:12-14 바른
1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준 땅을 바라보아라. 13네가 그것을 바라본 후에, 너의 형 아론이 돌아간 것같이 너도 네 조상에게 돌아갈 것이다. 14이는 친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때에 그 물가에서 나의 거룩함을 그들의 면전에 나타내라는 내 명령을 너희가 거역했기 때문이다."

그 물은 친 광야에 있는 므리바 가데스의 물이다.


Deuteronomy 32:51  (바른)
이는 너희가 친 광야에 있는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에 죄를 지었으며, 너희가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Deuteronomy 32:48-52 바른

48그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49"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 느보 산으로 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유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아라. 50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자기 백성에게 합류한 것같이, 너도 네가 올라가는 그 산에서 죽어 네 백성에게 합류할 것이다. 51이는 너희가 친 광야에 있는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에 죄를 지었으며, 너희가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52너는 앞에 있는 그 땅을 보기만 할 뿐,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모세와 아론의 죄는 나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다. 그런데 모세의 기록만 보면 앞에서 살펴보았듯 사실 우리의 명령을 거역한 것 같지 않다. 심지어 우리의 거룩함과 영광에 흠집을 낸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민 14장에서 모세가 아론과 자신의 원망과 통곡을 단지 백성들 앞에 엎드렸다는 한 마디만 기록함으로 은폐하였던 것같이 지금 여기 민 20장의 2 차 므리바 사건에서도 자신들의 거역함을 자신들이 회막 앞에서 엎드렸다는 말 한마디로 축소 은폐한 흔적이 있다. 모세가 사건의 기록에서 누락한 것이 있다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모세가 사건을 은폐하고 기록에서 누락했다면 그 누락된 사건은 오직 모세가 삭제할 수 없었던 우리(하나님)의 말에서 찾아야 한다.

성경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이 사건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종합하면 다음의 둘로 결론지어진다.

첫째는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의 앞에서 우리(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이다(민 20:12, 27:14, 신 32:51, 시 106:32~33)

둘째는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면전에서 우리(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다는 것이다.

모세가 민 14장의 가데스의 원망의 눈물과 거역을 단지 백성들 앞에 엎드렸다는 말로 축소한 전례를 따라 이 사건의 은폐된 것을 유추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한 이 일에 대한 평가를 따라 은폐된 것을 너희는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모세가 은폐한 사실에 대해 결론적으로 이 글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너희가 성경을 통해 그것을 발견하기 원하는 마음으로 이 과정들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를 유념하고 나의 말을 잘 듣기 바란다.

1차 므리바 사건과 같은 내용만을 2차 사건과 관련한 성경에 기록한 모세의 기록에는 모세와 아론이 우리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하여 우리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들의 앞에서 훼손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은폐의 전례와 그 은폐와 관련된 유사한 표현을 2차 므리바 사건이 기록된 민 20:6 '모세와 아론이 회중 앞을 떠나 회막 입구로 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백성들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러진 것이다. 모세는 백성들과 함께 원망하고 울며 거역한 행동을 엎드리다는 단 한마디로 은폐하고 축소시켰다. 설마 우리가 모세와 아론이 단지 엎드린 한 행동으로 인해 그들을 가나안에 들이지 않았겠는가? 이방인이 갈렙도 가나안에 들였는데 그 놀라운 기적들을 행한 아론과 모세를 우리가 왜 거절하여 우리의 나라에 들이지 않겠는가? 이미 민 14장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했다. 모세와 아론도 원망의 통곡과 믿음 없는 거역으로 우리를 대적한 백성과 이미 함께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오직 믿음으로 반응한 것은 여호수아와 갈렙 둘밖에 없었다고 우리가 이미 결론을 내려 확정 지어버렸다. 아무리 모세가 자신과 아론의 죄를 은폐하려 노력해도 그리고 인정하지 않으려 해도 그것은 그의 어리석음일 뿐이다. 우리가 모세와 아론의 죄를 정죄한 것이 진리이며 참이며 진실이다.

모세는 가데스바네아에서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기록에서도 은폐했다. 그리고 여기 민 20장의 2차 므리바 사건에서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히려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해 자신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백성을 원망한다. 다음 구절들을 보자.


Deuteronomy 1:37  (바른)
여호와께서는 너희 때문에 나에게까지 진노하여 말씀하셨다.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나

이 원망이 이상하지 않은가? 원래 대로면 자신이 죄가 없다면 백성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백성들을 버리지 말라고 기도하던 모세였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서 언급을 할 때만은 계속 백성을 원망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원망하는 것이 우리의 말에 근거하지 않은 자신의 감정에 기반한 분노라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분명 모세와 아론이 거역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의 명령을 거역했다고 우리가 확정적으로 말했음에도 모세는 계속해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간악한 모습을 성경의 아주 유명한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아담과 하와가 처음 타락했을 때의 모습이다. 아담은 하와를 핑계로 삼았고 하와는 뱀을 핑계 삼았다. 결코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계속 변명만 늘어놓는 것이 죄성을 가진 인간의 모습이다. 법정에 선 죄인들이나 감옥의 죄인들에게 물어보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살인을 한 자도, 사기를 친 자도, 심지어 여자를 강간한 자도 어떤 핑계라도 찾아 자신의 죄를 덮거나 축소하려 애를 쓴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1차 므리바 사건을 기억하고 2차 므리바에서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친 모세였다. 그랬다면 1차 므리바 사건과 같이 백성의 앞에서 바로 우리의 뜻을 묻고 그 자리에서 백성을 책망하고 우리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음을 기억할 수 있는 모세가 왜 아론과 함께 백성의 앞을 떠나 회막 앞에 엎드렸을까? 이 질문에 모세와 아론의 반역의 힌트가 있다. 그리고 우리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나타내라는 명령이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있다. 바로 1차와 같이 백성들 앞에서 백성들의 잘못을 꾸짖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했어야 한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백성의 앞을 떠나 회막 앞에서 엎드렸다. 회막 안에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회막 앞에 엎드렸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백성에 대한 분노이고 또한 우리에 대한 원망이다. 불신앙의 지긋지긋한 백성들에 대한 분노가 일어나고 그리고 이런 백성들을 상대하도록 자신들에게 명령하는 우리에 대한 원망인 것이다. 정말 우리의 말을 듣고자 했으면 회막 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회막 앞에 엎드러졌다. 이것은 분노와 원망의 행동이었다. 바로 가데스바네아 앞에서 보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모세의 습관적 기록을 통해 보면 이 행동은 단순히 엎드린 것이 아니었다. 심하면 분노와 원망과 통곡이 함께 했을 수도 있는 기록이다. 웬만하면 모세가 회막 안에 들어오지 않고 앞에 엎드러지는 경우는 없었다. 이는 우리와도 대화를 단절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다. 이는 불만을 가진 자의 행동이며 그것도 극심한 불만으로 인해 관계를 일시적이나 영구적으로 단절하겠다는 자의 행동이다. 이를 확실하게 뒷받침할 수 있는 구절이 민 20장에 나온다. 다음 구절이다.

Numbers 20:10 바른
10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바위 앞으로 소집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들어라, 너희 반역한 자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해야 하겠느냐?"

이는 원망과 분노가 가득한 표현이다. 이들이 왜 회막 앞에 엎드러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표현이다. 모세가 아무리 자신이 우리와 백성을 원망하며 거역하여 돌아서 회막으로 향한 모습과 마음의 분노를 감추려 해도 모세의 뒤에 이어지는 말에서는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모세는 분노가 일어나도 백성들의 앞을 떠나지 말아야 했다. 그리고 우리의 앞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의 거룩과 영광이 무지한 백성들 앞에 손상되었다. 모세는 우리의 의도를 알고 1 차 므리바에서 처럼 백성들 앞에서 우리의 거룩함을 나타내어야 했다. 1 차 므리바에서도 분노함으로 우리에게 불만을 토로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봐줄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백성과의 대화 단절뿐 아니라 우리와도 대화를 단절하고 삐쳐서 그 자리를 떠나 엎드러져 원망과 분노를 드러낸 것은 백성들 앞에 우리의 거룩과 영광을 훼손하는 짓이었다. 우리(여호와 하나님)는 이것에 대해 책망하고 가데스바네아의 거역과 이 사건에서의 거역에 대한 책임으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이를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알아듣고 싶지 않았다. 단지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과 라멕과 같이 자신들의 잘못은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그 죄의 형벌도 거부하며 오직 억울하며 핑계할 무언가를 찾아 자신들의 죄를 회피하고 싶은 죄성이 가득한 인간의 모습만을 보여 주었다.

이것이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모습이다. 거듭나지 못하면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대단한 선지자라도 어쩔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이다. 이것이 자연인의 한계다. 이러한 한계는 자연인 상태의 나의 제자들에게도 보였다. 베드로는 세 번 나를 부인했고 다른 모든 제자들도 나를 버리고 도망했다. 그 수많은 기적을 보았고 눈앞에 인간이 된 신을 목도하였는데도 실패했다. 오직 요한은 마지막까지 나를 따라왔지만 두려움으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그에게 부탁했다. 그 기록을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 남겼다. 그렇게 나를 사랑한 요한은 그나마 나의 의도를 가장 잘 아는 자였다. 그렇게 나의 사랑을 알고 나를 사랑한 요한은 다른 자들의 복음서와는 다른 복음서를 남겼다. 성령이 사람을 통해 성경을 기록하더라도 그 사람의 기질과 지식과 그 사람의 한계와 역동적으로 교감하며 글을 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글을 받아 적는 기계일 뿐일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경을 기술한 저저의 연약함과 지식의 부족함도 그대로 반영되어 드러난다. 이것을 요즘 너희 신학적 용어로 표현하면 역동적 축자영감설이다. 성경은 오류가 없고 완전한 글이다. 그런데 그것이 성경 자체를 기록하는 저자의 지식이나 성품에 아무 오류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사용하여 성경을 기록한 성령의 완전함에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 모세가 자기 성품 상의 허점이 있고 그 기질상 분노가 많아 사람도 쳐 죽이고 십계명 돌판도 깨트리고 하루에 삼천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칼로 도륙하기도 했고 또한 성경 여러 곳에서 파렴치하게 자신의 죄를 은폐 축소하는 시도를 했지만 이 모든 것을 성령이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너희가 얻을 수 있는 놀라운 진리가 드러나도록 성령은 기가 막힌 수사학적 기법을 사용하여 문학 작품을 기술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이며, 홍해의 기적과 이집트에서의 기적들을 일으켰던 전무후무한 대선지자라는 타이틀에 숨겨질 수 있었던 모세의 육체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래야 왜 모세와 아론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는지가 명확하게 설명이 된다. 너희 인간들은 사건의 본질과 사람의 본질을 잘 못 보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나(예수님)와 함께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가 한낱 계집종의 앞에서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할 수 있겠는가? 너희는 베드로에 대한 기록을 베드로 자신이 남기지 않고 다른 제자들이 남긴 것을 기뻐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도 모세와 같이 자신의 불순종을 은폐 축소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의 거듭남을 겪은 이후에 기록한 글이라면 모세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거듭난 자들은 자신의 심령 속에 더 이상 자신의 어리석음이 힘을 쓸 수 없다. 왜냐하면 강력한 성령의 능력이 그 심령에 부어져 이제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실수할 수 있어도 어떤 상황에서라도 회개하고 즉각 돌이켜 다시 나의 통치에 복종한다.

여기 모세의 거듭나지 못함과 육체에 속한 죄성의 흔적을 명확하게 성경에 남겨야 할 이유가 등장한다. 이렇게 성경에 모세의 모습이 보이는데도 너희는 여전히 그가 행한 기적들로 인해 모세의 모습을 온전히 보지 못하고 있다.

Psalms 106:32-33  (바른)
 32 그들이 또 므리바 물가에서 주님을 분노하게 하여 모세가 그들 때문에 화를 입게 되었으니, 33 이는 그들이 그분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세에 대해 평가한다면 너희는 가나안의 사람과 광야의 사람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시편을 기록한 자들도 모세의 인간적인 푸념에 근거를 삼고 자신들이 인간을 영웅시하는 어리석은 우상숭배에 근거한 노래를 불렀다.

만약 절대신앙과 절대평등과 절대사랑과 절대복종과 절대평화를 얻는 신앙을 모세가 자신을 변명하지 않고 진솔하게 구했다면 모세도 광야의 죽음이 아닌 가나안 정복자가 되었을 것이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들의 것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기를 바란다. 절대믿음, 절대평등, 절대사랑, 절대복종, 절대평화의 신앙이 있어야만 침노하는 자가 될 수 있다. 결코 믿음의 길은 쉽지가 않다. 너희 삶에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대가를 지불해야 좁은 길로 갈 수 있다. 4m에 육박하는 거인과 당대 최고의 무기들과 철옹성 같은 침략이 불가능한 절대불가능을 돌파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 자라야 나의 통치 안에서 나에게 복종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우리만이 줄 수 있는 믿음이다. 그래서 완전한 율법의 준수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조차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 위대한 선지자 모세와 아론도 들어갈 수 없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길이 나의 나라에 들어와 우리의 통치에 복종하는 것이다. 특히 원수가 가득한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길이다. 오직 사람이 아닌 타오르는 불길인 성령의 지극한 뜨거움만이 다니엘과 같이 풀무불을 이기고 그 속으로 몸을 던질 믿음을 가지게 할 수 있다. 사자의 입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말을 하며 사자굴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큰 역사를 일으키는 믿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옛사람이 죽어서 불평과 불신앙과 불복종이 사라진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와 여호수아의 차이점은 바로 이곳에 있다. 여호수아에게는 불평이 보이지 않는다. 단지 참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 안에 불평이 아닌 신뢰와 순종이 가득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마지막에 나와 내 집은 우리(여호와 하나님)를 따를 것이라 했다. 이는 기질의 차이가 아니다. 단지 그 속에 옛사람이 죽고 성령이 그 안을 충만히 채워야만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이다. 진정한 기적은 외적인 표적들이 아니다. 그 속사람이 거듭나는 기적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다.

그러나 누누이 일러 말했던 것처럼 너희가 깨닫기를 원한다. 이 믿음은 오직 우리의 선물이라는 것을. 그래서 너희가 해야 할 것은 하늘로부터 거듭나게 하는 믿음의 불이 내리는 것을 기다리는 것뿐이라는 것을 너희가 깨닫기 바란다. 너희 육체의 소욕을 멸할 지옥의 불길보다 더 뜨거운 불이 너희 죄성을 태워 순간순간 멸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매일 너희 육체를 쳐서 복종함에 실패할 것이고 그것은 곧 불순종의 자아가 여전히 역사하는 것이므로 그곳은 나의 통치가 임한 곳이 아니다. 기적의 크기나 사역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직 그 심령 속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쳐서 멸하여 정복하고 그 믿음으로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을 보이는 것이 진정한 증거다. 아무것도 못하고 조선에서 9개월 만에 꽃다운 생을 마감한 루비 캔드릭을 기억하는가? 사역의 크기가 아니다.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고 대동강에서 가슴에 칼이 박혀 죽은 토마스를 기억하는가? 이들은 후에라도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그것조차 못하고 죽은 자들이 부지기수다. 이름 없는 들꽃으로 피었다, 사그러들었지만 나 예수의 마음에 강한 향기를 남겼던 사람들은 그 이름이 없었다.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다. 그것에 속아 지옥으로 향하고 있다면 이제 돌이켜 우리 앞에 나오기를 바란다. 그러면 세상의 가장 작은 자로 숨겨져서 살았어도 하늘에서 가장 큰 자로 드러날 것이다.

바로 릭 조이너가 마주쳤던 거지 안젤로와 같이. 그는 나와 동행했다. 그는 사도바울과 베드로보다 큰 자다. 그는 지금껏 생존했던 어떤 믿음의 사람보다 더 큰 자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그 어떤 곳에서도 안젤로의 이름을 아는 자는 없었다. 심지어 안젤로가 감싸 안고 함께 죽어주었던 거지조차 안젤로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 예수는 그가 죽어 내 앞에 왔을 때 영원히 잊히지 않을 이름으로 그를 기억한다. 그리고 죽어 다시 만난 나의 사랑하는 자를 영원히 내 품에서 놓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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