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하나님)는 우리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우리의 통치를 받도록 했다. 우리의 통치가 있던 태초의 에덴으로 다시 회복시키기 원했다. 우리가 통치하고 인간이 우리의 형상으로 그 통치를 실행했던 그때는 모든 피조계가 낙원이었다. 그 중심 에덴에 인간이 살면서 우리(하나님)를 대리하여 세상을 다스렸다. 그곳에는 우리의 성품이 그대로 법으로 실행되는 곳이었다. 우리의 사랑이 부어져 모든 만물은 서로 사랑했다. 인간과 인간도 사랑했으며 미움이나 착취와 폭력이 없었다. 그것이 우리의 통치다. 모두가 사랑하며 우리의 완전한 보호를 받으니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심령이 완전하여 우리를 닮았으니 그 속에 악함이나 미움이나 시기나 질투가 없다. 악한 인간의 심령으로 사도행전적 사랑의 공동체는 불가능함을 너희는 안다. 사도행전적 사랑의 공동체가 이상적일 수 있어도 그 실행은 이 땅에서는 불가능하다. 구약의 사랑의 공동체도 이 땅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태초의 인간은 그렇지 않았다. 사랑하는데 열심이며 자신보다 타인을 위해 진심으로 더 노력한다. 그러니 인간의 악함으로 인한 문제는 원시 공동체적 연합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태초에는 삼위일체인 우리 안에 먼저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우리는 사랑하였고 완전한 이해와 완전한 포용으로 서로 하나되었다. 그 공동체의 확장으로 우리는 인간을 만들었다. 인간들도 우리(하나님)의 성품(형상)을 닮아 우리와 사랑으로 하나되었으며 성령의 연대와 중계로 인간들 서로의 심령과 심령이 하나되어 연합했다. 태초의 피조계는 사랑으로 가득한 낙원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그곳을 망쳐 원수의 도둑놈 근성으로 세상을 물들였을 때 세상은 예비 지옥도가 되었다.
우리는 지옥도가 된 세상을 태초의 낙원으로 회복시키려 했다. 그 길은 우리의 통치와 우리의 사랑이 흐르는 태초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하나님)는 인간이나 우주가 필요가 없는 존재다. 인간과 피조계가 반역하면 그냥 폐기시켜 무로 돌려버리면 된다. 그것이 가장 안정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와 사랑으로 하나 된 인간들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을 회복하는 것이 신인 우리에게는 번거로운 정도가 아니라 신으로서의 모든 것을 버리는 선택이었다. 신이 인간이 된다는 것도,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도 신인 우리에게는 극악한 모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인류와 피조세계를 다시 태초의 우리의 통치와 사랑이 흐르는 낙원으로 회복하기 위해 오욕의 길을 선택했다. 우리가 인간들이 수시로 하는 불평들과 그리고 수군거리는 우리에 대한 험담들과 우리를 모욕하는 자들의 어리석은 말을 참아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우주의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인식하는데 모든 만물 중에 인간이 가장 악하다. 그 심령의 부패함은 악마의 그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악마들은 우리를 대적하지만 그래도 자신들이 악한 존재인 것도 그리고 자신들이 지옥의 불로 들어갈 것도 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최소한 우리를 두려워하고 그 두려움으로 눈치르 보면서 움직인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우리를 마음에 두기도 싫어하고 심지어 자신들의 인식에서 우리를 삭제해 버린다. 그러면서도 귀신들과 점술을 따르고 샤먼들에게 복채를 바친다. 또한 우리의 존재를 말하는 자들을 비웃으며 우리의 존재를 비웃는다. 그들의 비웃음은 스스로 알지 않기를 작정하고 본능적으로 비웃는 비웃음이다. 그것이 가장 사악하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피조세계를 보면 우리의 창조 증거가 넘쳐나고 자신들도 그런 것들을 분석하고 이해할 만한 능력이 있는데도 일부러 거부하고 비웃으며 그것을 통해 쾌감을 느낀다. 자신들 서로서로를 비웃으며 괴롭힐 때도 쾌감을 느끼고 전능자인 우리를 모독하면서도 쾌감을 느낀다. 그런 인간에 대한 우리의 가장 간단한 해결법은 그냥 그 인간들과 인간들이 만든 세상을 모두 무로 돌리는 것이다. 심판도 회개도 필요 없다. 그냥 무로 돌리면 인간의 존재와 피조계 모두가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필요만을 두고 보자면 우주나 인간이나 모두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사실 있어도 없어도 되는 그저 그런 가벼운 존재들의 가치도 안 되는 무의미한 그런 것들이다. 우리는 인간과 피조계가 필요하지 않다.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의 사랑이다. 단지 우리가 인간을 사랑할 뿐이다. 사랑이란 아무 가치 없는 것도 가장 소중한 것으로 만든다. 우리가 인간을 구원하려는 유일한 이유도 사랑이다. 사랑이 아니면 인간은 우리에게 무용한 존재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 우리 중 나(예수)는 인간을 목숨을 다해 사랑한다. 그러니 우리의 구원에 대해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다른 종교와 같이 인간을 이용해 돈과 권력을 얻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물론 우리의 이름을 사용하는 거짓신앙 즉 죽은 정통주의가 다른 종교와 같은 착취와 폭력을 저지르기도 한다. 사실 역사에 기록된 대부분의 기독교는 우리가 만든 에클레시아가 아니었다. 단지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세상에 속한 종교였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든 참 에클레시아는 사람의 그 어떤 것도 요구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단지 에클레시아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세상이 그들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죽어있는 영혼들을 살리기 위해 수고와 박해를 당하는 것은 세상이 그들과 원수 되었기에 극악하게 방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을 구원하고 태초의 낙원으로 다시 인도하려면 지상의 통치자 인간이 온전한 우리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사랑과 통치가 피조계에 임할 수 있다. 인간이 우리의 통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랑과 공의의 성품을 갖는 것이다. 이를 그대로 삶에 반영한 것이 십계명과 율법들이다. 십계명과 율법을 요약하면 우리(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결코 그 원래 의도가 인간에게 계명을 지키도록 강요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냥 사랑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고백했듯이 인간에게 우리(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실행 불가능한 계명이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인간은 독사 새끼의 본성으로 사는데 그 본성으로는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까?"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다.
사랑한다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 안 된다. 그런데 인간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 물론 노력을 하지만 인간이 한 행동의 결과는 그것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부모가 재산이 많다면 그 부모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부모를 살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유산을 두고 형제들끼리의 다툼을 벌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별 문제가 없는 집이라 하더라도 진심으로 마음을 다하여 부모를 대하는 경우가 없다. 인간이라 부족한 행동을 하는 부모에 대한 불만과 반항이 가득한 경우가 있다. 그런 것을 행동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부모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는 경멸하면서도 그냥 겉으로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하는 경우들도 많다. 또는 그 부모의 온전하지 못한 사랑에 대해 깊은 상처를 입고 부모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경우들도 있다. 부모도 자식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자식에 대해 가혹한 기준을 가지거나 또는 실제로 부족한 자식을 단순히 사랑으로 용납하지 못하고 판단하며 그 판단의 말을 여과 없이 내뱉아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간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거의 온전하지 못하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타락하여 인간의 행동 자체가 온전하지 못한데 이유가 있다.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 관계에서조차 사랑하지 못한다.
이 기본적인 관계 속에도 이기심과 자기 우월적 경멸과 자기 상처에 대한 보상적 복수심이 가득하다.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오직 사랑하라는 기본적인 것이지만 인간은 기본 중에서도 가장 가벼운 사랑도 할 수 없다.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도록 간음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우리의 통치를 받는 것은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을 지키고 사랑을 고수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조차 하지 못한다. 이것은 행동을 수정하거나 교육을 통해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타락하여 우리(하나님)의 아들에서 독사의 자식(새끼)이 되었다. 사랑과 공의의 존재였던 인간이 미움과 불의의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 인간은 우리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
십계명과 율법은 우리의 사랑을 실천하고 우리의 법에 따르는 사랑하는 삶을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우리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우리의 통치를 받아야 우리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시내산에서 십계명과 율법을 받은 것은 정식으로 우리와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은 것이다. 굳이 인간의 관계로 비유하자면 남편과 아내로 언약을 맺은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를 맺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우리의 아들, 우리의 백성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시내산 이전에는 심각한 징계를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시내산 이후에는 자식으로 훈계하여 징계를 내렸다. 그래야 기본적으로 자식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부모가 징계하는 이유는 벌을 주기 위함이 아니다. 단지 자식이 깨닫고 악한 길에서 돌이키기 원하는 것이다.
유월절과 홍해는 세상과 결별하는 것이다. 이전 남편이었던 세상의 임금 사탄과 이혼하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으로서 이루어지는 이혼이다. 죽음을 통해 이별을 고하는 것이니 상대가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으려 해도 소용이 없다. 죽음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이별하게 한다. 이렇게 세상과 사탄과 이혼한 이스라엘이다. 이 이혼과 죽음은 법적인 것이다. 실제로 육신과 죄성이 죽어 이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새 남편인 우리(하나님)와 시내산에서 혼인을 한다. 또한 부모와 아들의 관계로 비유하면 우리의 아들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 혼인과 아들 됨도 법적인 것이다. 인간이 거룩한 우리의 성품으로 새로 태어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법적으로는 우리 아들로 거룩하고 사랑으로 가득한 존재라는 인정을 받았으나 아직 인간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과 불의가 가득한 존재다.
이 죽음과 새로 태어남이 실질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데 그 적용의 과정이 광야다. 물론 모두가 광야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믿음의 문제이며 그 믿음도 전적으로 우리에게 구하기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믿음은 전적인 우리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도 우리에게 구해야 얻을 수 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고,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발견할 것이며,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 7:7 바른)
거듭남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이 죽은 것이 있다고 야고보서는 말한다.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이요, 그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서 마틴 로이드 존즈는 죽은 정통주의라는 말을 만들었다. 결국 죽은 믿음은 믿음의 모양은 있으나 참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죽은 믿음은 능력이 없다. 능력이 없으니 행함으로 나타날 수 없다. 살아 있는 믿음은 그 마음 안에 옛 죄성이 죽어버린다. 그리고 우리의 성품이 부어져 새사람이 된다. 성령을 통해 강력한 동기가 부여되기 때문에 우리의 뜻대로 사랑하며 살게 된다. 그렇게 사랑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거듭남이요 중생이다. 이것이 또한 회개다. 회개(悔改, conversion, repentence)는 한문의 뜻도 그렇고 영어로도 모두 방향을 돌이켜 우리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뜻한다. 나라를 바꾸어 전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변화로 완전히 다른 나라의 법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세상과 사탄과 육신이 원하는 도둑질과 미움과 불의가 아니라, 우리의 사랑과 공의가 넘치는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고 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나는 그 능력을 위해 십자가를 져 그 능력을 법적으로 확보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은 성령이다.
이러한 변화로의 초청이 가데스바네아다. 가데스바네아를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변화된 심령에 부어진 절대신앙만이 가나안의 거인족들과 철옹성과 같은 성벽 앞에서도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 그래야만 가나안으로 진군할 수 있다. 그런 심령은 우리(하나님)를 믿는 믿음으로 모든 상황에서 절대평안을 얻는다. 바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안식이다.
출애굽의 세대 중에 가데스바네아를 통과할 믿음을 가진 자는 단 둘이었다. 심지어 모세와 아론도 백성과 함께 엎드려졌다(민 14:5) 그러나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기고 가나안을 정복할 심령을 가졌다.
가데스바네아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등장한다. 아브라함에게는 가나안으로의 초청이 있었다. 하란이라 할 수도 있고 갈데아 우르라 할 수도 있다. 또한 신약의 제자들에게는 오순절 전 예루살렘이라 할 수 있다. 능력이 임할 때까지 머무름이며 그곳에서 능력을 부음 받는다. 그리고 정복전을 시작하는데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정복한다. 바로 가나안 정복과 같은 장면이다. 구약에는 그 정복이 가나안 주변에 그쳤는데 신약에는 하나님의 구약에서부터 의도하셨던 대로 모든 열방에 그 구원이 미치게 되었다. 부흥(Revival) 전에는 반드시 가데스바네아가 있다. 부흥이라는 것이 사실 가나안 정복전이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하나님)가 임재하여 세상에 사랑과 평안, 그리고 공의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미움과 불의의 세상이 정복되는 정복전인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인생들은 가데스바네아를 통과하지 못한다. 교회 안에서도 가데스바네아를 통과하는 인생은 극히 적다. 심지어 유월절과 홍해를 건너는 자들도 극소수다. 대부분의 유형교회 안에 있는 자들은 유월절과 홍해도 통과하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는 여전히 이집트의 백성으로 살고 있다. 바로 세상을 사랑하고 동시에 노예 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경험하지도 못하고 기본적인 믿음인 십자가(유월절)에 대한 믿음도 없는 상태로 대부분 죽은 정통주의 신앙인들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단지 신앙고백을 배웠고 그것에 동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신앙고백자 노력자들이지 신앙자가 아니다. 종교교육을 받았으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무당으로 치면 귀신도 못 만난 가짜 무당들이다. 단지 무당 흉내만 내고 있는 사기꾼들이다. 이들은 오직 복채만 노리는 탐욕의 백성들이다
준비되지 못한 자들은 결코 이집트에서 나올 수조차 없다. 혹 세상이 배신하고 너무 괴롭혀서 세상(이집트)을 떠나올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돕는 기적들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구도자의 믿음이지 우리(하나님)의 아들들의 믿음은 아니다. 그 믿음으로는 우리의 뜻대로 살 수 없다. 심령 속의 존재가 변화되지 않고는 우리(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가득 품고 세상을 사랑으로 통치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 성령이 역사하여 강력한 바람(행 2장,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역사하지 않고는 세상을 휩쓸 광풍이 불어오게 할 수는 없다. 우리의 사랑을 세상에 이루는 것은 마치 가나안 족속을 그 땅에서 멸하는 것과 같다. 세상의 모든 미움과 불의를 부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삶이다. 사랑하는 것이 세상의 환영을 받을 것 같으나 세상은 그것을 미워하며 적극적으로 대적한다. 특히 우리(하나님)를 사랑한다는 것을 대적한다. 그리고 세상은 사랑으로 상대들을 포용하고 품고 돌본다는 것을 견딜 수 없다. 특히 인간들을 대상으로 이익을 보고 있던 존재들은 그 이익이 상실됨으로 복음을 대적한다. 바로 빌립보에서 귀신 들린 여종을 통하여 점을 치고 돈을 벌던 주인과 같다. 또한 노예들을 착취하던 로마의 귀족들과도 같다. 또한 중세에 농노들을 괴롭히던 귀족들과도 같다. 이들은 자신들의 노예를 공평과 사랑으로 대하는 것을 거부한다. 또한 다른 이들이 이들에게 사랑과 조건 없는 도움을 베푸는 것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 도움으로 자신들에게 이익을 주는 노예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들의 이익과 직결된 문제로 자신들의 사치를 지탱할 부가 사라짐을 뜻한다. 이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이런 세상을 꿈꾸고 그것을 상상하는 자들은 사회의 질서를 깨트리는 반역의 무리들이며 역적들이다. 세상은 이들을 역적으로 몰아 토벌해 버린다. 기독교가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세상의 신분질서와 착취의 구조를 형성하는 법들을 타파하는 것은 반역이기에 기독교는 어디에서나 저주를 받는다. 그런 완전한 이상을 구현하고 완전한 사랑을 주는 왕이 통치하는 나라는 세상의 어떤 곳에서도 없는 것으로 모든 나라와 경쟁 자체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상은 자신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사랑을 주어 자신들의 추종자와 세뇌된 노예들을 빼앗으려는 하늘나라를 대적한다. 그래서 진정 사랑하는 한 사람이 회사에 나타나면 회사의 권위자들과 경쟁자들이 싫어하고 질투하며 모함하여 쫓아내려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그렇게 하면 우리는 무엇이 되는가?"
그들도 아는 것이다. 자신들이 도적이라는 것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가 나타나면 그들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들은 사랑과는 반대는 착취와 억압과 미움과 시기의 화신들이다. 바로 독사의 새끼들인 것이다. 이렇게 정체가 드러나기 원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사랑하고 화목케 하며 정직과 정의로 사는 것을 미워한다.
세상은 우리(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적하기에 싫어한다. 우리의 나라가 임하면 그들 속에 있는 온갖 술수들과 비리들과 거짓이 드러난다. 그것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래서 세상은 우리(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한다. 전쟁을 준비하며 철병기와 거인과 철옹성을 준비한다. 그래서 가나안 즉 우리의 통치에 들어가는 것은 전쟁이며 정복전이다. 세상을 멸하는 것이다. 세상의 도둑질과 착취와 미움과 불의를 멸하는 것이다. 이렇게 빛이 개인에게 임하여 그의 영역을 빛으로 만든다. 그리고 거듭난 개인들이 모여 공동체가 되면 그 공동체의 영역도 빛이 된다. 그렇게 하여 세상에 우리(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런데 어둠은 빛을 미워하여 극렬하게 저항한다. 어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저항한다. 거인들을 모으고 철병기와 거대한 철옹성을 쌓는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절만 해도 거인들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런데 어디서 이런 거인들이 나타난 것일까? 그것도 헤브론 한 곳에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들에서도 거인들이 나타난다. 세상이 우리(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을 환영한다면 이런 거인들을 준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철옹성도 철병기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세상과 사탄과 육신은 끊질기게 내 백성이 낙원으로 들어가는 것에 저항한다.
이집트에서만 대적한 것이 아니라 내 백성이 들어갈 가나안에도 세상과 사탄과 육신은 존재한다. 이곳에 존재하던 민족들은 아브라함 때는 그 악이 심판받을 정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 민족들을 아브라함 때 심판하지 않고 기회를 주었다. 만약 그들이 회개하여 우리(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사랑과 공평으로 서로 사랑하는 나라를 이루었다면 내 백성이 된 이스라엘과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도 내 백성에 편입되어 이스라엘이 되었을 것이다.
세상이 준비한 것들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 속에 있는 불순종하는 육체가 있다. 불순종하는 육체가 있는 것은 이들이 이미 내 백성으로 부름 받았으나 아직은 내 백성이 아님을 뜻하는 것이다. 그들의 본질이 어둠에 속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로는 우리(하나님)의 나라인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가데스 바네아의 믿음에서의 파선 이후 이스라엘은 광야를 떠돌았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로 계속해서 우리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훈련을 받았다.
이러한 모습은 육체에 속한 모든 자가 해당되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뛰어나고 탁월하더라도 이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 모세와 아론조차 가데스바네아의 통곡의 밤에 백성들과 함께 엎드러졌다.[^1] 인간의 수준이 이러하다. 아무리 이스라엘의 그 선지자라 일컬어지던 모세도 최초의 제사장이었던 아론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것이 인간의 수준이다. 아무리 뛰어나고 아무리 대단한 기적을 체험했어도 거듭나지 못한 인간은 동일하다. 심령이 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하여 죽고 다시 거듭나 완전한 우리의 아들로 거듭나지 못하면 누구나 동일하다. 그러한 변화의 능력은 나(예수)의 공로이며 그 능력을 가지고 인간의 심령이 들어가 변화를 일으키고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적용하는 자는 성령이다.
거듭나지 못한 자는 이집트에서 부름 받은 세대와 같이 하늘의 능력을 맛보고 12 기적과 시내산의 놀라움을 경험하고도 거듭나지 못한다. 광야에서 하늘의 만나가 내리는 것을 매일 아침 경험하고도 그 심령은 여전히 육체에 속해 있다. 그 많은 메추라기가 쌓이는 것을 경험하고도 여전히 절대믿음으로는 나가지 못한다. 그것이 인간의 상태다. 또한 구하는 것이 자신의 입에 들어가는 것과 자신들의 민족의 미래 밖에 없다. 그것이 자신들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음을 모르고 오직 보이는 당장 눈앞의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의 기도는 모두 그런 것에 집중되어 있다. 전쟁에서 모세의 기도에 의해 전쟁의 판도가 바뀌고 수많은 기적을 경험하고 불순종에 의해 불뱀에게 물려 죽을 위기를 당하고도 깨닫는 것이 없다.
이는 그들이 특별히 악해서가 아니다. 오직 그들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상태의 육체에 속한 자들이라 그렇다. 너희 세대에는 아직 이집트에서 나오지 못한 자들이 대부분이고 그중 어떤 자들은 광야까지는 나왔으나 여전히 육체에 속하여 자신의 소욕이 죽어지고 오직 우리(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새 마음과 새 영이 부음을 받은 자들이 적다. 심지어 엄청난 기적을 경험한 순복음이나 기도원에 속한 자들도 아직 그러한 상태에서 광야를 헤매는 자들이 거의 전부다. 심지어 그 와중에 그 영혼이 탐욕에 빠져 이미 사탄에게 속한 자들도 상당히 많다.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고 기적을 행하지만 나는 그들을 알지 못한다. 거듭나지 못한 육체의 소욕에 사로 잡힌 그들은 나의 나라와 상관이 없으며 나의 기업과도 상관이 없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자신들의 탐욕이며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의 신은 자기 배다.
자신들에게 일어난 기적을 증거로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이 아무리 크더라도 이집트에서 부름 받은 세대에 비해서는 작을 것이다. 너희가 기적을 보아도 이집트의 12 기적과 비교하겠는가? 너희가 바다가 갈라지고 세계 최강의 군대가 수장당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너희가 땅이 갈라져 죄를 행하는 행악자들을 삼키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온 하늘을 덮는 우박과 벼락과 천둥이 땅을 쳐서 멸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너희가 그와 비슷한 일을 들은 적이라도 있는가? 이 시대의 어떤 믿음의 사람도 그와 같은 기적과 영광은 경험하지 못했다.
그런데 생각하여 보라. 그 세대들은 믿음이 없어 모두 광야에서 파리하게 말라죽어 갔다. 그러니 자신의 체험을 근거로 자신의 구원을 예측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기 바란다. 아무리 큰 기적을 보았다고 해도 그 심령이 거듭나지 못하면 내게 복종할 수 없다. 궁극적인 절대신앙과 절대복종 그리고 절대평안은 그들 안에 없다. 여전히 그들은 자신들의 명예와 권력과 부에 관심이 집중되고 오직 그것을 통해 자신의 교세를 넓히는 데에 집중된다. 그들은 감옥에 있는 바울의 마음을 괴롭게 하려 자신들의 교세를 넓히는 전도를 하던 자들과 동일한 상태이다. 여전히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며 깨닫지 못한 마음으로 자신들은 선택받은 선민이라는 우월주의에 빠져있다.
내가 우상숭배자의 아들을 불러 믿음의 조상을 만든 이유를 아직도 모르는가? 내가 이방 기생 라합과 이방의 룻을 통해 다윗의 혈통을 만든 이유를 모르는가? 내가 자기 혈통적 선민 우월주의에 속한 자들을 멸한 이유를 모르는가? 그들은 나(예수)조차 나사렛의 개잡종이라는 이유로 배척했다. 그래서 그들의 혈통은 도저히 더 이상 유대인이라 볼 수도 없는 처참한 지경이 되었다. 그들의 아녀자들은 너무 많은 강간을 당하여 그들은 대대로 강간한 이방 개들의 개자식들을 낳았다. 그들 스스로는 더 이상 혈통적으로 유대인이 아닌 개잡종들이다. 유대인의 피는 더 이상 그들에게는 없다. 유럽에 살던 자들은 자신들을 강간한 유럽인들의 피를 가져 유럽인의 얼굴을 가졌다. 아프리카에 있던 자들은 강간자들인 검둥이들의 피를 이어 검둥이들이 되었다. 중동의 아랍인들에게 강간당한 자들에게는 아랍인들의 얼굴이 새겨졌다. 그들은 더 이상 아브라함의 씨도 아니다. 그렇게까지 되어서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혈통을 주장하고 그 인종 우월주의로 팔레스타인을 인종청소하고 있다. 너희는 이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여겨지는가? 그것이 이스라엘의 회복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며 이것이 사랑의 통치인가? 그들 자신도 이미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사마리아인보다 더한 개잡종이 되었는데 그들이 세우는 나라가 이스라엘인가? 시온주의자들은 인종우월적 민족주의자들인가? 아니면 다윗의 믿음을 따라 사랑과 공평으로 온 인류를 새롭게 섬길 사랑의 왕국을 건설하는 일군들인가? 그들이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선민인 유대민족이 모든 세상의 족속들을 정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아래에서 이방 개잡종들도 하나님을 섬기는 곳에 편입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들을 개잡종들로 취급하여 결코 우월한 선민인 자신들과는 섞일 수 없는 하등한 것들로 생각한다. 오죽하면 그들의 랍비는 히틀러가 한 일이 옳다고 한다. 단지 히틀러가 게르만 민족에 설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편에 서서 그렇게 가차 없이 유대인의 대적들을 멸했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가나안 정복과 같이 자신의 땅에 있는 이방 종족들을 멸절하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라 믿고 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을 멸하고 있다. 바로 인종청소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옳았다면 내가 인간으로 갔을 때 나는 왜 12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 로마의 군단들을 멸하고 세계를 정복하여 영원히 유대인들이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지 않았겠는가? 너희는 아직도 그리 어리석은가? 그들과 너희는 자신의 탐욕이 무엇을 원하는지 보지 못하는 소경이요, 내가 아무리 불러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구나.
구약의 가나안 정복은 다른 측면이 있다. 그것은 이 땅에 한계가 있는 낙원을 건설하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이 틈탈 수 없는 정화된 땅이 필요했다. 그것이 가나안 정복이다. 그곳에서 인종청소와 같은 일들이 벌어졌으나 그것은 인종청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심판이었다. 이러한 심판은 세계의 도처에서 각 민족들이 흥망성쇄를 거듭하면서 항상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마지막은 새로운 나라가 옛 나라를 멸하는 것인데 그 일을 이스라엘이 했을 뿐이었다. 가나안 족속들은 자신들의 죄가 가득 차서 심판을 받았다. 나는 아브라함 이전부터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다. 나는 세상에 하루종일 사랑과 회개를 선포하며 손을 벌리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항상 독사의 길로 나가 자신들이 독사의 새끼임을 입증하고야 만다. 아브라함 때도 그들에게 기회를 주어 300년을 넘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그들의 죄는 더 사악하고 흉악해졌다. 결국 그들의 죄는 그들의 심판을 불러들인 노아의 세대와 같이 그들에게 심판을 불러왔다. 그것이 가나안 정복이다. 이것은 특수 상황에 특수한 설정에 의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의 나라는 세상을 정복하는 군대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세상의 일과는 상관없이 임한다. 오직 사랑으로만 말해지고 사랑으로만 행해지는 것이 나의 나라다. 그래서 나의 나라는 원수까지도 사랑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의 공동체다. 그것이 태초의 공동체이며 우리는 그 공동체의 핵심 구성원으로 그중 나는 나의 목숨을 사랑하던 인간들을 위해 바쳤다. 그리고 삼위의 우리는 그 모든 고통을 함께 결정하고 함께 맛보았다. 우리는 완전한 연합으로 인해 모든 고통과 아픔도 함께 느낀다. 우리 삼위뿐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에 속해 있었던 인간들과 그들의 통치를 받는 피조세계 모두의 아픔을 느낀다. 우리는 세상을 멸하기 위해 정복하기 위해 나타나지 않는다. 세상을 사랑하며 사랑하여 구원으로 이끌어 세상과 별개의 나라에 거하도록 한다. 세상의 나라와 나의 나라는 서로 상관할 것이 없다. 세상이 겉 옷을 내놓으라 해도 주며 목숨을 내어놓으라 해도 준다. 그것을 통해 세상에게 사랑의 강력함을 보인다. 그 사랑의 강력함이 바로 하늘나라의 힘이다. 그러니 한시적 한정적 상황 속의 구약의 가나안 정복을 인종청소와 동일시하는 것은 정의의 실현인 심판과 집단 인종 살해를 동일시하는 것과 같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그의 아들 야곱의 자손들이 이러한 길을 가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서자 이스마엘의 자손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이단으로 들어서 이슬람의 길로 갔으며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종교 우월주의에 빠져 그것을 의로 여기고 그 의로 모든 자들을 정죄하며 모든 다른 자들을 정복하여 자신들의 발아래 두기를 원한다. 이들도 유대인과 같이 세계 정복을 꿈꾸며 다윗의 왕국을 회복할 메시아로 여기는 무함마드의 명을 따라 세계를 정복하고 있다.
이삭이나 이스마엘의 육신의 후손들은 모두 동일한 지경에 빠져 헤매는 어리석은 길로 갔다. 너희 세대는 다르겠는가? 너희는 너희 육신의 탐욕의 무엇을 구하는가? 너희는 각자 자기 길로 달려가는구나. 그것이 광야의 길이다. 자기 탐욕의 길을 한 없이 달리는 어리석은 잔나비[^2]의 길이다.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짐승적 존재다. 짐승의 길을 가는 자들은 짐승의 길에서 죽을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육신의 먹을 것을 공급하겠으나 절대신앙의 훈련에 있는 축복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이집트)을 그리워하다, 광야에서 죽어 묻힐 것이다. 그들은 하늘의 능력을 맛보고도 깨닫지 못한 자로 첫째 부활의 영광은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들 중 마지막까지 깨닫지 못한 자들은 둘째 사망으로 심판가운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권고한 대로 너희는 그들보다 더 나은 믿음으로 나아가 은혜의 강가로 나가길 원한다. 그리고 절대믿음과 절대평등과 절대복종과 절대평강(가가와 도요히꼬) 가운데서 세상이 감당치 못할 나라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한다. 이제 너희는 말세의 믿음을 보여 응답이 올 때까지 기도하라. 그리고 응답이 없음을 원망치 말고 너희 육체의 악독함을 보고 더욱 깊은 믿음의 기도로 나아가기를 구하라. 그리고 무엇보다, 너희 자신의 길과 짐승들의 습관들을 따르는 길이 아닌 우리(하나님)의 길을 성경을 통해 찾으라. 옛 목자들의 길을 찾으며 자신을 점검하라. 그리고 우리가 비추어 주기를 간절히 구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 습관대로 광야에서 평생을 헤매다, 죽는 어리석은 짐승이 될 것이다.
[^1]: Numbers 14:4-5 바른
4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가 우두머리를 세우고 이집트로 돌아가자." 하니,
5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얼굴을 숙이고 엎드렸다.
[^2]: 원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