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적 구원의 서정[^1]:이집트에서의 구원사적 관점
모세의 오경은 구원의 드라마다. 한 편의 잘 구성된 구원의 대서사시다. 모세 모경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한 편의 잘 편성된 교과서다. 그런데 구원에 관한 설명 방식이 대부분 드라마다. 바로 내러티브(이야기체)다. 모세 오경의 드라마를 이스라엘이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보인다.
이제 막 이집트에서 나와 조상들의 신인 우리를 섬기게 된 자들에게 우리가 창조주이며 유일한 자존자이며 이름조차 필요치 않은 유일무이한 존재임이 창세기를 통해 나타난다. 그리고 조상들을 통해 오랫동안 우리(하나님)가 이스라엘과 함께 했고 사랑했음도 창세기에 나타난다. 또한 우리와 함께 하여 보살핌을 받으며 가나안으로 가서 나의 백성이 되어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되는 마스터플랜이 파노라마와 같이 펼쳐진다. 이 드라마에서 상당히 긴 부분을 차지하는 신명기는 모세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절절한 사랑으로 한 당부다. 그리고 그 당부도 설교체의 딱딱한 설명이 아닌 과거를 회상하는 드라마의 옴니버스식 구성이 사용되어 드라마 속의 작은 드라마들이 회상의 형식으로 펼쳐진다.
이는 이집트에서 신들의 이야기에 익숙해진 이스라엘에게 가장 적합한 교육적 방법이었다. 또한 살아있는 생생한 신(우리)과의 만남을 경험할 수 있는 이야기식 상상력으로 도출된 최고의 시청각 교육이었다. 또한 직접 그것을 경험한 자들로부터 듣는 것은 더 강력한 효과를 나타낼 수 있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글을 몰라 이 내용의 대부분을 이야기 식으로 전파하고 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의 무료한 텐트 안의 긴긴밤은 지루하다. 이스라엘은 이야기 꽃을 피우며 그 지겨움을 견뎌냈을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아이들은 자신들의 신인 우리에 대한 이야기 시청각 교육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물론 글을 사용할 줄 알았던 모세와 레위인들의 그룹을 통해 모세오경은 이미 기록되고 필사되어 전승되었다.
이 구원의 대서사시를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도출해 내기를 원했다. 이제 이집트로부터의 구원의 서정(구원의 순서, 라틴어: Ordo Salutis; 영어: Order of Salvation)을 나열하여 설명함으로 너희 시대의 구원을 비추어볼 수 있게 하겠다. 사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만 다를 뿐 구원은 너희에게나 이스라엘에게나 동일한 과정을 통해 일어난다.
일반적으로 너희가 알고 있는 구원의 서정은 다음과 같다.
부르심 (내적 소명에 앞서 외적 소명이 있다) , 중생, 회심 (회개와 믿음), 칭의, 성화, 견인, 영화
Calling (external calling preceding internal calling), regeneration, conversion (including repentance and faith), justification, sanctification, perseverance, and glorification
물론 이렇게 정형화하여 이해하면 좋겠지만 지금은 모세시대의 모세의 기록들을 통한 구원에 관해 언급할 것임으로 이와 동일하지만 그 구분이나 용어는 조금 다른 것들을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 속의 구원이므로 그 맥락은 같다.
그 첫 시작은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은 요셉이 이룬 구원으로 이집트로 이주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은 요셉이 파라오와 이집트 백성에게 끼친 은혜와 기적의 영향력으로 평온하게 몇백 년간 번성했다. 70여 명의 민족이 그렇게 짧은 기간에 600만 영으로 불어나는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에게 풍요와 번영의 땅이었다. 그런데 강력한 능력으로 이집트의 모든 땅과 소유를 파라오의 지배하에 두었던 요셉의 영향력을 잊은 파라오가 등장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단기간에 번성하여 이집트인들의 수를 능가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살던 세상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두려워했고 이스라엘의 민족말살을 결정했다. 남자아이는 출생하자마자 죽이려 했고 성인들은 건설현장에 강제동원되어 노예가 고사되어 갔다. 부계혈통 중심의 유목민 사회에서 남성이 사라지면 그 부족은 사멸한다. 여자들이 살아남아도 그들은 단지 정복자들의 씨를 뿌리는 밭이 될 뿐이다.
풍요와 번성의 땅이었던 세상 이집트가 이제는 고통과 슬픔의 땅이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고향을 그리워하고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조상들의 신인 우리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그들은 울부짖으며 우리에게 기도했다. 그들의 기도를 우리가 듣고 그들에게 모세와 아론을 보냈다.
세상에서의 고난과 환란은 인간이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한다. 아픔과 절망을 느끼면 인간은 그것을 해결하려고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소용없음을 알게 되면 인간은 절망한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외부의 도움을 찾게 되어있다. 인간은 죄성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것이 절망에 이르지 않으면 우리를 찾지 않는다. 인간은 그 마음에 우리(하나님)를 두기 싫어한다. 인간 교만은 자신의 위에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인간이 절망적 상황 앞에서 다급해지면 절대자를 찾으려 한다. 그때 인간은 우리에 대한 소개를 받고 우리에게 기도하며 도움을 구한다.
이 단계는 우리의 초청이다. 이 초청은 기존의 이스라엘에게만 아니라, 이집트인과 이방인에게도 해당된다. 이 초청을 받아들인 자들은 여러 기적적인 사건들을 통해 그리고 잠잠히 함께 하는 우리를 통해 우리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초청을 받고 우리가 존재함을 알게 된 인간은 우리에 대해 경험으로 알아가기 시작한다. 이 경험은 반드시 지식적인 깨달음도 포함을 한다. 신앙적 체험과 지식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이집트의 이스라엘에게는 창세기의 드라마를 통해 나에 대한 지식이 전해졌다. 이는 이야기 형식으로 이집트신화적 스토리텔링에 익숙했던 내 백성이 될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전해졌다. 창세기의 이야기들은 시장과 들과 여인들의 안방과 남자들의 집합소였던 신전의 뜰에서 입에서 입을 통해 전파되어 나갔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전해진 지식은 12 기적들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집트에서 12 기적을 통해 우리의 존재에 대한 경외감과 참 신인 우리가 하는 일들을 보며 우리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세상의 본질을 알게 된다. 세상의 신 즉 귀신들의 정체를 알게 된다. 그리고 죄인인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된다. 바로 원수인 육체와 세상과 사탄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게 된다. 이것들이 어떻게 자신을 속이고 착취하며 결국에는 지옥의 죽음으로 몰아가는지 알게 된다. 세상의 거짓종교와 이데올로기(이념, 사상)가 자신을 세뇌하여 착취하는 방식에 대해 알게 된다. 이는 철학적인 비판과 종교학적 비교분석을 통해서가 아닌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 것으로 거짓신들과 세상의 사기적 본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집트에 12 기적을 통해 그 당시 있었던 거짓 신화들과 그 신화들에 기반을 두고 종교와 권력이 사람들을 지배하던 거짓된 시대정신의 정체를 알게 된다. 자신들이 아무것도 아닌 거짓말하는 영들에게 속았으며 또한 그들이 자신들을 보살피며 돕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을 속여 착취하는 존재들임을 알게 된다. 거짓 신들에게 헌금을 하고 기도를 하고 희생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신들이 준 율법들을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이 모든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지식적 탐구보다 더 강력한 것이 경험이다. 12 기적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을 경험한다. 이집트의 가장 강력한 물과 개구리와 관련한 신들의 허상과 능력 없음을 알게 된다. 그 거짓된 존재들이 자신들을 속여 지배한 사실을 알게 되고 그렇게 살았던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각 시대와 각 사람마다 이런 과정을 겪게 되는데 구원에 관해 설명하는 이 과정들이 순서와 시간적 차이를 두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람과 시대마다 다르다. 어떤 이들은 이 과정이 단 몇 분 만에 찾아오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이 과정이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리고 각 과정들 사이에 시간적 구분과 순차적 연결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과정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또한 개인의 성향과 그들이 이미 경험한 과거와 그를 통해 형성된 인격의 인식적 특징들에 따라 그 과정들의 비중과 강약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사실 이 모든 구원에 과정에 대한 순서를 정하여 말함은 사실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또한 이 과정을 순서 있게 정리함으로 너희들에게 이 모든 것이 단계적으로 순서를 두고 일어난다는 착각을 줄 수 있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들을 정리하여 설명하는 것은 이집트에서 내 백성을 구원함을 통해 너희 시대에 너희를 구원하려는 나의 의도를 파악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구원을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 글을 통해서는 모세 시대의 구원을 수천 년의 시간 차를 두고 너희에게 풀어 알려 너희가 너희 시대의 거짓과 어둠에서 벗어나 구원기를 원한다.
너희는 너희 시대의 원수인 너희 육신과 세상과 사탄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어디에 속고 있고 어떻게 착취를 당하고 있으며 결국 어떤 멸망으로 떨어질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야 너희는 스스로 그곳에서 벗어나야 함을 깨닫게 된다.
사실 수많은 너희 시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 과정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죽어 지옥에 떨어진다. 교회도 거짓신앙을 가지고 화석화되어 모양은 같지만 생명의 능력이 없어 영혼을 살릴 수도 없고 오히려 속여서 평생을 종교의 노예로 살다가 지옥에 떨어지는 사기극을 벌이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은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라 단지 초청만 받았을 뿐임을 모르고 산다. 그 초청에서 수많은 기적과 일상적 만남을 통해 우리를 알아가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수 있는 신뢰가 생겨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절망적인지 알게 되고 결국에는 절대 절망에 이르러 자신이 아닌 온전히 우리의 뜻과 통치를 열망하는 깨달음을 얻어 거듭남에 이르러야 한다. 그래야 겨우 거듭나 구원을 얻게 된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가 되어 하늘의 능력으로 세상을 정복하여 자신에게 속한 영역들을 하늘나라로 변화시키게 된다. 그것이 가나안 정복이다. 거의 대부분의 너희는 아직 이집트도 벗어나지 못하고 12 기적도 경험하지 못한 채 겨우 모세와 아론을 통해 처음 말로만 이스라엘의 신이 있음을 들은 이집트의 사람들과 같은 상태다. 평생을 말로만 듣고 그 속에서 그 초보적 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초청의 문턱에서 거짓종교에 속아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고 산다. 그러다 죽어 눈을 뜨면 지옥에 떨어진 자신을 보게 된다. 앞에도 누누이 말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대의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졌던 죽은 정통주의 교회들에서는 이런 거짓이 반복되고 수많은 지옥의 백성들을 양산했다. 이 수준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인격적인 우리와의 사귐이나 기적은 고사하고 우리가 살아 있는지조차 의심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사야가 아하스에게 한 말과 같이 너희도 깨닫고 우리(하나님)를 믿지 못하면 멸망할 것이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겸손히 우리를 알아가기를 기도하고 열망하라. 우리가 살아있는 것을 알려 달라고 기도하라. 간절히 기도하는 순간 그 이후로 우리는 너희 삶 속에 개입하여 너희에게 기적으로 그리고 잠잠한 일상에서의 동행으로 너희가 우리를 알 수 있게 할 것이다.
이렇게 경험으로 세상과 사탄과 육신의 거짓을 깨닫고 우리(하나님)를 알고 신뢰하게 되는 과정이 바로 이집트에서의 12 기적의 과정이다. 사실 이것은 광야에서도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우리를 알아가면서 점점 우리(하나님, 신)의 성품을 배우고 우리를 닮아가 성화에 이르게 된다.
경험과 성경적 지식을 통해 우리를 알아가다가 이집트의 이스라엘과 내 백성이 된 이방인들은 우리(하나님)와 함께 세상과 사탄과 육신을 떠나야 할 것에 대해 깨닫게 된다. 그리고 세상을 탈출하게 된다. 그것이 출애굽(출이집트)다. 그런데 세상을 떠나 우리와 함께 여정에 오르려면 우리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있어야 한다. 우리를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자신의 모든 터전이 있는 이집트를 버리고 떠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파라오의 군대가 지켜보고 있는데 탈출을 감행했다가 군대에 의해 모두 몰살당할 수 있는데 어떻게 우리에 대한 강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를 따라나설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강력한 12 기적들이 필요하다. 사실 출애굽 당시에는 홍해의 기적을 제외한 11개의 기적을 경험했다.[^2] 그 숫자가 어찌 되었던 우리의 백성들은 우리를 알게 되고 신뢰하여 자신들이 속한 세상의 어떤 공포도 이기고 우리를 따라나설 믿음의 준비가 되었다.
이 상태에서 믿는 자들은 나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게 된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나의 말의 의미를 알게 된다. 이제 의심하는 단계가 아니라 진실로 내가 자신들을 위해 십자가를 졌음을 알게 된다. 나를 믿으면 세상과 함께 멸망할 것이 아니라 구원받아 생명을 얻음을 알게 된다. 이집트에서 나를 따라나선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에 편입된 이방족속들이 모두 이를 알고 유월절을 지킨 것이다.
유월절 어린양은 나를 상징하는 것이고 나 예수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서 나 예수는 유월절 기간에 십자가의 피를 흘렸다. 바로 유월절 어린양이 된 것이다. 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세상 모두가 받아야 할 죄의 심판과 저주가 나의 백성들의 집을 넘어가게 된다. 우리의 심판의 천사들이 방문하는 모든 집은 그 집의 장자가 죽는다. 장자가 죽는 것은 그 집안의 모든 것이 죽는 것이다. 기업을 이을 장자가 죽는 것은 그 기업이 죽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단지 한 아들만을 잃는 것이 아니다. 다음 아들이 장자의 자리를 이을 수 있지만 이 모든 장자들이 죽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집트에서는 한 집에 한 장자만 죽었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실패요 그 모든 기업은 죽음뿐임을 나타낸 것이다. 나는 이집트에 나의 심판과 구원을 알리기를 원했지 모든 아들들을 죽여 이집트의 멸망을 초래할 마음이 없었다. 단지 인간들이 세상에는 죽음뿐임을 알고 정말 죽음에 이르지 말고 돌이켜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 십자가와 유월절은 나의 죽음으로 이미 법적으로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은 거짓과 착취와 죽음뿐임을 깨닫고 내 백성들은 세상을 떠난다. 세상을 떠남의 시작이 출애굽이다. 출애굽의 중심동기는 세상의 신이 헛됨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참 신을 따라나서는 것이다. 신이라는 형태를 갖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자신이 믿는 신념이나 이념 또는 세계관을 버리는 것이다. 만약 무신론자로 과학주의를 신봉하는 현대인이라면 우리(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 시대가 주는 가치관의 속임을 깨닫고 그 세뇌에서 벗어나 나의 십자가를 만나 그것을 심령으로 믿는 확신하는 것이다. 이것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그리고 그것이 참임을 인정하는 것이요. 이로 인해 눈물의 감사가 매일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여기 한수의 과거를 보고 자신의 십자가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점검하기 바란다.
한수는 한 번도 아름을 잊은 적이 없다. 그녀는 어릴 적 친구였고 사춘기 이후로는 여자친구였다. 그러다 고 3 때 학원을 마치고 오던 중 오토바이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나를 밀어내고 자신이 오토바이에 치여 중상을 입었다. 나는 응급실로 따라갔고 수술실 앞을 지켰다. 그 시간 내내 나는 나 자신을 자책했다. 남자인 내가 아름이를 지켜주었어야 했는데 내가 한눈을 파는 사이에 아름이가 나 대신 이렇게 되다니 나는 죽고 싶은 마음이 밀려왔다. 하지만 수술실의 아름이를 위해 참고 견디고 있었다. 그러나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아름이는 7 시간의 수술 후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우리 부모님과 아름이의 부모님도 병원을 지켰다. 그러다 다음 날 새벽에 아름이는 우리 곁을 떠났다. 병원으로 오며 119 구급차에서 아름이는 말했다. 힘 없이.
"나를 기억 해줘, 그리고 우리 부모님께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전해줘. 우리 엄마 너무 슬퍼하면 네가 위로해 줘"
나(한수)는 그것이 아름이의 마지막 말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그 핏기 없는 얼굴에 묻은 피와 그리고 그 긴 머리 소녀가 했던 말은 이제 마지막 말이 되었고 너무 또렷해져서 지금 보고 있는 세상보다 더 선명하게 새겨졌다.
나는 자살을 여러번 생각했지만 언제나 아름이의 마지막 부탁 때문에 죽을 수 없었다. 나는 아름이 엄마가 살아계시는 동안은 내 생을 유지하고 나를 통해 위로와 기쁨을 얻으시도록 해야 한다. 나는 이 사명감에 생명을 이어나간다. 세월이 더 지나고 나의 트라우마가 좀 옅어지면 그 때는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지만 사실 지금의 나는 아름이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에 생을 유지할 이유를 아직 찾지 못했다.
나는 그 이름만 생각해도 눈물이 났다.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집에서 폐인이 되어있었던 탓에 나는 재수를 했다. 그리고 고려대를 갔다. 그런데 여자 아이들 이름은 왜 그렇게 그 이름이 많은 지 모르겠다. 지나가다. 과게시판에나 아이들의 부르는 이름에 '아름이'가 있으면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이제는 서울대 로스쿨을 다니고 있지만 아직도 나는 그 이름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아름이의 그 마지막말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아름이 엄마가 있던 장례식장을 내내 밤낮으로 지켰다. 어떤 이들은 내가 아름이의 형제인 줄 알았다. 모든 장례를 마치고도 나는 나의 슬픔을 이기기도 버거운데 아름이의 집을 찾았다. 재수할 때도 나는 한 달에 두 번은 아름이 부모님을 찾아갔다. 아름이 부모님은 이제 안 와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재수 종합반의 기숙사에서 정신이 아득해져 터질 것 같은 그 충동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의무감에서 그리고 공부하고 일상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아름이 엄마와 아빠를 찾아갔다. 그 집 골든 레트리버 올리버도 나는 아름이를 대신해 산책을 자주 시켰다. 올리버와 놀 때면 아름이가 생각났다. 아름이는 올리버와 같이 밝고 따뜻한 성격이었다. 언제 누구에게나 웃어주고 자기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먼저 눈치채고 움직였다. 얼마나 따듯했는지 내 어린 시절에는 그녀가 준 따사로움이 가득했다. 그녀는 내 어린 시절의 지울 수 없는 온기였고 나를 감싸안는 포근함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얼굴도 예쁘고 밝고 착한 아름이가 왜 너같이 까칠한 녀석과 붙어 다니는지 모르겠다며 아름이가 아깝다고 했었다. 그래도 아름이는 다른 아이들의 그 말들에 눈을 흘기며 나를 대신해 싸워주곤 했다. 그리고 언제나 나의 곁에서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나는 잊을 수 없다. 어떻게 내가 그 이름을 잊고 그 얼굴을 잊고 그 음성을 잊겠는가? 나는 지금 있는 내 현실보다 그녀가 언제나 더 생생하다.
대학을 다니는 내내 나는 변변한 연애도 한번 못했다. 소개팅을 나가면 아름이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 아이와 다녔던 추억들이 떠올랐다. 억지로 친구들이 계속 만나게 해서 데이트를 이어나가려 해도 그럴 때는 내 우울증이 감당할 수 없도록 심해졌다. 그래서 내 주치의는 이겨낼 수 없으면 피해 가라고 했다. 잠시 피했다, 증상이 덜해지면 다시 시도해봐야 한다고 했다. 다른 아이들에게 대학 생활과 취업준비와 그리고 연애는 일상이었는데 나에겐 취업준비와 로스쿨 준비만이 있었다. 연애는 꿈도 꾸지 못했다. 아니 그 생각 자체를 회피해야 했다. 나에게 연애란 즐거움이 아니라 극복하기 위해 노력과 시도를 반복해야 하는 장벽이 되었다.
부모님은 의대 진학도 기대하셨는데 나는 의대 진학을 포기했다. 그날 아름이의 피를 본 이후로 나는 누군가의 손에 난 작은 상처의 피조차 볼 수가 없었다. 손이 떨려오고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식은땀이 나고 힘이 빠져나가 정신이 아득해 왔다. 나는 때론 밝고 명량하며 부드러웠던 아름이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비슷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으면 눈물이 난다. 나를 대신해서 죽은 그 아이의 그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아마 그 아이를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아이의 마지막 부탁인 아름이 엄마에 대한 짐을 영원히 내려놓지 못할 것 같다.
만약 십자가에서 너를 위해 죽은 나에 대한 생각이 한수의 아름이에 대한 생각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너는 나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다. 사실이 아니기에 위와 같은 반응이 없는 것이다. 물론 감정의 기복이나 슬픔을 이겨내는 각자의 성향과 이성적 통제력의 차이로 실제적 삶은 차이가 있겠으나 마음으로 밀려오는 파장은 모두 같다. 그런데 그런 파장이 없다는 것은 나의 십자가 사건이 너에게는 모두 거짓이라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이보다 더 큰 파장이 밀려온다. 특히 우리 중 성령이 내주 하여 깨닫게 하고 상기시키면 전 생을 불태울 불길이 마음을 덮어버린다. 그런데 그것이 없다면 너에게 있는 나의 십자가 사건은 가짜다.
이 십자가가 바로 유월절 어린양 사건이다. 유월절이 없으면 세상을 떠남은 불가능하다.
세상과 그 신을 버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알고 믿고 있던 모든 가치관을 송두리째 버리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목표가 좋은 대학에 진학하여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너를 위해 죽은 나 예수를 위한 사랑이 불타올라 나의 뜻이 너의 뜻이 되고 나의 소원이 너의 소원이 되는 것이다. 이는 좋은 대학 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잘 포장된 핑계로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사랑이 너의 사랑이 되고 내가 바라보고 있는 영혼을 보면 너의 눈에도 눈문이 맺히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마음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지금은 어디에서 누구를 위해 울고 있는지가 관심사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십자가의 사랑을 갚을지를 고민하는데 갚을 수 없어서 자신의 모든 몸을 바치고 전생을 바치는데 그래도 만족할 수 없어, 열정과다로 달리다, 완전히 번아웃된다. 그래도 다음날 이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친 몸을 다시 이끌고 일어나 가던 길을 또다시 달린다. 그렇지 않다면 너는 아직 세상을 버리지 못했다.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쾌락과 성공과 권력을 좇는 작은 마귀일 뿐이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하면 독사의 새끼다.
출애굽은 이런 과정의 시작에 불과하다. 이제 세상이 자신을 괴롭게 하고 고통을 주니 이제 이 세상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여 우리(하나님)를 따라 볼까 하여 따라나선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우리가 능력이 있으니 우리의 도움을 구하여 기도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 아직 육신은 죽지를 않았다. 원래는 유월절 밤에 세상의 아들들과 함께 죽었어야 하나, 육신이 살아 있는 상태로 유월절을 통과했으니 육신의 욕정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런 상태로는 우리의 통치에 복종할 수 없다. 우리의 사랑을 따라올 수 없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면 자신이 손해를 보고 바보처럼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손해 보고 살 수가 없다. 자신의 공부 비밀과 고급 정보를 손해를 보고 다른 이가 요청하면 내어 놓아야 할 수도 있고 이유 없이 세상이 미워하면 미움을 당해야 한다. 그런데 아직 육신의 욕망이 살아있다면 이런 것은 견딜 수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아직도 세상이 구하는 것을 구하고 있다. 절에서 빌던 것을 교회에 와서 빌고 있다. 또는 무신론자로 추구하던 성공의 목표를 위해 여전히 나의 이름 예수의 이름을 빌어 기도하고 있다.
이런 자들은 결코 나의 사랑과 나의 뜻에 복종할 수 없다. 다른 이의 영혼을 위해 진정 울 수 없다. 목사라도 자신의 교회와 자신의 자부심을 위해 숫자를 끌어모을 수는 있어도 그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기도와 사랑은 할 수가 없다. 아무리 껍데기로는 그렇게 해도 그 영혼들의 결실을 보면 실질적인 목사의 목표를 알 수 있다. 목사가 구하는 것이 교회에 현실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거듭난 성도가 없다는 것은 목사가 거듭나지 못해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거듭나지 못했기에 목사가 구하는 것은 속에 숨겨져 있으나 그 본질은 당연히 세상적이요, 사탄적이요, 육신적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많아도 거듭난 영혼은 만에 하나 백만에 하나도 찾아보기 어렵다. 마치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거듭난 믿음을 가진 자가 단 둘밖에 없었던 것과도 같다. 이 시대 대부분의 교회가 이런 상태에 있다. 이는 목사나 강도사 전도사의 책임도 아니다. 각 영혼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데 교역자들이 일조를 하는 것은 맞으나 그들 때문에 너희 각자가 거듭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탐욕과 불신앙이 막고 있기 때문이다. 중세의 암흑 속에서도 빛은 타올랐고 그 빛들은 화형을 당했어도 하늘의 별이 되어 빛나는 이름을 하늘나라에 남겼다. 그러니 그 어떤 핑계도 핑계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우리(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면 어디에서 건 어떤 조건에서 건 우리가 구원했을 것이다.
유월절은 어린양의 피를 통하여 법적으로 죄인의 육체가 죽었음을 인정받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밤을 지나 부활의 아침을 맞이한다. 이것이 실질적인 육체와 마음의 거듭남은 아니다. 그러나 법적으로 거듭남을 인정받는 것이다. 여기서 법적이라는 것은 육체가 죽음에 이르지 않고 나 예수가 십자가에서 대신 죽음의 공로를 인정받아 죽었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실질적인 몸이 죽지는 않았지만 법적으로 호적상에 이미 죽었다고 표기해 주는 것이다. 또한 마음도 성령의 불세례가 임하지 않아서 옛 자아가 죽지 않고 있다. 그래도 이미 법적으로는 옛 죄인은 죽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출발일뿐이다. 실질적인 하나님의 아들로 심령이 거듭나는 것은 성령의 불세례를 통해서다. 그리고 평생 동안 성화를 거치고 실질적인 육체의 죽음 이후 영적으로 완전한 아들로 변화된다. 그리고 몸은 마지막 심판 때에 첫 째 생명으로 살아나 부활을 얻어 구원이 완성된다.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과 나의 백성 된 이방인들은 홍해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바람의 벽으로 갈라진 홍해를 죽지 않고 건넜다. 그러나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내 백성들을 잡으려는 세상은 파라오와 그 군대라는 형태로 홍해바다에서 모두 죽임을 당했다. 홍해는 결코 세상에 속한 자들은 통과할 수 없다. 그러나 나의 백성 된 이스라엘은 육체의 죽음을 보지 않고 유월절과 홍해를 통과했다. 유월절을 통과하여 법적인 죽음을 인정받았기에 홍해에서도 죽음을 보지 않고 죽음의 바다인 홍해를 통과했다.
세례의 원래 의미는 옛사람이 물속에 들어가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 속에는 죽음과 부활이 한꺼번에 들어있다. 이는 유월절과 연결된 하나다. 유월절에는 이집트의 모든 장자들이 죽었다. 그리고 홍해에서는 이집트의 핵심적인 힘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세상을 떠나고 세상의 핵심적인 권력이 파해 짐으로 세상은 내 백성을 노예로 잡아둘 힘을 잃어버렸다. 이렇게 내 백성은 세상에서 자유를 얻고 세상과 결별한다. 유월절과 홍해에서는 세상의 장자와 세상의 군대가 죽임을 당했다. 이를 통해 결정적으로 세상에서 내 백성이 구원을 받는다. 세상과의 결별인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신약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세상이 죽는 것이 아니라 내 백성이 죽는 것처럼 보인다. 내 백성이 나의 십자가와 연합하여 법적 죽음을 인정받아 호적 상에서 사망으로 등록이 된다. 그런데 그 참 의미를 알고 나면 구약과 신약이 다르지 않다. 신약에서도 사탄과 세상의 권세가 파하여 짐으로 내 백성은 자유를 얻는다. 그 방법이 십자가에서 나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다. 이미 죽은 사람이니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어떤 법도 통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세상과 결별하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모양은 조금 다르지만 결국 세상과 결별하는 것은 동일하다. 그리고 죽음을 통과하는 것도 동일하다. 또한 성도들이 실질적인 죽음을 맞지 않고 죽었다고 인정됨도 동일하다. 나의 죽음은 실패인 것 같지만 엄청난 승리다. 나는 죽음으로 내 백성이 받을 죄의 벌을 대신 받았다. 이로서 나를 믿는 자는 죄의 형벌에서 자유케 되었다. 또한 나는 죄 없이 두 번째 아담이 되어 죽음으로 모든 인류의 죽음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를 믿는 자는 합법적으로 나와 함께 죽었다고 법적으로 인정을 바게 된다. 이는 엄청난 결과를 낳는데 죄인이 죽음으로 더 이상 세상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된다.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내 백성을 노예로 잡고 있는 원수들의 권세를 깨트리는 강력한 승리가 된 것이다. 죽음으로 더 이상 원수인 사탄과 세상과 육신에 종노릇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진정한 숨겨진 승리다. 그래서 이를 신약의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다.
그분께서 십자가로 통치들과 권세들을 무력화시켜 밝히 드러내어 수치를 당하게 하시고 승리하셨다.(Colossians 2:15 바른)
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합법적으로 원수들의 권세를 무력화시켰다. 죽음으로 다른 세상에 속하게 된 내 백성을 원수들은 더 이상 지배할 권세가 없다. 이것이 십자가의 승리다. 실패와 고통만이 십자가가 아니다. 십자가는 그것을 통해 참된 법적 죽음을 맞이하고 그 법적 죽음으로 인해 세상과 사탄과 죄에 종노릇 하던 내 백성을 자유하게 한다. 실질적으로 죽어버리면 바로 지옥에 떨어지니 인간 스스로의 실질적 죽음으로 얻을 수 있는 승리는 없다. 단지 실질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법적인 죽음을 맞으므로 원수의 권세에서는 자유로워지지만 죽음 이후의 심판에는 이르지 않는다. 십자가의 승리는 이런 내용들이 내포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내 백성을 죄사함을 얻는다. 그리고 법적으로 독사의 새끼(아들)에서 우리(하나님)의 아들도 인정함을 받는다. 이것이 홍해에서 받은 물세례의 의미다. 그리고 신약의 요한의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의 실질적인 능력이다.
그러나 이렇게 물세례를 받은 것은 법적인 변화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진정으로 복종하기 위해서는 법적인 변화뿐 아니라. 실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법적으로 우리의 아들들이 되었으니 이제는 실질적을 우리의 아들들이 되어야 한다. 그 변화는 바로 성령이 임함으로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전 옛사람의 욕망이 죽어지고 우리(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를 닮아 우리의 뜻과 우리의 소원이 그 마음에 부어지는 것이다. 망아지는 말의 새끼라서 말의 유전자를 받아 말의 생김새를 가지고 말의 행동을 한다. 송아지도 소의 유전자를 받아 소의 행동을 한다. 이와 같이 우리(하나님)의 아들이면 우리의 성품을 가지고 우리의 행동을 해야 한다. 인간은 그럴 능력이 없는데 성령이 십자가를 통해 죄사함을 얻고 법적 신분도 하나님의 아들로 변한 인간에게 합법적으로 임한다. 그렇게 임하여 인간이 우리의 아들로서 행동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한다. 이 부분은 다음에 이어질 광야에서 육체가 죽고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남에 관한 부분에서 언급된다.
[^1]: 구원의 순서 즉 구원의 과정과 단계들을 말한다. 구원의 여정이라 말할 수도 있다.
[^2]: 사실 수는 강조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진정 중요한 것은 수가 수식하고 있는 사건들 속의 구원의 진수다. 주목해야 할 것인 바로 이것이다. 너무 수비학적 또는 분석적 틀들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란다. 단지 그것은 성경 속의 진수를 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