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은 광야의 40년을 거치지 않고 바로 가나안으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광야의 40년은 옛 세상 이집트에 속한 옛사람이 죽는 과정이다. 옛사람들의 세대가 모두 죽은 후에야 가데스바네아의 20세 미만과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자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옛 세상에 속한 옛사람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 앞에서 계속 설명했지만 우리(하나님)의 통치에 들어온다는 것은 우리의 말을 듣고 우리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와 원수 된 세상의 욕심을 품은 자가 어떻게 우리에게 순종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옛사람들이 죽는 40년이 지나고 나서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항상 이런 것은 아니다. 그중 둘은 바로 가나안에 들어갈 믿음을 가졌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었다. 이 일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겠다.
이스라엘은 정탐군들을 보내고 그들을 통해 미리 지형과 그곳에 거주하는 민족들에 대해 정보를 얻은 후 가나안으로 진격할 것이었다. 정탐군들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뽑혔다. 그중 에브라임 지파의 여호수아와 유다지파의 갈렙이 있었다.
모세는 정탐군들을 보내며 말했다.
"저 네겝 지방에 들어가 보고 산악 지대에도 올라가 보아라. 그곳이 어떤 곳인지 살펴보아라."
"거기에 사는 백성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 지, "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 "
"그들이 사는 도시들은 어떤지, 천막에서 사는지, 견고한 성 안에서 사는지, "
"땅은 기름진지 메마른지, "
"숲이 우거졌는지 아닌지"
"살펴보고 오너라. 대담하게 행동하여라."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과일을 따오너라."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목동으로 보내며 모든 것을 잊어버린 줄 알았지만 그는 40년 전까지 이집트의 왕궁에서 왕자로 지내며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한 전략과 군사전술들을 공부했고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조상들의 땅인 가나안으로 가기 위한 지형들에 대해 문서들을 찾아보며 탐색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준비된 리더였고 책략가였다. 이제 가나안을 정복해야 하는데 가나안에 대한 실사를 하여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해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가나안을 정탐하라고 하셨다. 모세의 명령은 상당히 구체적이었고 전략가로서 세심한 면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12 명의 정탐군들은 가나안에 가서 그곳을 모세가 명령한 것에 유의하며 살폈다. 그리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석류와 무화과를 따왔다. 그리고 에스골(송이) 골짜기에서 포도송이 하나를 가져왔는데 장정 둘이서 막대에 꿰어 둘러매야 할 정도로 거대했다. 가나안에는 그 포도의 크기에 맞는 거인족들이 살고 있었다. 헤브론에 거주하는 거인족들은 아나킴(아나크)의 후손인 아히만족, 세새족, 탈매족들이 있었다. 그 외에도 가나안 정복 때에 보면 곳곳에 거인족들이 있었다. 그들 앞에 이스라엘 백성은 메뚜기의 크기와 같았다. 후대에 다윗과 싸웠던 골리앗은 이들에 비해 작은 편에 속했다. 바산 왕 옥은 그 철 침대의 크기가 4m나 되었다. 키는 최소한 3m 30cm 이상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가나안 족속들은 키가 장대하며 그들의 성읍은 요새화되어 있다.
정탐군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
사탄과 세상에 노예가 된 인간의 육신으로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이 없다. 거대한 가나안 인들과 그곳의 요세화된 성읍을 보고 이집트의 노예에서 겨우 탈출한 이스라엘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이 전쟁에 승산이 없다는 것이 당연한 결론이다. 오직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우리(하나님)뿐이다. 그러니 우리를 믿는 절대신앙이 없으면 가나안을 정복하는 이 전쟁에서 승리는 없다. 그런데 인간은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믿을 수 없다. 믿음 자체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나안에 들어가야 할 이유가 없다. 이집트에서 사는 것이 훨씬 풍요롭고 쉽다. 그곳에서 비록 노예가 되었지만 조금 괴로운 상황만 참으면 얼마든지 광야보다 심지어 가나안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과 풍요를 누릴 수 있다. 적극적으로 이집트에 부역하면 더 큰 지위를 얻고 이집트인들이 누리는 지위를 자신도 누릴 수 있다. 막스 베버의 말과 같이 세상은 어차피 그렇게 흘러가는데 그것에 저항하지 말고 순응하며 소시민으로 사는 길을 선택하면 얼마든지 이집트에서의 삶을 즐길 수 있다. 웰빙 라이프와 워라밸을 지킬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연봉 수십억을 벌 수도 있고 명예와 권력을 얻을 수도 있다. 우리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타이틀을 버리면 얼마든지 이집트인으로 편입해 소시민의 삶을 살 수 있다.
누가 이렇게 쉬운 길을 두고 거대한 거인들과 높은 요새를 정복해야 하는 정복 전을 선택할 것인가?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가나안이 아니라 이집트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가나안을 선택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멍청한 짓이다.
심지어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보다 그냥 광야를 떠도는 것이 낫다. 광야를 다니더라도 거대한 거인들과 절벽과 같이 높은 성 위에서 화살을 쏘아대는 적들을 마주하는 것이 더 큰 불행이다. 최소한 광야에는 해지지 않는 옷과 매일 아침이면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가 있다. 그리고 필요할 때면 목마름을 채울 물이 있다. 지금도 수많은 족속들이 광야에서 유목을 하며 산다. 그들은 스스로 양이나 염소나 낙타를 길러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우물들과 오아시를 찾아 짐승들과 자신을 먹여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해주신다. 최소한의 자신들이 해야 할 것도 없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완전 복지다. 만약 너희 시대의 치열한 삶과 경쟁을 경험한 MZ세대라면 광야의 삶은 완전한 청년복지 그 자체일 것이다. 매일 캠핑을 즐기며 매일 주어지는 음식을 무료로 공급받아 트랙킹을 즐기는 삶이라 느껴질 것이다. 모세는 이미 40년을 먼저 미디안 족족들과 그 삶을 살았다. 그 삶도 정상적인 삶인 것이다. 현대화된 너희 시대에도 아직도 베드윈들이 남아 있는 것은 그 삶도 정상적인 삶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보다 이미 모든 군대가 수장된 이집트로 돌아가 자신들보다 인구의 수도 작고 자신들을 너무나도 두려워하는 이집트를 정복하는 것이 더 쉽다. 그리고 이집트 땅에서 풍요로운 미래를 꿈꾸는 것이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집트는 고대 근동에서 가장 뛰어난 곡창지대다. 날씨도 따뜻하며 습도도 높지 않아 낮의 태양이 아무리 뜨거워도 신전들이나 심지어 흙과 돌을 섞어 만든 가난한 농부의 집이라도 그 안에서는 시원함을 얻을 수 있다. 물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얻을 수 있으며 필요한 모든 것은 곡식 무역과 아프리카에서 들어오는 조공무역을 통해 언제든지 얻을 수 있다. 지금 남아있는 이집트 문명의 유산은 실제 그들이 소유했던 거의 극히 작은 일부일뿐이다. 원래 유산이라는 것이 세월이 지나고 남은 일부인 것이다. 그러니 원래 있던 그들의 부가 어떠했는가는 상상에 맡기겠다. 무엇보다 풍요를 바탕으로 피어난 당시 세계최고의 문명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을 정복하여 그곳의 통치자들이 된다면 그 자체로 낙원을 얻는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이집트는 셈족들에게 정복당한 적이 있으며 또한 힉소스인들과 같은 셈족의 왕조들이 들어선 적이 있다. 파라오와 그 군대가 사라진 지금의 이집트는 이스라엘 백성이 꿈만 꾼다면 충분히 정복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가나안을 정복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정세를 판단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돈키호테와 같은 선택이다. 단지 멋진 정복전을 꿈꾸고 기사도를 위해 풍차라도 괴물로 보고 공격해야 하는 허황된 낭만을 꿈꾼다면 그것을 선택할 것이다. 그것은 라만차의 산초조차 선택하지 않을 미친 짓이다. 산초도 정신이 나간 주인이 아니었다면 결코 그 길을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정상적인 인간이 그런 선택을 하겠는가? 그래서 육체를 가진 인간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 세상과 세상의 임금에게 길들여진 인간은 절대 그런 선택을 할 수 없다.
가나안에 대한 이스라엘 전체의 선택과 판단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옳은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심지어 모세와 아론조차 엎드러져 통곡했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온 회중이 소리 높여 부르짖었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울었다.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죽었거나 혹 이 광야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어찌하여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시는가? 우리 아내와 아이들이 사로잡힐 것이니,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들이 서로 말하였다.
"우리가 우두머리를 세우고 이집트로 돌아가자."
그래서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얼굴을 숙이고 엎드렸다.(Numbers 14:1-5 바른)
이 반응이 정상적인 인간들의 반응이다. 결코 그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중요한 한 가지가 이들에게는 없었다. 바로 우리(하나님)다. 우리가 함께 해야 생명이 있다. 우리와 함께 하지 않고 이집트와 같은 복락을 누릴지라도 그 삶 자체가 지옥이다. 인간의 심령이 어떤 부와 명예와 권력이 있는 곳이라도 그곳을 지옥으로 만든다. 더 큰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으려고 인간이 만드는 것이 지옥도다. 그 모든 것을 얻는 수단이 지옥의 손길이다. 폭력과 권모술수와 사기와 살인이 더 큰 탐욕으로 나가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을 추구하도록 우리(하나님)는 세상을 설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설계와도 다른 자기 탐욕의 한도를 넘은 범람은 결국 지옥의 수단을 부를 수밖에 없다. 그 외에는 길이 없는 것이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것을 약탈해야 한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이들 자체를 잡아와서 노예로 부리며 그들이 생산하는 것조차 실시간으로 탈취해야 한다. 그리고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을 폭력으로 제압하기 위해 군대를 두어야 한다. 그 군대를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하니 더 많은 약탈과 착취와 살인을 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길이다. 우리가 없는 곳은 항상 이런 지옥이다. 세상의 길은 안락하고 향락이 가득하며 육체의 나른 함을 즐기기에 가장 좋은 왕도인 것 같지만 사실은 지옥의 수단이 아니면 그 길은 성취될 수 없다. 오직 악업만이 그것을 이루 수 있게 하는 수단이다. 그 길은 지옥의 악업의 길이며 결국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불나방들의 길이다. 그러니 인간은 우리와 함께 해야 한다.
만약 타락한 세상 속이 아니면 인간은 우리를 따름으로 바로 태초의 낙원에 있게 된다. 가나안 정복 전쟁도 이집트 탈출도, 심지어 광야 40년의 길도 필요가 없다. 그러나 타락한 세상과 그 속의 자신들의 육체와 사기군 지배자 사탄이 있기에 죄인인 인간이 세상에서 탈출하여 우리에게 오는 길은 험난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를 선택하여 우리에게 절대복종하는 인간들이 지상에서의 삶은 전쟁일 수밖에 없다. 이집트인들에게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겠다는 것은 전쟁선포였다. 이집트의 절반 이상의 인구를 차지하는 전력들이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어떤 세상의 나라가 이를 두고 볼 수 있는가? 이처럼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다는 것은 전쟁일 수밖에 없다. 원수들이 자신들의 어둠에 빛이 온다는데 전쟁을 선포하지 않겠는가? 자신들의 노예였던 자들이 이제 노예해방을 꿈꾸는데 자신들의 재산인 노예들을 그냥 넋 놓고 잃어주겠는가?
그냥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그래서 이집트 탈출의 진통이 있었고 또 가나안 정복의 무지막지한 과업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하면 가나안을 정복하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우리(하나님)가 없다면 가나안 정복은 불가능의 철옹성을 지키는 철갑옷 거인들에게 도륙당하는 돈키호테의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했다.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무모한 선택이 우리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엘샤다이다. 이스라엘의 전능자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대신 싸울 것이다. 구원의 길에서 인간이 해야 할 것은 단지 우리를 믿는 것뿐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 모든 길을 열 것이다. 12 가지 기적을 보이고 홍해를 가르고 광야의 땅을 가르며 뱀과 전갈을 밟으며 강물을 가르고 성을 무너트리며 해를 멈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길을 가려면 믿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엘샤다이며 전능자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갈 수 있다.
모세의 시대 가데스바네아에서는 그 믿음을 가진 자들이 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세대를 이끌고 가나안을 정복한다. 가나안을 정복한 세대들은 이들의 믿음으로 인해 가나안을 정복했다. 일반 백성들의 믿음이 아니라 이들 두 리더의 믿음으로 가나안은 정복되었다. 그들은 가나안을 정복할 때 태양을 멈추고 바다를 가르며 우주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우리를 믿는 믿음으로 살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중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은 오늘 가데스바네아에서도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믿음으로 섰다. 그래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출애굽의 성인 세대로서 다음세대 정복전의 리더가 되었다. 이와 같이 천국은 침노하는 자들의 것이다. 이들은 침노하는 무리며 믿음의 군장이다. 그 누구도 이들을 대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이 비루먹은 이집트의 노예 출신이라 해도 이들에게는 이제 전능자 엘샤다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오늘 가데스바네아의 두 믿음의 용장 여호수아와 갈렙의 선택을 엿볼 기회를 주겠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그 땅을 정탐한 자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으며,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그 땅은 아주 좋은 땅입니다. 만일 여호와께서 우리를 좋게 여기신다면, 우리를 그 땅으로 데려가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1]입니다. 여호와를 거역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을 떠났고, 여호와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10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났다.(Numbers 14:6-10 바른)
믿음의 선택은 항상 이와 같이 무모하다. 그러나 그 선택은 결코 무모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선택이 하나님의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그것이 길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하나님께서 길을 여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체에 속한 자들이 보았을 때 그 길은 가장 무모한 길이다. 그래서 믿음의 길을 선택하는 자들이 그들의 눈에는 가장 어리석은 자로 보이며 그들이 자신들을 믿음의 길로 이끄는 것을 보면 그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심지어 믿음의 사람들을 제거해서라도 그 길로 들어서는 것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으면 거대한 거인들과 철벽 같은 요새는 바로 죽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가나안 정복은 땅에 있어 육체에 속한 자들의 길이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늘에 오른 하늘에 속한 자들의 길이다. 세상은 오고 싶어 하지도 않고 올 수도 없는 길이다. 그래서 가데스바네아의 세대들은 믿음의 사람 둘을 돌로 치려고 했었다. 그러나 우리(여호와)가 이를 막아섰다. 그리고 선언했다. 이 둘만 가나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모두 광야에서 엎드러져 죽게 될 것이라 했다.
가데스바네아의 이스라엘은 육체에 속한 자들로 그들은 그 믿음을 소유하지 못했다. 그래서 광야의 40년을 거치며 육체에 속한 모든 자들이 죽어지는 길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 광야의 시험을 통과한 자들만이 우리(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왕으로서 정복전을 펼칠 수 있다. 그래서 천국의 백성은 침노하는 자들의 무리다.
상당히 난해하고 복잡한 내용들을 계속 설명했는데 이 중 대부분의 내용들은 철학과 교수들이 읽어도 난해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장 모세의 연대기의 내용과 유사하지만 기독교를 공격하는 철학책에 이보다 조금 쉬운 내용을 세계적인 석학이 언급했지만 그것에 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그 설명을 자세히 하니 철학과 교수들도 읽어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되어버렸다. 내(예수님)가 이 책을 이렇게 쉽게 설명했어도 너희가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무리가 있을 것이다. 아마 이해했다고 느껴도 사실 그 깊이를 알지도 못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오해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내가 인간으로 갔을 때에 했던 말들도 엄청나게 어려운 고전헬라어의 철학적 용어들을 사용하여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그 당시 대중들이 사용했던 쉬운 히브리어만을 사용했다. 오죽하면 그런 용어만을 사용하여 대중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했던 나에 대한 유대종교학자들의 평가는 무식한 자였다. 너희 성경의 번역된 표현은 학식이 없는 자였다. 그러나 그렇게 설명을 했음에도 그들은 내가 설명한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어려운 말로 설명했기 때문에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다. 쉬운 말로 설명했어도 그들이 알 수 있는 이해의 수준을 벗어난 내용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의 가장 악한 점은 모든 문제 상황의 원인을 자신이 아닌 타자에게 핑계한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이 지은 죄를 자신의 아내와 뱀에게 떠넘겼듯 인간은 스스로의 문제를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항상 타자에게 핑계한다. 심지어 그 떠넘기는 대상을 우리(하나님)로 설정하는 경우들도 많다.
인간들이 나(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내 말이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하늘의 일을 말하니 땅에 속한 자들이 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것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다. 그러나 거듭나 하늘에 속한 자들은 장성하여 가며 그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내가 설명한 대부분의 내용이 이러한데 인간들이 세월이 지나도 결국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욕심에 막혀 눈이 가려진 탓이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쉬운 말로 그들의 이해를 도우려 해도 그들은 구원을 위한 기본적인 이해에 조차 도달하지 못했다.
그 원인을 나는 비유를 통해 그 당시의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서사로 풀아냈다. 바로 다음 비유다.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집주인이 있었다. 그가 포도원을 일구고 그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포도즙 틀을 파고 망대를 세우고 그것을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멀리 떠났다.
열매 맺을 때가 가까워지자, 그가 자기 소출을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그 농부들에게 보냈으나, 농부들이 그의 종들을 잡아서,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다.
주인이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더 많이 보냈으나 그들에게도 똑같이 행하였다.
마침내 주인이 그들에게 자기 아들을 보내면서 '그들이 내 아들은 존경하겠지.'라고 말하였으나, 농부들은 그 아들을 보자, 자기들끼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상속자이니, 자, 우리가 그를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그들이 그를 붙잡아 포도원 밖으로 쫓아내어 죽였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가 그 농부들에게 어떻게 하겠느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께 대답했다.
"그가 그 악한 자들을 처참하게 죽이고, 그 포도원은 열매를 제때 그에게 바치는 다른 농부들에게 세를 줄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건축자들이 버린 돌, 이것이 모퉁이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께서 행하신 일이고, 우리 눈에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너희에게서 빼앗아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에게 주실 것이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질 것이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분의 비유를 듣고서, 그것이 자기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임을 알아채고,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하였으나 무리들을 두려워하였으니,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지위와 명예가 중요했다. 나 예수가 갔을 때 내가 주인인데도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자리만 생각했다. 내가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한다고 생각했다. 마치 포도원의 종들이 포도원 주인의 아들이 왔으나 자신들이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몰래 죽여버린 것과 같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말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가 그들에게 분명히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은 핑계일 뿐이다. 아닌 것 같지만 그들의 죄악은 이미 역사 속에서 드러났다. 그들은 알고 싶지도 않고 본능적으로 싫기 때문에 대적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남을 속이고 심지어 자기 스스로까지 속일 수는 있지만 자신들이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만약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하여 남을 시기하고 스포츠에서 승부욕이 불타며 교회 안에서도 시기심이 일어난다면 너희는 아직 육신에 속한 자요 진정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다. 고린도서에서 육신에 속하였다는 것은 구원받았으나 육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교회라는 공동체에는 들어왔으나 아직 구원에는 이르지 못한 구도자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은사가 나타날 수 있고 이들도 성령의 능력에 노출될 수 있지만 구원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적을 경험했으나 여전히 육신에 속했던 가데브 바네아의 성인(20세 이상) 이스라엘은 모두 구원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믿음으로 합하지는 못했다.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비추심을 받았으나 그들은 아직 거듭나지는 못한 상태다. 그 상태로 계속하여 나아가면 그들은 모두 광야에서 그 마지막 하나까지 죽은 이스라엘과 같은 자들이다. 그 자신의 모든 의지가 죽고 하나님의 의지만이 살아있는 상태가 아니다. 여전히 자신의 뜻과 자신의 욕심이 그 중심에 살아 의지를 형성하고 자신을 지배하는 상태다. 바로 자연인 바로 육신으로 태어난 상태 그대로의 사람이다. 혼인잔치에 초정은 받았으나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자들과도 같은 자들이다.
나의 십자가와 함께 죽고 나의 부활과 함께 살아난 자만이 거듭난 자다. 거듭남으로 이미 자기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것이 단지 개념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육신에 자기 정과 욕심이 죽어버려야 한다. 구원받은 자는 더 이상 자기 욕심이 마음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불일듯 일어난다. 육신에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이 가라는 길을 간다. 결코 자신의 생활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그것이 목적이 되어 좋은 직장과 좋은 미래를 선택하지 않는다.
자기 유익을 구하는 자들은 아직도 자신이 어디에 속하였는지도 모르는 소경들이요.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들이다. 절에서 빌어야 할 소원을 단지 교회에 와서 빌 뿐이다. 이들은 고린도서에서 말한 육에 속한 자들이다. 그리고 유리하는 별과 같이 욕심에 이끌리는 발람과 같은 자들이다. 수많은 자들이 이들의 상태와 같은 삶을 살다가 지옥으로 떨어졌다. 중세 교회 전체가 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옥불로 떨어졌다. 화석화된 교회 전체가 이러한 길들을 갔다. 이들의 상태는 예수님을 대적한 유대인들의 상태이며 그들은 전체였다. 나머지 일부가 믿어 구원을 받았다. 좁은 길은 그 길이 좁고 험하여 찾는 자가 적다.
왜 우리(하나님)는 가데스바네아에서 믿음이 없어 순종하지 않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데려갔겠는가? 그것은 그곳이 그들의 믿음을 시험할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곳이 최고의 시련을 맞아 최고의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광야는 우리(하나님)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우리 없이는 통과할 수 없는 곳이다. 특히 이스라엘과 같이 전혀 광야에 대한 지식이 없는 민족에게는 더욱 그렇다.
광야를 떠도는 유목민의 무리들에게 광야는 삶의 터전이다. 농경민족에게는 농경에 적합한 땅이 있다. 또한 유목민족에게는 유목에 적합한 땅이 있다. 물론 광야가 유목에 무조건 좋은 장소는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타민족과의 큰 경쟁 없이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장소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속한 미디안을 보면 알 수 있다. 너희 시대에도 아직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나 북아프리카나 중동의 유목민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들에게는 광야는 익숙한 장소로 절대적 한계와 절망의 곳은 아니다. 이들에게 시련을 주고 한계를 경험하게 하고 우리만을 신뢰하도록 하는 훈련을 시키려면 광야가 아닌 다른 장소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300여 년을 보낸 이스라엘에게는 전혀 낯선 땅이며 첫 경험의 장소다. 그들의 조상들도 유목을 하는 자들이었고 원래 광야와 그 경계지들에 거주했던 자들이다. 그러나 비옥한 이집트의 고센에 거주한 300여 년의 세월 동안 광야에서의 삶에 대한 모든 지식은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광야에서 물이 없어서 고민을 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양과 염소와 낙타와 야생마를 효과적으로 유목하는 민족이었다면 결코 양식이 없어서 불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 광야 세대의 청소년들이 있다. 야반과 두기오와 혁거세였다. 이 때는 이집트에서 나온지 30년 되었다.
야반은 전형적인 이스라엘인의 얼굴이었다. 두기오는 이집트인과 이스라엘의 혼혈이었다. 그리고 혁거세는 찢어진 눈에 튀어나온 광대뼈에 기골이 장대한 중앙아시아 동쪽의 어느 족속의 후예라 했다. 자신의 집안은 대대로 그 부족의 왕이었는데 그들 왕의 호칭이 혁거세라 했다. 혁거세의 집안사람들은 염소나 양의 우두머리도 혁거세라 불렀다. 지금도 터키 땅에서는 염소나 양의 우두머리를 혁거세라 부른다. 혁거세의 집안은 반란으로 그 왕권을 잃어버리고 쫓겨나 유목하던 중 이집트까지 왔는데 이집트에서 용병으로 일을 했다. 지금은 이스라엘의 신(여호와)인 우리를 따라 이스라엘 민족에 편입되었다.
야반이 말했다.
"어른들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이 광야를 살아가려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우리 민족은 스스로 의식주조차 해결 못하는 어리석은 길을 가고 있어. 스스로 물도 찾고 양식을 기르고 계절에 따라 어느 목초지를 찾아가 거주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어. 광야에서 벌써 30년을 살았는데 이것도 모른다는 것이 말이나 되냐? 광야 어느 곳에 물이 있는지 발견한 우물에 대한 지도를 만들어야 해. 그리고 늘 양식이 부족하니 양과 가축들의 수를 늘려야 해 이 많은 민족이 먹고살려면 사람 하나당 20마리 이상의 가축이 있어야 해 그래야 젖과 고기를 양식으로 삼은 후에도 계속 새끼를 낳아 그 수를 유지할 수가 있어. 유목을 하려면 이렇게 모여서 한 집단으로 뭉쳐 다니지 말고 흩어져야 해. 또 광야의 다른 민족들을 만나면 우리 자신들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도록 전투훈련도 틈나는 대로 해야 해."
두기오는 야반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다는 듯 무시하는 태도로 말했다.
"야! 너는 어떻게 이 광야에서 계속 살자는 말을 하는 거야. 여기가 뭐가 좋다고, 여기는 그냥 모래와 돌과 드문드문 나있는 풀들이 다인데 뭐 하러 여기에서 사는 법을 배우려는 거야. 우리가 두고 온 이집트 고센땅은 얼마나 좋은 곳인지 모르지. 부모님이 말씀해 주셨어. 그곳이 얼마나 풍성한 땅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집트의 모든 군대가 홍해에서 죽었기 때문에 지금은 이집트의 국력이 형편없다는 거야. 소문에는 이미 셈 족 출신들이 이집트를 점령했다는 소문이 있어. 그들은 숫자도 우리보다 훨씬 작다고 했어. 우리는 이집트인들보다 많고 우리 민족이 그들보다 뛰어나, 내가 봐서는 모세 선지자님이 그때 판단을 잘못하신 것 같아. 홍해에 파라오와 그 군대들이 수장되었을 때 바로 이집트로 쳐들어가서 이집트를 점령했어야 했어. 그랬으면 지금 이런 생고생도 안 해도 되는 건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저 철갑을 두른 거인이 있는 척박한 가나안 땅은 빨리 포기해 버리고 이집트로 돌아가서 지상낙원을 건설하는 거야. 모든 음식과 세상의 풍요가 넘치는 전 세계의 발전된 대국을 우리 이스라엘이 통치하는 거야. 그리고 이집트인들과도 화목하며 그곳에 이 사막의 오아시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행복의 도시들을 건설하는 거야. 구름기둥이나 불기둥만 좇아 다니는 이런 무의미한 방랑은 이제 때려치워야 해."
혁거세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나서 무거운 입을 열었다.
"우리 이스라엘이 이렇게 광야를 방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야. 원래 대로면 우리는 이집트에서 나와서 바로 가나안에 들어갔어야 했어. 그런데 가데스바네아에서의 일을 너희는 들었니 거기서 우리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못했어. 거대한 거인들과 그들이 지키고 있는 철옹성 같은 요새를 보고 두려워했지. 분명 하나님께서 싸워서 이겨주실 것인데 우리는 믿지 못했어.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거야. 가나안에만 들어갔어도 우리는 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돼."
"지금 광야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해. 우리 민족이 우리 스스로 광야의 길을 갔으면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거야. 우리 민족의 수가 엄청나게 작아졌겠지. 그래도 남은 소수의 인원들은 야반이 말하는 것처럼 광야에서 샘을 찾고 철을 따라 목초지를 이동하며 생존하는 법을 배웠을 거야. 그런데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가 광야에 사는 것이 아니었어. 만약 우리가 광야에 있어야 한다면 하나님께서 모세 선지자를 통해 우리를 훈련시키셨을 거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하셨어. 떠날 때가 되면 성막 위로 구름기둥이 떠오르고 그 구름 기둥의 움직임을 따라 우리는 따라만 다녔어. 그러니 우리가 지리를 익힐 필요도 없었고 익힐 수도 없었어. 샘을 따라 여정을 이끌지도 않으셨기에 우리는 샘들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하지도 못해. 물론 양들을 먹일 목초지를 찾는 것도 우리는 할 수 없어. 우리가 30년 동안 광야에서 한 거라고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서 걷는 거였어. 우리 중 여자들은 이미 음식을 요리하는 것을 많이 잊어버렸어. 아침이면 만나가 내리니 그것은 요리할 필요도 없이 먹을 수 있는 거잖아. 그러니 여자들이 요리할 일도 없어. 또 바느질하는 법도 천을 만드는 법도 모두 잊어버릴 것 같아. 옷이 떨어지지도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어. 바느질이 필요 없었어. 신발도 떨어지지 않으니 신발을 만드는 장인들도 신발을 만드는 법을 잊어버리고 있어. 그리고 이제 모두 나이가 들어서 저들이 죽고 나면 이스라엘 안에는 신발을 만들 수 있는 장인들이 사라질 거야. 남자들도 농사짓는 법과 가축을 기르는 법을 잊어가고 있어. 사냥법도 물론이야. 이런 것들을 하고 싶어도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움직이면 모든 것을 버려두고 떠나야 하니 할 수가 없었어. 이런데 우리 민족이 무슨 능력과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겠어?"
야반이 물었다.
"그럼 우리를 왜 데리고 나왔는데 이렇게 하면 우리는 바보 민족이 되고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어리석은 민족이 될 거야."
혁거세가 말했다.
"내 생각에는 우리 민족이 살 길은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는 거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오랫동안 같은 방식으로 훈련시키시는 것은 이유가 있어. 이 세상에 어떤 민족도 자기 미래를 자기가 책임질 수는 없어. 어떤 나라도 민족도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가다, 죽는 길을 피할 수는 없어. 그리고 그 모든 길은 우리가 이집트에서 경험한 것처럼 서로 눈치 보며 서로 빼앗고 폭력으로 지배하고 두려워 복종하는 관계들이 거미줄처럼 퍼져서 지옥을 만들어. 행복한 것 같지만 마음은 늘 의미 없음에 괴로워하게 되고 많은 시간들을 벌어지는 사건들 가운데 불안과 초조에 떨며 보내게 돼. 그리고 왕과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벌이기도 하고 외교관계를 형성하기도 하는데 그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지워지지. 전쟁에 나가서 죽는 것도 우리고 그리고 외교관계를 위한 세금을 바치는 것도 우리들이지. 때로는 우리는 속아서 착취를 당하면서도 착취당하는 줄도 모르고 살아. 그래서 행복하다고 아무리 스스로 최면을 걸어보려 해도 마음속은 항상 불행해."
두기오가 말했다.
"야 그건 세상에 사는 사람들 모두 그런 건데 그게 뭐가 어떻다는 거야. 다른 세상은 없어."
혁거세가 답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를 보살피시면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아도 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새로운 나라를 만드시고 저 가나안에서 행복자들로 살게 하시려는 거야. 하나님이 보살피시면 우리는 아버지 아래서 편안히 살 수 있어."
야반이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 가나안의 철병거와 거인들과 철옹성은 너무 해. 우리가 어떻게 저걸 이겨낼 수 있겠어?"
혁거세가 답했다.
"아니야, 그건 하나님께서 처리하실 거야. 우리가 할 것은 하나님을 믿고 나가면 돼. 원래 나의 조상들은 싸움에는 이골이 난 사람들이야. 그런데 그 싸움에서 가장 큰 원칙이 있어. 싸움의 대세를 파악하는 거야. 반드시 이길 싸움이 아니면 어떻게든 피해야 하지. 우린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그걸 알아. 그런데 내가 보기에 우리는 반드시 이길 수 있고 하나님만 철저히 믿으면 별 고생도 하지 않고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어. 홍해를 가르시고 이집트에 10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이 계신데 저 세상의 거인들과 철병거를 이기지 못할 리가 없어. 이집트의 최정예병들을 전부 홍해에서 죽이신 하나님이신데 무엇을 못하시겠어. 너희와 너희 지파들은 어떻게 그 모든 것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믿음이 없는지, 참 의아해."
"그리고 사탄이 얼마나 두려우면 저런 일을 했겠어? 원래 우리 조상들이 가나안에 있다가 요셉 선지자 때에 이집트로 이주했는데, 사실 그전에는 저런 거인들이 가나안에 없었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할아버지들에 대해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들 중에도 거인 이야기는 없었어. 그런데 우리가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니까, 사탄과 귀신들이 두려워서 그곳에 거인족들을 불러 모은 거야. 강한 것들을 그곳에 모아 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두렵다는 거야. 사백 년도 안 되는 기간에 아니 저렇게 강해지고 식물들도 커진다는 것이 말이 안 되잖아. 모두 사탄이 두려워해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들만 모아서 우리가 올라올 것을 대비한 거야.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다는 증거야. 왜냐하면 사탄이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강하다는 거야. 우리 스스로는 약하고 무기도 없고 군사훈련도 안되어 있지만 우리에게는 엄청난 병거와 무기가 있어. 거인족보다 더 강하고 그 모두를 상대할 수 있는 진정한 거인이 계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셔. 우리의 진정한 무기는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진정한 검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야.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셔. 단지 광야에서 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가라면 가고 멈추라 하시면 멈추면 되는 거야."
"하나님의 광야 훈련은 바보 훈련인 것 같아도. 그것은 최고의 훈련이었어.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매 순간 하나님만 따라가는 훈련이었어. 그렇게 해서 절대믿음과 절대순종을 얻으면 절대안식인 가나안은 당연히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었어. 하나님의 바보 훈련은 멍청이가 되는 길이 아니라 최고 믿음의 용사가 되는 길이야."
"이 말은 우리 지파의 수장이신 갈렙 아저씨가 언제나 나에게 말씀해 주시던 거였어. 갈렙 아저씨는 이방인인 그니스 족속인데도 유다지파의 어른이 되셨어. 아저씨는 늘 말씀하셨어.
'중요한 건 내가 지금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야.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꿈이 있어야 해. 나는 출신도 이방인이야. 그리고 뒤늦게 유다지파에 들어왔어. 그래도 나는 이집트에서 기적을 보며 하나님을 만났어. 그 놀라우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어. 청년 갈렙아 꿈을 가져라. 나는 너의 꿈이다. 너는 내가 너를 데려갈 땅에서 정복자요, 용사가 될 것이다. 너는 나를 믿으라. 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나는 그날로 아버지와 함께 하나님을 따랐어. 그리고 아버지에게 저는 개(갈렙의 이름 뜻)이니 주인을 잘 선택하여 충성을 다하고 죽기까지 따르겠습니다라고 했어. 그리고 이집트를 나올 때 믿음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했어. 유월절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했어. 그런데 내가 장군의 아들이고 군대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고 해서 이방인이 내가 유다지파의 대표가 되었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신거야. 그리고 정탐군을 뽑을 때도 하나님께서 나를 지명하셨어. 원래 이스라엘 족속이었던 많은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으시고 나를 선택하셨어. 나를 이방의 개라고 놀리는 사람들도 있어. 그런데 나는 그런 말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 나는 하나님을 믿어. 그리고 하나님을 충성되이 따를 거야.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세워주실 거야. 하나님은 약속하셨어. 내가 이름대로 개처럼 하나님을 끝까지 따르면 이스라엘의 최고의 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았던 헤브론을 나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어. 그곳은 산지인데 강한 자들이 살고 있을 거라고 하셨어. 그리고 정탐 때도 보았는데 그곳에는 거인들과 철병기와 높고 견고한 성이 있었다. 그래도 나는 믿어 그날에 하나님께서 그곳을 나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거든. 내가 정탐하러 가서 헤브론을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어. 이 산지를 너에게 주겠다. 너는 이곳을 정복할 때까지는 기운이 쇠하지 않는 청춘을 얻을 것이다. 너는 그 청춘의 믿음으로 나를 따르라.'
나는 갈렙 아저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어. 나는 동방의 이방인이라, 외모도 출신도 너무 달라서 사람들에게 차별을 받기도 하지만 나도 갈렙 아저씨처럼 하나님을 따를 거야. 그리고 나도 갈렙 아저씨를 따라가서 헤브론을 정복할 거야. 그 거인들을 쳐부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야 말거야. 나는 싸움의 승패에 대한 눈치가 누구보다 빠르거든. 사람은 눈치가 있어야 해. 나는 어려서 직접 이집트에서의 기적과 홍해 사건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모든 일들에 관해 들었어. 그 모든 것을 듣고도 어떻게 승리를 믿지 않을 수가 있겠어? 사람은 눈치가 있어야 해. 나는 갈렙 아저씨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 돼. 그러면 나는 기적들을 많이 보게 될 거야. 하하하하"
[^1]: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좋은 농경지는 아니다. 그러나 목축을 업으로 삼는 이스라엘에게는 최고의 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