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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Jul 20. 2024

01.3.2.3.8. 율법의 종- 모세의 연대기 16

십계명, 가데스바네아, 광야 40년

01.3.2.3.8.10.2.3. 육신을 심판: 십계명과 광야 40년


내 백성은 육체의 죽음을 보지 않고 물세례(홍해=노아홍수)를 통과했다. 바로 나를 향한 여정의 출발인 신앙고백을 한 것이다. 신약성경에는 이에 관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는 명칭을 통해 정의를 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출발에 불과했다. 그들이 온전한 나의 나라, 나의 통치, 가나안에 들어오려면 사탄과 귀신들에게 속했던 옛 습관을 그대로 가진 자기 자신의 육체가 죽어야 했다. 그렇게 옛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했다. 이런 과정이 광야의 40년이다. 그리고 구원으로 초청받은 내 백성에게 나의 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어떻게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지 그 기준을 제시했는데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이다. 나의 아들들은 나를 닮아있다. 그래서 나의 성품을 가지고 나와 같은 일을 세상에서 한다. 그래서 나의 백성은 나에게 순종하며 나에게 순종함은 나의 말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뜻과 마음을 담은 율법에 순종해야 한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랑을 마음의 중심에서부터 가지는 것이 순종이다. 그리고 그것을 행위로 실천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의무이며 동시에 사랑 행함의 능력을 가지는 특권이다. 그런데 율법을 행할 중심을 가지지 못한 육신의 욕심에 속한 자들은 결코 나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 육신의 습관을 그대로 가진 자는 가나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그는 육신에 속하여 어느 땅에 있던지 육신이 속한 세상과 사탄에게 소속되기 때문이다. 믿음이 있어야 자신의 속에 있는 옛사람의 추악한 욕심을 멸할 수 있다. 이 죄악이 멸함을 받아야 온전히 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다. 오직 자기 안에 있는 사탄과 세상의 추종자였던 옛사람의 습관(구습)을 멸하는 것이다. 결국 옛사람의 구습은 자기 속의 옛사람이 죽어야만 멸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죄를 짓기에 죄인인 것이 아니다. 오직 죄인이라 죄를 짓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인 자아가 죽고 하나님의 아들인 의로운 자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홍해 바다를 통한 물세례는 죄된 육신이 제거되어 죽지 않고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과정의 서막이다. 그러나 나의 통치에 들어가 온전한 구원에 이르려면 누구든지 자기 옛사람이 죽고 하늘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죄된 욕망의 자아(육신)가 죽고 하늘의 성품과 소망을 품은 우리의 성품을 가진 자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성령이 사람의 마음에 내려 옛 성품은 죽어지고 우리를 향한 열정과 사랑이 불타올라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뜻만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불일듯 일어나야 한다. 그 모든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의 교육으로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러한 사람으로 개조가 불가능하다. 오직 성령이 사람의 심령 안에서 그 사람을 변화시킬 때만 가능하다. 이것은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남으로의 길을 제외하고는 길이 없다. 인간은 죽기 전까지는 죄의 욕망을 버릴 수 없다. 오직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길 외에는 길이 없다. 존재 자체가 완전히 변화되어야 한다. 나의 십자가와 함께 죄의 사람이 죽어야 한다. 그리고 나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그래야 말의 새끼는 말의 행태대로 자라고 소의 새끼는 소의 행태대로 자라듯 우리(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 수 있다. 그래야 우리에게 순종하여 우리의 통치를 받는 우리(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통치에 들어와야 우리의 나라(가나안, 하늘나라=하나님의 통치)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제 그 과정을 설명하겠다.

노아의 홍수는 물세례였다. 타락한 세상의 심판에서 노아는 신앙고백을 함으로 구원의 여정에 올랐다. 그리고 그 후대를 거치며 다시 바벨의 반역으로 인류는 다시 한번 공멸의 위기에 이르렀다. 우리(하나님)는 그 위기를 언어의 혼잡과 언어 그룹별 종족의 세분화로  막았다. 노아의 후손들은 시간을 거듭하면서 구원의 여정을 걸어갔다. 그 후손들은 때로는 나를 잊고 우상에게 절하기도 했다. 그런 우상장수의 아들 아브라함을 불러 나는 가나안(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통치)으로 이끌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는 우리(하나님)를 알게 되었다. 온전한 순종의 믿음을 가진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욕심이 아닌 우리의 뜻과 우리의 길에 순종하는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우리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은 우리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 의미를 모르면 구원의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

우리는 반복적으로 백성들을 세상에서 해방시켜 가나안으로 불렀다. 노아와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구원의 여정이 그러했다. 그리고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가나안으로 오는 여정이 그러했다. 그리고 야곱의 일족들이 온 세상을 멸할 기근에서 구원받음이 그러했다. 또한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여정이 그러했다. 또한 심판받아 페르시아에 포로 되었던 내 백성이 가나안으로 귀환하는 과정이 그러했다. 또한 신약의 이 세상 예루살렘 하갈에게서 난 자들 중에 하늘의 새 예루살렘 사라에게로 이끌리는 여정이 그러했다. 지금도 이 구원은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그 과정들을 반복하며 내 백성들을 초청하고 있다.

이런 반복되는 구원의 여정(서정)들 중 지금은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의 이집트로부터의 구원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세상과 사탄에게서 내 백성을 구원하는 장면까지를 설명했다.

이제 내 백성이 나의 온전한 통치를 받으려면 내 백성의 옛사람이 죽음을 보아야 한다. 우리(하나님)에게 온전히 순종한다는 것은 사탄과 세상 아래에 있던 세상의 구성원이었던 자기 자신이 죽어야 하는 것이다.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빠져나왔지만 그들도 이집트에서 세상과 사탄에게 속하여 세상을 구성했던 육체들이다. 우리(하나님)에게 복종하고 우리의 명령을 따르는 본성을 가진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과 공평을 가르치는데 이제 이집트에서 나온 내 백성은 여전히 이집트의 질서였던 경쟁을 통해 서로 빼앗고 서로의 것을 차지하는 성공이라 불리는 도적질에 익숙했다. 그들은 더 이상 길거리의 고아처럼 남의 것을 탐내어 훔치지 않아도 부모인 우리에 의해 완전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을 잘 믿지 못했다. 걱정하고 불평하지 않아도 자신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가 공급할 것인데 목이 마르다, 배가 고프다,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했다. 그냥 필요하면 우리에게 달라고 하면 되는데 우리를 믿지 못하고 불평과 불신앙의 반응부터 토해냈다. 이런 자들이 우리를 완전히 신뢰하여 우리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믿고 자기 자식 이삭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려 했다. 우리에게 순종하는 자는 이런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한 자가 죽은 자를 살리는 역사를 경험한다. 즉 나의 부활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자신도 죄로 인해 죽은 상태에서 부활하여 우리(하나님)에 대해 살아난다.

가나안(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통치)에 들어온다는 것은 100% 우리를 신뢰하고 우리를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통치에 들어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구약에서는 가나안이었다. 히브리서에서 말한 것처럼 구약의 여호수아를 통해 주어졌던 가나안은 단지 예표의 상징이다. 온전한 우리의 통치 안에서 완전한 평화를 누리는 믿음을 구약에서 모든 백성이 누리는 것은 어려웠다. 여호수아는 온전한 안식을 주지 못했다. 그것은 참 여호수아인 나 예수가 가야 이루어질 일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서 구원을 이루고 하늘의 능력인 성령이 인간들 속에 태초와 같이 함께 했을 때 사도행전의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의 사람들이 탄생했다. 그들은 세상이 흔들 수 없는 나를 믿는 굳건한 믿음으로 평강을 누렸다. 바로 은혜와 평강이다. 그 안식 속에 살아간 자들의 기록들이 사도행전이며 그런 안식으로 내 백성들을 초청하고 양육하는 과정들의 훈육의 말들의 기록이 서신서들이다. 이 훈육의 말들은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내 백성들을 교훈하고 책망하며 바르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한다. 사실 모든 성경에 기록된 글들의 기능이 이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신앙으로 자신의 시대를 살아 나 예수와 함께 죽어 영원한 부활의 승리를 맛보라고 초청하는 글이 계시록이다. 성경의  모든 글은 구원의 초청에서 시작하여 이 땅에서의 생의 마감까지 온전히 세상에서 구원받은 자로서 마지막까지 우리(하나님)의 구원 속에 머물러 영원한 구원으로 들어가라는 권면이며 안내서이다.

01.3.2.3.8.10.2.3.1. 십계명과 율법


우리(하나님)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을 내 백성에게 주었다. 내 백성에게 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었다. 십계명과 함께 우리는 시내산에서 다른 율법들과 구원과 성도들의 성화의 삶을 위한 희생과 헌신의 규례들을 내렸다. 그 모든 것은 열 개의 계명을 통해 요약되는데 결국 이 계명들은 결국 우리(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계명으로 요약된다. 십계명과 그 세부적 설명서인 율법들은 하늘나라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하늘의 질서를 담은 법이었다. 우리의 백성들은 세상에서 우리의 나라로 땅에서 하늘의 나라로 옮겨졌다. 그들은 더 이상 사탄과 타락한 인간들의 나라에 속하여 도적질과 착취와 멸망의 법에 순종하지 않는다. 세상의 미움과 불의와는 정반대의 사랑과 공평의 법에 순종한다.

세상은 도적질 하고 빼앗고 멸망시키는 자들이 왕이 되고 그들이 모든 이들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것들로 만든다. 법도 빼앗고 도적질 하고 멸망시키는 적자생존의 질서를 위해 기본적인 역할을 다한다. 소유에 관한 법들도 모두 힘 있는 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법이다.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소유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 법의 기본적인 정신이다. 법이 존재하지만 정말 힘과 돈과 세상을 움직일 지식이 있는 자들을 위해 존재한다. 있는 자들의 것을 지키기에는 유리하게 만들어진 것이 법이다.

내가 태초부터 세상에 사람을 태어나게 할 때에 그들에게 공평하고도 고유하게 준 기업들이 있다. 모든 사람은 내가 베푼 사랑과 공평의 법에 의해 정상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심지어 타락한 이후에도 인간은 자신의 삶을 이어나갈 수 있고 작은 노동이 따르지만 결국 자신과 가족을 지킬 기업을 일구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가인의 후예들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땅에서 유리한 자들이 된 가인의 후예들에게도 그들이 상공업에 종사할 수 있는 기업을 주었다. 노아 홍수 이전의 시대에 인간들은 그런 풍요를 누렸다. 물론 노아 홍수 이후에 인류는 그 풍요를 누렸다. 그 수가 완전히 급감하여 8명이 된 인류에게 온 세상은 너무 넓었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은 그들의 것이었다. 인류가 불어나도 땅은 충분했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이 문제였다. 과거 홍수 이전의 인간의 타락과 폭력성이 문제가 되어 인간은 심판을 불러왔다. 홍수 이후에도 인간은 그 타락의 속도를 더해갔다. 강력한 니므롯이라는 왕과 그의 지휘를 따르는 백성들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이 주는 풍성한 곡물을 바탕으로 문명을 건설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들의 반역의 꿈을 높여 탑을 쌓았다. 탑이 가능했던 것은 인간들에게 그만한 풍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수 대항이라는 푯대 아래 인간들은 단결하여 자신들의 모든 것을 한곳에 집중시켰다. 공멸을 향해 달리던 그들의 모든 시도도 언어의 혼란으로 모두 종결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사탄을 닮은 독사 새끼의 본능은 그 활동을 결코 멈출 수 없었다. 세상에 용사라는 자들이 홍수 이전과 같이 나타났고 그들의 탐욕은 나라들과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홍수에 죽었지만 홍수 이후에도 용사와 제국들은 등장했다. 제국들 마다 제도와 법들이 달랐고 문화들도 달랐다. 발생한 지역도 달랐으며 그 제국을 지배하는 인종도 구성하는 인종도 달랐다. 수많은 변화들과 세월의 흐름들이 있었지만 결국 그 본질은 하나였다. 모두 도적들이었으며 빼앗는 자들이었으며 결국 타자를 멸망시키는 자들이었다. 제국의 발생은 남의 나라를 도적질 하는 것으로 시작되며 제국의 부는 남의 나라를 약탈함으로 시작되고 자국의 백성들을 착취함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결국 제국의 확장은 남의 나라를 멸망시킴으로 이루어진다. 그 모든 법의 근간들도 모두 이를 위한 것이다. 도양의 성현의 가르침으로 알고 있는 유교는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세뇌하여 왕에게 스스로 충성하여 착취당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으며 고대사와 역사를 재편하여 속이면서까지 사람들을 왕에게 충성하게 했다. 군사부일체라는 복종을 통해 결국 모든 권위는 왕에게 귀결되도록 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그리고 제자는 스승에게 복종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스승들은 왕에게 복종한다. 모두 상명하복 하는 질서가 성립된다. 왕은 아버지를 죽이고 형제를 죽이며 자기 왕권에 도전하는 모든 자들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신하는 스스로 결정하여 아무도 죽일 수 없다. 정적이라도 죽이려면 힘겹다. 그리고 권력의 하위 체계로 내려가면 갈수록 법이 허용하는 범위는 너무도 작다. 노비의 주인은 노비를 죽일 수 있지만 노비는 자신의 아내를 겁탈하는 주인에게 손도 댈 수 없다. 또한 자신을 괴롭히는 다른 노비도 마음대로 죽일 수 없다. 신분체계에서 가장 힘이 약한 자는 아무 권리도 없고 오직 영원한 착취만이 그의 몫이다. 그리고 권력의 상층부로 가면 갈수록 모든 권리가 보장되는 심지어 인간의 권위를 넘어선 집단 살상도 유교의 이름하에 자행할 수 있다. 이것이 동양 최고의 도덕률을 지니고 있다는 유교의 숨겨진 민낯이다.

다른 모든 정치체제와 그에 닿아있는 종교의 체계들도 동일하다. 그 안에 있는 모든 법들도 동일하다. 모두 적자생존의 법이요, 그 법의 핵심은 착취와 도적질과 억압과 폭력이다. 세상의 법이 강제하는 폭력의 힘이 없다면 그 누구도 법에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세상에서 강장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청사진도 인간의 악한 죄성 앞에서는 그 힘을 잃고 만다. 그 어떤 유토피아도 인간의 본성이 변화되기 전에는 실제로 구현할 수 없는 책 속의 허구일 뿐이다.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원했던 칼 맠스의 모든 구상도 실패했다. 인간의 죄성을 인함이다. 공동생산과 공동분배, 공평과 정의를 외쳤지만 그런 나라를 만들었을 때 그 실상은 비참했다.

북한이 굶어 죽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북한의 농업기술원 학자의 분석을 들었을 때 누가 황당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북한은 인구대비 남한에 비해  농지의 면적이 두 배에 가깝다. 그리고 기후도 남한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북한보다 더 추운 만주는 중국 제일의 곡창지대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쌀은 만주에서도 북부에 속한 흑룡강 일대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북한의 작물들과 그 씨앗도 남한의 것과 비교분석하였을 때 떨어지지 않는다. 북한에서는 오랫동안 식량문제로 골모리를 앓았기 때문에 그 연구가 상당히 진전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황당한 곳에 있었다. 똑같은 종자로 똑같은 땅에서 농사를 짓는데 연구원들이 농사짓는 곳에서는 100개의 결실이 난다면 공동동장에서는  15개의 결실밖에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스로 굶어 죽을 위기에 쳐했지만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대충 농사를 짓는 것이다. 심지어 공동 농장 안에서 연구원이 생산하는 것과 공동생산하는 것을 비교해도 결과는 같았다. 남한에서는 농업기술원에서 100개의 결실이 나면 일반농민에게서는 최소한 80개의 결실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고부가가치 작물이어서 돈이 되는 작물이면 심지어 일반농민이 120개의 생산을 한 기록들도 있다. 결국 북한이 굶는 결정적인 이유는 스스로 자신의 것이 아니라 생각하여 농사를 등한시한데 있다. 이것이 인간의 악함이다. 인간의 악함은 체제나 그 어떤 종교나 사상으로도 치료할 수 없다.

그런데 나의 나라에 들어오려면 그 악함이 치료되어야 한다. 시내산에서 우리가 우리의 백성들에게 전한 법은 그 악함이 치료되어야 지킬 수 있는 법들이었다. 우리를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을 실천하는 법이었다. 스스로 자기 기업을 공평하게 분배받아 그것을 대대손손 지킬 수 있게 하였고 그것을 개인의 실수로 잃어버려도 70년의 희년이 되면 아무 대가 없이 다시 찾을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가난과 슬픔은 십일조라는 제도를 통해 구제하도록 했다. 그리고 개인 간에도 형제를 도울 때는 이자도 없어야 하며 또한 70년이 돌아오면 빌려 주었던 모든 부채도 감하여 주도록 했다. 이건 사랑으로만 된 공동체였다. 우리(하나님)와 이웃을 사랑함이 법의 모든 것이었다. 심지어 남의 아내나, 여종이나, 남종을 탐해서도 안되며 남의 재산이나 남의 것을 함부로 탐해서도 안되며 남의 것을 지켜주고 서로 사랑하여 보살펴야 한다. 이것이 구약의 모든 율법의 핵심이다.

그런데 너희가 받아들인 십계명과 율법은 오직 의무와 짐일 뿐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너희 욕심과 교만으로 인해 그 법들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도적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가 너희에게는 크나큰 짐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간음자요, 도적이요, 거짓말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의 본성을 속일 수 없다. 역사상 가장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조차 율법의 기준에 들지 못하고 나의 나라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세상에 갔을 때 마 5장에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을 통해 그들에 대해 그 정체를 정의했는데 그들은 모든 율법을 형태적으로 지켰음에도 독사의 새끼들이요, 마귀의 새끼들이었다. 그들은 결코 우리(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의 새로운 십계명으로 시작하는 심령의 변화로만 지켜질 수 있는 법에 대해 설명했다.

01.3.2.3.8.10.2.3.1.1. 새 계명: 산상수훈


Matthew 5:3-12 바른


1. "영에 가난한 자들은 복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우리)을 바람으로 그는 영(우리)에 가난한 자다. 그러니 그는 복이 있다. 하늘나라(우리의 통치)를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적으로 하늘의 통치를 받게 된다.

2. 슬퍼하는 자들은 복되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은 자신이 육신과 세상과 사탄에 속하여 우리(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함으로 애통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우리를 건져내랴'라고 한 사도바울의 탄식과 애통이 있다.
그는 애통함으로 복이 있다. 그는 하늘나라에 속하여 현재적으로 우리의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온유한 자들은 복되다.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에 항복하고 하늘의 통치만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복되다. 그들은 하늘나라(가나안)를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되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뜻이 이루어짐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되다. 그들은 나의 뜻이 이루어져 원수 사탄이 심판을 받고 세상은 멸하여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며 그 영원한 천국에서 나의 사랑과 기쁨만이 오직 나의 뜻만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금생에서와 내생에서 모두 나의 뜻이 법이 되는 가나안(하늘나라)에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나의 뜻만 이루어진다. 그들은 나의 의(나의 뜻이 이루어짐)로 만족하며 배부를 것이다.

5. 긍휼히 여기는 자들은 복되다.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자신을 긍휼히 여겨 이집트(세상과 사탄과 육신)에 종 된 자신을 구원하였음을 감사한다. 그러므로 같은 처지에 있는 자들을 긍휼히 여긴다. 그러므로 이런 긍휼을 아는 자들은 이미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다.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긍휼히 여긴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지 않는 자는 긍휼을 받은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미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을 받은 자요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는 자다.

6.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복되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함으로 세상과 사탄과 육신의 더러움을 그 마음에서 버린 자들은 복되다. 그들은 세상의 신들을 멸하는 나를 보았다(열 가지 재앙) 그들은 세상의 신을 버렸으며, 광야에서 옛 자아 자기 육체를 버린 자들이다. 그렇게 그들은 광야에서 죽고 거듭났다. 그들은 자기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음이 청결함으로 복되다.  그들은 나의 통치(하늘나라, 가나안)에 들어와 내게 복종함으로 나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7.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되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을 입고 은혜를 경험한 자들은 다른 이도 사랑하고 그들에게도 은혜를 베푼다. 그들은 특히 다른 이들과 나를 화목케 한다. 그들은 다른 이들도 자신들과 같이 내게 와 사랑과 은혜를 경험토록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복되다. 왜냐하면 나의 형상을 가지고 나의 뜻을 이루는 나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은 복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나의 뜻을 이루려면 항상 세상이 박해를 한다. 그러나 나의 뜻인 모든 인류가 구원받으며 나의 뜻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하여 박해받는 자들은 복되다. 그들은 나의 뜻을 따름으로 나의 통치(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9. 나 때문에 사람들이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거짓으로 너희를 대항하여 온갖 악담을 할 때에 너희는 복되니,


너희가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거짓으로 모함하고 악담을 할 때는 너희는 복되니, 


10.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있던 선지자들을 이와 같이 박해했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이제 이집트(세상나라)를 떠나 하늘나라(가나안)에 있을 것이고 그곳에서 너희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있던 선지자들을 이와 같이 박해했었다.

팔복은 사실 8 개가 아니다. 내가 준 것은 10 개의 '복되다'인데 인간들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팔복이라 했다. 그 전체 길이와 마지막 두절의 반복 대칭적 히브리적 수사법에 의한 '복되다'의 두문장에서의 한 복되다의 중첩등을 현대의 너희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육신으로 갔을 당시의 히브리어를 구사하는 백성들은 그것이 8개가 아니라 10개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팔복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마치 신약의 교회에 초청받은 새나라, 즉 하늘나라의 백성들에게 주는 십계명과 같다. 구약의 계명은 행위 위주였다면 신약의 계명은 마음의 중심을 요구한다. 구약에서는 성령이 함께 하여 거듭나게 하는 역사가 위주가 아니었다. 구약의 백성들은 율법의 행위적 요구를 따랐다. 그러나 신약의 백성은 행위가 아닌 그것보다 더 지키기 어려운 마음으로 지켜야 하는 법을 요구받았다. 그것은 신약에는 성령이 함께 하여 그 본성을 바꾸어 새 심령이 되게 하는 역사가 모든 신자에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구약의 모든 것은 내가 세상에 가서 이루는 구원인 신약의 구원을 그리는 율법적 그림자였다.

구약과 신약은 모두 나라에 관한 것이다. 하늘나라의 도래와 그 하늘나라에 투항하는 자들과 하늘나라를 대적하는 자들에 관한 심판을 그렸다. 내가 마태복음에 기록된 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하며 팔복과 구약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새 마음의 계명을 선포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나는 그 모든 곳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마음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늘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하늘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  나는 팔복을 말하면서도 그리고 팔복이 포함된 산상수훈을 말하면서도 모두 나의 나라 하늘나라에 투항하려면 어떤 기준으로 항복하고 나와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결코 인간이 들어올 수 없는 문을, 좁은 길을 말했다. 그러나 인간은 불가능하지만 성령은 가능하며 나를 통해 자신의 육체가 죽고 새사람이 된 자들은 가능하다. 성령은 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사람의 심령 속에 적용하여 강력한 불꽃으로 타오르며 거룩한 생수가 되어 인간의 죄를 씻긴다. 인간의 속에 타오르는 나의 열정과 나의 속성이 그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그래서 인간이 심령으로 거듭나 나에게 복종하게 한다. 그러므로 구약적 율법으로는 이룰 수 없는 신약의 마음의 법이 인간에게 요구될 수 있고 그 마음의 법이 인간에 의해 준수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복음은 단순히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이동하는 종교적 차원의 것이 아니다. 우주적 차원의 나라를 옮기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던 세상을 버리는 것이고 그 세상에서 사랑하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 세상의 모든 가치를 버리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던 모든 것과 결별하는 것이다. 자신이 즐기던 모든 것과 결별하는 것이다. 이제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나라의 왕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자신의 모든 의지를 쳐서 복종해야 한다. 그래야 원래 자신이 있던 나라가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심판을 당할 때 자신은 그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새나라가 와서 옛 나라를 심판하여 불 지르고 그 모든 것을 없앨 것이다. 그러므로 살려면 항복하고 새나라의 법에 마음의 동기로부터 복종해야 한다. 항복하고 다른 나라에 들어오려면 그 다른 나라의 법을 준수해야 한다. 그것도 행동만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숙한 곳에서의 동기부터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이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새나라에 맞는 새인간이 되어야 한다. 과거에 살던 나라의 사람은 완전히 죽고 새나라에 맞는 인간으로 새로 태어나야 가능하다. 인간의 본성은 이런 방법 외에는 변화될 방법이 없다. 과거에 살던 나라의 본성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새나라 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선택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진정 지금 자신이 사는 옛 나라에서 절대절망에 이르지 않는다면 새나라로의 전향을 꿈꾸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옛 나라는 반드시 필멸하며 영원한 불못만이 지옥만이 기다리는 예비지옥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결코 인간은 전향하지 않는다. 그래서 구원을 위해서는 인간은 인생의 여정에서 고난과 고통 때로는 자신의 실수로 인해 실패를 경험해야 한다. 사실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이끌지 않아도 타락한 세상과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비극을 만들어내어 인간이 결국 경험하게 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살 소망을 잃어 자살을 시도하려는 자들아 그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이 너에게 오고 다른 세상이 너의 세상에 침투하였다. 이미 그 나라가 너희 곁에 있다. 그러니 그 슬픔과 절망과 두려움과 죽음과 심판의 세상을 버리고 새나라, 하늘나라에 투항하라. 그러면 팔복의 복이 너에게 임할 것이다. 그곳에는 더 이상 눈물도 병듦도 아픔도 실패와 좌절도 없다. 오직 내 안에서 평안과 안식과 사랑이 가득하다. 이 옛 세상에 네가 사는 동안에 육신이 거하는 동안 옛 세상이 침범하여 너에게 고통을 주려하지만 진정 네가 나의 나라에 속했다면 너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승리한다. 그리고 네가 육신을 벗는 날은 완전한 자유를 얻어 이제 옛 세상의 침범 따위는 걱정할 필요도 없는 완전한 나의 나라에 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원수인 육신을 심판하고 우리(하나님)의 통치에 들어오는 것이다. 십계명과 율법 앞에서 육신은 심판을 받고 그 앞에서 죽는다. 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그곳에서 자신의 죄의 육신의 삼판을 맞고 그 육신은 죽는다. 그리고 나의 부활과 연합하여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난다. 그렇게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법에 복종하는 새로운 질서의 나라의 통치가 임하는 것이다. 그곳이 천국 즉 하늘나라며 그곳에는 우리의 온전한 통치가 있으므로 완전한 보호가 있고 그래서 완전한 쉼(안식)이 있다.

이것이 십계명과 율법이 내 백성에게 주어진 이유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다. 구약에서나 신약 모두에서 죄된 인간은 우리의 법을 따를 힘이 없다. 오직 우리(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자들만이 그 본성적 사랑과 공의를 따라 우리의 뜻 즉 우리의 법을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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