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
침노와 안식이 너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 )
현재의 너희에게 임하는 안식은 어떻게 임하는가?
( )
침노로 임하는가?
( )
그렇다면 너희는 여호수아 세대에 의해 침노당하는가?
( )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다면 앞의 글들을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답을 모르거나 오답을 적는다면 앞의 글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대부분은 위에 답을 적을 수 없다. 심지어 목사와 신학자들도 이에 대한 답을 적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하나다. 저들이 지적으로 부족해서가 아니다. 단지 저들은 성경을 통해 다른 것을 알고 싶어 한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사사기의 백성들과 같이 자기 길을 간다. 성경을 통해 우리가 말하려는 의도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기 관심사를 위해 성경을 이용하고 우리를 이용하려 할 뿐이다. 마치 부처에게 비는 자들이 자기 욕망을 위한 기원을 하는 것과 같다. 부처에게 비는 자들이 불가의 도를 깨닫고자 하는 목적도 스스로 해탈하여 신이 되는 것에 있다. 더 큰 깨달음을 얻어 더 높은 교만을 획득하기 원한다. 성경과 그 성경을 기록한 우리를 이용하기 원하는 자들은 부처를 이용하려는 자들과 같은 자들이다. 저들은 우상숭배자들이다. 광야에서 완전히 자기 악이 죽지 않은 자는 가나안을 정복하기에 합당하지 않다. 그러한 자들이 성경을 읽으면 항상 자기 악에서 비롯되는 악한 욕망을 위해 성경을 이용한다. 그러니 그러한 자들에게 성령을 통해 해석되는 진리가 보일 수 있겠는가? 저들은 강 건너 편의 신들을 섬기는 자들이다. 저들은 가나안을 정복하여 하늘이 땅에 임하도록 할 자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하늘의 일을 알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현대의 언어로 저들에게 지금 내가 말하고 있다 하여 알아들을 수 있을까? 과연 성경의 언어와 설명이 어려워 저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다. 저들이 시장에서 노는 아이들의 놀이와 같이 울 때 함께 울고 웃을 때 함께 웃을 수 없는 이유는 저들이 들을 귀가 없고 볼 눈이 없기 때문이다. 저들은 그 관심이 다른 곳에 있다. 저들의 배는 욕심이요, 악을 잉태하는 거울이다. 악을 원하는 자는 악을 비추어 악을 잉태한다. 결국 악을 낳아 그 악이 장성하도록 한다. 저들의 신은 자기 배다.
위의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 속에 사용된 안식이라는 단어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하나님)가 6일 동안 창조한 후 제7 일에 쉬었다. 이때 쉬었다는 말을 '안식하다'라고 한다. 여기서 '안식하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샤바ᅊᅳ(שׁבת [[H7673]][^1])'로 일을 끝내고 쉬다라는 의미다. 이 단어의 강조형이 '안식일(샵바ᅊᅳ, [[H7676]])'이라는 단어이다. 안식일이나 안식하다라는 말이 사용된 창세기 이외의 글에서도 이 단어들은 끊임없이 사용된다. 안식일은 사실 태초의 제 칠일의 안식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날이다. 6일 동안 일을 하고 제 칠일 안식일에는 쉬는 것이다. 이를 통해 매주마다 안식이 무엇인지를 각인하는 것이다.
태초의 세상에 대해 앞에 언급한 부분들이 있어 그곳에서 안식에 관해 잠시 언급을 했었다. 태초의 세상이 낙원인 이유는 그곳에 안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초의 세상은 일해야 하는 세상이 아니었다. 일이라는 것은 스스로 수고하고 땀을 흘려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행위다. 그런데 태초의 세상은 그런 일이 없었다. 태초에는 모든 것이 창조의 원형인 질서 안에서 자연스럽게 제공되는 곳이었다. 예를 들어 과일은 농부가 수고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과일은 천연의 환경에서 수도 없이 많이 자라는 것으로 지상에 넘쳐났다. 그것을 그냥 인간은 따서 먹으면 되었다. 에덴의 모든 나무의 열매가 아담의 것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가? 그중 생명나무의 열매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인간의 것이었다. 태초에는 병충해도 자연재해도 일기의 불안정도 없었다. 완벽한 조건에서 모든 생태계가 운행하였기에 과일은 인간의 노동력이 없이도 잘 자랐다. 그것을 인간이 누리는 것이다.
태초의 모든 환경과 질서는 사랑이었다. 우리의 완전한 사랑이 인간을 통해 지상에 그대로 구현되었다. 과일나무가 잘 자라는 것은 과일나무가 옆에 자라는 식물들과 사랑하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작은 풀들 즉 지금 사람들이 잡초라고 부르는 것들은 자신의 힘을 다해 광합성을 한다. 광합성을 하여 열매를 맺고 그 열매는 땅에 떨어진다. 그 열매에서 씨앗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동물들의 먹이가 되기도 하고 땅에 떨어져 거름이 되기도 한다. 잎도 자라서 위에 있는 잎들이 풍성하여 지면 아래의 잎들은 햇빛이 차단되어 말라 떨어져 또 거름이 된다. 땅에 떨어진 열매 속의 씨앗은 다시 자라 이와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이렇게 하여 다양한 키와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건강하고 비옥한 유효토심을 만들어낸다. 서로 뿌리가 만나고 서로 엉키어 부드러우며 푹신하기도 하며 그러면서도 질기고 수분과 양분을 잘 통과시키며 자체적으로 작은 동물과 미생물들의 발효와 소화의 과정을 거치며 깊은 유효토심을 만들어 결코 마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물이 넘쳐 식물이나 동물의 숨을 막지 않는다. 또한 땅의 결속력과 흡수력으로 인해 산사태가 일어나는 일도 없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땅과 그곳에 사는 모든 구성원들이 자연적으로 양분과 약성을 만들어내어 스스로 건강하게 치료하며 스스로 왕성하게 자라게 한다. 인간이나 동물들은 자연이 이렇게 사랑하는 공생의 관계에서 생산한 약성과 양분을 먹고 또한 건강하고 거대한 모습으로 자란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여 함께 함으로 서로를 살리고 보살피는 관계가 모든 지구에 퍼져 있고 모든 우주에 퍼져 있다. 이렇게 태초의 질서는 서로 사랑함으로 서로 돌보는 관계 안에서 모두 쉼을 얻는다. 누군가 공격하여 자신을 위해할 것을 걱정할 필요 없이 대문을 열고 잠에 든다. 누군가 수군거리며 자식을 욕할 것을 걱정할 필요 없이 자신을 가리지 않고 나타낸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모든 것을 보여도 스스로도 죄가 없고 또 그 누구도 죄를 찾지 않기에 누구나 마음에 쉼이 있다. 병도 없으며 슬픔도 없으며 죽음도 없다. 완전한 보살핌과 완전한 복지가 있다. 또한 그 가운데서도 마음은 언제나 환희에 차있다. 우리(하나님)의 존재를 만난 모든 자들은 알 것이다. 우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거룩에 압도되고 또한 신비와 기쁨에 싸여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알 수 없다. 일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일 년 같으며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영생을 누리며 우리와 같은 시간의 개념을 갖게 된다. 또한 우리가 창조한 피조물들을 보면 그 속의 모든 신성의 창조의 신비를 맛봄으로 그것 또한 황망한 기쁨을 선사한다. 지금 너희는 너희 영에 성령이 충만하게 거하지 않음으로 이 모든 능력들을 잃어버려 그것을 느낄 수 없으나 성령에 충만하여 이러한 것을 경험한 자들은 태초의 그 기능 중 일부를 일시적을 사용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삶을 사는 인간은 영원을 살아도 권태로움이나 지겨움을 경험할 수 없다. 언제나 권능과 신비의 영역에 속한 놀라움에 접하여 경이 속에 살아간다. 마치 계시록에 나오는 24 장로와 하늘의 그룹들과 천사들이 24시간 365일을 경이 속에서 그 감탄으로 찬양을 영원히 이어갈 수밖에 없는 상태와 같다.
6일의 창조 이후 우리(하나님)는 안식했다. 그 안식은 창조의 행위를 쉬는 안식이었지만 결코 모든 작동을 중단하는 쉼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사랑이 풍성한 생명이 가득했다. 파괴되지 않은 태초의 질서는 모든 자연을 안식하게 했다. 모든 것이 사랑으로 행복을 누리며 자신의 낙원을 살아가는데 또 그것이 새로운 생산과 탄생을 이끌어내어 영원히 끝도 없이 번영하여 이어진다. 이것이 태초의 안식이다.
창조를 쉬고 안식한다는 것은 일을 끝내고 쉼을 의미하며 이는 스스로 창조하고 스스로 일하는 행위가 끝남을 뜻한다. 그 창조의 결과물을 누리는 피조물들은 스스로 창조한 행위도 없고 스스로 노력한 일도 없다. 그러나 모두 피조된 낙원의 세상을 누리며 행복을 누린다. 그러므로 현재와 같이 일하지 않으면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더위와 목마름에 죽는 세상과 비교하여 어떤 차이를 가지는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태초의 쉼이다. 일은 우리(하나님)가 하고 모든 피조물과 인간은 영원한 낙원의 쉼과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여기서의 안식의 개념은 일을 마쳐 완성하여 쉬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일과 완성은 우리(하나님)가 하였고 인간과 피조물은 우리가 쉼으로 자신들도 쉼에 참예하게 되었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는 안식이 없었다. 인간의 죄악으로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죄악의 본성은 미움이다. 거룩의 본성인 사랑과 정 반대되는 것으로 죄악은 타자를 미워함에서 출발한다. 미움은 타자보다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미움의 감정은 이해하고 용납하며 자신을 내어주는 것을 싫어함에서 시작된다. 사랑하는 자가 잘되면 기쁘다. 그런데 자신만 사랑하고 타자를 미워하는 자는 타자가 잘되면 질투가 나고 배가 아프다. 자기 자식이 잘되면 기쁘다. 이는 보통의 인간의 본성은 자신보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움의 근원은 자기만 사랑함이다. 나보다 타자가 더 똑똑하고 뛰어나면 견딜 수가 없다. 자기만 사랑하는데 자신이 타자보다 못하면 견딜 수가 없다. 자기만 사랑하기 때문에 타인이 손해를 입더라도 자신만 잘되면 된다. 그래서 폭력을 휘두르고 사기를 치고 억압을 하고 착취를 한다. 타인은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하더라도 자신만 잘 되면 된다. 왜냐하면 죄악의 사람은 자신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으므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자기만을 사랑하는 미움이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세상은 마귀의 미움이 가득 차 있다. 그 세상이 바로 지옥도다. 우리가 세상을 태초의 세상으로 돌리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움의 세상에는 돌보는 사랑이 아니라 억압과 착취가 가득하다. 더 강한 자가 약한 자들 약탈한다. 더 똑똑한 자가 더 무지한 자를 억압한다. 심지어 교묘하게 사회의 시스템과 법으로 속여 약자들의 몸과 정신을 노예로 삼는다. 이러한 일에 차질이 생기면 타자를 죽이고 타자의 나라나 지역 전체를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 대량학살을 벌이고도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축제를 벌이는 것이 인간이다. 그것을 역사라고 기록하여 자랑하며 떠들어대는 저들은 진정 악마들이다. 저들은 더 이상 우리(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우리의 아이들이 아니다. 저들은 옛뱀의 미움을 가진 독사의 새끼들이다. 독사의 독인 마약에 취해 자신만을 사랑함으로 세상을 지옥도로 만든 우리의 아이들을 보니 우리는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그들을 위해 우리(하나님) 중 내(예수님)가 죽더라도 그들을 살리기 원했다. 지옥의 새끼라도 독사의 새끼라도 원래는 우리(하나님)의 아이들이니 원래는 나(예수님)의 새끼들이니 살려야 한다. 지옥에서 변태적 자기 사랑의 마약에 취해 서로를 죽이며 쾌락을 얻는 것을 어찌 그냥 두고 보겠는가? 타인을 억압하고 죄악을 저지르고도 마약에 취해 부끄러움도 모르는 상태에 빠진 저들을 어찌 죄인이라 하여 그냥 쓸어버리겠는가?
너희는 나의 아이다. 너희는 나의 새끼다. 그러니 내가 너희가 무엇이 되었든 어디에 있든 너희를 버릴 수 있겠는가? 나는 풍랑이 이는 바다에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어미의 타들어 가는 마음으로 세상의 바다에 있는 너희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큰 풍랑으로 네가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죽임을 당하기 전에 너를 구원할 길을 내기를 원한다.
다시 태초의 사랑의 곳으로 다시 에덴의 보호 속으로 너희가 돌아와 완전한 안식을 누리기 원한다.
원수에게 잡혀있는 아이를 그들에게서 구해내는 것이 구원이다. 그리고 그 아이를 데려와 부모의 보호 안에서 보살펴 마음과 몸의 안정과 쉼을 주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너희에게 구원의 길을 열었다. 또한 그 길을 통해 보인 구원을 성경에 기록하였다. 그 역사의 기록에 있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부른 것을 너희는 기억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나는 믿음의 민족을 길러냈다. 그 민족은 이집트에서 요셉을 통해 대가족인 70인에서 수백만의 민족으로 발전했다. 단지 400여 년 만에 그렇게 한 가족이 나라와 민족의 규모로 발전한 것은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 모든 것이 요셉을 통한 안배로 가능했던 것이다. 요셉을 통해 민족으로 거대해진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보낸 세월 동안 우리를 잊었다. 그들은 우리를 잊고 결국 이집트의 노예로 전락하여 고통 중에서 자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신을 기억하고 울부짖었다. 그들의 고통하는 신음소리를 듣고 우리는 그들에게 모세를 보냈다. 아브라함에게 보인 구원과 이삭과 야곱에게 보인 구원이 있다. 그리고 요셉과 모세를 통해 보인 구원도 있다. 나는 언제나 나의 백성을 세상에서 구원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구원해 가나안을 약속했다. 그리고 약속한 땅을 그의 후손들에게 줄 것을 약속했다. 그의 후손은 바다의 모래와 같이 밤하늘의 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 약속했다. 그런데 450년 만에 그 약속이 이루어지고 그 약속된 시간에 나는 구원을 이루었다. 야곱은 그의 삼촌 라반의 땅인 밧단 아람에서 구원했다. 그리고 그 인생의 모든 역경에서 내가 그를 구원하였다. 이삭은 역경이 없었던 것 같지만 나는 그를 모리아 산에서 구원했다. 그의 죽음의 순간에 나는 천사를 보냈고 수풀에 걸린 어린양을 보여 나 예수가 그를 위해 죽임 당함을 보였다. 그 약속의 산 여호와 이레가 예루살렘이 되고 그 예루살렘 성전산에 나는 피흘림의 언약을 세웠다. 아브라함과의 약속대로 셀 수도 없이 많아진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우리(하나님)와 겨루어 이긴 자인 야곱과의 약속대로 우리의 기준에 의한 심판이 아닌 구원을 베풀었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바로 우리(하나님)와 싸워이긴 자다. 만약 우리의 심판의 법대로면 그들도 죄인이라 심판을 당해야 했다. 그들도 불신앙으로 원망했으며 그들도 이집트의 세상 백성과 같이 탐욕과 죄악으로 물든 자들이었다. 오직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자신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야 하는 노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편에 서 있던 모세의 말을 듣고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양의 살을 먹음으로 살았다. 그것은 오직 은혜였다. 그들이 이집트 백성에 비해 더 거룩하고 경건했기에 구원한 것이 아니다. 만일 그들이 그러했다면 그들 모두는 광야의 40년에 죽어 넘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불순종으로 광야에서 모두 죽었다. 그들의 어떠한 것도 우리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모든 기준을 이기고 승리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야곱을 에서보다 사랑한 것처럼 그들을 사랑했다. 그들이 태에서 나기도 전에 이미 그들을 야곱과 같이 선택하여 사랑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모든 기준의 심판을 이긴 자 야곱의 새 이름 이스라엘이라 칭해진다. 그래서 천국에 이른 모든 자의 이마에는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그들의 새 이름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심판을 이긴 자, 야곱의 새 이름을 가진 자들, 이스라엘에게 우리의 구원을 베풀었다. 그들을 구원하였을 때에 우리는 가장 먼저 유월절을 행했다. 세상은 통과할 수 없는 심판의 죽음을 그들이 이기게 하였다. 그들은 심판을 이겨 승리할 자, 그 심판의 주인 우리(하나님)를 이긴 자 이스라엘이었다. 그들이 심판을 이기지 못하자 우리는 나 예수를 죽여 그들이 우리의 기준을 이겨 심판에서 승리하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이긴 자다. 사랑하는 자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없다. 우리는 그들 이스라엘을 사랑하였기에 그들을 이길 수 없는 자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과의 씨름에서 그들에게 시작 전부터 이미 졌다. 사랑하는 자를 이길 법이 어디에 있으며 사랑하는 자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어떤 가치도 없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도 사랑하는 자를 이길 수 없다. 그래서 나 예수는 나의 목숨을 내버렸다. 왜냐하면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며 모든 허물을 덮는다. 이것이 유월절이며 내가 사랑하는 이스라엘이 살 수 있었던 유일한 기반이었다. 유월절(逾越節, passover)은 그래서 피와 죽음과 죽음이 넘어가는 유월이 가득했다. 그래서 유월(pass over, 逾越)이다. 죽음이 내 백성을 넘어간 그래서 내 백성이 죽음의 심판을 이기게 한 유월이 가득했다. 내 백성의 가정의 수만큼 그 유월이 있었다. 유월은 어린양인 나 예수의 피가 죽음의 심판을 이긴 승리의 날이다. 그러나 그 피를 믿지 않고 양의 살을 먹지 않은 자들은 모두 죽는 심판이다. 그래서 유월을 어기는 자는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이를 구약에 절기로 지키고 구원의 수단으로 이집트에서 행한 것은 이스라엘의 뼈와 살에 유월의 구원을 새기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오직 나를 믿는 자만이 살 수 있다는 진리를 각인시켜 살리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이제 세상에 나의 피로 구원받음을 모르는 자들이 없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있던 모든 시대에는 어린양의 피가 그들의 속죄의 수단이었으며 그 구약이 내가 신약에 와서 죽었을 때 나(예수님)를 그 예언된 완전한 피를 흘리는 어린양임을 확증해 주었다. 그래서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모든 장자들은 죽임을 당했다. 그와 같이 엄중한 수단으로 나는 나의 구원을 나타내었다.
Exodus 12:1-14 개정
1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3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양을 취하되
4그 어린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고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양을 계산할 것이며
5너희 어린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이달 열 나흘 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 중이 그 양을 잡고
7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날 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 사르라
11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 이니라
12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13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유월절의 저녁과 그로부터 시작되는 무교절에는 빵에서 누룩(이스트)을 제하였다. 그런데 빵에서 누룩을 제하지 않는 자들은 죽임을 당하리라 했다. 겨우 빵에 누룩을 넣지 않는 것을 지키지 않았다 하여 어찌 사람을 죽인다는 말인가? 그 이유가 있다. 이제 설명을 천천히 들어보자.
Exodus 12:15 개정
너희는 이레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그런데 누룩을 제한다 하였을 때에 제한다는 단어가 바로 안식하다와 동일한 단어다. 바로 샤바ᅊᅳ다. 창 2:2, 3절에서 사용한 바로 그 단어 '안식하다'다. 샤바ᅊᅳ는 안식하다, 쉬다라는 의미다. 누룩이 일하는 것을 쉬게 하는 것이다. 누룩을 제하다라는 말을 원어적 의미 그대로 번역하면 '누룩을 쉬게 하라'다. 구원에는 인간의 일이 없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앞에서 구원이 인간의 노력으로 불가능함을 설명했다. 인간은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오직 항복하고 십자가의 공로인 유월절만을 의지하고 우리에게 나와야 한다. 그래서 누룩이 일하는 것조차 쉬게 해야 한다. 인간의 일을 쉬게 해야 한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다.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받으려는 자는 아직도 구원받을 자격의 시초조차 얻지를 못했다. 구원받을 수 있는 기반은 오직 나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없다.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 구원을 수단이 없다. 이를 가리거나 이를 왜곡하는 모든 것은 전 인류를 자신의 죄에서 죽게 만드는 죄악이다. 유일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을 가려서 막는 자가 있다면 그를 어찌하여야 하겠는가? 그의 받을 심판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죽음이다. 그래서 구원의 날인 유월절과 유월절부터 시작되는 7일의 인간이 하는 모든 자신의 노력을 포기하는 7일의 무교절에는 누룩이라도 그 일을 쉬어야 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우리가 이끄는 대로 세상에서 나와 그 세상과 함께 심판을 당하지 않도록 도망하는 것뿐이다.
우리가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자들과 무교절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이와 같은 엄중한 이유가 있다.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태초의 칠일의 안식을 절기로 정했다. 일 주마다 있는 안식일이다. 6 일의 창조와 7 일의 안식을 모형으로 하여 만들어진 이스라엘의 영구한 날의 체계를 형성했다. 그 이유는 태초의 창조도 구원도 그리고 구원받은 이후의 새 하늘 새 땅에서도 인류가 할 일은 없다는 것이다. 오직 인간이 할 것은 자신의 공로가 아닌 완전한 십자가의 피를 의지하여 항복하고 자신의 죄악의 일을 쉬고 고통스러운 자기 공로와 자랑의 헛됨을 쉬고 오직 우리를 의지하는 것이다. 그를 상징하는 것이 안식일이다. 안식은 구원의 기반이다.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헛된 시도를 하는 한 인간은 구원의 단초조차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절대절망에 이르러야 한다. 그 절대절망이 바로 구원의 단초다. 자신의 헛된 시도를 쉬는 안식이 바로 구원의 기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헛된 노력을 쉬지 않음으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없고 그곳에서 죽음의 심판을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 율법에서는 안식일을 어기는 자는 죽이라 했다.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 밝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Exodus 31:13-17
13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14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라 그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찌며 그날에 일 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15엿 새 동안은 일 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 일에 일 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16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17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 새 동안에 천 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
[^1]: 이러한 형태를 한 H*** 형식의 코드는 스트롱코드라는 것이다. H는 히브리어임을 표기하는 것이다. 성서에 사용된 헬라어는 Greek의 약자인 G로 나타낸다. 성서를 연구하던 학자인 스트롱은 성경의 각 단어들을 연구자들이 쉽게 알아보도록 그 변형과는 상관없이 같은 단어에는 한 코드를 붙여 표시하였다. 이를 스트롱코드라 부른다. 위에 쓰여진 H*** 의 조합을 보면 이를 떠올리면 된다. 그러므로 그 번역본이나 형태의 변화가 있더라도 과거현재, 미래, 심지어 분사나 부정사라도 한 코드 H7673이면 모두 한 단어 H7673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