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3.2.3.10.9.6.12.3. 성경 속 안식과 관련한 단어들
##### 01.3.2.3.10.9.6.12.3.1. 안식하다(샤바ᅊᅳ)
###### 01.3.2.3.10.9.6.12.3.1.1. 창 2:2~3절의 안식
###### 01.3.2.3.10.9.6.12.3.1.2.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안식
###### 01.3.2.3.10.9.6.12.3.1.3. 여호수아서 이후의 안식(샤바ᅊᅳ)
히브리어 샤바ᅊᅳ(שׁבת, [[H7673]])는 안식하다, 쉬다라는 뜻 외에 다른 뜻으로도 사용된다. 앞에서 일부 언급되었는데(Exodus 12:15) '누룩을 제하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물론 이는 '누룩을 쉬게 하라'라고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샤바ᅊᅳ(שׁבת, [[H7673]])는 제거하다 또는 끊어지다라는 단어의 뜻도 가졌다.
다음 한글 성경에서 이러한 뜻으로 사용된 단어를 찾아보라.
Joshua 5:12 바른
12그들이 그 땅의 산물을 먹은 다음날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더 이상 만나가 없었고, 그 해 가나안 땅에서 난 열매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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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성경에서 샤바ᅊᅳ(שׁבת, [[H7673]])에 해당하는 단어는 '만나가 그쳤으니'에서 '그쳤으니'라는 단어다. 만나는 광야 40년 동안 계속해서 내렸다. 그런데 그 만나가 더 이상 내리지 않게 되었다. 이를 쉬다라는 표현을 사용해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만나가 (내리기를) 쉬었으니'
이는 의미를 따라 (내리기를)이라는 어구를 추가한 것이다. 원어 그대로 하면 다음과 같다.
'만나가 쉬었으니'
결국 이것의 의미하는 바는 만나가 그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샤바ᅊᅳ(שׁבת, [[H7673]])의 뜻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그중에서 그쳤다. 또는 끝마치다. '중단하다'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일을 끝마치고 쉬다'라는 의미에서 '쉬다'에 강조점이 갈 수도 있고 쉬게 된 원인인 일을 '마치다'에 강조점이 갈 수도 있다. 그래서 동일한 단어임에도 강조점을 달리하여 전혀 다른 의미의 뜻으로 사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원어민들에겐 동일한 단어이나 그 의미상의 강조점이 다른 정도의 차이다. 그러므로 번역에 의해 다른 단어와 같이 취급될 수 있으나 사실은 같은 단어의 의미의 여러 각도의 얼굴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언어의 묘미가 있다.
그런데 '만나가 쉬었다', 또는 '만나가 안식했다', 또는 '만나가 그쳤다'는 이 문장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
광야의 만나가 그 일을 마치고 안식했다는 말을 하는데 이 말에는 이스라엘이 광야의 방황을 마치고 가나안에 안식할 것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Joshua(여호수아서) 5:12절이 위치한 문맥을 알 필요가 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거쳐 결국 요단강 앞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아모리와 바산지역을 점령하고 그 땅에 머물겠다는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의 요구가 있었다. 이 지역의 점령 후 아론이 죽었고 모세는 모압평지에서 마지막 신명기의 긴 설교를 한 후 죽었다. 우리가 모세를 통하여 세운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는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을 따라 홍수가 난 요단을 가르고 상류의 물의 벽이 강을 막아 투명한 댐에 막힌 물이 붇딪히며 요동치는 것을 보며 가나안으로 진입했다. 이를 본 모든 가나안 족속들과 근동의 족속들은 다시 한번 그 이전의 홍해를 갈랐던 무시무시한 이스라엘의 신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이집트를 거의 멸망직전에 이르게 했던 그 기적들을 생각하며 두려움에 뼈가 달그락 거리며 진동했다.
건조한 기후라 요단은 평소에는 좀 큰 개천에 불과 한 곳이었다. 강이라 부르기에도 좀 부끄러워 보였다. 그러나 우기의 비가 갈릴리 호수에 모여 흐르고 거기에 이스라엘 땅 북부 요단 동서의 강들로부터 물들이 한꺼번에 요단강에 모이면 급류가 형성된다. 이는 마치 사막의 와디가 건기에는 마른 계곡이었다가, 비가 오면 급류가 몰려와 계곡의 전체를 물이 채워버리는 것과 같다. 이를 예측하지 못하고 양 떼나 소떼를 몰고 와디에 남아있다가는 급류에 가축과 사람이 모두 휩쓸려 떠내려 가게 된다. 이에 대한 표현이 선물결이다. 바다의 해일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결의 포효는 자주 볼 수 없다. 그런데 사막의 와디에 흐르는 선 물결의 포효는 사막에 가끔 비가 내리면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성경에 선 물결에 대한 표현은 이 와디에서 벌어지는 일을 두고 이스라엘에게 한 것이다. 이스라엘이나 중동 지역의 사람들에게 선 물결을 말하면 와디에 휘몰아치듯 밀려 내려오는 선 물결을 떠올린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선 물결이 투명한 벽을 만나 부딪쳐 하늘로 솟구쳐 튀어 오르고 옆으로 퍼져 터져 나간다. 그런데 거대한 투명벽이 그 모든 것을 막고 버티고 있다. 물결은 투명한 댐에 갇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그 수위를 높여간다. 밀려오는 선 물결의 포효는 전진을 멈추었지만 더 큰 공포를 만들어낸다. 투명한 댐에 막힌 물의 수위가 급격히 높아지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물의 양이 엄청나기에 요단 양옆 경사지의 좁은 곳을 채운 물은 높이 쌓아 올려진다. 이스라엘이 통과하는 시간 동안 채워진 물의 높이는 수십 미터에 이르렀다. 물의 벽 위 강의 양 사면 경사지에는 급격히 차오르는 물로 순식간에 홍수가 났다. 황토색 거대한 홍수로 차오르고 있는 물의 벽은 과거 홍해의 물의 벽만큼이나 큰 공포로 다가왔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입을 염탐하기 위해 왔던 각 족속들의 정탐병들은 그 광경에 압도되어 말을 잃었다. 그 두려움과 경이는 그대로 가나안 족속들에게 전파되었고 고대 근동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를 굉장히 짧고 무미건조게 기록하고 있다. 왜 그렇게 기술했는지 묻는다면 단순하다. 성경의 관심은 홍해나 이집트에서의 기적들을 영상미 있게 스펙터클한 화면에 담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여호수아서나 그 앞에 기록된 모세 오경의 원 독자들은 그런 영상미가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장면들을 직접 본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 사건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놀라운 장면들이 떠오르기에 굳이 현장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필요치 않다. 물론 그 현장을 보지 못한 수천 년 후의 너희에게는 그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는데 성경은 그 시대 그 현장에 있었던 나(예수님)의 백성들을 위해 기록된 것이다. 그것이 일차적이고 그 기록을 통해 후대의 수많은 세대들은 간접적인 도움을 얻는다. 또한 각 세대는 성경의 자세한 묘사보다 더 큰 것을 자신의 세대에 믿음으로 경험한다. 왜냐하면 그 모든 시대에는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에 존재했던 우리(하나님)가 여전히 살아 존재하여 강력한 자로서 기록된 것이 아닌 살아있는 기적을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참으로 우리(하나님)를 믿는 자들은 그러한 기적의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러므로 굳이 성경에 기록된 기적에 대한 자세한 영상미는 필요치 않다. 물론 성경을 원래의 의미대로 해석하기 위해 그 시대에 대한 고증이 필요하며 또한 기적에 대한 현장적 고증이 필요하다. 이것이면 충분하다.[^1]
이제 원래의 내러티브로 돌아가 살펴보겠다.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을 따라 물이 갈라지고 그 갈라진 강바닥을 이스라엘의 앞에 있던 불기둥으로 말렸다. 불기둥은 평소에는 낮에 나타나지 않았다. 밤에 나타나 이스라엘의 앞을 밝히며 또 추운 사막의 공기를 데워 이스라엘의 추위를 막아주었다. 불기둥은 이런 경우에 특별히 낮에 나타나 강의 바닥이나 홍해의 바닥을 말려주었다. 이스라엘의 요단강 도하가 모두 이루어졌을 때 이스라엘은 요단 동편의 길갈에 진을 쳤다.
그 후에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여리고를 시작으로 수많은 성들과 왕들이 무릎을 꿇었다. 전쟁에서 진 것은 단 한번 아이에서 아간의 범죄로 인한 것이었다. 그 외에는 이기고 이기고 이기는 승리를 거듭했다. 그렇게 전쟁이 시작되고 그해 가나안 지역을 정복하고 전리품들을 거두었다. 그 전리품 중에는 곡식들도 포함되었다. 그렇게 전리품으로 또 일찍 정착하여 그곳의 곡식을 거둔 지파들의 수확으로 식량을 충당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에게 만나가 그쳤다. 이제 만나는 그 일을 쉬게 되었다. 이제 만나는 자기의 일을 마치고 안식하게 되었다.
만나의 안식(샤바ᅊᅳ)에 관해 언급할 것이 많다. 앞에 오경적 구원의 서정에 관해 언급을 했다. 그곳에서 광야에 관해서도 언급을 했다. 더 나은 이해를 위해 그 글들을 찾아 읽어보기 바란다.
광야의 삶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자기 육체가 죽기를 기다리는 장소다. 이스라엘 전체로 보아서는 그들이 육체의 소욕이 죽지 않음으로 자신들이 죽은 곳이다. 그렇지만 개인의 구원의 과정에서는 생명의 다함을 뜻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 악한 영(정신)이 죽는 것을 기다리는 중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과 연합되고 동화되어 새롭게 우리(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과정이 거듭남인데 현대에 너희가 쓰고 있는 동일한 용어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실제 거듭남이 아닌 단지 정신승리로 거듭남만을 말한다. 상상임신과 같이 상상거듭남만을 하고 있다. 영접기도나 세례문답만 하면 거듭났다고 말하니 상상거듭남이다.
광야나 가나안을 멸하고 임한 천국이나 모두 우리의 은혜로만 살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광야에는 생필품이 자연적으로 잘 생산이 되지 않는 곳이다. 유목민들도 겨우 오아시스나 드문드문 있는 초지를 찾아 가축만을 기를 수 있을 뿐이다. 최소한의 삶만이 허락된 곳이다. 전혀 준비 없이 들어간 이스라엘은 유목민으로 살아갈 조건도 안 되는 곳이었다. 우리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곳이 이스라엘이 접한 광야였다.
그런데 우리는 왜 가데스바네아에서 우리(하나님)를 거역한 이스라엘을 광야로 보냈을까? 성경에서 말한 대로 극한의 환경에서 그들이 모두 죽기까지 기다린 것일까? 죽이기 위해 40년을 광야에서 보내게 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하나님)가 그렇게 말한 것은 단지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또한 그들이 돌이키지 못할 것을 예지하고 탄식한 것이다. 그들이 광야에서 죽은 것은 형벌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형벌 가운데 죽은 것은 자신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음으로 형벌을 자초했다. 그들이 광야의 40년이 차기 전 언제였든 회개하였다면 여호수아, 갈렙과 같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것이다.
내(예수님)가 그들을 회개하도록 돕지 않은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착각한다. 칼빈의 예정설을 들으며 회개를 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은혜라 생각한다. 물론 은혜다. 그래서 회개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은혜가 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들은 회개할 은혜를 얻었으니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는 구원에 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회개할 수 있도록 전능한 능력을 가진 성령이 돕는다. 특히 구약의 이스라엘에게는 각별했다. 또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인류에게도 우리는 각별하다. 우리(하나님)는 우리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인류가 회개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 그들이 자기 죄가운데서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우리는 전능의 능력으로 회개를 촉구한다. 자연의 모든 질서와 자연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들은 우리를 증거한다. 그렇게 하여 인류는 우리를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직접 복음을 듣지 못했다 하여 핑계 할 수 없다.
이를 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간주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의 뿌리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인간의 전도를 통하든 인간의 전도를 통하지 않든 인류의 모든 구원은 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이 선교사도 들어가기 전에 영으로 찾아온 나 예수를 만나고 구원받고 에클레시아가 되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구원은 나를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그런데 기존의 교회에 소속되었던 인간을 통해서는 아니었다. 물론 그곳에 아직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선교사의 기도가 있어, 이를 사용했다. 그래도 직접적인 전파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 경우는 교회 밖에서 이루어진 구원인가? 자유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나 예수 그리스도 밖의 구원인가? 너희는 논리적 포함관계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나 예수 그리스도 안의 구원을, 교회 안의 구원과 동일시하고 있다. 나 예수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어찌 내가 작은 교회 안에 국한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논리는 저 타락한 중세 카톨릭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저들은 카톨릭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했다. 너희는 카톨릭에서 카톨릭을 빼고 개신을 집어넣어 구원은 개신 교회 밖에서는 없다고 한 것이다. 다른 말이 아닌데 다른 것으로 착각한다. 이를 타 종교를 통한 구원이나 인간의 자력 구원과 혼동한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흑과 백을 그리고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할 눈조차도 없는 분별력 없는 어리석은 무뇌아들의 논리일 뿐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교회 안에서가 아니다. 정확하게는 구원은 나 예수 안에서다.
모든 구원은 나 예수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은혜를 붓고 회개하도록 촉구하는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인간이 반응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결국 자기 죄가운데서 죽는다. 광야에서 죽은 자들도 이와 같다.
광야는 우리를 따를 수 없는 인간의 육체가 죽어지는 곳이다. 육체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극한의 상황에서 극한의 순종을 요구하는 곳이 광야다. 그 극한의 상황에서야 인간이 우리에게 복종하는 지 아닌 지를 알 수 있다. 편한 상황에서는 순종하는 척할 수 있지만 극한의 상황에서는 자신의 본 바탕이 드러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광야에 보냈다. 그곳에서는 오직 우리를 신뢰하고 우리의 능력으로만 살 수 있음을 배우게 된다. 믿음이 없어 죽는 세대, 개인으로는 옛사람은 그곳에서 죽고 새로 태어난 이스라엘, 개인으로는 새피조물로 태어난 새사람은 그곳에서 극한의 순종과 신뢰의 훈련을 받는 곳이 된다.
그래서 광야에 들어선 사람은 모든 환경이 무너지고 극한의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다. 이집트를 빠져나오기 위해서도 환경이 무너지고 또 갈렙과 여호수아의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도 환경이 무너지는 경우들이 있다. 자신이 어디에 속하였는지 잘 분별하여 자신의 구원을 위해 힘써야 하겠다.
여기서 용어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동일한 회개와 중생과 구원이라는 말을 쓰지만 현재 너희가 쓰고 있는 용어와 성경의 용어는 전혀 다른 용어다. 너희가 알고 있는 구원의 서정들에서는 회심과 중생을 구분하는데 이는 회심과 중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그러한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회심 즉 회개는 죄악에서 돌이켜 우리(하나님)에게 오는 것이다. 그 방향을 사탄에게서 돌이켜 우리에게로 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회개는 인간이 거듭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으로 돌이켜 우리에게 올 수 있는 것은 그가 거듭났기 때문이다. 그 생명이 뱀의 새끼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변화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결코 뱀의 새끼는 우리에게 순종할 수 없다. 그 DNA에 새겨진 것을 벗어나 우리를 향해 올 수 없다. 회개가 먼저냐 중생이 먼저냐를 논한다면 사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논하는 어리석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어리석음이다. 왜냐하면 둘은 어느 것이 먼저일 수 없다. 단지 동일한 일에 대한 다른 표현일 뿐이다. 전쟁에서 한 나라가 승리하면 한 나라는 폐배 한다. 이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 어떤 측면에서 표현하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구원에 관한 것도 동일하다. 만약 세상(이집트)에서는 부름을 받았으나 아직 광야를 방황하고 있다면 저는 구원받은 자인가? 혹 그러한 자들을 불 가운데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일까?(고전 3:15)[^2] 저들은 구원의 과정 중에 있다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정확한 상태를 표현하면 저들은 구원받지 못했다. 원수에게 구원을 받는 것은 원수에게서 빼앗아 완전히 안전한 우리의 나라에 소속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저들은 아직 원수의 나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육신은 세상인 이집트를 벗어났지만 아직 정신은 이집트에 살던 독사의 새끼 그대로다. 구원은 육신적 장소의 변경이 아니다. 장소를 옮겨도 영적인 나라 즉 영적인 장소는 여전히 세상(이집트)에 속하였다. 그래서 이집트를 그리워하며 이집트에서 누렸던 것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저들은 구원받은 자들인가? 아닌가?
히브리서의 글을 빌려 나의 답을 대신하겠다.
Hebrews 3:7-19 바른
7그러므로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8격노하던 때 곧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9거기서 너희 조상들이 사십 년 동안 나를 시험하였고 또한 나의 행한 일들을 보았다.
10그러므로 내가 그 세대를 향해 노하여 말하기를 '그들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서 나의 길들을 알지 못하였다.'라고 하였고,
11내가 진노하여 맹세한 것처럼 '그들은 나의 안식에 결단코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12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믿지 않는 악한 마음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13오직 '오늘'이라 부르는 동안 매일 서로 권면하여 너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죄의 유혹으로 완고해지지 않게 하여라.
14이는 우리가 처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으면,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들이 되기 때문이다.
15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오늘 너희가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하셨으니,
16이 말씀을 듣고도 격노케 한 자들이 누구냐? 모세를 통하여 이집트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또 하나님께서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범죄 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18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누구에게 맹세하셨느냐? 불순종한 자들이 아니고 누구냐?
19이로써 우리는 그들이 불신앙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음을 알게 된다.
독사의 새끼가 구원받았다니 말이 되는가?
John 8:44 바른
44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서 너희 아비의 욕심을 따라 행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안에서 있지 않았으니, 이는 진리가 그 안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자기 본성에서 말하는 것인데,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메시아로 왔던 나를 눈으로 보았던 유대인들보다 나으냐? 저들은 그 유대인 중에서도 나를 믿은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어찌하여 마귀의 새끼이며 독사의 새끼라는 말이냐?
John 8:31-59 바른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이며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무에게도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어찌하여 당신은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까?"
육신으로 온 나 예수를 믿고 따라다닌다라고 하였지만 저들의 상태를 보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니, 죄를 짓는 자는 모두 죄의 종이다. 종은 집에 영원히 거하지 못하나 아들은 영원히 거한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안다.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
그들이 예수께 대답하여 말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아브라함의 일들을 하였을 것이나, 지금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하는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 너희는 너희 아비의 일들을 하고 있다."
그러자 그들이 말하였다.
"우리는 음행으로 나지 않았고, 우리에게는 한 아버지가 계시니, 곧 하나님이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을 것이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다. 너희가 왜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서 너희 아비의 욕심을 따라 행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안에서 있지 않았으니, 이는 진리가 그 안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자기 본성에서 말하는 것인데,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믿지 않는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에 대해서 책망하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 어찌하여 너희가 나를 믿지 않느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므로 너희가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우리가 당신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도 하고 악령 들렸다고도 말하는 것이 옳지않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악령 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나는 내 아버지를 공경하는데, 너희가 나를 멸시하고 있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않으나 나를 위해 구하고 판단하시는 분이 계신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내 말을 지키면, 그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그분께 물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악령이 들린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었고 선지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말하기를 '누구든지 내 말을 지키면, 그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니, 당신이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하다는 말이오? 또 선지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내 자신에게 영광을 돌린다면, 내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게 영광을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니, 너희가 '그분은 우리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는 그분이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나, 나는 그분을 안다. 만일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하면, 나도 너희처럼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 보기를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물었다.
"당신이 아직 오십 세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있다."
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하였으나, 예수께서 피하여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너희는 저들보다 더 나은 자들인가? 너희는 내가 온 이후에 세워진 교회에서 새로운 교리를 지식으로 습득한 신앙고백자들이기에 더 나은 자들인가? 나의 십자가와 부활을 지식으로 알고 있다 하여 너희가 거듭난 자들인가? 히브리서를 보라. 모세시대의 기적을 모두 체험하고도 저들은 믿음이 없어 구원받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나를 육신으로 보고 나의 음성을 듣고 나의 눈빛을 보고도 나를 알아 보지 못했다. 그런데 나를 육신으로 보지도 못했고 모세 시대의 기적들을 체험하지도 못한 너희가 그들보다 낫겠는가? 너희의 신앙이 그들에 비할 수나 있겠는가? 그런데 너희 알량한 지식이 너희가 내 백성이 되게 해 줄 것인가? 만약 지식으로 따진다면 나의 시대에 육신으로 나를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너희를 능가하였을 것이다. 저들은 구약만을 보고도 나의 부활을 믿고 자신들도 부활할 것을 믿었다. 또한 저들은 나 예수를 성경을 보고 믿고 기다렸다. 메시아를 기다리던 자들인 저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럼 현대의 너희는 그 알량한 지식, 그것도 성경적 구원과는 상관도 없는 로만 가톨릭적 거짓 신앙고백인 너희 지식이 너희를 저들보다 더 나은 자로 만들겠는가?
이제 나는 위의 글과 같이 요한의 글에 언급된 나의 말을 통해 너희에게 다시 너희의 상태에 대해 답하겠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에 대하여 증언하셨다. 너희는 도무지 그분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였고 그분의 모습을 보지도 못하였으며, 또 아버지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지도 아니하니, 이는 너희가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John 5:37-38 바른)
1 John 1:1-3 바른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것은 태초부터 있었고 우리가 들었으며, 우리의 눈으로 보았고, 우리가 주목하였고, 우리의 손으로 만져 보았다. 그 생명이 나타났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그 영원한 생명을 보았고, 너희에게 증언하며 전하고 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도 전하니, 이는 너희가 우리와 서로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다."
너희는 요한복음을 집필한 요한의 글을 읽었는가? 과연 너희는 나(예수님)를 지금 눈으로 보고 주목하고 있는가? 지금 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그리고 나를 만지고 있는가? 원어의 뜻은 이러한 현재완료진행의 시제를 포함하고 있다. 이 사귐에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너희는 여전히 바리새인들과 같이 나를 믿는다고 말하였던 유대인들과 같이 어둠에 속하였다. 바로 마귀의 새끼들이다.
요한일서의 사귐이 영적 사귐이라 말한다고 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영으로 나의 음성을 듣고 나를 보는가? 과연 너희는 영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는가? 한 번도 영적 만남과 사귐을 가져 보지도 못한 너희가 무엇을 알겠는가?
아니면 귀신들과 자기 욕심에 미혹되어 샤먼들과 같이 권력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홀리는 너희 무당 목사와 기도원 원장들이 영적 사귐을 알겠는가? 너희는 오직 미혹되어 너희 탐심을 위한 치성을 올리지만 그 귀신들과의 사귐은 없다. 너희는 두려움이 기본적인 감정이며 사랑이 없다. 우리를 사랑하고 믿지 못한다. 그래서 너희는 우리를 귀신을 대하듯 정성과 노력으로 대한다. 사랑하는 자는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견디며 소망가운데 승리한다. 그러나 너희는 사먼들과 같이 치성을 드리며 너희의 영력이 커지기 위한 힘 기르기를 주 과업으로 삼는다. 바로 무당이나 샤먼들이 하는 짓이다. 어리석은 자들아 나와 함께 하는 자들의 능력은 나 자신에게 있다. 기도하는 시간과 비례하지도 않으며 치성을 드리는 정성에 비례하지도 않는다. 만약 너희 영력이라 부르는 귀신의 영능이 그러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면 너희는 귀신들과 마귀에게 속하였다.
진정한 사귐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연인을 사랑하는데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탐해 그에게 접근한다면 그것이 사랑이겠는가? 이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가 만나는 그 영이 진정 우리(하나님)의 영, 성령이라면 과연 너희 어리석은 탐심에 속아 능력을 부어주겠는가? 자신을 보지 못하는 맹인들아 너희 눈이 어두우면 너희 어두움이 얼마나 크겠는가? 눈은 몸의 등불인데 너희는 그 등불이 꺼졌으니 너희는 소경 된 인도자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선생이다.
너희는 광야와 그곳에서 내리는 만나와 회개와 구원과 중생에 대해 아는가? 그리고 그것을 기록한 창세기 이후의 모세 오경 네 권의 책 속에서 이를 발견하고 있는가?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하지만 너희 시대의 회개와 구원과 중생은 모두 상상이다. 상상회개, 상상구원, 상상중생은 상상임신과 같이 상상이지 현실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이글을 읽은 자들은 이제 핑게할 수 없다. 사실 이글을 읽지 않은 자도 핑게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이시대의 글로 성경을 풀어 설명한 것을 들은 자들은 그 책임이 더욱 크다. 또한 성경을 읽은 자도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인 자도 핑게할 수 없다. 진정 알려고 했다면 이미 모든 것이 명시되어있다. 단지 너희가 알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듣고 보지 않았기에 책임은 너희에게 있다.
[^1]: 만나에 대한 성경의 기록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만나가 그쳤는데 그에 대해 별로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없어 보인다. 만나가 그친 것은 너희에게는 대단한 기적이 끊어진 아쉬움으로 느껴지겠지만 정작 이스라엘은 만나가 그친 것을 기뻐했다.
모세의 세대나 여호수아의 세대는 이 만나에 대해 기적이라 기록하지 않았다. 왜일까? 후대에 조상들을 기억하며 광야에서 만나가 내린 것을 기적이라 언급하는데 왜 당대에는 만나에 대해 기적이라는 반응이 없었을까? 상상을 해보라 하늘에서 양식이 떨어지는 일이 흔한 일인가? 그런데 기적을 경험하고도 그냥 평범한 일상이라 받아들이는 이들이 어찌 정상이란 말인가? 근현대의 어떤 자들은 하늘에서 만나가 내린 것에 대해 믿지 못하고 그냥 종교적 신화로 여길 정도인데, 저들은 그런 대단한 기적 앞에서도 그냥 냉담한 반응들이다. 심지어 만나가 그쳤는데 그에 대해 아쉬워하는 표현도 하나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너희는 만나가 기적이며 그 기적을 경험하였다면 어떻겠는가? 너희는 너희가 일하지 않고 그냥 하늘에서 양식이 내린다면 기뻐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잘 생각하여 보라 성경에 대한 해석을 할 때는 원저자의 의도와 또 그 글의 원 수신자들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만나가 맛있는 음식임은 맞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만나가 내렸을 때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한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는가? 이집트에서 값없이 먹던 생선과 오이와 멜론과 부추와 양파와 마늘이 생각나는데, 지금 우리의 기력이 약해졌으나 우리 앞에 이 만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Numbers 11:4-6 바른)
이집트를 나온 지 1년 2개월이 지나는 동안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은 만나였다. 만나는 고수 씨와 같이 둥글고 작았다. 마치 아침에 이슬이 맺히면 작은 물방울들이 진주와 같이 둥근 형태를 띠고 있는데 그것이 만나의 모양이다. 만나는 기름과 꿀을 섞은 과자의 맛이었다. 이와 관련한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Exodus 16:14 바른 그 내린 이슬이 마른 후에 보니, 광야 표면에 작고 둥글며 땅 위의 서리같이 미세한 것이 있었다.
Exodus 16:31 바른 이스라엘 종족이 그것을 만나라고 불렀으며 고수 씨처럼 하얗고 맛은 꿀 섞은 과자와 같았다.
Numbers 11:7-9 개정 7만나는 깟 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8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맛 같았 더라 9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
만나가 내린 것은 기적이지만 기적도 일상이 되면 기적으로 느끼지 못한다. 그렇게 되니 이제 만나의 맛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했다. 1년 여를 먹고도 그렇게 불평을 했는데 생각하여 보라, 39년 가까이를 만나만 먹었다면 어떠하겠는가? 그래서 성경의 기록에는 만나가 그친 것에 대해 당대의 별 특별함이 없는 기록을 하였다.
[^2]: 1 Corinthians 3:11-15 바른
11아무도 이미 놓여진 기초, 곧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다. 12누가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건물을 세우면, 13각 사람의 행위가 드러날 것이다. 그날이 그것을 밝히 보여 줄 것이다. 그것은 불로 드러나게 되고 그 불이 각 사람의 행위가 어떤 것인지 시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14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행위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 상을 받을 것이요, 15누구든지 세운 행위가 불타면 해를 입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마치 불 속을 거쳐 받은 것 같을 것이다.
단 이구절에는 전제가 있다. 바로 기초인 나 예수 그리스도 위에 있는 자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냥 영접이나 신앙고백서를 통해 교육받은 자가 아니라 참된 믿음을 소유한 자라는 것이다. 또한 이구절은 각자의 행위에 대한 것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즉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의 행위에 관련한 것이다. 앞의 구절인 고전 3:9~10절을 전제로 하고 있다.
1 Corinthians 3:9-10 바른
9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고,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건축물이다. 10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나는 지혜로운 건축가처럼 기초를 놓았고, 다른 이는 그 위에 세운다. 그러나 각자 어떻게 그 위에 세울 것인지 조심해야 한다.
즉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파한 자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 또한 편지의 수신자인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건축물이다. 그 밭의 또는 그 건물의 기초는 나 예수 그리스도다. 그 위에 세운 행위의 열매와 그에 대한 심판에 관한 고전 3:9~15절까지의 글이다.
그런데 그 바로 아래에는 16절 이후에는 다음과 같은 문단이 있다.
1 Corinthians 3:16-17 바른
16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께서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멸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멸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너희는 그 성전이다.
앞의 문단에서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건축물이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을 멸하면, 하나님게서 그 사람을 멸하실 것이라 했다. 과연 이것이 자신(성전)을 멸하는 것일까? 아니면 타인(성전)을 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힌트는 다음에 있다.
1 Corinthians 3:21-23 바른
21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마라. 모든 것이 다 너희의 것이다. 22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모든 것이 다 너희의 것이다. 23그리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 즉 하나님의 집을 멸하는 자는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자다. 즉 사람이다. 저들이 하나님의 집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저들을 파괴하시리라는 말이다. 여기서 싸우는 자들은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가 아니다.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는 올바른 복음의 씨앗을 뿌린 자들이다. 교회 안에서 자기 욕심을 따라 분당을 만든 자들이 자신들의 분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들은 '바울의 계열이다. 아볼로의 계열이다. 게바의 계열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이 싸우며 하나님의 성전인 개인들이 모인 공동체의 성전 즉 에클레시아인 교회를 망치고 무너뜨리면 하나님께서도 저들을 무너뜨리실 것이라는 것이다. 고전 3장은 개인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교회 공동체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에클레시아가 개인의 성전이 모여 한 몸을 이루어 공동체 성전이 되는 것처럼 개인과 공동체를 떼어 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래서 둘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해석을 할 때는 면밀히 관찰하여 그 구절에서 말하는 바가 개인인지 공동체 인지 아니면 공동체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자칭 사도들인 지를 살펴야 한다. 개인의 구원에 관한 구체적인 고린도 전서의 진술을 보려면 오히려 다음의 구절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1 Corinthians 6:9-11 바른
9너희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 속지 마라. 음행한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남성 동성애자나, 동성 연애하는 자나, 10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남을 헐뜯는 자나, 약탈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다. 11너희 가운데 이같은 자들이 더러 있었으나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씻음을 받았고, 거룩하게 되었으며,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러한 자들은 가나안을 멸하고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을 상속받지 못할 것이다. 하늘나라에서 자신의 기업을 분배받지 못할 것이다. 신약을 알려고 하면 구약적 배경을 알고 접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