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은 사시기가 끝나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사사의 역할을 했다. 그는 성경에 직접적으로 사사로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늙었을 때 그의 아들들을 사사로 세웠던 것을 보면 그는 사사였다(삿 8:1, 행 13:20). 그는 선지자의 역할을 했다. 성경에도 사무엘을 선지자라고 칭하고 있다. 성경에는 그를 제사장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사무엘은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나 성전에서 자라 제사장의 일을 했다. 또 형태 상으로 그는 왕이 아니었지만 왕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렇다면 사무엘은 왕이었을까?
이스라엘 왕의 계보는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18이제 베레스의 세대(연대기, 히 톨레도트)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19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룻기 4:18-22)
룻기의 마지막에는 베레스의 연대기가 나와있다. 베레스는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아들이다.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쌍둥이 동생은 세라다. 이들의 어미 다말은 사실, 유다의 아내가 아니었고 며느리였다. 유다는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 했다가 자신의 설득으로 상인들에게 종으로 팔아버린 사건 이후 형제들에게 실망했다. 아버지에게 거짓으로 동생이 늑대나 곰에게 찢겨 죽었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사실을 말하려 해도 형제들이 자신을 말리며 협박했다. '요셉도 그렇게 했는데 우리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라고 했다. 그는 헤브론의 집에서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답답했다.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형제들을 떠나 집을 나왔다. 그는 아둘람 굴이 있었던 아둘람에 거주했다. 도망 다니던 다윗의 처지와 같았다. 유다는 가나안 여자에게서 아들 셋을 낳았다. 엘과 오난과 셀라였다. 첫아들 엘의 아내가 다말이었다. 엘이 악하므로 우리(여호와)가 그를 죽였다. 다말은 형사취수제에 의해 동생 오난에게 주어졌는데 오난은 형 엘의 대를 이어 주기를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형의 대를 이어주면 장자에게 주는 기업을 자신이 차지할 수 없고 다말의 아들이 엘의 양자가 되어 장자의 기업을 차지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난은 땅에 체외사정을 했고 그것이 악하므로 우리(여호와)가 그를 죽였다. 다말은 셋째 셀라에게 시집가서 자식을 낳아 엘과 오난의 기업을 이어야 했다. 그런데 유다는 자신의 아들들이 악하기에 죽었다고 생각지 않고 며느리 때문에 아들들이 죽었다 생각하여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았다. 다말은 자신이 이대로 과부로 늙어 죽을 것을 알고 너울을 쓰고 창녀로 가장하여 어두운 텐트에서 유다와 동침하여 쌍둥이를 낳았다. 그들이 베레스와 세라다.
베레스와 세라의 탄생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다말이 해산할 때에 보니, 그의 태속에 쌍둥이가 있었다. 그 여자가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자 산파가 그 손을 잡고 그 위에 홍색 실을 묶으며 말하였다.
"이 아이가 먼저 나왔다."
그런데 그 아기가 자기 손을 도로 들이니 보아라, 그 형제가 나왔다. 그러자 산파가 말하였다.
"왜 네가 밀치고 나오느냐?"
그래서 그의 이름을 베레스라고 불렀으며, 그 후에 손목에 홍색 실을 감고 있는 그 형제가 나왔으므로 그의 이름을 세라라고 불렀다.(룻 4:27-30 바른)
이 쌍둥이에 대한 기록은 이 쌍둥이들의 할아버지 야곱의 출산 기록과 닮아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계보(연대기, 히 톨레도트)는 이렇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사십 세에 밧단아람 사람 브두엘의 딸이며 라반의 누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았다. 이삭은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의 아내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는데, 리브가가 아이들이 뱃속에서 서로 싸우므로 말하였다.
"이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하면서 가서 여호와께 물었다.
여호와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두 민족이 네 뱃속에 있으니, 두 백성이 네 몸에서부터 나누어질 것이며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다."
리브가의 출산 기한이 다 찼으니, 보아라, 그 뱃속에는 쌍둥이가 있었다. 먼저 나온 아이는 붉고 온몸이 털옷과 같아서 그의 이름을 에서라고 불렀고, 그 후에 그의 아우가 나왔는데, 그의 손은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있었으므로 그 아이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불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 이삭의 나이는 육십 세였다.(창 25:19-26)
이삭의 첫 아이 에서는 붉은 털이 있었다. 손자 세라는 먼저 손을 내밀어 손에 붉은 실을 묶었다. 둘 모두 붉음과 관련된 탄생 스토리가 있다. 이 둘은 원래 장자였으나 장자의 기업을 잃어버렸다.
이삭의 둘째 야곱은 형보다 늦게 태어났는데 형에게 지지 않으려고 형의 발을 붙잡고 나왔다. 후에 결국 야곱은 형 에서의 장자 명분을 탈취하여 장자가 된다. 그런데 그의 손자 베레스는 할아버지 야곱보다 더 하였다. 그는 손까지 내민 자신 앞에 있던 세라를 밀치고 자신이 먼저 비집고 나와 형이 되어버렸다. 할아버지를 뛰어 넘어선 청출어람의 투지다.
이러한 닮은 꼴의 출산 기록을 가지고 있는 야곱과 베레스 조부와 조손은 그 계통을 따라 유다 지파의 왕 다윗의 선조가 된다. 야곱의 아들 유다가 베레스를 낳았고 그 혈통에서 이스라엘의 왕가가 탄생한다. 이로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계보의 장자의 역할은 유다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혈통 상의 장자는 르우벤이지만 르우벤이 장자로 왕이 되지 못하고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온다. 유다 지파 왕권의 정당성의 확보에서 이러한 혈통 상의 유전과도 같은 유다의 아들들의 출산이 그 증거가 된다. 유다가 야곱 장자로서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야곱의 출생과 같은 자녀들의 출산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것도 야곱보다 투지가 앞선 청출어람의 장자 베레스라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야곱 출생의 청출어람 출생을 가진 베레스가 유다의 아들이므로 야곱의 장자 적통은 유다와 그 아들 베레스의 계보로 이어졌다.
이렇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계보는 이어져 장자의 기업이 유다 지파의 다윗 왕에게 이어진다. 그리고 그 기업은 나 예수에게 까지 이어져 나 예수는 왕으로 마태복음에 등장한다.
왕가의 연대기에 사무엘은 없다. 사무엘의 계보는 왕의 계보와는 상관이 없다. 사무엘 시대 초기에는 인간 왕이 없었다. 이스라엘에 우리(하나님)가 직접 왕으로 통치하던 시대 마지막에 우리 종으로 일한 사람이 사무엘이다. 사무엘은 왕인 우리의 종으로 일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최조의 인간 왕 사울을 세웠고 그 뒤를 잇는 우리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을 세웠다.
이스라엘에 인간 왕이 없던 시대는 족장들의 시대와 애굽시대, 그리고 출애굽과, 광야, 가나안 정복, 사사 시대까지 이어졌다. 사사 시대 이후로는 엘리 대제사장이 그 임무를 대신했다. 그러다, 엘리의 가문이 몰락하고 엘리의 밑에 있던 사무엘이 등장한다. 사무엘이 등장하던 시대는 이미 사사들이 끊어졌다. 그런데 사무엘상 8:1절에 사무엘이 늙자, 사무엘의 아들들을 사사로 삼았다. 엘리도 사사였고 사무엘도 사사였으며 사무엘의 아들들도 사사였다. 그런데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무엘과는 다르게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재판을 불공정하게 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타락한 사사들이 아닌 다른 수단을 찾으려 했다. 그것이 왕이다. 이때의 상황을 성경을 통해 보자.
사무엘이 늙어 자기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우니, 그의 장남 이름은 요엘이고 둘째 이름은 아비야였다. 그의 아들들이 사사로서 브엘세바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나, 사무엘의 아들들이 그의 길로 행하지 않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가서, 그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당신은 늙었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길로 행하지 않으니, 이제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워서 우리를 다스리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사무엘에게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한 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네게 하는 모든 말을 들어주어라.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 그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하는 일마다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던 것처럼 네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제 너는 그들의 말을 들어주되,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여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에 대해 알려 주어라."
사무엘이 왕을 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전하여, 말하였다.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다.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를 관리하고 기마병이 되게 하며, 그들이 그의 병거 앞에서 달리게 될 것이고, 또한 그를 위하여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고 그의 밭을 갈게 하며 그의 곡식을 추수하게 하고 그의 전쟁 도구와 병거 장비들을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너희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빵 굽는 자로 삼을 것이다. 또한 그는 너희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에서 좋은 것을 거두어 자기 종들에게 주고, 너희 곡식과 너희 포도원 소출의 십 분의 일을 거두어 자기 궁정관리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이다. 또한 너희 남종들과 여종들과 빼어난 젊은이들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그의 일을 시키고, 그가 너희 양 떼의 십 분의 일을 가져갈 것이며, 너희는 그의 종이 될 것이다. 그날에 너희는 너희가 선택한 왕 때문에 부르짖을 것이나 여호와께서는 너희에게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다."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고 말하였다.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모든 민족처럼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릴 것이며, 그가 우리의 싸움을 싸우기 위해 우리보다 앞장서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백성의 모든 말을 듣고 여호와의 귀에 말씀드렸다.
22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그들의 말을 들어주어 그들을 위해 왕을 세워라."
이에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각자 자기 성읍으로 돌아가거라."
이스라엘이 왕을 구한 것은 위의 글과 같이 우리(하나님)를 버린 것이다. 사무엘이 사사로 있는데 사무엘을 버린 것이다. 물론 사무엘의 아들들이 문제가 있었지만 그들을 폐하고 다시 사무엘을 통해 우리의 길을 제시받으면 되는데 이스라엘은 왕을 구했다. 이렇게 하여 사무엘은 왕을 세우는 자가 되었다. 첫 왕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왕이었다. 그의 출신 베냐민 지파는 사사기 마지막의 타락의 극한을 보여준 지파였다. 그 지파의 왕답게 사울은 타락의 길을 갔다. 사울의 실패로 우리(하나님)는 사무엘을 통해 사울을 폐하고 새 왕을 세웠다. 다윗을 세운 것이다. 이처럼 사무엘은 왕은 아니었으나 인간 왕을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는 권위를 가진 자였다. 그는 우리와 직접 교통 하여 우리의 일을 수행한 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왕의 권위를 넘어서는 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진정한 왕인 우리의 명령을 출납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분명한 명제가 드러난다. 사무엘은 사사의 시대에서 왕정의 시대로 넘어가기 위해 세워진 과도기적 인물이 아니다. 왕을 세우는 것은 원래 우리(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단지 인간들이 구하여 세운 것이다. 신약의 백성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왕의 형태가 우리를 뜻한다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왕이라 칭하는 것은 인간 세상의 왕과 같은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세상의 왕은 앞에서 여러 번 언급한 것처럼 도둑의 욕심을 가지고 피지배 계층을 착취하는 존재다. 사탄이 주장하는 먹이 사슬의 최상위에 있는 존재다. 우리가 그러한 존재를 세우기를 원했겠는가? 그랬다면 이미 광야에서 모세를 왕으로 세웠을 것이다. 왕이 전쟁 수행에 효과적이었다면 우리는 여호수아를 왕으로 세웠을 것이다. 왕이 이스라엘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었다면 우리는 여호수아 사후에 사사들을 세우지 않고 왕들을 세웠을 것이다. 어떤 제도나 그 제도의 인간 통치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승리와 안식의 근간은 우리와 함께 함이다. 우리(하나님)를 신뢰하지 않고 이방 나라들의 왕을 구한 것은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이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착취하는 왕들의 밑에서 신음했다. 왕궁을 세우고 관료들을 세워 나라를 다스리려면 돈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군대를 유지하는 데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그 모든 것을 백성들을 착취하여 얻었다. 위에 우리가 사무엘을 통해 왕에 대해 설명한 것은 아주 선량한 군주의 예다. 대부분의 군주들은 생산물의 50%를 가져간다.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전부를 가져간다. 전쟁에 이겨야 살 수 있다는 명제 하에 모든 것을 가져간다. 또 전쟁에서 지면 적들에 의해 약탈을 당한다. 그 약탈하는 자도 적국의 왕이다. 적국에 물어야 하는 전쟁 배상금도 모두 백성들이 부담해야 한다. 어떠한 자들은 이러한 상황이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에는 진정한 참 왕인 우리가 있다. 우리가 있어 백성을 지키면 어떠한 적들도 침략할 수 없다. 혹시 적들이 침략을 준비하더라도 우리가 미리 그 전쟁을 막거나 필요하면 사사를 세워 백성들을 이끌고 나가 싸워 이기고 이기고 이기게 한다. 그러니 상비군이 필요 없다. 어차피 싸움의 승패는 우리에게 달렸기 때문이다. 필요할 때 군사를 모으고 평소에는 평안히 자기 기업에서 살면 된다. 그것이 안식이다. 우리가 이스라엘에게 준 사사 시대나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의 체제는 과도기적 체제가 아니다. 어찌 보면 지상에서 국가 단위의 통치 중 가장 이상적인 것이 모세, 여호수아, 사사 시대의 통치다. 우리(하나님)가 직접 통치하면서 우리의 명령을 백성에게 전달하고 그 명령대로 나라를 이끌 종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백성들이 종을 통해 우리의 말에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가 전능의 능력으로 백성을 보호한다. 백성들이 스스로 우리를 떠나 다른 신들을 섬겨 이방 나라의 식민지가 되어도 그들이 고통 속에 부르짖으면 우리가 응답하여 구원한다. 왕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유지하는 모든 조직이 필요가 없다. 또한 그것을 위해 백성들을 착취하여 걷어 들이는 세금도 필요 없다. 또한 이스라엘이 스스로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바쳐지는 수많은 아들들의 피도 필요 없다. 이스라엘이 극도로 약해져 적들을 대적할 군사도 남아 있지 않을 때에는 우리가 천사를 보내 적들을 멸할 수도 있다. 우리는 히스기야의 시대에 이러한 일을 행했다. 천사를 보내 하룻밤에 적들을 멸했다. 그 당시 앗수르의 왕이었던 산헤립은 패배 이후 앗수르로 도망갔으나 결국 자신의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당대 최 강대국의 군대로 우리(하나님)의 전능함 앞에 서면 바람에 흩어지는 타고 남은 재일 뿐이다.
세상의 정치학이나 역사학에서 발전적 형태라고 말하는 모델은 사실은 착취의 강도가 높아지는 수순일 뿐이다. 작은 마을에 깡패들이 착취를 단행하고 그 우두머리가 있다. 그가 세력을 길러 옆 마을까지 점령하여 착취를 단행한다. 그리고 점점 범위를 넓혀가며 도시를 점령하여 도시 국가를 이룬다. 그리고 더 확장하여 일반적인 소국 단위의 착취를 단행한다. 그 이후 더 힘을 길러 주변국들을 점령하여 착취의 범위를 제국화 한다. 이러한 착취의 역사에 권력자들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도입하여 인간들을 세뇌시킨다. 국가나 민족, 애국이나 충성 등은 전부 백성들이 스스로 착취를 당하도록 세뇌하는 것에 불과하다. 민족의 개념은 긴 인류의 역사에서 200-400년 정도밖에 안된 신생개념이다. 그 모든 것도 백성들이 스스로 충성심을 발휘해 목숨까지도 착취당하도록 세뇌시키기 위해서 개발된 거짓 지배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유학이나 왕권신수설이나 교황무오설, 심지어 민주주의나 사회주의, 공화주의 모두 세뇌의 이데올로기로 사용된다. 평등이나 자유도 모두 입에 발린 소리일 뿐이다. 착취자들은 결코 착취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떠한 수단과 이데올로기를 동원해서라도 착취를 이어나간다. 그리고 앞으로 인류의 노동력이 가치를 상실하는 시대에는 인간에게 더 이상 착취할 것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러한 때에는 잉여 인간들을 집단 학살하여 사회 보장의 비용을 줄일 것이다. 권력의 최상위 층을 차지하는 자들이 그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비정함이 원동력이다. 악랄한 비정함이야 말로 가장 강한 권력자의 덕목이다. 선하고 순수한 자는 결코 늑대들의 세상에서 우두머리가 될 수 없다. 그러니 부족 국가, 연맹체, 왕권체제, 절대왕권, 제국의 순으로 역사가 발전했다고 믿고 그 오판의 역사관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사기를 왕정으로 가는 과도기라고 보는 것은 이러한 잘못된 역사관의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보기 때문에 생긴 오류라 할 수 있다.
만약 왕정이 발전된 형태였다면 이스라엘은 사사기보다 더 온전해져야 했다. 그러나 너희는 알 것이다. 열왕기나 역대기의 역사에 나타난 모습은 사사 시대보다 더 비정한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왕권이 강해지면 심지어 선지자들을 학살하여 우리(하나님)의 소리를 듣지도 않고 백성들의 피울음의 소리도 막아버렸다. 다음 성경을 보라.
이 일들 뒤에 이러한 일이 있었더라. 예스르엘 사람 나봇이 예스르엘에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마리아 왕 아합의 궁궐에서 매우 가까이 있더라.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집에 가까이 있으니 그것을 내게 주어 내가 그것을 채소밭으로 삼게 하라. 내가 그것 대신 그것보다 더 좋은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혹시 네가 보기에 좋거든 내가 그것의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하매 나봇이 아합에게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의 상속 재산을 왕에게 주는 것을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하니 예스르엘 사람 나봇이 자기에게 한 말 즉 그가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조상들의 상속 재산을 왕에게 주지 아니하리이다, 한 말로 인하여 아합이 근심하며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빵을 먹으려 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왕의 영이 어찌하여 이같이 슬프게 되어 왕께서 빵도 들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매 그가 그녀에게 이르되, 그 까닭은 내가 예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말하며 그에게 이르기를, 돈을 받고 네 포도원을 내게 달라. 아니면 네가 기뻐하거든 내가 그것 대신 다른 포도원을 네게 주리라, 하였으되 그가 응답하기를, 내가 내 포도원을 왕에게 주지 아니하리이다, 하였기 때문이라, 하니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이르되, 왕이 지금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빵을 드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예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에게 드리리이다, 하고는 이에 그녀가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그의 인으로 봉인하고 나봇의 도시에서 그와 함께 거하던 장로들과 고귀한 자들에게 그 편지를 보내니라. 그녀가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힌 뒤에 벨리알의 아들 두 사람을 그 앞에 앉히고 그를 대적하여 증언하며 이르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모독하였다, 하게 하고 그 뒤에 그를 끌고 나가 돌로 쳐서 죽이라, 하였더라. 그의 도시의 사람들 곧 그의 도시의 거주민들인 장로들과 고귀한 자들이 이세벨이 자기들에게 보낸 대로 곧 그녀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행하여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매 벨리알의 자손 두 사람이 들어와 그 앞에 앉으니라. 그 벨리알의 사람들이 백성 앞에서 그를 곧 나봇을 대적하여 증언하며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모독하였다, 하매 이에 그들이 그를 도시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서 죽이고 그 뒤에 이세벨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 하니라.
이세벨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는 것을 듣고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 예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을 받고 왕에게 주기를 거부하던 포도원을 소유로 취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 하니 나봇이 죽었다는 것을 아합이 듣고 일어나 예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소유로 취하려고 거기로 내려갔더라.(열왕기상 21:1-16)
이 일은 수많은 왕들의 악행 중 하나일 뿐이다. 왕정이라 하여 사사기보다 더 나은 신앙과 발전된 정치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악한 왕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행한 악행들의 기록들로 열왕기는 가득 차 있다. 다윗도 그 악행의 피해자로 젊은 시절 대부분을 도망자로 살았다. 이스라엘 첫 왕인 사울조차 자신의 권력을 위해 다음 왕이 될 다윗을 괴롭혔다. 또한 그 타락한 왕으로 인해 백성들은 블레셋(팔레스타인)의 압제를 당했다. 사사들의 시대에는 헤브론의 세 거인을 물리쳤다. 바로 여호수아가 죽은 후의 유다 자손의 정복 전에서 갈렙이 보여준 모습이다. 그런데 사울 당시의 이스라엘은 겨우 골리앗이라는 거인 하나 앞에 전 군대가 떨고 있었다. 이 모습들이 사사기보다 더 나은 모습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니 세상의 거짓된 역사관에 속아 열왕기를 사사기보다 더 나은 시대라고 보는 어리석음은 버리기 바란다. 다윗과 같은 자는 특별한 자다. 저는 사사로 임명되거나 왕으로 임명되거나 선지자로 임명되어도 동일하게 우리를 섬기며 따를 자다. 그가 사사였어도 동일하게 이스라엘을 반석에 올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 제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의 통치자는 왕이 아니다. 모든 것의 소유자도 왕이 아니다. 진정한 주인은 우리다. 우리만이 사랑으로 다스리며 사랑으로 보살핀다.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는다. 만유의 주인 우리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구차하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너희를 위하여 이러한 말을 한다. 군주주의나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나 아나키즘이 최고의 정치 체계가 아니다. 그 어떤 제도도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사무엘과 같이 우리를 따르는 자가 있고 우리가 그 나라의 왕이 되면 그곳에 진정한 안식이 찾아온다. 완전한 보호가 있다. 그러므로 생각의 깊은 근원을 새롭게 하여 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이상을 가졌어도 쓰디쓴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이들의 공평한 행복을 추구했던 공산주의는 스탈린이나 모택동의 학살과 공포 정치로 그것이 불가능함을 증명했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민주주의는 결국 모든 권력과 부와 혜택이 오직 극소수의 악인들에게 몰릴 수밖에 없는 먹이사슬의 비정함에만 자유를 준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악함을 벗지 못한다면 어떤 제도를 설계해도 그 속에서 인간은 최악의 지옥을 만들 수밖에 없다. 인간 자체가 악하기 때문이다. 사사 시대나 열왕 시대의 실패는 이를 증명하는 증거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진정 우리의 백성으로 거듭난 자가 나오면 그를 통해서 열방이 복을 얻을 수 있음도 보였다. 그래서 사람이 중요하다. 이 땅에 진정한 구원받은 의인이 나온다면 그는 그의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능력을 지상에 풀어놓아 역사하게 할 것이다. 사무엘은 그러한 자 중에 하나였다. 그는 그러한 자가 되도록 길러졌다.
사사기의 말미에는 사사조차 없던 시대가 있었다. 모든 자가 타락하여 사사로 세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삼손도 어릴 때부터 구별하여 나실인으로 길렀지만 이방 여인들과의 음행으로 자신을 타락시켰다. 율법을 무시하고 나실인으로서의 의무를 경시했다. 마지막에는 원수들에게 눈알이 뽑혀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우리가 힘을 돌려주었지만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목숨도 잃었다. 이스라엘 사사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우리가 구별하여 기르고 사사들 중 가장 강한 힘을 부어주었지만 그는 자신의 타락으로 결국 실패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서부터 구별된 자를 기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한나에게 자식을 주지 않고 한나의 슬픔 속 기도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서원을 하게 했다. 그렇게 하여 사무엘은 젖을 뗄 때부터 성전에서 길러졌다. 구별되어 우리를 따랐다. 우리의 음성을 듣고 우리의 말에 순종하고 우리의 뜻을 백성들에게 성실히 전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성취되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이 그가 이스라엘의 선지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사무엘을 길렀던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의 악행으로 이스라엘은 고통을 겪었다. 블레셋이 쳐들어오자 엘리의 아들, 옵니와 비느하스는 법궤를 들고 블레셋과 싸웠다. 우리의 임재와 언약을 상징하는 법궤가 있다면 전쟁에 승리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법궤는 빼앗겼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었다. 아들들의 죽음과 법궤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전령에게 들은 엘리 제사장은 그 자리에서 비둔한 몸이 의자와 함께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다. 엘리는 사무엘에 앞서 사사로 40 년을 다스렸다. 제사장의 집안조차 이렇게 타락했다.
이제 엘리의 아들들도 죽고 성막에 남아 있는 자는 사무엘이었다. 그는 대가 끊어진 엘리 가문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되었다. 사무엘은 사무엘서에 자신의 계보가 등장하지 않지만 역대상 6장에 그 계보가 등장한다.
사무엘은 엘가나의 아들이고, 엘가나는 여로함의 아들이며, 여로함은 엘리엘의 아들이고, 엘리엘은 도아의 아들이다.
도아는 숩의 아들이고, 숩은 엘가나의 아들이며, 엘가나는 마핫의 아들이고, 마핫은 아마새의 아들이다.
아마새는 엘가나의 아들이고, 엘가나는 요엘의 아들이며, 요엘은 아사랴의 아들이고, 아사랴는 스바냐의 아들이다.
스바냐는 다핫의 아들이고, 다핫은 앗실의 아들이며, 앗실은 에비아삽의 아들이고, 에비아삽은 고라의 아들이다.
고라는 이스할의 아들이고, 이스할은 그핫의 아들이며, 그핫은 레위의 아들이고, 레위는 이스라엘의 아들이다.(대상 6:34-38)
사무엘이 어려서부터 성막에 살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사무엘의 엄마 한나가 사무엘을 우리(하나님)에게 바치기로 서원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가문이 원래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 가문이었기 때문에 사무엘은 성막에서 자라고 섬길 수 있었다. 후에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기 전에 사무엘이 번제를 드리는데 이 모든 것도 그가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무엘이 처음 우리(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곳도 성막이었다. 사무엘이 선지자로 인정을 받았을 때도 그는 성막에 있었다. 성막에 있었던 사무엘은 법궤가 있는 곳에서 우리의 음성을 들었다. 그 법궤가 있는 곳은 우리의 임재가 있는 곳이다. 법궤의 뚜껑은 그룹들의 날개가 덮고 있었고 그곳에 피를 뿌려 대속죄일에 모든 이스라엘의 죄를 속했다. 그 이름은 속죄소라 했으며 또 다른 이름은 우리(여호와 하나님)의 발등상이었다. 우리의 임재를 나타내는 다른 말은 우리의 발이 머무는 것이다. 우리의 발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곳에 와 있는 것이다. 그 발이 머무는 장소가 발등상인데 그래서 속죄소를 임재의 상징인 발등상이라 했다. 그 임재의 장소에서 잠을 자던 사무엘이 우리의 음성을 들었다. 원래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그것도 1년에 정해진 날에만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사무엘은 우리(하나님)의 등불이 있고 우리의 궤가 있는 지성소에 있었다. 그곳에서 잠을 자고 있던 어린 사무엘은 우리의 음성을 들었다. 원래 율법대로라면 그곳에서 자고 있던 사무엘은 죽었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정해진 날이 아님에도 지성소에 있었고 그곳에서 우리의 음성을 들었다. 사무엘상 3:3절의 기록대로 사무엘은 일상적으로 그곳에서 잠을 청했다. 성막에서 섬기던 어린 사무엘은 낮과 밤 모든 시간에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사무엘은 이렇게 특별히 길러진 제사장이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워져 선지자의 직을 감당할 때에 다른 제사장들도 있었다. 그런데 사무엘은 특별한 제사장이었다.
삼상 2: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할(원어, YLT; 모든 날들에 오르내리며 걸을) 자에 해당하는 제사장은 인간 중에는 아무도 없다. 진정한 제사장은 멜기세덱과 같은 제사장인 나 예수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여호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뜻하는 자도 나 예수 외에는 없다. 이렇게 되면 제사장인 나 예수가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야인 나 예수 앞에 영구히 행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충실하며 우리의 마음과 뜻대로 행하며 그 집이 견고하며 우리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할 제사장을 특정하기 어려워한다. 분명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자)인 나 예수 앞에 영구히 행할 자이므로 나 예수에 대한 구절은 아니라 결론을 짓고 가능한 제사장을 찾는데 그 첫 번째 후보가 사무엘이다. 그리고 두 번째 후보가 다윗 시대에 유일한 대제사장이 되었던 사독이다. 그런데 사무엘의 가문은 사무엘의 아들들 대에서 이미 우리를 떠났다. 또 사독은 제사장의 계보가 영원히 이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이 영원한 제사장에 대해 특정하기 어렵다.
이 문제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예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예언은 조건적이다. 다윗 가문의 왕위가 영원하리라는 예언이 있었다. 그러나 다윗 가문의 왕위는 끊어졌다. 예언이 틀린 것일까? 아니다. 예언은 조건적이다. 약속을 받은 자가 충실히 우리를 따른 다면 그 예언은 그대로 영원히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약속을 받은 자가 우리를 떠나 악한 길로 간다면 그 약속은 취소된다. 조건부 약속인 것이다. 사무엘이나 사독도 모두 동일하다.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과 이들의 자손들이 영원히 우리를 따른다면 그 약속은 그대로 성취된다. 그러므로 이 예언의 제사장이 사무엘이나 사독이 될 수도 있다.
동시에 예언의 특성상 다층적 해석이 가능하다. 일차적으로는 구약이나 신약에 등장하는 인간을 의미하며 또 동시에 참 제사장인 나 예수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는 성경에 등장하는 예표가 예언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구약에 나 예수를 예표하는 인물들은 자신들이 그 약속을 충족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이 구절과 같이 영원히 행할 수 있는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이 약속이 주어지는 경우 그 약속과 예언은 인간으로 가서 인간들을 구원한 참 제사장이며 선지자이며 왕인 나 예수를 의미한다. 이렇게 예표는 예표의 인물과 나 예수의 간극 사이에 작동한다.
또 앞에 설명했던 제사장으로서의 나 예수가 그리스도로서의 나 예수 앞에 영원히 행하는 문제도 사실 문제의 초점을 잘못 두어 혼선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두 인격이 존재해야 한다는 전제를 둔다면 문제가 된다. 단지 제사장과 그리스도의 역할에 초점을 두면 문제는 해결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제사장은 사무엘로 볼 수 있다. 나 예수의 예표로서의 사무엘인 것이다. 여기서 예언된 것처럼 사무엘은 충실한 제사장이었다. 그는 우리(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의 뜻대로 행했다. 그의 날 동안 그의 집은 견고 했으며 그는 죽어 우리에게 올 때까지 우리 앞에서 행했다. 그리고 천국에서 우리 앞에 영구히 있다. 또한 사무엘의 예표의 원형인 나 예수가 있고 나 예수의 뒤에는 나 예수를 따를 수많은 제자들이 있다.
오늘도 우리는 이러한 사무엘과 같은 자를 찾고 있다. 그런데 세례 요한 이후의 모든 성도는 구약의 모든 성도들을 뛰어넘는 자들이다. 그들은 인간의 한계 안에서 나 예수를 기다리며 바라보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요한 이후의 모든 자는 천국의 아들들이다. 바로 나 예수의 인간으로서 직분을 따른 형제들이다. 사무엘은 천국의 통치를 이스라엘에 가져온 자였다. 지금도 우리는 천국의 통치를 지상에 풀어놓을 믿음의 제사장들을 찾는다. 저들은 타인의 죄를 위하여 기도하며 그 죄를 자신이 짊어지기를 간구한다. 타인의 생명을 대신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기를 간구한다. 이러한 자들은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인류를 구원한 나 예수와 형제 된 제사장들이다. 누가 거듭나 영광스러운 천국의 제사장이 되겠는가? 나 예수는 오늘도 그들을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