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2.3.13. 열왕의 어미 룻의 연대기 3

by 에스겔

01.3.2.3.13.5. 기업(열왕의 어미)


나오미가 룻에게 제시한 안식을 얻는 길은 기업 무를 자를 찾는 것이었다. 나오미는 자신의 남편과 아들 둘이 모두 죽어 기업을 이을 자가 자기 집에 남아있지 않는 절망 앞에 섰다. 그래서 친족들 중 선한 보아스를 선택하여 그에게 기업 무를 자의 사명을 맡기려 했다. 룻의 요청을 받은 보아스는 룻의 정절을 빼앗지 않고 먼저 정식 혼인 절차를 밟기 위한 일을 추진했다. 그는 아침 일찍 서둘러 성문을 향했다. 당시 성문은 방어의 최고 요충지로 마을의 영광과 권위를 상징했다. 그래서 도시의 중요한 행사나 회의가 이곳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 거기 앉아 있는데, 마침 보아스가 말한 그 유업을 물러 줄 사람이 지나가므로 보아스가 말하였다.

"여보시오, 이리로 와서 여기 앉으시오."

그가 와서 앉았고, 또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들 가운데서 열 사람을 모셔 와서 말하였다.

"여기 앉으십시오."

그들이 앉았다.

보아스가 그 유업을 물러 줄 사람에게 말하였다.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밭 일부를 팔려고 내놓았소. 내가 당신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여 말하니, 여기 앉아 있는 분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시오. 만일 당신이 그 유업을 물러 주려 하면 물러 줄 것이지만, 당신이 그 유업을 물러 주려 하지 않는다면 내게 말하여 알려 주시오. 이는 당신 외에 그 유업을 물러 줄 사람이 없고, 내가 당신 다음이기 때문이오."

그가 말하였다.

"내가 그 유업을 물러 주겠소."

보아스가 말하였다.

"당신이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 당신은 죽은 자의 이름을 그의 유업 위에 남기기 위해 그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자 룻도 맞아들여야 할 것이오."

그 유업을 물러 줄 사람이 말하였다.

"나는 내 유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그 유업을 물러 주지 못하겠소. 내가 유업을 물러 줄 수 없으니, 당신이 친히 그 유업을 물러 줄 나의 권리를 행사하시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유업을 물러주거나 맞바꾸는 일을 확정할 때 그 사람이 자기 신을 벗어 상대방에게 주었는데, 이것이 이스라엘에서 증명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그 유업을 물러 줄 사람이 보아스에게 "당신이 사시오."라고 말하고 자기 신을 벗으니,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말하였다.

"오늘 여러분은 내가 나오미의 손에서 엘리멜렉에게 속한 모든 것과 기룐과 말론에게 속한 모든 것을 샀다는 것에 대한 증인이십니다.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자 룻도 내가 아내로 맞아들여서 죽은 자의 이름을 그의 유업 위에 남기고, 죽은 자의 이름을 그의 형제들로부터 그리고 그의 고향의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겠으니, 오늘 여러분이 증인이십니다."

그러자 성문에 있던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말하였다.

"우리가 증인이오. 여호와께서 당신 집에 들어오는 여자를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그리고 당신이 에브라다에서 유력하게 되며,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되기를 바라오.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를 통해 당신에게 주실 후손으로 당신의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은 베레스의 집과 같이 되기를 바라오."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 여자와 동침하니, 여호와께서 그 여자로 잉태하게 하시므로 그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

여자들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여호와를 송축합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유업을 이어 줄 사람이 당신에게 끊어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유명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당신 생명의 회복자이며, 노년의 봉양자가 될 것이니, 이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에게 일곱 아들보다도 더 나은 당신의 며느리가 그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나오미가 그 아이를 데려다가 자기 품에 두고 아이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자들이 그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면서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라고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으니,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다.

베레스의 족보는 이러하다.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여기서 기업 무를 가장 가까운 친척은 처음에는 기업을 무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보아스가 기업을 무르려면 이방 여인 룻도 아내로 맞아 그에게 자식을 낳아주고 기업은 그 자식에게 주어야 한다고 했을 때 기업 무를 자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신을 벗어 보아스에게 주었다. 그 행위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권한을 준다는 상징이었다. 기업을 포기한 자는 이방 여인 룻을 아내로 맞아들여야 한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 기업 무를 권한을 행사하려 했다. 그러나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포기했다. 과연 그의 판단 기준이 옳았을까? 성경에서는 결론을 말하고 있다. 그의 선택은 어리석음이었다. 결코 믿음의 유업은 혈통우월주의에 기원하지 않는다. 오직 은혜에 기준한다. 그 은혜를 구하는 룻을 통해 그 믿음의 기업은 이어졌다. 그래서 여인들은 일곱 아들보다 나은 며느리라고 룻을 평가했다. 룻은 며느리였지만 아들보다 더 정성스럽게 시모 나오미를 돌보았고 시모를 위해 자신의 젊음을 포기하고 나이 든 보아스에게 자신을 아내로 맞아달라고 했다. 그것도 혼인도 하지 않았음에도 열린 들의 곡식단 사이에 자고 있는 보아스의 이불을 들고 그의 발아래에 누웠다. 여종이 취할 태도를 가지고 자신의 몸에 대한 모든 권리조차 포기한 룻의 심정은 수치에 떨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이기고 시모의 명령을 수행했다. 그 시모가 단지 자신의 노년만을 위해 그 명을 내린 것이 아님을 알았게 때문이다. 이방 여인인 자신이 시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어떤 처지에 놓일 것이라는 것을 염려한 배려였던 것이다. 엘리멜렉과 그 아들 기룐의 기업은 룻의 순종을 통해 이어졌다. 또한 그 기업은 보아스를 통해 이어져 혈통을 따라 나 예수의 계보에 이어진다. 그 영광을 취한 자가 누구인가? 바로 이방 계집 룻이다. 이스라엘의 처녀가 아니었다. 라합도 그러했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도 그러했다. 그들 모두는 이방인에게서 출발했지만 믿음으로 은혜를 얻었다. 그리고 안식을 약속받아 자손들에게 기업을 물려주는 자가 되었다. 이스라엘이 얻은 기업은 이방인이었던 아브라함의 약속을 인하여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혈통을 우선하며 믿음이 그 혈통조차 언약의 혈통으로 변화시킨다. 어떤 이방인이든 그들이 돌이켜 회개하고 은혜를 구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기업을 주고 안식을 누리게 한다. 룻이 믿음으로 시모와 시모의 신인 우리를 선택하였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이방 여인이 아니었다. 단지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육신의 혈통만이 보이지만 우리는 그 영이 하늘로부터 난 것을 보고 그의 정체성을 평가한다. 자신의 어머니 라합을 인하여 룻을 믿음의 눈으로 평가하고 그를 아내로 받아들인 보아스는 다윗을 낳고 나 예수 그리스도를 낳을 믿음의 용장이었다. 그의 믿음으로 다윗의 가계가 형성되었다. 이는 본래 이스라엘인이었던 어떤 자들보다 뛰어난 여인의 믿음이 2대를 이어 빛을 발하는 장면이다. 이 여인 룻의 믿음은 유다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던 다말의 믿음에 견주어진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어미가 되었던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비교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사라 다음으로 자신들의 진정한 어미로 여겨지는 자들이다. 한 이방 여인이 우리를 따르기로 하고 목숨을 걸고 우리를 따랐을 때에 나온 결과를 너희는 보았을 것이다. 누구든지 우리를 찾고 구하면 우리의 나라를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은혜와 평강이 주어질 것이다.




01.3.2.3.13.6. 베들레헴 진입, 은혜, 평강, 기업, 열왕


룻기 1장은 회개다. 이스라엘 땅을 떠났다 돌아온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다. 나오미에게는 다시 돌이킴(회개)이었지만 이방 여인 룻에게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건 도전이었다. 이러한 행위를 성경에서는 회개라 부른다. 돌이켜 전향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모든 방향을 돌려 우리에게 나아오는 것이다.

룻기 2장은 은혜다. 믿음으로 요단을 건넌 룻에게 우리가 베푸는 은혜다. 보아스의 말과 같이 우리를 선택한 룻에게 우리가 어떤 은혜를 베푸는 지를 보여 주었다.

룻기 3장은 안식이다. 보아스가 베푼 처음 은혜가 확장되어 평생을 돌보는 혼인 언약이 됨을 보여준다. 그것은 평생을 보호해 주는 인생의 안락을 보장한다. 바로 안식이 룻에게 찾아온 것이다.

룻기 4장은 기업이다. 단순한 혼인 언약을 넘어선 기업을 보존할 혈통이 이어지게 되고 그를 통해 룻은 이스라엘 언약의 핵심에 서게 된다. 믿음의 열왕들의 어미가 된다는 것은 사라에게 주어진 언약이었다. 그 언약이 룻에게 계승되고 그를 통해 다윗이 나오게 된다.



01.3.2.3.13.6.1. 베들레헴 진입


룻기 1장에서 룻이 베들레헴에 진입하는 것은 여호수아가 믿음으로 가나안에 진입하고 기업을 얻는 정복전을 치르고 그 결과 기업을 얻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쳐 안식이 찾아오는 것과 같다. 여호수아의 정복도 사실 은혜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그 은혜를 얻은 자들은 회개한 자들이다. 즉 회심한 자들이다. 마음의 중심에서 돌이켜 우리에게 돌아와 복종하는 자들이다. 광야의 죽음은 불순종의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옛사람은 죽고 순종하는 새 사람으로 태어난다. 그러한 자가 룻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다. 룻기 1장은 효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지극히 봉양하는 자는 복을 받는다는 내용이 아니다. 룻이 선택한 것은 우리(하나님)이다. 룻은 세상의 행복과 복락이 아닌 우리를 선택했다. 그래서 소망이 없는 시모를 모시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남편을 다시 얻을 수 없는 고독의 날이었다.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궁핍이었다. 그녀는 그래서 구걸도 감수했다. 자신의 친정 부모의 품으로 돌아간다면 이 모든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된다. 또 새로운 남편을 만나 여인으로서의 행복도 추구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우리를 선택하고 시모와 시모의 땅을 선택한 룻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러한 선택은 정상적인 인간이 할 수 없는 선택이다. 옛사람의 소욕이 죽었다는 것에 대해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욕구가 식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욕구가 있음에도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새로운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바로 영에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다. 영인 우리(하나님)에 대한 가난이 극심하여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자가 아니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룻과 같은 선택은 할 수 없다.

사실 회개한다는 말은 돌이켜 전향한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완전히 항복한다는 말이다. 그 은혜 자체도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그렇게 회개한 자에게는 성령의 능력이 부어진다. 그런데 회개와 성령의 부어짐, 즉 물세례와 성령 세례는 분명히 구분된다. 회개는 인간의 편에서 하는 것이다. 회개도 성령 세례도 모두 성령의 은혜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둘의 차이점이 있다. 물세례 즉 회개의 세례는 인간의 선택이 주된 근원이다. 스스로 원하여 우리에게 전향하는 인간의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회개하도록 외적인 환경을 조성하고 내적인 감동을 성령이 주도하여 베푼다. 그런데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결정은 인간이 한다. 인간이 스스로 이것을 거부한다면 회개는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나 예수가 가서 복음을 전하였을 때에도 돌이킨 자들이 적었다. 성령이 예루살렘에 부어졌을 때에도 그 성령을 받은 자들과 그 성령을 비방한 자들은 자신들의 선택을 따라 구분되었다. 그러므로 전하는 자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받는 자들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인간의 선택이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이러한 뜻이다. 그 의지를 스스로 발동하지 않는다면 우리(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우리(하나님)는 우리 자신 외에는 어떠한 존재에게 굴복할 수 없으며 의지를 빼앗길 수 없다. 우리(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도 동일하다. 심지어 우리(하나님)도 마음대로 인간의 의지를 조종할 수 없다. 오직 자의로 움직일 수 있는 우리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다. 그러므로 회개의 결정적 요인은 인간에게 있다. 우리는 인간이 깨닫고 우리를 선택할 수 있도록 모든 수고를 다할 뿐이다. 그것이 은혜다. 그 노력을 전능의 능력을 동원하여 행한다. 그리고 그 전능의 능력을 가지고도 세상의 모든 일은 세상의 원래 왕인 인간 스스로 하도록 돕는다. 그래서 인간이 하는 전도와 선교가 필요하다. 인간의 기도와 인간의 순종이 있어야 땅에서 우리의 뜻은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이 회개의 실체다. 그러므로 회개는 전적으로 인간의 선택이다. 또한 회개는 우리의 의지와 능력으로 설득하는 전적 은혜다.


01.3.2.3.13.6.2. 은혜


그렇게 회개하고 우리를 선택한 자들에게는 우리의 은혜가 부어진다. 회개 차체도 은혜이지만 그 은혜에 더한 은혜를 붓는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은혜다. 그 삶을 영위하고 우리와 함께 선택하여 걸을 수 있는 은혜를 붓는다. 천국에 들어온 자들에게 주어지는 은혜다. 바로 우리의 보살핌이다. 모든 곳, 모든 방면에서 우리의 은혜가 임한다. 왜냐하면 저들은 돌이켜 우리의 품으로 전향하여 들어온 우리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은혜의 핵심은 우리에게 있다. 은혜라는 것은 전적이다. 어떤 조건이 아닌 전적 은혜다. 인간의 의지와 그 마음의 모든 것에서 하늘의 욕구가 솟구친다. 그것이 우리의 은혜다. 그 은혜의 핵심은 성령 세례다. 성령이 인간 위에 임하여 그 생각과 마음에 우리를 사랑하여 따라올 수 있는 능력을 붓는다. 우리에게 돌이켜 항복하기로 한 회개의 선택은 인간의 의지였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로는 우리를 따를 수 없다. 죄로 인해 부패해진 인간은 스스로 의를 행할 능력이 없다. 오히려 악과 탐욕을 끝없이 쏟아내는 것이 인간의 중심이다. 그러니 인간 스스로는 우리를 따를 수 없다. 인간은 결코 자신의 의지와 욕구에 반하는 일을 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자유의지이기 때문이다. 죄에게 속한 인간은 진정한 자유가 없다. 죄는 마음대로 지을 수 있지만 선을 행하는 것은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부단한 노력을 하여도 인간의 마음에는 선이 아닌 죄의 탐욕이 가득하다. 그래서 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죄를 이기고 자신의 탐욕을 이기고 오직 우리의 뜻을 따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의 부은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죄를 이기고 그 죄인들의 세상을 이기고 그 죄의 세상 거짓 임금 사탄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부어짐으로만 가능하다. 이것이 진정한 은혜다. 그 은혜 안에서 천국에 속한 자로 사는 것이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라는 개념은 이교적 극락의 개념이다. 천국은 살아서 들어가고 살아서 들어간 그 천국에 몸을 벗은 후에도 속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부활의 때에는 죽은 몸도 다시 살아 천국에서 살게 된다. 그것을 미리 보여 준 것이 나 예수의 부활이다.

룻기 2장에서 룻에게 은혜를 베푸는 보아스가 룻기의 주인공인가? 아니면 룻이 주인공인가? 룻기의 주인공은 룻이다. 룻기 1장의 주인공은 확실히 룻이 맞다. 그런데 2장과 3장과 4장은 룻과 보아스가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으로 각각 등장한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룻기에 보아스가 등장하지만 보아스 중심으로 룻기는 기록되지 않았다. 룻을 중심으로 기록되었다. 룻기 2장에서 보아스는 룻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로 등장한다. 룻기의 시작은 룻의 과거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룻이 어러움 가운데서 은혜를 입고 또 안식을 얻고 결국은 기업을 취하는 결말이 찾아온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보아스는 어떤 인물인가? 룻에게 값없이 은혜를 베푸는 자로 나온다. 그리고 이방 여인인 룻을 현숙하고 정결한 여인으로 여겨 그 여인을 혼인 전에 범하지 않는 인물로 나온다. 그리고 그 여인을 위하여 다음 날 서둘러 일을 처리하여 그 여인을 합법적인 아내로 맞는다. 이것은 은혜를 베풀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이다. 마치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난 것과 같다. 보아스가 중심으로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백설공주의 주인공이 백설공주이듯 룻기의 주인공은 룻이며 보아스는 룻을 곤경에서 구해내는 왕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백설공주의 주인공은 백설공주의 어머니나, 난쟁이들이나 왕자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주인공을 돕는 역할을 하는 선한 자들일뿐이다. 룻기의 보아스도 이러한 역할을 하는 자다.

이 보아스는 나 예수의 예표다. 값 없이 은혜를 베풀고 신부를 맞이하는 자다. 뒤에 기업을 언급하면서 이 부분을 더 깊이 살펴볼 수 있는데 룻은 보아스에게 시집을 감으로서 원래 자신의 남편 가문인 엘리멜렉의 집안에서는 얻을 수 없는 기업을 가지게 된다. 이 모든 것을 베푸는 것은 전적은혜다. 성령의 감동을 따라 룻기를 읽는 자들은 룻기를 읽으며 은혜의 감격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그들의 입에는 감격의 고백이 따를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순간 죄인된 자신들을 은혜로 맞아준 신랑인 나 예수를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버리운 자들이다. 성령의 감동을 얻지 못한 저들은 우리에게 속한 자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된다. 그러한 자들은 참된 구원으로 나아오라.



01.3.2.3.13.6.3. 평강


신약 서신서를 읽은 자들이라면 서신 거의 대부분에 등장하는 은혜와 평강이라는 표현을 읽어보았을 것이다. 서신들의 시작에 습관과도 같이 등장하는 이 문구의 앞에 항상 등장하는 것은 바로 우리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성령(계 1:4)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은혜와 평강의 근원적 출처가 어디인 지를 명시하는 것이다.

히브리서와 야고보서 그리고 요한일서와 요한삼서를 제외한 모든 서신서에는 이러한 특징이 나타난다.

히브리서는 이스라엘 12지파들에게 보내진 서신으로 헬라적 서신의 형태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실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평강과 은혜를 언급하고 있다.(히 13:19, 25) 히브리서의 마지막 장인 13장의 끝에는 인사를 하고 있다. 이로서 히브리서가 서신서임을 알 수 있다.

야고보서는 열방에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라는 말로 인사를 하고 있다. 이 서신은 특정 지역의 특정 성도들에게 보내진 것이 아니다. 열방에 흩어진 이스라엘인들에게 보내진 것이다. 이 당시에 이스라엘인들을 이방인들은 유대인이라 불렀다. 그러나 정확한 명칭은 여전히 이스라엘인들이다. 로마인들이 유대인이라 이름 지은 것은 헤롯이 받은 속주의 이름이 유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스라엘인들의 호칭이 될 수는 없다. 현대에 까지 이러한 호칭의 혼동이 있지만 이는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현대에 세워진 이스라엘도 이스라엘이 아니다. 이에 대한 것은 이 책 여러 부분에서 언급하였다. 그래서 차라리 히브리인이라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야고보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내진 서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신자와 그들에게 인사하던 헬라의 서신의 형식이 1:1절에 그대로 등장한다. 이는 수신자들이 흩어진 열두 지파이기 때문이다. 저들의 대부분은 헬라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건넨 인사인 문안하노라는 현대어로는 안녕하세요이며 코이네 헬라어로는 카이레인(Χαίρειν)이다. 이 단어는 일상적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서신의 인사말로 사용했던 말이다. 그런데 열두 지파라는 수신인들은 나오지만 수신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는 특정인들이 아닌 흩어진 모든 열방의 이스라엘인들에게 보내진 서신이기 때문이다.

은혜와 평강은 고대 헬라인들의 일반적인 인사법은 아니었다. 헬라인들의 편지 인사말은 단지 수신자를 밝히는 것과 그 수신자의 건강과 안녕을 비는 축복의 형태를 가졌다는 것이 같다. 그런데 바울의 서신이나 베드로, 사도요한, 유다의 서신들에는 그리스인들의 서신의 형식의 틀 즉 수신자와 축복의 틀에 수신자인 교회에 대한 애정과 우리(하나님)로부터 오는 축복(은혜와 평강)을 채웠다.

골로새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만 제시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근원을 표시하지 않았지만 이는 그 앞 뒤에 나오는 구절로부터 충분히 보충되고 있다. 뒤에 언급하고 있는 골로새서의 인용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신약 대부분의 서신서는 은혜와 평강이라는 기본적인 축복의 인사를 가지고 있다.




은혜와 평강과 관련된 서신서들의 표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로마서 1:7)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린도전서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린도후서 1:2)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라디아서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에베소서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빌립보서 1:2)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골로새서 1:2)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데살로니가전서 1:1)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데살로니가후서 1:2)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디모데전서 1: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디모데후서 1:2)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디도서 1:4)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빌레몬서 1:3)


히브리서, 야고보서에는 없음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베드로전서 1: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베드로후서 1:2)

요한 일서에는 없음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요한이서 1:3)

요한 삼서에는 없음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유다서 1:2)

장차 오실 이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요한계시록 1:4-5)


표현의 차이가 있는 서신서들


(골로새서 1:1-2) 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데살로니가전서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베드로전서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유다서 1:1-2) 1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2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요한계시록 1:4-5) 4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하나님)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성령님)과 5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님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이러한 인사를 신약의 서신들이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다. 성경을 통해 드러나고 십자가의 사역을 통해 드러난 핵심이 은혜와 평강(안식)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와 구원이라 할 수 있다. 십자가는 은혜며 구원은 원수에게서 건져 평안하게 함이다. 세상에 속한 모든 자들은 남편이 없는 과부와 같다. 저들을 보호할 자도 없다. 저들에게 있는 자들은 양의 탈을 썼으나 모두 늑대다. 부모도 형제도 스승도, 남편도, 사장도 국가 원수도 왕들도 모두 축복을 말하지만 그 속에 있는 것들은 늑대의 약탈이다. 진정한 보호자는 없다. 물론 양심을 따라 행하고 본성적인 사랑을 따라 행함이 있지만 그것은 일부일 뿐이고 이 세상 임금 사탄의 모든 질서는 약육강식의 억압과 착취다. 단지 자신은 약탈의 이리가 아니라고 양의 탈을 썼을 뿐이다. 세상의 모든 제도의 근원도 이와 같다. 억압과 착취다. 원수의 세상에서 원수에게 유괴된 자들의 삶은 이러한 형편에 있고 이를 벗어난 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인생은 고단하고 힘들다. 어떤 자에게도 이것은 예외가 될 수 없다.

룻은 보호할 보호자가 없었다. 시모가 있었지만 저는 연약한 늙은 이라 보살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룻의 보호자는 아무도 없었다. 밭에서 일할 수 있는 남자가 아무도 없었다. 기업을 유지해 줄 남편도 자식도 없었다. 기업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상속자는 남자인데 집안에 엘리멜렉의 혈통이 끊어짐으로 상속을 받아 그 기업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구걸이었다. 합법적인 구걸인 이삭 줍기를 하던 룻에게 앞으로 평강의 길이 보이는가? 그녀의 길에 과연 안식이 있겠는가? 그런데 보아스는 이러한 룻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그리고 남편 기룐을 대신하여 대를 잇고 또한 기업을 관리하여 풍성한 소득을 창고에 모아들여 룻과 시모 나오미가 안락한 삶을 살게 하였다. 룻은 보아스를 얻음으로 안식을 얻었다. 고난과 풍파의 세월이 끝나고 진정한 쉼이 찾아왔다.

그래서 나는 마태복음 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했다. 너희를 보살필 진정한 남편이 누구인가 생각하여 보라. 세상에 너희를 사랑해 줄 자가 있느냐? 그렇다면 그에게로 가라. 그러나 세상 속에는 진정한 너희 보호자가 될 능력을 가진 자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 속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01.3.2.3.13.6.4. 기업


룻기 4장은 기업이 이어질 수 없었던 룻 집안의 기업이 이어진다. 룻이 계보를 이은 것은 단지 그 집안의 기업을 유지한 수준이 아니었다. 룻이 이스라엘에 편입되어 이스라엘의 현숙한 여인으로 인정받았던 것처럼 룻의 남편 기룐의 계보는 나 예수의 계보에 편입되었다. 엘리멜렉과 그 아들 기룐은 나 예수의 계보에 등장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런데 그 계보를 이은 룻의 아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이로서 룻의 계보는 나 예수의 계보에 편입되었다. 원래 기업을 무를 경우, 오벳은 룻을 어미로 하여 보아스의 씨로 태어났으나 룻의 원래 남편 기룐의 아들이 된다. 양자가 되는 것이다. 이로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손자가 된다. 이렇게 하여 대가 끊어진 집안의 대를 잇는다. 그런데 나의 계보에 등장하는 룻의 아들, 오벳은 이 법칙을 벗어나 양부 기룐의 자식이 아닌 친부 보아스의 자식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렇게 하여 나 예수의 계보에 등장하게 된다. 이는 일반적인 율법을 벗어난 것이다. 이렇게 된 것도 모두 룻에게 부어진 전적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자신들의 기업을 찾은 정도가 아니라 천국의 왕의 계보를 얻게 된 것이다. 그 계보의 끝에는 나 예수가 있음을 너희는 알 것이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족보를 보면 대가 끊어진 기업을 이어 주기 위해 대신 기업을 무른 흔적들이 족보에 나타난다. 그래서 기록하기에 따라 두 족보가 차이가 난다. 그런데 나손의 손자요, 살몬의 아들인 보아스가 낳은 오벳에 관한 부분은 기업을 무른 흔적이 없다. 나 예수의 계보는 엘리멜렉과 기룐의 계보가 아닌 보아스의 계보가 원 계보이기 때문이다.



01.3.2.3.13.6.7. 룻기


살몬(살라-눅 3:32)이 라합에게서 낳은 보아스가 등장하는 룻기는 사사기 초입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룻의 아들 보아스가 아직 살아 있던 시대로 유다 지파 웃니엘의 사사 통치가 끝나고 이스라엘이 타락하여 모압왕 에글론을 섬겼던 십팔 년 이후의 시대다. 타락하여 압제를 당하고 분순종으로 인한 기근으로 고통받던 나오미와 엘리멜렉이 모압으로 떠났다. 엘리멜렉은 원수의 나라에 부역하여 그곳에서 먹고 살기을 찾고자 하는 자였다. 그 모든 것이 끝나고 이방인 룻이 그곳에서 오히려 믿음으로 베들레헴 행을 선택한다. 룻기는 그 룻의 믿음으로 일어나는 가나안 재정복의 시나리오를 보여준다.

우리(하나님)는 한 시대에 대한 두 개의 기록을 남겼다. 사사기와 룻기를 기록한 것이다. 사사기의 기록을 이어 사무엘의 시대가 이어지는데 처음으로 세워진 왕은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었다. 사울은 사사들과 같았으며 실패한 통치자였다. 그런데 사사기와 별도로 기록된 룻의 계보에서 나온 다윗은 우리의 마음에 합한 자였다. 그는 사사들과는 달랐다. 신실한 사무엘의 뒤를 이었으며 우리의 뜻을 이루는 왕이 되었다. 사사기의 타락과 룻기의 믿음의 결단과 순종은 대조된다. 이를 통해 이어지는 계보도 대조된다. 사사기의 마지막에 타락의 극한을 이루어 집단 윤간과 집단 납치, 강간을 자행했던 베냐민 지파의 왕 사울은 타락하여 사사기의 타락을 반복한다. 그러나 룻의 회개와 믿음, 그리고 룻의 남편의 어미인 라합의 회개와 믿음을 이어받은 계보의 왕, 다윗은 순종하여 원수들과 싸워 이기고, 이기고, 이기는 나 예수를 예표하는 왕이 된다. 저는 유다지파의 왕이다. 사사기에 기록된 유다 지파의 기록으로 유명한 것은 바로 갈렙의 믿음과 그 조카 웃니엘의 믿음이다. 저들의 믿음과 순종은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났다. 특히 이미 회개하여 광야의 백성이 아니었던 갈렙의 믿음은 여호수아와 함께 한 유일무이한 믿음이었다. 갈렙도, 라합도, 룻도 이방인이었으나 그 회개의 믿음으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 거듭난 자의 삶을 살았다. 다윗은 이러한 유다 지파의 왕이었다. 사사기의 타락을 이어받은 사울은 히브리인들의 기업을 얻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회개와 믿음의 순종을 유산으로 이어받은 다윗은 히브리인들의 기업을 정복하여 그 땅에 진정한 안식을 가져왔다.

타락한 사사기를 끝내고 진정한 믿음의 시대가 도래하도록 다윗의 시대를 준비하는 인물이 세워지는데 그것이 사무엘이다. 그리고 사무엘이 세울 다윗의 언약의 계보를 기록한 것이 룻기다. 이렇게 타락(사사기)을 회개(룻기)하여 구원(사무엘)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사무엘이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한 구원자 다윗은 암몬왕 나하스에게 어미가 납치 강간을 당하여 잉태된 자다. 그래서 다윗 자신도 자신의 어미가 죄 중에 자신을 잉태했다고 했다. 이 기록은 유대 랍비들의 역사 기록에도 등장하는 정확한 역사다. 이러한 혼혈이었고 그 태생이 죄스럽고 비천했지만 우리를 선택하여 우리를 따른 자가 결국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왕이 된다. 진정한 통치자가 된다. 이도 이방인이었던 아브라함과 갈렙과, 라합과 룻의 믿음의 계보를 이은 믿음의 표징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구원 즉 우리(하나님)의 구원은 혈통을 따른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선 자들은 자신의 혈통도 과거도 환경도 모두 나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다. 저들은 믿음으로 나 예수와 함께 부활하여 새 피조물로 하늘나라 백성의 삶을 산다. 저들은 하늘에 속하였으므로 바로 우리(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저들은 나 예수와 함께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정복자들이며 저들은 천국의 침노자들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인이나 이방인이나 혈통이 아닌 믿음으로 은혜를 얻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땅을 정복하여 기업을 얻으며 안식을 얻는다. 우리(성부, 성자, 성령)로부터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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