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2.3.14. 사무엘의 연대기 2

by 에스겔

01.3.2.3.14.1.3. 선지자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다. 그런데 그를 부르던 호칭은 사사가 아닌 선지자였다. 그는 선지자였다. 그를 통해 우리가 말을 했고 그의 말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기에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모든 이스라엘이 우리(하나님)가 사무엘을 선지자로 세운 줄 알았다. 처음 사무엘이 우리의 음성을 들은 것도 예언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엘리는 자신의 아들들의 죄로 자신의 가문이 몰락하여 노인이 남지 않을 것을 경고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우리는 엘리의 곁에 있던 사무엘을 통해 또다시 경고했다. 사무엘이 우리의 음성을 들을 당시 성전에서는 환상도 꿈도 예언도 희귀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엘리는 어린 사무엘에게 우리의 음성이 주어진 것을 보았다. 아이에게 우리의 음성이 임하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었다. 선지자를 통해 책망하여도 듣지 않기에 우리의 음성을 듣고 처음에 엘리 제사장의 음성으로 착각한 지각이 어린 아이를 통해 말하였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놀라야 하고 그 아이의 입을 통한 경고를 듣고 살 길을 찾아야 하는데 엘리의 반응은 의외였다.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아들들을 책망할 때에도 그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마치 귀찮다는 투였다. 비둔해진 그의 육체를 보면 그가 평소에 어떠한 삶의 태도를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우리의 경고를 들어도 귀찮다는 반응이었다. 아들들이 죽고 앞으로 후손들이 죽어 나간다는 데도 그러한 반응이었다. 심지어 마지막 죽을 때에도 비둔한 몸으로 의자에 걸터 앉아 소식을 듣다가 놀라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다. 만약 전쟁의 소식을 기다리는 일반적인 아비라면 도시의 성문에 서서 멀리 눈을 뻗어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게으른 습성대로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소식을 듣고 있을 때에도 앉아 있었다. 그로 인해 그는 놀라, 의자와 함께 넘어져 목이 부러졌다. 참으로 비참하지만 그 죽음의 모습이 추하다. 엘리가 그렇게 게으른 기질일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죽음의 원인이 아니다. 진정 우리를 아는 자였다면 우리 앞에 두려워 떨었을 것이다. 아무리 게으른 자라도 진정 거듭난 자였다면 그는 자신의 과거의 삶과는 다르게 성실하며 다른 이들이 보기에 제 정신이 아닐 정도로 열정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성경의 수많은 자들이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현대 심리학자들이 성경의 인물들을 분석할 때에 인물들의 기질과 성향에 대해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거듭나기 전의 성향과 거듭난 후의 성향은 많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만약 엘리가 거듭난 자였다면 이런 비참한 상황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구약에서 우리가 사용한 종들을 오랫동안 훈련 시킨 이유는 그 과정 속에서 그들이 우리에게로 돌이켜 회개하며 거듭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타락한 본성을 그대로 가진 인간은 평생을 훈련해도 변화되지 않는다. 인간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옛 사람이 말 그대로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야 한다. 그것이 거듭남이다. 그렇지 못하면 방법이 없다.

엘리는 이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 뒤편에서 우리는 성전에서 구별되어 자란 사무엘을 길렀다. 사무엘은 엘리의 가문을 멸할 예언을 시작으로 선지자로 이스라엘에 드러났다.

그의 말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말한 것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 이유는 그가 우리의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서 듣고 말을 했다. 현대의 목회자들은 설교 강단에서 우리(하나님)의 말을 대언한다고 한다. 저들을 사기군들이다. 왜냐하면 저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듣지도 않은 것을 자신들이 마음대로 지어서 떠들어 댄다. 여러 번 예로 들었는데 몇 백 년 전의 홍길동전을 읽고 홍길동의 말을 오늘 성도들에게 대신 전한다고 하면 저는 사기군이다. 홍길동을 직접 만나서 들은 것을 전해야 홍길동의 말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하나님)의 말도 글을 읽어서 전하는 것은 사기다. 성경의 글은 과거 그 상황에 그 시대의 백성에게 준 말이다. 그 원리와 상황 속 논리를 이해한 상태에서 진리의 알갱이를 캐낼 수는 있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현재 상황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를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현재 우리(하나님)가 말한 것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사기다. 홍길동전을 읽고 그렇게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우스꽝스러운 짓인데 성경을 읽고 그렇게 하면 그럴듯하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아무리 성경을 읽고 원리를 발견했어도 최종적으로 지금 이곳에서 그 뜻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직접 들어야 할 문제다. 우리의 음성을 듣고 그것이 우리의 음성인지 분별하여 그 감동을 따라 전해야 우리의 말을 대언하는 것이다. 사무엘은 그렇게 했기에 그의 말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소위 직통 계시라는 것을 말하는 자들이 있는데 저들의 대부분은 사탄의 영을 받았다. 성령을 받았다면 자신만이 우리(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다른 이들은 못 듣는다는 말을 하지는 못한다. 신약의 성도들은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이요, 선지자로 우리의 음성을 듣고 우리와 대화한다. 그것이 기도다. 혼자 떠드는 것은 이방 우상에게나 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인 성령이 내주 한다는 것은 성령의 인격과 교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인제사장설을 성경에서 찾아낸 루터의 후예를 자처하는 너희가 이를 모른다면 너희는 누구의 후예들인가? 과연 루터의 후예들이 맞는가? 그런데 소위 직통계시를 받는 자들과 자신만이 강력한 은사자임을 강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저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저들은 과거 무속의 샤먼들과 같이 그것으로 자신의 권력과 복채를 구하는 무당들이다. 저들의 영은 나의 영이 아니다. 저들을 따르고 추종하여 섬기는 자들도 저들과 같이 우리(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들은 아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우리가 준 성경을 가지고 떠든다고 하여 다 우리에게 속한 자들은 아니다. 다 우리의 선지자는 아니다. 영을 분별하라. 그들의 속에 든 목적을 분별하고 그들 행위의 종말을 보라.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에 영웅전을 읽듯 읽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다.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나에게 주어진 이야기임을 내가 그 이야기에 나오는 성도와 같은 성도임을 깨닫고 읽어야 한다. 나에게 성경에 기록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먼저 내가 성도로 거듭난 자인가를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성경에 기록된 우리를 만나 사무엘과 다윗과 엘리야와 바울과 같이 살면 된다. 오늘도 너희가 나를 만난다면 너희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너희는 사무엘과 같을 것이다.


01.3.2.3.14.1.4. 사사


사사기의 타락과 실패의 기간에 죄악은 짙어지고 소망은 사라지는 듯했다. 삼손 사후부터 엘리 이전 기간, 사사에 대한 기록은 없다. 구별된 나실인도 실패하였고 우리 앞에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제사장을 선택했다. 엘리가 사사가 되었다. 그나마 성막에서 섬기는 그래서 임재가 있는 지성소에서 우리를 만날 수밖에 없는 자를 세웠다. 그런데 제사장도 거듭나지 못한 자여서 그도 타락해 갔다. 그 아들들은 성전에 바쳐지는 제물을 가로챘으며 그로 인해 죽임을 당할 것이란 경고를 받았다. 그 아들들과 함께 엘리가 죽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성소에서 머물며 자란 아이였다. 그는 우리의 마음에 합한 자였다. 그 마음으로 우리를 섬기며 우리를 따랐다.

창세기로부터 사도행전의 오순절이 이르기까지 누가 거듭난 자이며 거듭남은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왜일까?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창세기 6장의 표현이나 성령이 임하여 사사들에게 부어진 것이나 또는 선지자들에게 부어지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곳에서 사용된 표현은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하는 것이다. 또한 성령이 떠나고 그곳에 악령이 들린 것도 보게 된다. 바로 사울의 경우다. 그런데 신약에서 성령의 임함과 구약에서 성령의 임함은 다른 것인가? 결정적으로 말하면 같으면서도 다르다. 이를 어떤 이들은 성령이 위에 임하는 것과 내주 하는 것의 차이라고 표현한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표현을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런데 이는 영적인 것을 공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성령은 영적인 존재인데 인간들을 위해 눈에 보이는 육적인 형태로 표현했다. 이렇게 구분을 한 것은 그 차이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성령이 머리 위에 임한 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사역을 위한 것이다. 사람에게 임하여 우리의 생각과 능력을 붓는다. 그런데 그것이 영구적인 것이 아니고 일시적인 것이다. 심지어 앞에 이 책에서 언급했던 여호수아나 다윗과 같이 구약의 거듭난 아들들에 대해 언급한 것도 모두 동일하다. 단지 그들이 거듭난 아들인 나 예수의 예표이며 신약의 거듭난 자들의 예표의 역할을 하기에 그들을 아들로 언급한 것이다. 창세기 6장에서 언급된 것처럼 타락한 인간에게 더 이상 성령은 함께 하지 않는다. 함께 한다는 것은 단회적으로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함께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이라 했다(창 6:3). 이는 그들과 함께 머물 수 없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인 성령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아니라, 타락한 자신의 생각과 마음대로 살아가기에 그들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거부한다. 거룩함과 진실과 사랑을 버리고 죄악과 거짓과 미움을 선택한다. 그래서 성령은 그 죄인들과 함께 할 수 없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영에 대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쉬운 표현은 마음과 생각이다. 육체가 없는 마음과 생각을 영이라 할 수 있다. 인격체이지만 육신은 없다. 그것이 영이다. 이는 온전한 표현은 아니지만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라 이렇게 표현한다. 공간적으로 위에 임하여 일시적으로 그 사람에게 성령이 영향을 주는 것이 구약과 오순절 성령의 사건 이전의 성령의 사역이다. 그 사람의 머리 위가 아니라 마음 안에 내주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는 신약의 오순절 이후의 성령의 역사다. 구약에는 인간이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이 그들을 일시적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신약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이 그들의 마음에 함께 거주하여 지속적으로 역사하게 되었다. 이 표현을 다르게 표현하면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 지속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부음을 받은 것이다. 구약에는 아직 나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없었기에 궁극적으로 인간이 나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거듭남이 없었다. 사실 옛 사람이 죽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나 예수가 대신 죽음으로 법적으로 나 예수와 합한 인간은 죽은 것으로 선언된다. 또한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씻음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다. 나 예수가 죽은 것은 이 일을 위함이다. 나 예수가 부활하여 성결의 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은 것은 바로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 것을 대신 받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거룩함을 법적으로 인정받은 인간들에게 성령은 이제 합법적으로 함께 거주하게 된다. 그렇게 하여 그들의 마음에 창세와 같이 지속적으로 우리(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성령)이 부어진다. 그런데 성령은 인격이므로 이 과정을 인격적으로 행한다. 때로는 대화하며 때로는 죄를 이길 힘을 강력하게 붓기도 하고 땅에서 우리의 일을 실행할 열정을 붓는다. 이렇게 하여 신약의 성령세례는 내주 하여 함께 함의 임함이다. 구약의 모든 자들은 저들이 아무리 탁월한 일을 했더라도 저들은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다. 심지어 거듭난 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았어도 저들은 내적인 생명이 죽고 다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지는 못했다. 성령을 소멸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우리의 길을 따랐지만 결코 거듭난 심령을 가지지는 못했다. 이 차이는 너무도 극명하여 나 예수는 "여자가 낳은 어떠한 자보다 더 큰 자가 세례 요한이지만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라고 했다. 이는 거듭난 자와 여자에게서 낳아진 자연인의 차이를 설명한 것이다. 죄에 대해 죽고 우리에 대해 산 자만이 자연인의 죄 생명을 벗고 다시 태어난 자, 즉 거듭난 자가 된다. 나 예수와 함께 죽고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부활한 자만이 새롭게 다시 태어난 자, 거듭난 자다. 이렇게 거듭난 자라야 성령의 통치를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다. 그렇게 우리의 통치가 임한 그곳이 우리(하나님)의 나라, 즉 하늘나라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 하나님의 아들과 종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약의 모든 자들은 종이었다. 포도원에 온 종들과 포도원에 온 아들은 분명히 다르다. 나 예수는 아들이다. 성부의 아들이다. 나 예수는 두 번째 아담이다. 이는 즉 우리(하나님)가 낳은 유일한 자식인 인류를 말하는 것이고 벤 아담 즉 아담의 후손 즉 인자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나 예수의 아들 됨의 공로를 힘입어 아들이 된 모든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들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포도원 비유에 나온 아들은 예수 나 자신이다. 나의 죽음을 포도원의 비유를 통해 말했다. 아담과 나는 우리(하나님)가 우리의 형상으로 낳은 자들이다. 아담은 흙으로 만들어 우리의 생명을 부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나 예수 두 번째 아담은 여자에게서 성령으로 난 인간이었다. 인간들과 나 예수가 다른 것은 인간으로서의 어떠한 것이 아니다. 단지 나 예수가 우리(하나님) 삼위일체의 본체라는 신성의 차이가 있다. 또한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죄인이었으나 나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의인이라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나 예수와 함께 죽고 살아 거듭난 자들은 모두 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은 공로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 사실 성령의 임함은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거듭난 자와 거듭나지 못한 자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 거듭나지 못한 사도들은 신약에 속한 자들이었지만 저들은 성령이 지속적으로 함께 하여 역사함을 경험하지 못했다. 베드로는 강력한 기름 부음으로 나 예수와 함께 물 위를 걸었다. 그러나 그는 거듭나지 못한 자라, 가야바의 뜰에서 나 예수를 부인했다. 그러나 거듭난 이후의 베드로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나 에수를 죽인 산헤드린에서 담대히 나 예수 외에는 구원자가 없음을 선포했다. 거듭나기 이전과 거듭난 이후의 베드로는 다른 사람이다. 앞의 사람은 옛 사람이며 뒤의 사람은 새 사람이다. 구약에도 사울은 새 마음과 우리(하나님)의 영을 받았다는 표현이 나온다(삼상 10:-10). 사울 이전의 사사들에게도 성령은 부어졌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사울은 불순종과 악행을 인하여 성령이 떠나고 악신에게 사로 잡혔다.

성령세례를 말함에 있어 능력을 받아 자신의 권력을 세우려는 모든 자들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다. 고린도서의 능력은 가졌으나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못한 자들도 구약과 신약의 거듭나지 못한 사도들과 같은 상태라 할 수 있다. 진정 거듭나 우리에게 속한 자들은 죄가 만지지도 못한다. 거듭난 자들은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나의 영광을 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양들의 유익을 구하며 심지어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도 내어 놓는다. 왜냐하면 거듭난 자는 나 예수와 같이 이미 우리(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성령을 통해 부음 받기 때문이다. 거듭난 자들은 타고난 천재들이 나면서부터 다른 것처럼 거듭난 그 순간부터 자연인들과 차이를 보인다. 처음에는 지식이 얕고 부족할 수는 있으나 그 안에 성령(기름 부음)이 있어 그에게 모든 것을 가르침으로 그는 우리(하나님)의 아들로 자란다.

사무엘이 사사임을 언급하면서 거듭남과 성령의 임함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사무엘이 거듭난 자의 예표였기 때문이다. 저는 순전함으로 우리를 따라 평생을 살았다. 그가 순전하게 우리를 따르도록 어려서부터 세상과 구별하여 지성소에서 길렀고 그는 구별된 지성소의 사람이 되어 우리와 대화하며 우리의 임재 가운데 살았다. 사사 중 사무엘은 전무후무한 자였다. 그러함에도 이스라엘은 사무엘을 버리고 왕을 구했다. 이는 사무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를 버린 것이다. 자신들의 죄악의 대가로 받은 징벌을 우리가 부족하여 자신들을 지키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고 원망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자구책인 왕을 구한 것이다.



01.3.2.3.14.1.5. 예표


사무엘은 위와 같은 여러 직분들을 가졌다. 그것도 그 직분들에 탁월했다. 그는 심지어 왕을 세우고 폐하는 자였다. 그의 탄생이나 구별된 삶은 나 예수의 삶을 닮아있다. 그 이유는 그가 나를 예표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예표였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01.3.2.3.14.1.5.1. 탄생


사무엘은 나와 같이 탄생에 어려움을 겪었다.

ㄱ. 나 예수

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천사의 잉태 예언을 받고 믿음으로 결단하였다.
그녀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처녀의 몸인 줄 알았지만 믿음으로 서원하고 아이를 잉태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낳을 아이가 우리(하나님)에게 드려진 자임을 알았다.

ㄴ. 사무엘

사무엘의 어머니는 한나다.
그녀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믿음으로 서원하고 아이를 잉태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우리(하나님)에게 드렸다.


01.3.2.3.14.1.5.2. 성장


부모를 떠나 성전에 거함


ㄱ. 사무엘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삼상 2:11)


ㄴ. 나 예수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그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2:42-43 )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과 은총을 받음


ㄱ. 사무엘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삼상 2:26 개정)

ㄴ. 나 예수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개정)


01.3.2.3.14.1.5.3. 영접받음과 버림받음


온 이스라엘 위에 세워짐


ㄱ. 사무엘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 위에 선지자로 세워짐


ㄴ. 나 예수

나 예수는 온 이스라엘 위에 메시야로 세워짐



백성에게 버림받음


ㄱ. 사무엘

사무엘을 백성들이 버리고 왕을 구함


ㄴ. 나 예수

나 예수는 백성들이 버려 십자가에 못 박음




01.3.2.3.14.1.5.4. 다시 세움


나 예수와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버림 받았으나 다시 우리(하나님)가 세워 백성들 위에 주권자로 세웠다.


ㄱ. 사무엘

사무엘은 사울왕을 세우고 폐했으며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자가 되었다.


ㄴ. 나 예수

나 예수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 그러므로 아담의 자손 즉 벤 아담, 인자로서 만유의

왕이 되었다. 나 예수는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아담, 즉 두 번째 아담으로 왕이 되었다.

또한 인자로서 우리(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만유의 통치자가 되었다. 인자인 나 예수의 아래에는

교회가 있다. 그리고 인자인 나 예수의 위에는 우리(하나님)이 있다.





01.3.2.3.14.1.5.5. 삼중직=그리스도


사무엘은 기름 부었다는 말이 성경에 없다. 그러나 그는 사사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우리(하나님)를 섬겼다. 왕을 세우고 폐하는 자로 왕보다 위에 있는 자로 사용되었다.

원래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는 전통적으로 기름을 붓는다. 그런데 생각하여 보라. 나 예수는 언제 기름 부음을 받았는가? 신약 성경에 내가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말은 없다. 역사에서 나 예수는 기름 부음을 받은 적이 없다. 또한 나는 구약 율법제도의 제사장으로 섬긴 일이 없다. 사람들이 나를 선지자로 여겼지만 나는 선지자로 기름 부음을 받은 사실도 없다. 나는 왕으로도 기름부음을 받은 일이 없다. 그러나 나는 첫 아담 후에 난 두 번째 아담으로 온 세상을 정복하여 다스리는 자가 되었다. 나는 두 번째 아담으로 왔으므로 합법적인 만물의 왕이다. 아담에게 왕권을 속여 탈취한 사탄은 나 두 번째 아담이 옴으로 그 권세를 빼앗겼다. 내가 인간으로 갔으므로 그는 내가 있는 날 즉 빛의 곳, 낮에는 어둠이 물러가 권세를 잃었다. 그리고 나를 믿는 자들이 거듭나 두 번째 아담인 나 예수에게 접붙여지면 그들이 빛의 아들들이 됨으로 어둠은 물러가 권세를 잃는다. 그러므로 회복은 오직 설계된 대로 아담의 후손들로 말미암는다. 나는 세상과 사탄과 죄악의 육신과 싸워 마지막까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종하여 승리하였다.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부활의 영광을 얻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인간들을 대신하여 치른 희생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나 예수로 인하여 아담의 권세를 얻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인자 즉 아담의 후손이다. 오직 사람(히 아담)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또한 그 아들 됨으로 인해 왕권을 얻는다. 나 예수는 참 사람으로 와 두 번째 아담임으로 진정한 왕이다.

또한 나는 너희 죄를 대신하여 나의 몸으로 희생의 제물이 되어 제사를 드린 완전한 제사장이다. 나는 내 몸을 속죄의 제물로 드려 너희 죄를 사했다. 또한 나는 화목의 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너희 죄인들의 사이를 화목하게 하였다. 나는 나의 몸을 드려 죽음으로 죄의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나는 의인이므로 죽음이 나를 가둘 수 없어 부활하였다. 이로 인해 나를 믿는 자들은 나의 의를 인하여 죄의 사람은 죽고 새 피조물로 부활한다. 법적 선포가 이루어 짐으로 죄인의 육체가 살아 있지만 법적으로는 죄인은 죽는다. 그 법적 권세를 죄인이 죽어 능히 죄를 이긴다. 그리고 거룩한 영 삼위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나는 인간으로 남으로 아담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그리고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완전한 삶을 이루었다. 우리(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여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육체를 이김으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 나는 신이므로 신의 아들로 태어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신의 아들인 너희를 위하여 아들로 태어나 완전함을 얻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공로는 너희 것이 되어 너희는 완전한 아들들이 된다. 진정 옛 생명이 죽고 새 생명으로 거듭난 자는 아들의 능력을 얻는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며 나 예수의 공로를 힘입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들은 두 번째 아담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아들들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린다.

나는 하늘에서 직접 본 것을 성령의 한량없는 부어짐으로 대언한 완전한 선지자다. 구약의 모든 종들은 하늘의 것을 보지 못하고 우리(하나님)에게서 들은 것을 전하였으나 나 예수는 하늘로서 내려와 하늘의 것을 말하였는데 인간 선지자와 같이 한량없는 성령이 부어짐으로 그 모든 진리를 말하였다. 그러므로 나만이 완전한 것을 전하였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단지 나 예수의 그림자일 뿐이다. 나는 완전한 선지자로 하늘의 일을 말했으며 완전한 구원을 풀어 이 땅에 선포함으로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는 거듭남을 계시했다. 그 진리로 세상은 빛을 보았고 빛으로 나아온 자들은 완전한 생명을 얻었다.

사무엘은 구약에 삼중직 즉 그리스도의 직분인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했다. 사무엘과 나 예수 모두 인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다. 오직 우리(하나님)가 성령을 직접 부었다. 삼중직분은 기름 부음을 받아 세워지며 그 역할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돌이켜 회개하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그들과 우리(하나님)의 사이를 중보하여 중계하여 사귐이 있게 하는 것이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로 이 직분을 행하여 우리의 구원의 예표가 되었다.

구약에는 수많은 나 예수의 예표의 인물들이 있어 내 백성들을 구원했다. 그 후 나 예수는 단 한 사람 완전한 구원자로 단 번에 완전한 구원을 이루었다. 오직 나 예수만이 단 하나 원형이다. 그리고 나 이후에는 내가 이룬 구원으로 수많은 그리스도인 즉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 또다시 나 예수의 구원을 이룬다. 이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와 같이 그 끝을 알 수 없다. 이렇게 구약의 수많은 예표의 사람들과 신약의 수많은 참 그리스도인들은 나 예수의 구원을 열방에 풀어놓는 나 예수의 그림자들이다. 오늘도 너희는 회개하여 거듭난 자가 돼라. 그래서 오늘이라는 날들에 너희 빛을 등경 위에 두어 세상에 나의 구원을 비추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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