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2.3.14. 사무엘의 연대기 4

by 에스겔

01.3.2.3.14.3.2. 사무엘서의 저자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는 원래 한 권의 책이다. 코이네 헬라어(그리스어) 번역본에서 상하를 나누었고 영어도 이를 따라 상하를 나누었으나 원래는 하나의 책이다. 사무엘서는 사무엘과 사울, 그리고 다윗의 연대기가 담겨 있다. 상하권을 구분하여 설명하면 사무엘상은 사무엘과 사울과 다윗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고 사무엘하는 다윗에 관한 기록이다. 열왕기상에도 다윗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 등장하지만 이는 솔로몬이 왕이 되는 과정에 관한 것으로 사실상 다윗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솔로몬에 관한 이야기다. 이렇게 하여 사무엘서에서는 세 인물의 시대를 보여준다. 그런데 사무엘서의 저자인 사무엘 자신은 사무엘서가 끝나기도 전인 사무엘상 25:1에 이미 죽었다. 사울의 실패 후에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으나 아직 다윗이 왕이 되지 못한 시기였다. 그렇다면 사무엘 사후에 기록된 것이 확실한 사무엘상 25-31장과 사무엘하는 누가 기록하였는가? 확실한 것은 사무엘은 아니다. 심지어 사무엘이 죽기 전의 기록에도 사무엘 시대에 기록하지 않은 내용들이 등장한다.

사무엘과 같은 형체를 접신하는 여인이 불러 사울을 만나게 한 일이 있었다. 무당에 의해서도 귀신이 불림을 받는데 그렇다면 선지자들이 이와 같은 일을 하여 죽은 이후의 사무엘이 사무엘서를 기록하게 한 것인가? 귀신 접하는 것은 분명 율법에 금한 것이다. 또한 귀신 접한 자를 통해 불려 나온 영도 살았을 때와 동일한 자가 아니다. 동서양의 수많은 샤먼들이 죽은 자를 불러 귀신 접하는 일을 한다. 한국의 한 풀이 굿에도 귀신 접하여 귀신의 한을 풀어주는 푸닥거리를 한다. 이렇게 귀신 접한 자들은 생각보다 많고 인류의 세계관에 사실로 뿌리내렸다. 또한 죽어서 귀신이 된 자가 산 자를 만나러 오는 것도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속이는 자가 속이는 것이다. 온갖 거짓 신들을 만들고 그 거짓 신을 섬기는 종교를 만들어 내는 사탄과 그 졸개 타락한 천사들의 속임이다. 원래 사탄은 거짓말하는 자다. 인간들을 속여 인간들을 통해 세상을 지배해야 하는 귀신들은 언제나 거짓에 능통한 자들이다. 저들이 죽은 자를 가장하고 신을 가장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인류를 속여 조종하기 위함이다. 앞에 거짓 종교의 메커니즘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는데 사람이 죽어 후에 귀신이 된다는 것과 거짓 신에 관한 속임들은 거짓 종교의 메커니즘에 핵심적인 기반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계관 속에 빠져 사는 자들은 온갖 어리석음에 헤매이게 된다.

사무엘서는 사무엘의 기록과 후대의 기록을 합한 것이다. 저자가 하나가 아니다. 그렇다 하여 영감 된 책이 아닌 것은 아니다. 역사서란 역사의 현장에 있던 자들이 기록하고 그들의 기록을 그들의 사후에 정리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무엘서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편집되었다. 물론 역사서라 하여 모두 여러 사람의 저자들의 저작들이 합하여진 것은 아니다. 창세기와 같이 역사의 현장에서 훨씬 후대의 사람인 모세가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창세기의 저자는 모세 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볼 때에 너무 편협한 생각과 저자나 기록된 관점에 대해 집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심지어 기록자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경우에도 그러하다. 성경에 대한 증거자는 역사적 기록이나 저자의 신빙성이 아니다. 물론 그것도 고려할 대상이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살아서 지금 그것을 증거 하는 우리다. 우리가 바로 가장 강력한 성경의 영감성을 증명하는 증거다. 우리의 증거를 알지 못하는 자는 우리를 본 적도 없는 자다. 그러한 자들은 우리를 알지 못하므로 그들과는 더 이상 진리를 논할 가치가 없다. 또한 논할 방법도 없다. 고고학적 증거나 기타 기록들은 단지 성경을 연구하기 위한 배경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으로 성경을 증명하려는 자들은 이미 우리(하나님)의 형용을 보지도 못한 어리석은 자일뿐이다. 역사 연구는 사실 추정일 뿐이다. 100% 사실은 역사 연구로 찾을 수 없다. 이는 인간의 한계로 인한 것이다. 과거는 지나간 것으로 그곳으로 돌아가 확인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또 그 현장에서 팩트를 보아도 그것을 기록할 때는 기록자의 역사관이 반영된다. 그러므로 치우친 경우가 많다. 심지어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서북공정과 같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경우들이 많아 기록 자체로는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가들은 과거 역사 탐구를 과거의 기록들과 고고학적 증거들을 상호 대조하여 얻어진 것으로 받아들인다. 역사적 탐구에 의해 형성된 역사는 사실이 아닌 사실에 근접한 추론으로 받아들인다. 결코 자신들이 100%의 진실에 접근했다고 확신하지 않는다. 저들은 지식이 있고 전문적 분석력을 가졌으므로 자신들의 한계를 확실히 안다. 단지 비전문가들만이 역사 기록의 100% 진실성을 믿는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실성을 인간이 증명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특히 교만한 인간 하나가 어줍잖은 지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인간들은 학자도 아니면서 자신이 성경의 진정성을 섣부르게 판단한다. 인생 참 교만하고 어리석다. 전정 지혜롭고 명철한 자들은 그렇게 미련한 교만에 빠질 수 없다. 미루어 짐작하여 자신의 주제를 알고 그 가운데서 진실을 파악하려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아는 겸손을 갖추고 있다.



01.3.2.3.14.3.3. 사무엘서의 역사적 배경


사무엘은 사사기의 시대를 지난 후에 기록되었다. 룻기의 끝자락을 잡고 있는 책이다. 사실 룻기에 등장하는 보아스는 룻기의 마지막에 아들을 낳는데 그 아들이 오벳이다.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그러므로 룻기 오벳의 탄생과 오벳이 장성하여 낳은 이새와의 간격만큼 사무엘서는 룻기와 시간적 격차가 있다. 다윗은 사울이 즉위하고 10년이 지난 후에 태어났다. 사울이 정확하게 몇 살에 왕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성경에 남아 있는 기록은 그가 40년을 통치했다는 것이다. 엘리는 죽을 때에 나이가 99세였다. 그 당시 사무엘은 어렸다. 아이였다는 것은 10살 이전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추정하며 엘리 90세 정도에 사무엘이 태어났고 사무엘이 늙어 사울을 세웠다. 그때 사울의 나이는 알려져 있지 않다. 사울은 왕으로 세움을 받고 40년을 통치했는데 그의 통치 10년에 다윗이 태어났다. 그후 30년이 흘러 사울이 죽어 사울의 통치가 끝났다. 그 때에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대 왕이 된다. 사무엘은 이미 늙었지만 사울을 세운 후 10년 이상을 살았고 사울 통치 후반 부에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다. 엘리가 죽을 때에 다윗은 태어나지 않았으며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출생도 불분명하다. 성경의 기록을 따라 추론하여 보면 이새는 사울과 비슷한 연배이거나 더 어렸을 가능성이 높다. 사울이 30년을 통치했을 때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이 10대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다윗 위로 7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둔 이새였다. 이새의 장성한 세 아들이 사울을 따라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간 것으로 보아 이새는 이때에 최소 40에 가까운 나이였을 것이다. 물론 어떤 성경 번역본에는 사울이 즉위할 때에 그 나이가 30 또는 40-42세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원어 성경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다. 단지 70인역이라는 그리스어 번역본을 참조했을 뿐이다. 심지어 40-42세였다는 번역은 그 근거가 없는 억측에 가까운 번역이다. 이는 사울의 즉위에 대한 기록이 있는 삼상 13:1절의 원어가 번역하기에 다소 난해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부분적인 성경 본문의 소실로 보고 보충하려는 어리석은 번역의 실수 때문에 생긴 일이다. 이 일을 최초로 시도한 것은 70인역을 처음 번역한 이스라엘인들이 아니었다. 1세기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고 로마의 유대 속주가 멸망당함으로 유대 공동체는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그 후대에 세월이 지나 유대인도 아닌 자들이 70인역 번역본에 첨가한 내용이 즉위 당시 사울의 나이가 30이었다는 것이다. 저들은 이스라엘인도 아니었고 유대의 역사도 알지 못하는 비전문가들이었다. 그래서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오역을 하고 말았다. 어찌 되었던 그 당시 상황이 이러했다. 또한 사무엘과 그 앞의 사사인 엘리가 활동하던 시기는 사사기와 룻기와 같은 역사성을 가진 시기였다. 룻기 4장에 등장하는 베레스의 연대기를 보면 살몬과 라합이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고 오벳은 다윗의 아버지 이새를 낳았다. 살몬과 라합이 시대는 여호수아의 정복 시대다. 그리고 보아스와 오벳과 이새는 사사 시대의 인물들이다. 그리고 다윗은 열왕 시대의 인물들이다.


사무엘서나 그 이전의 사사기와 룻기는 불순종으로 인해 이방 민족들이 쳐들어오면 우리가 사사들을 일으켜 구원해 주는 시기였다. 그런데 사무엘상 8장 이후에는 왕들이 외침을 막았다. 사울이 왕으로 세워진 것이다. 그 이후로는 왕들이 끝없이 일어났다. 백성들이 왕을 원하지 않아도 이미 왕정 지배체제가 형성된 이스라엘에는 이방족속의 압제뿐 아니라 왕의 압제가 계속되었다.


고대 근동의 지리적 특성상 유목민의 약탈이 여전히 성행했고 정착과 이동의 중간성을 지닌 이방족속들도 계속하여 이스라엘을 약탈했다. 블레셋이나 암몬, 모압, 에돔 등과 같은 족속들은 정착과 유목의 중간적 형태를 지녔다. 저들은 정착지를 중심으로 농사와 가축을 기르고 유목도 했으며 자신들의 추수가 지나면 이스라엘을 약탈하기 위해 짧은 기간 동안 이스라엘에 쳐들어 왔다. 그렇게 와서 이스라엘의 전투력을 괴멸시켰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자신들에게 대항할 수 없도록 무기를 만들 수 있는 대장장이나 제철, 금속 제련 기술자들을 끌고 가버렸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철 농기구를 손보기 위해서도 이방 족속에게 가야 하는 번거러움을 격기도 했다. 사울 시대 초기에 검이 사울과 그 아들 외에는 없었던 상황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러한 외침들이 많았는데 상비군이 없어 약탈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이스라엘은 왕을 구했다. 왕이 생기면 왕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상비군을 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유목 세계의 약탈을 막아주는데 효과적이었을까? 결론은 아니다. 게릴라 전을 펼치는 약탈에 상비군은 사실 쓸모없다. 없는 것보다는 나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약탈이라는 것이 전리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 약탈이 끝나면 사라진다. 그런데 상비군의 출동은 너무 느려서 출동하고 보면 이미 도둑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가고 없다. 중국은 이것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소용 없음이 증명되었다. 또 군대를 강화해 유목민들의 본거지를 공격했고 그들을 격퇴했다고 기록하였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흉노는 한나라에 의해 멸망한 것이 아니다. 단지 한나라의 군대가 귀찮게 하니 다른 지역으로 잠시 장소를 옮겨 약탈을 이어갔을 뿐이다. 그렇게 장소를 옮겨 가다, 유럽에 나타났는데 그들은 또 유럽에 중국에 입혔던 피해를 입혔다. 중국이 공주를 볼모로 보내고 막대한 양의 조공을 흉노에게 바쳤던 것처럼 유럽도 그러한 상황에 놓였다. 물론 이스라엘에 있었던 전쟁이 모두 소규모의 게릴라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규모 침략과 약탈이 이루어지는 경우들이 많았다. 이러한 때는 국가 규모의 전쟁이 벌어졌다. 국가 규모의 전쟁에서 상비군을 두고 있는 왕이 전쟁을 이끄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런데 알고 있는가? 왕이 있다고 해서 항상 전쟁에 이길 수는 없다. 상대가 강하면 왕의 상비군도 속수무책이다. 사울도 블레셋의 군대 앞에서 떨었다. 그것도 사사들의 시대에 갈렙이 셋이나 때려잡았었던 수준의 거인 하나 앞에 떨었다. 골리앗이라는 거인 하나에게 눌려 전 군대가 숨어서 떨었다. 원래 전쟁이라는 것이 내가 준비를 하여 군대를 강하게 하면 상대도 그에 따라 더 강한 군대를 기른다. 특히 노략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군대는 더 그럴 수밖에 없다. 또한 이스라엘의 전쟁은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 우리의 보호가 걷혀서 발생하기에 전쟁의 원인 자체가 다르다. 이스라엘이 우리를 잘 따를 때는 우리가 보호하기에 이스라엘은 전투에서 이길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함께 하여 전쟁에게 이기고 이기고 이겨 적들은 결국 처 들어 올 생각조차 못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사사가 세워지면 전쟁이 그쳤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사무엘서 전반부에 엘리와 그 아들들이 실패하고 사무엘이 세워진다. 그 과정에서 엘리의 아들들의 타락과 그로 인한 이방 족속들의 침입이 일어난다. 블레셋이 쳐들어 온 것이다.


블레셋의 후손이 후에 이스라엘지역에 정착하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살았다. 그들의 이름은 팔레스타인이다. 블레셋의 영어식 명칭이다. 이들은 현대 가자지구와 같은 해안 지역에 거주했다. 이스라엘 땅의 비옥한 해안가 평야를 차지한 민족이었다. 좋은 땅을 차지한 족속이다. 그만큼 강한 족속이었다. 히브리어로 블레셋족속은 페얼리스티 또는 필리스티(פְּלִשְׁתִּי)이다. 블레셋 땅은 필리세트(פּלשׁת)이다. 고전 그리스어로는 팔라이스티네(Παλαιστίνη / Palaistínē)였다. 그리고 그리스 알렉산더 제국과 그 후신들의 지배를 받았다. 후에 이 지역을 로마가 차지하면서 이 지역의 이름은 라틴어로 팔라이스티나(Palaestina)가 되었다. 이 명칭은 유대 속주의 3 차례 반란 이후 유대 속주의 이름을 폐하고 이스라엘 지역을 일컫는 명칭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땅도 빼앗기고 자신들의 민족성도 학살당했다. 팔레스타인의 명칭은 현대까지도 이어졌다. 이스라엘은 2000년 가까이 흐른 후 자신들이 쫓겨난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 근거는 성경의 약속이라 했다. 그런데 그 약속은 구약에 주어진 것이다. 그 약속을 준 것도 우리(하나님)다. 그리고 그 약속을 그들의 죄로 인해 폐하고 그 땅을 로마를 통해 멸망시킨 것도 우리다. 만약 우리가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이었다면 2000년 가까이 그들을 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나간 약속을 현대의 약속으로 끌어와 중동에 피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의 의도가 아니다. 저들은 혈통으로도 이스라엘이 아니다. 유전자를 따지자면 지금 이슬람이 된 아랍어를 쓰는 족속들이 구약의 이스라엘과 더 가깝다. 아브라함의 고향이나 아브라함과 야곱의 서자들이 거주한 지역이 아랍이다. 사실 현재 중동의 아랍 족속들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자손들이다. 유럽과 세계 각처에서 온갖 이방족속들에게 강간을 당하여 피가 섞인 현대의 이스라엘과 비교하였을 때 아브라함의 혈통에 더 가까운 자들은 이스마엘의 자손들이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그렇게 멸시하고 적으로 여기는 이슬람이 혈통으로 아직까지 아브라함에게 가장 가깝다. 유대인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누구도 이를 부인할 수 없다. 유럽에서 온 유대인들은 유럽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온 유대인들은 흑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또한 중앙 아시아나 인도의 북부인 파키스탄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은 중앙아시아인들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를 보아도 저들이 유대인들의 후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유럽에서 온 자들은 유럽 강간범들의 아들들이다. 아프리카에서 온 자들은 흑인 강간범들의 아들들이다. 그러니 혈통을 운운하고 과거의 언약을 운운하려는 자들은 그것이 과연 법적으로 유효한지 그것부터 따져야 할 것이다. 어리석은 교회가 현대 이스라엘 인종학살범들의 편을 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어찌 나치가 자칭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방식으로 팔레스타인을 학살하고 있는 강간범들의 아들들의 편에 서 있는가?


과거 구약 여호수아의 정복에서 가나안 7 족속을 멸한 것은 심판의 개념이었다. 그들의 죄악이 관영할 때까지 우리(하나님)는 아브라함과 자손들이 400년 가까이 기다리게 했다. 세상의 모든 나라와 민족들은 죄악이 관영하여 심판을 당한다. 그 과정이 토인비가 말한 민족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현대 팔레스타인에게 행해지는 것은 이와는 무관하다. 단지 인종청소일 뿐이다. 우리(하나님)는 시온주의자들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 일이 없다. 그러므로 구약의 이방 족속에 대한 우리(하나님)의 명령은 현대의 너희와는 상관도 없다. 이를 너희 삶에 적용시키려면 그 시대 이스라엘에게 준 배경을 고려하여 해석을 해야 하고 또 그것을 너희 시대 상황 어디에 적용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대 강간범의 아들들과 같은 인종학살의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사무엘서는 인종청소의 명령서가 아니다. 사무엘서는 인류를 구원하는 구원의 책이다. 그러므로 원래 말한 자의 뜻을 파악하는 석의가 없다면 너희는 아전인수격의 어리석은 해석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구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역사를 통해 구원자인 나 예수가 세상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전하는 책이 사무엘서이며 성경 전체이다.


01.3.2.3.14.4. 법궤



사무엘서의 초반에는 엘리가 등장을 한다. 그런데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엘리는 구원 역사의 주역이 아니다. 엘리의 등장은 사무엘이 선지자로 세워지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앞에서 다른 부분을 관찰하면서 이를 다루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한나는 성막에 올라가 서원기도를 드렸다.

"만군의 여호와시여, 만일 주께서 주님의 여종의 고통을 참으로 살펴보시고 저를 기억하시며 주님의 여종을 잊지 않으셔서 제게 아들을 주신다면, 제가 그를 평생 여호와께 드리고 그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낳은 아들을 성막에서 섬기는 자로 젖을 뗀 후에 엘리에게 맡겼다. 당시 엘리는 성막에서 섬기는 대제사장이었다. 엘리는 이미 자신의 사사 직분을 망각하였다. 그는 제사장으로서도 그 직분을 망각하여 아들들이 우리에게 드려지는 제물을 강탈하고 성막에서 일하는 레위 여인들과 음행을 하는 것을 벌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들어 보면 모든 것이 귀찮은 것 같았다. 게을러 비둔하고 나이가 든 엘리는 늘 성막 문 옆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엘리와 엘리의 아들들의 죄악은 그들에게 심판의 날을 가져왔다. 사무엘과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경고하였지만 그는 그 경고를 귀찮아했다. 믿지 않은 것이다. 안일함에 빠져 있던 엘리와 사무엘은 달랐다.

구체적인 상황 파악을 위해 성경을 보자

사무엘이 성장해 갔으며,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셔서 그의 모든 말 중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으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 받은 것을 알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실로에 다시 나타나셨는데,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해졌다.

이스라엘이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맞아 싸우려고 에벤에셀에 진을 쳤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을 쳤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대열을 갖추고 싸움을 벌였는데,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패하였고, 블레셋 사람들은 전쟁터에서 이스라엘 병사를 사천 명가량 죽였다.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말하였다.

"왜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게 하셨을까? 우리가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가져와 우리 가운데 두어,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하게 하자."

백성들이 사람들을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앉아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왔는데, 그때에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있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으로 들어올 때 온 이스라엘이 큰 환호성을 지르니 땅이 진동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 환호성을 듣고 말하였다.

"히브리 사람의 진에서 나오는 이 큰 환호성이 무엇이냐?"

이렇게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으로 들어온 것을 알게 되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말하였다.

"신이 그 진에 들어왔다."

"우리에게 화가 미쳤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우리에게 화가 미쳤으니 누가 이 강한 신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이 신들은 광야에서 온갖 재앙으로 이집트 사람들을 친 신들이다.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고 대장부가 되어라. 그렇지 않으면 히브리 사람이 너희를 섬겼던 것처럼 너희가 그들을 섬기게 될 것이니, 대장부답게 싸워라."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자 자기 장막으로 도망갔으며, 매우 큰 살육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크게 패하여 이스라엘 중에 보병 삼만 명이 쓰러졌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다. 그날에 베냐민의 한 사람이 진영에서 달려가 실로에 도착했는데, 그의 옷은 찢어졌으며 그의 머리는 흙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 엘리가 길 옆에서 의자에 앉아 살펴보고 있었으니, 이는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를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성읍에 도착하여 보고하니 온 성읍이 울부짖었다.

엘리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말하였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그 사람이 빨리 와서 엘리에게 보고하였다. 그때에 엘리는 구십팔 세여서 눈이 어두워 볼 수 없었다.

그 사람이 엘리에게 말하였다.

"저는 진영에서 돌아왔습니다. 저는 오늘 진영에서 도망 나왔습니다."

엘리가 말하였다.

"내 아들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소식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했습니다. 백성 가운데 큰 살육이 있었으며, 제사장님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고, 하나님의 궤도 빼앗겼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궤에 대해서 말할 때, 엘리가 문 옆의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이는 그가 늙었고 몸이 비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사십 년간 다스렸다.


그의 며느리, 곧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출산이 가까웠는데,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고 자기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진통이 시작되어 주저앉아 해산하며, 죽어 갈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자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그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고, 마음을 쓰지도 않았으며,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부르고 말하였다.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이는 빼앗긴 하나님의 궤와 또 그 여자의 시아버지와 남편 때문이었다.

또 그 여자가 말하였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니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삼상 3:19-4: 22)



이렇게 엘리의 집안이 심판을 당하고 사무엘이 세워지는 시기가 왔다. 그런데 성경은 사무엘이 어떻게 세워지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빼앗긴 법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법궤를 통하여 사무엘이 세워진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회개하고 돌아온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에벤에셀에서 아스돗으로 가져갔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다곤 신당으로 가져가 다곤 곁에 두었는데, 아스돗 사람들이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보니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쓰러진 채 얼굴을 땅에 대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다시 제자리에 세워 놓았다. 그들이 그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보니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쓰러져 얼굴을 땅에 대고 있었는데, 다곤의 머리와 두 손은 잘려서 문지방 위에 있고 오직 다곤의 몸통만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다곤 제사장들이나 다곤 신전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오늘날까지 밟지 않는다.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들을 엄중히 쳐서 아스돗과 그 지경을 악성 종기로 황폐하게 만들었다.

아스돗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는 말하였다.

"이스라엘 신의 궤가 우리와 함께 있어서는 안 되겠다.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의 신 다곤을 친다."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의 모든 군주를 모아 놓고 물었다.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들이 말하였다.

"이스라엘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 가라."

그러므로 그들이 이스라엘 하나님의 궤를 옮겨 갔다.

그들이 그것을 옮긴 후에 여호와의 손이 그 성읍을 치시니 아이로부터 어른까지 악성 종기가 생겨났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냈다.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왔을 때 에그론 사람들이 부르짖었다.

"그들이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고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 가져왔다."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의 모든 군주를 모아 놓고 말하였다.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냅시다. 그것이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지 않게 합시다."

이는 하나님의 손이 그곳을 엄중히 쳐서 온 성읍에 죽음의 환난이 만연해 있었기 때문이다. 죽지 않은 사람들은 악성 종기가 생겨 그 성읍의 비명 소리가 하늘까지 사무쳤다.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역에 머문 지 일곱 달이 되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점술가들을 불러 놓고 말하였다.

"여호와의 궤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것을 제자리로 보낼 수 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점술가들이 말하였다.

"만일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빈손으로 보내지 말고 반드시 그 신에게 속건 제물을 드리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도 낫고, 왜 그분의 손이 여러분에게서 떠나지 않았는가도 알게 될 것이오."

블레셋 사람들이 말하였다.

"우리가 그분께 드릴 속건 제물이 무엇입니까?"

점술가들이 대답했다.

"블레셋 군주들의 수에 따라 금으로 만든 악성 종기 다섯 개와 금으로 만든 쥐 다섯 개이니, 이는 여러분 모두와 여러분의 군주들에게 같은 재앙이 내렸기 때문이오. 여러분은 이 땅을 멸하는 악성 종기 형상과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의 신께 영광을 돌리시오. 그러면 아마도 그분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신들과 땅으로부터 그의 손을 가볍게 하실 것이오. 이집트 사람과 바로가 마음을 완강하게 한 것처럼 왜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완강하게 합니까? 그분께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신 후에야 그들이 이스라엘을 보내어 가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새 수레를 하나 만들어, 아직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먹이는 암소 두 마리를 데려다가 그 수레를 메게 하고, 송아지들은 그것들에게서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그분께 속건 제물로 드릴 금 보물을 상자에 담아 그 옆에 놓은 후 수레를 보내도록 하시오. 여러분이 살펴보아, 만일 그것이 그 궤의 본래의 지역, 곧 벳세메스의 길을 따라 올라가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리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친 것이 그분의 손이 아니라, 그 일이 우리에게 우연히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와 같이 하여 젖 먹이는 암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수레를 메게 하고, 그 송아지들은 우리에 가두었으며, 여호와의 궤와 함께 금 쥐와 종기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에 실었다. 암소들이 벳세메스로 향하여 똑바로 갔으니 큰길을 따라갔으며, 울음소리를 내면서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벗어나지 않았고, 블레셋의 군주들은 벳세메스 경계까지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때에 벳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추수하고 있었는데,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기뻐하였다. 수레가 벳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이 있는 곳에 이르러 멈춰 서니, 그들이 수레의 나무를 쪼개어 암소들을 여호와께 번제로 드렸으며, 레위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와 그 옆에 있는 상자와 그 안에 있는 금으로 만든 물건들을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놓으니, 그날 벳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고 다른 제물도 드렸다. 블레셋의 다섯 군주들이 그것을 보고 그날 에그론으로 돌아갔다.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께 속건 제물로 드린 금 종기는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 가사를 위하여 하나,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 가드를 위하여 하나,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였고, 금 쥐는 요새화된 성읍으로부터 성벽이 없는 마을까지 다섯 군주들에게 속한 블레셋의 모든 성읍 수와 같았다. 여호와의 궤를 올려놓았던 큰 돌은 증거물로서 오늘날까지 벳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있다.

벳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 안을 보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치시니, 백성 가운데서 오만 칠십 명이 죽었는데, 여호와께서 백성들을 크게 치셨으므로 그들이 슬피 울었다. (어떤 사본에는 '오만'이 없음)

벳세메스 사람들이 말하였다.

"여호와 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누가 설 수 있겠느냐? 그분이 우리에게서 떠나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겠느냐?"

기럇여아림 주민들에게 사신들을 보내어 말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 옮겨 가거라."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언덕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두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했다. 궤가 기럇여아림에 머문 날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 이십 년이 되었으니,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찾았다.

그러자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집에 말하였다.

"만일 너희가 여호와께 전심으로 돌아오려면, 너희 중에서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오직 그분만을 섬겨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내실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을 섬겼다.

사무엘이 말하였다.

"이스라엘은 모두 미스바로 모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할 것이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곳에서 그날에 금식하면서 말하였다.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 했습니다."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군주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오자 이스라엘 자손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사무엘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해 주십시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양을 잡아서 여호와께 온전한 번제로 드린 후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응답하셨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리는 동안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다가왔으나, 그날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큰 천둥소리로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패하였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와 벳갈 아래까지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죽였다.

사무엘이 돌 하나를 가져다가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우고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그래서 사무엘이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으로 들어오지 못하였으니,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막으셨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로부터 빼앗았던 성읍들이 에그론에서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로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영토를 되찾았고,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는 평화로웠다. 사무엘이 평생 동안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는데, 해마다 베델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하며, 사사로서 이스라엘의 그 모든 곳을 다스렸고,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그곳에 자기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곳에서도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았다.(삼상 5:1-7:17)



이 과정을 보면 인간이 한 것이 아닌 우리가 한 일이 나온다.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온 것은 이스라엘이 싸워서 다시 빼앗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 일을 했다. 그 결과 사무엘이 세워졌다. 이 사건들의 시작과 끝에는 사무엘이 등장한다.



삼상 3:19-4:1

사무엘이 성장해 갔으며,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셔서 그의 모든 말 중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으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 받은 것을 알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실로에 다시 나타나셨는데,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해졌다.
.
.
.
.

삼상 7:2-17
궤가 기럇여아림에 머문 날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 이십 년이 되었으니,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찾았다.

그러자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집에 말하였다.

"만일 너희가 여호와께 전심으로 돌아오려면, 너희 중에서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오직 그분만을 섬겨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내실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을 섬겼다.

사무엘이 말하였다.

"이스라엘은 모두 미스바로 모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할 것이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곳에서 그날에 금식하면서 말하였다.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 했습니다."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군주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오자 이스라엘 자손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사무엘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해 주십시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양을 잡아서 여호와께 온전한 번제로 드린 후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응답하셨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리는 동안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다가왔으나, 그날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큰 천둥소리로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패하였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와 벳갈 아래까지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죽였다.

사무엘이 돌 하나를 가져다가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우고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그래서 사무엘이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으로 들어오지 못하였으니,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막으셨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로부터 빼앗았던 성읍들이 에그론에서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로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영토를 되찾았고,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는 평화로웠다. 사무엘이 평생 동안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는데, 해마다 베델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하며, 사사로서 이스라엘의 그 모든 곳을 다스렸고,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그곳에 자기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곳에서도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았다



사무엘상 3장에서 사무엘은 성장하며 선지자로 이스라엘에 알려지게 된다. 여기서 더 사무엘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엘리 가문의 몰락과 법궤가 빼앗겼다가, 돌아오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을 통하여 엘리 시대에 타락했던 백성들의 마음도 돌아온다.

그 큰 틀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A 사무엘이 선지자로 온 이스라엘 위에 세워짐(삼상 3:19-4:1)
B 법궤를 빼앗김-이스라엘과 엘리 가문이 인간의 방법을 사용함으로 법궤를 빼앗김(삼상 4:1-22)
b 법궤를 되찾음-인간의 방법이 아닌 우리(하나님)의 방법으로 법궤를 되찾음(삼상 5:1-6:21)
a 사무엘이 사사(통치자)로 온 이스라엘 위에 세워짐(삼상 7)

b 법궤를 되찾음에 해당하는 사건에서는 5라는 수가 반복이 된다. 블레셋의 도성은 다섯이다. 또한 그 통치자도 다섯이다. 블레셋인들이 바친 금 독종은 블레셋의 5 통치자의 수와 같다. 또한 법궤가 머무른 장소도 5개의 성이다. 블레셋의 성읍, 아스돗과 가드와 에그론 3개와 이스라엘 성읍, 벳세메스와 기럇여아림 2개다. 이 다섯이라는 수를 통하여 블레셋 5 도성과 통치자를 심판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법궤로 상징되는 우리(하나님)의 영광을 멸시한 자들에게는 심판이 함께 함을 보였다. 블레셋의 세 성읍뿐 아니라, 법궤를 열어본 이스라엘 벧세메스 성읍의 백성들도 심판을 당하였다. 마지막 다섯 번째 성읍인 기럇여아림의 백성들은 법궤를 거룩하게 구별한 엘리아살을 통하여 지키게 하였다. 그들은 우리의 영광을 존중하고 겸손히 궤를 지켰으므로 그들에게 우리의 궤가 다윗의 때까지 있었다.(대하 1:4)

이스라엘 자신들은 스스로를 의지하여 실패하였다. 이스라엘은 우리에게 묻지 않고 법궤를 들고나가 블레셋에게 심각한 패배를 당하였고 법궤까지 빼앗겼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을 패배시킨 블레셋을 이스라엘 백성 하나의 손도 빌리지 않고 징벌했다. 그들은 우리의 법궤 앞에서 두려워 떨었으며 전쟁의 패배에서 입은 피해보다 더 큰 비해를 입었다. 그 피해는 재앙이었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군사 하나도 없이 그러한 일들을 행하는 것을 보고 우리에게 마음을 돌이켰다. 우상들에게서 돌이켰다. 우상을 섬기는 인간들의 타락에서도 돌이켜 회개하고 우리에게 마음이 돌아왔다.

그렇게 되자. 이스라엘은 미스바에서 블레셋을 무찌르게 된다. 엘리 시대의 이스라엘 장로들은 우리에게 묻지 않았다. 그들 시대의 제사장들은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로 타락하였다. 저들은 우리에게 묻지 않았다. 그러나 미스바에서 사무엘은 전쟁에 앞서 우리에게 태워 올리는 예물(번제)을 드린 후 부르짖었다. 우리는 응답하였고 이스라엘은 승리를 얻었다. 우리는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 블레셋을 우리의 손으로 막았다. 블레셋은 더 이상 이스라엘 지역으로 들어오지 못하였다.


위의 구조는 가운데 있는 B 법궤를 빼앗김b 법궤를 되찾음을 대조하여 구조의 아래위 양 괄호에 있는 A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의 선지자 됨a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의 사사됨을 강조한다. 또한 사무엘이 선지자와 사사로 이스라엘에 함께 하는 것은 우리가 함께 함임을 나타낸다. 사사의 통치를 받으며 이스라엘이 우리와 함께 함으로 평안이 함께 함을 보인다. 이를 통해 우리의 구원이 무엇인지 그 당시의 백성들과 그 후대의 너희들에게 가르친다.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구원은 우리를 앎에서 온다.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을 알고 겸손히 우리의 앞에 나아옴에 있다. 그래서 사무엘은 구원이 필요한 순간에 우리에게 부르짖었다. 우리를 부르는 것이 구원이다. 우리를 찾아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나 예수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심이다. 우리를 부르는 자는 우리의 구원을 얻는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16화01.3.2.3.14. 사무엘의 연대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