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최초의 왕은 사울일까? 아니면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일까?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있는 어머니의 형제들에게 가서, 그들과 외조부 집의 모든 가족에게 말하였다.
"모든 세겜 사람들에게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 모두가 여러분을 다스리는 것과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낫겠습니까?' 말해 주십시오." 하고, 또 "제가 여러분과 한 골육인 것도 기억하십시오."
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이 말을 모든 세겜 사람들에게 전하였더니,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 기울어져서, 말하였다.
"그는 우리의 형제이다."
그들이 바알브릿의 전에서 은 칠십 개를 꺼내 아비멜렉에게 주니, 그가 그것으로 건달들과 불량배들을 고용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고, 오브라에 있는 자기 아버지 집에 가서 자기 형제들 곧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는데 여룹바알의 막내아들 요담은 숨어서 살아남았다.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의 온 족속이 모이고, 함께 가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옆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다. 사람들이 요담에게 이를 알리니,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서서 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외쳐 말하였다.
"세겜 사람들이여,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자기들의 왕을 세우고자 하여 올리브 나무에게 말하였습니다.
'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시오.'
올리브 나무가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내 기름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흔들거리겠느냐?'
나무들이 무화과나무에게 말하였습니다.
'와서 우리 왕이 되어 주시오.'
무화과나무도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어찌 달고 좋은 내 과일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흔들거리겠느냐?'
나무들이 포도나무에게 말하였습니다.
'와서 우리 왕이 되어 주시오.'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흔들거리겠느냐?'
그러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말하였습니다.
'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시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으려면 와서 내 그늘에 피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가시나무에서 불이 나와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다.'삼상 9:1-15 바른)
아비멜렉이 왕이 된 것도 우리(하나님)의 뜻은 아니었다. 사울이 왕이 된 것도 우리의 뜻은 아니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우게 된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백성들 자신들이 우리를 버리고 인간 왕을 요구한 것이었다. 사울은 이 글의 앞 [사무엘의 연대기 1]의 [01.3.2.3.14.1.1. 왕?]에서 언급한 것처럼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비멜렉은 스스로 악한 마음을 품어 스스로 왕이 되려 했으나 사울은 그러한 자는 아니었다. 단지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우리가 사무엘을 통해 세웠다. 그렇다면 사울은 더 나을 수 있다. 그렇다. 사울은 처음에는 왕이 되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왕으로 선택받았을 때 겸손한 태도를 가졌다. 그러나 사울도 결국 타락했다. 그리고 아비멜렉과 같이 왕의 자리를 탐하여 다음 왕이 될 다윗을 죽이려 했다.
사울이 삼상 13-15장의 불순종으로 우리(하나님)와 우리의 명령을 버렸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를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삼상 15:26) 이스라엘 백성과 이스라엘 왕의 조건은 하나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과 세상의 임금 사탄을 따라서는 안된다. 그곳에는 죽음만이 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은 순종함으로 우리의 나라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만유의 창조자이며 만유의 주이다.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다스릴 능력이 있는 전능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우리를 벗어나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를 거역하고 떠난 사탄에게 속한 빛의 결핍, 즉 어둠에 속할 수밖에 없다. 그 어두움은 진실이 아닌 은폐이며 거짓이다. 빛이 없다. 빛이 있어 모든 것을 밝혀 보여주는 진실이 아니다. 그 속임으로 도적질 하는 자, 마귀의 일은 결국 죽음이다. 속여서 빼앗고 결국 그 생명도 빼앗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사탄과 귀신과 그에게 속한 악인들은 지옥으로 들어갈지라도 결코 돌이켜 회개하지 않는다. 또한 복종이라는 말을 경멸한다. 자신의 자존심이 가장 강한 동기이다. 그 깊은 기저에는 교만이 도사리고 있다. 또한 가장 사랑받지 못한 자의 최저의 자존감이 있다. 자존감이 강하고 사랑받은 자는 불필요한 자존심에 자신을 내버리지는 않는다. 주변의 말이나 자기 자존심이 동기가 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자존감이 낮은 자는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힘을 기르고 자신의 명성을 얻기 위해 온갖 추악한 죄를 저지른다.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을 결코 내어 놓으려 하지 않는다. 사울은 어떠한 자였는가? 자신은 왕이 될 자가 아니라고 말했을 때에나, 재비를 뽑았을 때 수레 밑에 숨어 자신을 숨긴 것은 겸손으로 볼 수 있지만 자존감이 낮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사울을 폐하였을 때에 사울은 사무엘의 겉옷을 붙잡았다. 너무 강하게 붙들어 옷이 찢어졌다. 간절했다. 그런데 그 간절함이 진실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사울의 간절함은 왕으로서 자신의 체면과 인기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사울의 말을 들어 보라.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 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사무엘상 15:30)
사울이 우리(여호와)에게 경배하고자 하는 이유는 단지 백성들 앞에 자신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목적 자체가 우리의 영광을 알고 우리의 은혜를 입어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사울은 이제 타락하여 자신의 권세와 명예를 드높이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든든히 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다. 이제 사울은 지배자가 되었다. 양들을 돌보고 지키는 목자가 아니라, 양들을 잡아먹는 약탈자요, 도둑이 되었다. 사울은 우리의 통치도 거부했다. 우리의 통치에 순종하는 왕은 백성을 돌보는 사랑의 목자다. 백성을 위하여 외적들과 싸우는 전사가 된다. 그런데 사울은 이제 자신을 위해 싸우는 자가 되었다. 이러한 사울을 우리가 버렸지만 사울은 자신의 왕좌를 내어 놓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 왕이 될 것이라고 짐작되는 다윗을 죽이려 했다. 사울의 이러한 악함을 알기에 우리는 사무엘에게 다윗이 다음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리지 않도록 했다. 심지어 다윗 자신도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모르도록 했다. 물론 사울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사울은 단지 자신이 왕의 자리에서 버림받을 것임을 알았을 뿐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려는 사무엘은 사울에게 살해되었을 것이다. 그 죄목은 역모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왕으로 세우려 했던 다윗도 역모로 몰렸을 것이다.
다음 성경 기록을 보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는데, 네가 언제까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하고 있겠느냐? 너는 너의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거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의 이새에게 보낼 것이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비해 두었기 때문이다."
사무엘이 말하였다.
"어떻게 제가 갈 수 있겠습니까? 사울이 들으면 저를 죽일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내가 여호와께 제사드리러 왔다.' 하고, 제사에 이새를 초청하여라. 네가 행할 일을 내가 가르칠 것이니, 너는 내가 네게 말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어라."
사무엘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니 그 성읍의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말하였다.
"평안을 위하여 오십니까?"
사무엘이 말하였다.
"평안을 위해서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제사드리러 왔으니 당신들은 스스로 성결케 하고 나와 함께 제사합시다."
그리고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성결케 하고 제사에 청했다.
그들이 왔을 때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생각하였다.
"과연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을 자가 그분 앞에 있구나."
그러나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그의 용모나 그의 큰 키를 보지 마라. 내가 그를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들과 같지 않으니, 사람들은 외모를 보지만 여호와는 중심을 보기 때문이다."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니 사무엘이 말하였다.
"이 사람도 역시 여호와께서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새가 또 삼마를 지나가게 하니, 사무엘이 말하였다.
"이 사람 역시 여호와께서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새가 그의 일곱 아들들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했으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말하였다.
"이 아들들이 전부입니까?"
이새가 말하였다.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보십시오, 그는 양을 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말하였다.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시오. 그가 여기 올 때까지는 우리가 식탁에 앉지 않을 것입니다."
이새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는데, 그는 혈색이 좋고 눈이 아름다우며 외모가 잘 생겼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이니 일어나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의 형제들 가운데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니, 그날부터 여호와의 영이 다윗에게 강하게 임했다. 사무엘이 일어나 라마로 갔다.(삼상 16장)
성경의 기록을 주의하여 읽는 자는 사무엘상 16장 어느 장면에서도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사무엘이 말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1] 그 이유는 이 글을 읽는 모든 자들이 알고 있다. 말을 했다면 다윗도 사무엘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사무엘이 말했듯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기도 전에 사무엘부터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과연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몰랐다. 삼상 16장을 읽어보라. 사무엘은 단지 베들레헴에서 우리에게 제사를 드렸을 뿐이다. 그 제사에 이새와 그 아들들을 초대했다. 그리고 기름 부을 자를 찾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았다. 만약 말했다면 다윗의 집안 전체가 멸문을 당했을 것이다. 그들 모두는 역모에 가담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윗은 그 많은 고난을 무엇 때문에 이겨내었을까? 왕이 된다는 것을 예언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골리앗을 죽인 후 사울의 시기와 미움을 받아 도망 다닌 다윗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그 오랜 세월을 보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다윗에게는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은 특별한 계시가 주어졌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다윗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가 골리앗을 죽일 때에도 알지 못했다. 자신이 이스라엘의 미래의 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자신에게 기름을 부은 사무엘은 아무 말도 없이 자신보다 크고 강하며 아버지의 인정을 받은 형들을 두고서 자신에게 기름을 부었다.
무어라 물었어야 했지만 자신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암몬 왕 나하스에게 납치당하여 강간을 당하다 시피하여 낳은 자신이었다. 자신의 누이들도 나하스의 소생이었다. 어미는 그렇게 납치당하였다가 나이 들어 미모가 떨어지자 나하스 왕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리고 고향 땅으로 돌아와 남편을 찾았다. 나하스의 딸 둘의 손을 잡고 있던 아내를 본 이새는 말없이 아내의 배를 보았다. 아내의 배가 불러있었다. 몇 달 후 아이를 출산했는데 사내아이였다. 이새는 아이의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다. 이새의 다른 아들들도 모두 태어난 사내아이를 미워했다. 심지어 어미가 데리고 온 자신들의 여동생 둘도 미워했다. 어미는 나하스에게 버려지고 본 남편인 이새에게도 버려진 아이가 다윗이었다. 그래서 어미는 이름 없는 아들에게 모든 세상이 미워해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이가 되라고 다윗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새와 일곱 아들들은 어미와 세 이부 남매들을 미워했다. 그래도 다윗의 어미는 일곱 아들들의 어미였다. 그리고 원래 유목민의 전통에는 아내가 납치를 당하였다, 돌아와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아내가 납치를 당한 것은 아내의 책임이 아니라 자신이 아내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렇게 하여 소 집단으로 떠돌던 유목민에게 새로운 유전자가 부어지기에 그냥 묵인했다. 심지어 강간을 당하여 낳은 아이도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였다. 그것이 전통이다. 칭기즈칸의 어머니도 납치를 당해서 칭기즈칸을 낳았다. 그 납치에 대한 보복으로 칭기즈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죽임을 당했고 칭기즈칸은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또 칭기즈칸의 아내도 납치를 당했다가 돌아왔다. 그런데 그때 아이를 임신하였는데 칭기즈칸 자신의 아이인지 아니면 강간한 남자의 아이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도 칭기즈칸은 자신의 자식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유목민들의 전통이었다. 그런데 이방인과 혼인관계를 맺는 것을 금기시하는 이스라엘에서는 자신들의 유목민 전통과 율법 사이에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도 이미 이방인의 피가 흐르는 것이 확실한 잡종이 다윗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다윗은 들에 버려졌다. 이에 대한 언급은 [오경적 구원의 서정 4]의 [01.3.2.3.9.8.3. 다윗:영에 속한 가나안(하늘)의 사람]에 잠시 언급을 했었다. 아비와 형들과 베들레헴 성의 모든 자가 다윗이 이방 잡종임을 알았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에게 기름을 붓는 까닭을 알지 못했다. 자신은 기름 부음을 받을 자격도 없는데 사무엘이 왜 기름을 붓고 있는지 그 까닭을 물을 수 없었다. 사무엘은 베들레헴 장로들도 두려워하는 인물이었다. 제사를 드리겠다고 했을 때 장로들은 그냥 따랐을 뿐이다. 감히 왕을 세우고 왕을 지도하는 선지자에게 무엇을 물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새도 아들들도 감히 질문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방의 피가 섞인 다윗이 까닭을 물을 수 있었겠는가?
사무엘이 떠난 후에도 다윗은 여전히 들에 버려진 상태였다. 그곳에서 그가 기름 부음 받은 이유를 물었지만 우리는 답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말해주는 순간 어린 다윗과 늙어 쇠약해진 사무엘은 사울의 창에 심장이 꿰뚫렸을 것이다.
성경에는 다윗이 자신에게 부어진 왕의 기름 부음을 알지 못했다는 증거가 계속 등장한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다음 대의 왕이 될 것을 알려 주었다면 사무엘은 다윗이 사울에게 죽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알려 주었을 것이다. 먼저 사울의 주위를 피하여 두각을 나타내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기름부음을 숨기지 않았다. 심지어 사울의 앞으로 반복적으로 나갔다.
하프를 들고 사울에게 들린 악신을 쫓아내 주었다. 또 사울의 무기 드는 자가 되기도 했다. 다윗은 자신의 기름부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다윗이 하프를 연주할 때에 악신들이 떠나간다는 소문이 사울에게 까지 들렸다. 다음 성경을 보자.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자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한 영이 그를 괴롭게 하였으므로, 사울의 종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한 영이 왕께 괴로움을 주고 있으니, 부디 우리 주께서는 앞에 있는 주의 신복들에게 말씀하셔서 수금을 탈 줄 아는 사람을 구하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한 영이 왕께 임할 때에 그가 손으로 연주하면 왕께서 나으실 것입니다."
사울이 그의 신복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나를 위해 수금을 잘 타는 자를 찾아서 나에게 데려오너라."
젊은 종들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보십시오, 제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한 아들을 보니, 그는 수금을 연주할 줄 알고 힘센 용사이며 전쟁에 능한 사람이고 말을 잘하며 준수한 사람으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십니다."라고 하였다.
사울이 이새에게 전령을 보내어 말하였다.
"양 떼와 함께 있는 네 아들 다윗을 내게로 보내라."
이새가 떡과 포도주 한 가죽 부대와 염소 새끼 한 마리를 나귀에 싣고 그의 아들 다윗의 손에 들려 사울에게 보냈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서 섬기게 되었는데, 사울이 그를 매우 사랑하였으므로 다윗이 그의 무기들을 드는 사람이 되었다.
사울이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다윗이 내 앞에서 섬기게 하여라. 그가 내 마음에 들었다."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한 영이 사울에게 임할 때마다 다윗이 수금을 잡고 그의 손으로 연주하면, 사울이 상쾌해하며 상태가 좋아지고 악한 영이 그에게서 떠났다.
다윗에게 사무엘이 주의를 준 것 같은가? 결코 아니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단지 기름만을 부었다. 그 기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알려주었다면 사울을 피하라고 주의를 주었을 것이다. 또한 다윗의 아버지 이새나 다윗의 형들의 다윗에 대한 태도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다윗의 아버지 이새와 형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또한 전쟁터에서 골리앗을 때려잡았다. 또 자신이 곰도 사자도 늑대도 때려잡는 기름부음이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다음 구절들을 보자.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서 섬기게 되었는데, 사울이 그를 매우 사랑하였으므로 다윗이 그의 무기들을 드는 사람이 되었다.
사울이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다윗이 내 앞에서 섬기게 하여라. 그가 내 마음에 들었다."(삼상 16:21-22)
여기서 사울은 다윗을 분명히 만났고 그를 매우 사랑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에 사울은 다윗을 알아보지 못한다.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의 머리를 취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져왔으며, 그의 무기들은 자기 장막에 두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에 맞서기 위해 다윗이 출전하는 것을 보고 군사령관 아브넬에게 말하였다.
"아브넬아, 이 소년이 누구의 아들이냐?"
아브넬이 말하였다.
"왕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왕이시여, 저는 알지 못합니다."
왕이 말하였다.
"너는 이 젊은이가 누구의 아들인지 물어보아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 아브넬이 그를 데리고 사울 앞으로 갔는데, 다윗의 손에는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들려 있었다.
사울이 그에게 말하였다.
"소년아, 너는 누구의 아들이냐?"
다윗이 대답하였다.
"저는 왕의 종인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입니다."
다소 주제를 벗어난 것 같은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데 사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책에 언급하지 않더라도 불신자들 조차 모두 아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는 짧게 다루겠다. 그보다 앞 장인 삼상 16장에서는 사울이 다윗을 사랑하여 자신의 옆에 두고 하프를 연주하게 하고 자신의 무기를 드는 자로 삼았다. 그런데 다음 17장에서는 사울이 다윗을 알아보지 못한다. 심지어 골리앗을 죽이기 전에 자신의 갑옷과 무기를 내어 주고 대화도 했다. 또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오는 다윗을 자신의 바로 앞에서 보았다. 그런데 다윗에게 묻는다.
"소년아, 너는 누구의 아들이냐?"
성경 편집자들의 실수일까? 아니다. 단지 사울이 악신이 들려 정신이 오락 가락 하기 대문에 생긴 문제였다. 이 문제는 여기서 일단락해도 되겠다.
그런데 자신의 기름부음을 숨겨야 할 다윗이 사울의 앞에서 골리앗을 때려죽였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지혜로웠을까? 결코 아니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후에 다윗은 사울의 미움을 사고 도망자 신세가 된다.
--다음화에 계속-
[^1]: 이 부분에 대하여는 이 책을 쓰면서 새로 성경을 자세히 관찰하여 발견한 것이다. 이전에는 통상적으로 교회에서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대로 당연히 다윗이 자신이 왕으로 세워질 것을 알았다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발견한 것에 대해 성경의 전후를 살피고 무엇이 더 증거에 근거한 것인지 검토하여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심지어 이 글을 쓰기 이전에 썼던 글들도 다 수정해야 하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리를 발견하였으면 내가 이전에 주장한 오류를 버려야 한다.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의 성경 해석이 완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하여 자신의 오류가 드러나면 언제나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심지어 설교를 하는 목회자도 이와 같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설교를 듣는 성도에게서 배워야 한다. 또 자신보다 더 큰 은혜와 지식과 기름부음이 있는 자가 청중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물은 후에 만약 그를 설교자로 세워야 한다면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아야 한다. 심지어 목회자만이 설교의 강단에 선다는 자체도 사실 성경적이지 않다. 예배는 성령님이 주도하시는 것이고 그날 그 순간의 설교자도 성령님이 정하신다. 성경 그 어디에도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만이 설교해야 한다는 증거는 없다. 단지 로마와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은 카톨릭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단으로 사제주의를 교회에 가만히 들여왔을 뿐이다. 원래는 하나님께서 세운 기름부음을 받은 신약의 성도 누구라도 설교할 수 있으며 안수할 수 있고 세례를 행할 수 있다. 신약의 성도는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백성)이기 때문이다. 교회 조직의 권력을 높인 목적은 로마의 국가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회를 잘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후에는 로마의 권력을 교황이 대체하였으나 권력자를 중심으로 조직을 통제하고 교회를 통해 세상을 조종하고 지배하려는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