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는 바람에 흔들리며 빛을 반사하는 식물들의 빛깔에 관하여
「꽃들에 관하여」라고 했는데 글을 쓴 내용은 꽃만이 아니라 식물 자체에 관해 썼다. 나에게는 모두가 꽃이다. 겨울마다 붉어지는 남천도 나에게는 꽃이다. 심지어 봄에 돋아나는 새싹도 나에게는 꽃이다. 만해는 기룬 것은 다 님이라 했는데 내겐 아름다운 것은 다 꽃이다. 내게 꽃이란 그런 단어다.
우리나라에도 들장미가 있다. 사람들은 장미는 외래종으로만 알고 있다. 그런데 장미로 불려 질 수 있는 식물들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23 종정도 되는 것 같다. 그중 흔히 알고 있는 것이 해당화다. 그리고 들장미가 있다. 이 들장미라는 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찔레꽃이다. 찔레가 장미라고 하면 사람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그런데 찔레가 야생 장미다. 중국 고서에 의하면 찔레가 장미의 야생종이다. 찔레를 개량해서 장미를 만들었다.
찔레나무는 내가 어릴 적 자라던 고향엔 흔한 식물이었다. 심지어 밭둑에 있으면 그 가시 때문에 성가셔서 낫으로 쳐내야 하는 식물이었다. 그래서 살아남는 곳이 산과 밭이 만나는 경계지의 경사가 심한 비탈 버려진 땅이 대부분이었다. 아니면 평지라도 버려진 땅에 가끔 피어있었는데 놀다가 그 가시에 옷이 걸리면 옷이 찢어지기 쉬워서 그 근처로는 가지 않았다. 그런데 봄이 되면 아이들은 그 찔레로 다가가곤 했다. 찔레도 장미라고 꽃을 보기 위해 다가가진 않았다. 그 찔레의 새순을 먹기 위해 다가갔다. 70년대에 태어났지만 내가 살던 곳은 산골이라 그런 것들을 아이들이 간식으로 삼았다. 심지어 봄에 소나무의 새로 난 꼭대기 가지의 껍질을 벗겨 그 속살을 껌 대신 씹기도 했다. 소나무 껍질은 질겨서 먹을 수도 없었다. 그냥 씹기만 했다. 그래도 찔레순은 먹을 수 있으니 좋은 간식이었다. 나중에 찔레의 약성을 한의학에서 찾아보니 구충 효과가 있다고 했다. 나 같이 시골 들판에서 많이 노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이렇게 찔레는 나에게 어릴 적 노는 곳에 흔히 있던 식물이었다.
찔레는 겨울에 그 줄기와 가지가 앙상하지만 줄기가 뿌리에서 무수히 돋아나와 한 뿌리에서 줄기 수십 개가 돋아난다. 뿌리로 번식을 해서 하나로 출발해서 들판을 가득 덮어버릴 수도 있다. 줄기는 봄과 여름에는 푸르지만 겨울에는 붉어진다. 그 색이 아주 아름답게 붉지는 않다. 푸른 줄기의 빛깔이 남아있는 상태로 붉다. 그래서 붉은빛이 진하지 않다. 사실 적색과 녹색은 서로 대비되는 색이라 둘이 대비되면 굉장히 강하고 화려한 색이 된다. 그런데 찔레의 겨울 가지 색은 그런 색이 아니다. 그냥 양쪽 다 색이 옅어지며 섞여서 흐려진다. 그래도 유일하게 그 색이 붉어질 그때가 겨울이다. 겨울에 그 앙상하고 가시가 돋아 무수히 땅에서 난 가지가 흉물스러울 수 있는데 그래도 약간은 붉은색을 가지게 되어 그나마 봐줄 만하다. 도시에서 장미 줄기를 겨울에 잘 관찰해 보면 그 색이 붉은빛을 띠는데 그것이 찔레의 겨울 색이다.
잎은 모두 떨어지는데 그래도 가을에 맺힌 열매가 남아있다. 그 열매가 상당히 붉다. 그 열매가 이 나무가 장미나무임을 증명해 준다. 장미의 열매 모양을 그대로 하고 있다. 아마 장미 열매를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붉고 둥글고 딱딱한 장미 열매의 축소판이 찔레 열매다. 작지만 붉은 그 열매는 새들의 먹이다. 특히 춥고 눈 내린 겨울에는 작은 새들을 살려 주는 귀한 먹이가 된다. 겨울에 눈이 쌓이면 새들의 먹이도 그 속에 다 묻힌다. 추운 겨울 먹이가 없으면 새들은 굶주려 죽게 된다. 그런데 눈 위에 한 번씩 보이는 붉은 열매들이 새들의 배고픔을 덜어 그 생명을 살려준다. 가을의 붉음은 떨어지는 낙엽과 겨울 죽음의 예표지만 또한 그것은 살리는 생명의 색이다. 피 흘림이 있는 그곳에 대속의 생명이 있다. 그 붉음은 다른 생명의 먹이가 되어 다른 곳에 배설되어 또 다른 부활의 씨앗이 된다. 봄이 되면 생명의 싹을 틔우고 부활한다.
그렇게 추운 겨울에도 새들을 살려주는 찔레의 가지는 새들이 기댈 만큼 크고 풍성하지 않다. 가지가 너무 얇다. 아마 나무 종류 중에서는 가장 얇을 것이다. 너무 얇아서 그것을 나무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여러해살이 풀이라고 해야 하는지 망설여질 정도로 얇다. 그리고 그 중심이 되는 줄기가 굵어지는 나무의 특성도 없다. 단지 옆에 또 얇은 줄기 가지가 무수히 많이 돋아 날 뿐이다. 뿌리가 번식을 하고 뿌리를 따라 얇은 줄기가 계속 올라온다. 그런데 약해서 겨울에는 모두 얼어버릴 것 같은 가지가 봄까지 모두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가지 끝까지 봄이 되면 생생하게 살아난다. 큰 나무들도 겨울이 추우면 그 가지 중 일부가 죽는다. 그런데 찔레는 아무리 작은 가지라도 죽지 않고 모두 다 살아난다. 그 생명력이 대단하다. 벌써 봄이 되면 겨울 눈 녹은 물을 머금고 아직 얼어 있을 뿌리에서부터 힘을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생명력을 밀어 올려서 가지의 끝까지 가득 채운다. 그러면 작은 싹의 몽오리가 올라온다. 그 몽오리가 올라오면 붉은 가지의 색이 줄어들고 점점 녹색이 강해진다. 녹색보다는 좀 더 연둣빛을 가지게 된다. 그 빛은 일반적인 연두는 아니고 일반적인 새싹들이 연한 연두에서 초록으로 변해가는 중간쯤의 색이 된다. 몽오리가 점점 커지면 그 속에서 잎이 나온다. 잎과 함께 새해의 작은 잎을 달고 있어야 할 가지들도 나온다. 나무도 작고 그 잎도 작다. 그런데 그 잎의 수는 무수히 많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 작은 잎들이 줄기를 모두 가려버린다.
그렇게 잎이 무성해지면 그 잎이 난 자리들에서 작은 꽃이 피기 시작한다. 그 꽃은 흰색이다. 작은 흰 꽃 안에 연한 노란 꽃술이 있다. 어릴 적엔 그것을 장미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장미라고 하기엔 그만큼 볼품이 없다. 장미는 여러 겹의 꽃잎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색도 다양하고 화려하다. 또 장미 특유의 화려한 웨이브와 주름이 있다. 그 모양새가 장미의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 돋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찔레는 단 한 겹의 작고 흰 꽃잎 다섯 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장미처럼 화려한 웨이브나 주름도 없다. 그래도 그 작은 꽃이 자세히 보면 참 아담하게 예쁘다. 화려함은 없지만 그냥 시골 냇가에 노는 꾸미지 않은 어느 소녀를 닮았다. 흰 피부에 겨자 색으로 끝을 물들인 삼베옷을 입은 듯하다. 어린 아기들처럼 때 묻지 않은 수수함이 있다. 작고 앙증맞다. 사실 풀에서 피는 꽃도 대부분 찔레꽃보다는 크다. 그래서 그 꽃에는 화려함은 없다. 볼 품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꽃의 수가 무수히 많아 그 모인 무리가 크고 화사해진다. 꽃이 한참 필 때는 찔레 덤불 전체를 꽃이 뒤덮는다. 장미 전시회를 가면 들장미의 그런 특성을 이용해서 그 덤불로 터널을 만들고 그 전체를 야생장미꽃이 뒤덮어 화려하게 치장을 하기도 한다. 그 수가 무수히 많기 때문에 그 작은 꽃들이 한꺼번에 모이면 그 흰 빛이 들판에 띠를 두르기도 한다. 비탈에 찔레가 꽃을 피우면 비탈이 흰색으로 물든다. 가시가 있어 사람들에게 푸대접을 받고 들에서 쫓겨나지만 그 쫓겨난 곳이 어디든 질긴 생명으로 살아 희고 화사한 꽃다발 수십 수백을 선물한다. 마치 원수를 사랑하여 그에게 축복을 하는 것 같다. 그 흰 꽃의 빛깔은 목소리가 있는데 좌안 바에즈(Joan Baez)의 노래를 닮았다. 희고 순수한 그 노래의 소리를 닮았다.
찔레 덤불은 처음에는 푸르다가 꽃으로 잠시 흰색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 꽃이 잠시 피고 지면 다시 진한 녹색이 된다. 그 녹색의 빛은 여느 나무의 푸른빛과 조금 차이가 있다. 그 빛이 나무의 잎에서 보이는 빛과는 조금 다르다. 가시 돋친 줄기에 에나멜 광택의 녹색이 있다. 다른 나무는 줄기가 나무껍질에 덮여서 그 푸른빛을 잃어버린다. 일반적인 나무에 푸른빛은 어린 가지나 잎에서만 보인다. 그런데 찔레는 줄기가 커서도 계속 푸르다. 물론 아주 오래된 줄기 중에는 간혹 조금 갈색이 생기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도 나무껍질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얇다. 거의 대부분의 가지는 다른 나무들의 아주 어린 가지나 가지고 있는 특성 그대로 계속 푸름을 간직한다. 그리고 그 줄기가 자라는 것도 다른 나무들의 어린 가지 수준이다. 계속 그 어린 상태를 유지한다. 그리고 그 가지 자체가 자신만을 키우지 않는다. 그 뿌리가 계속 뻗어서 또 그 뻗은 뿌리 위로 다른 어린 줄기가 돋게 한다. 그 줄기도 여전히 어리고 젊은 상태를 유지해 그 빛은 푸르다. 그렇게 한 나무가 수십의 새로운 새 나무줄기를 돋게 한다. 그래서 들판 전체를 뒤덮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뿌리로 연결되어 하나의 나무다. 결코 독립된 다른 나무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찔레는 하나로 자신을 나누어 주어 수십 수백 수천의 생명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생명은 항상 푸르다. 회중교회 출신의 남미 방계혈통 바에즈가 부른 노래의 제목처럼 영원히 젊다. FOREVER YOUNG
여름 내내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덤불은 더 무성해진다. 찔레는 뿌리로 번식을 해서 그 땅을 점령해 버린다. 그 가시가 돋아난 빽빽하고 줄 장미처럼 퍼지는 가지를 가지고 있어서 서로 엉키어 덤불을 형성하면 그곳에 있는 찔레가지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사람이 지나갈 수조차 없게 된다. 찔레가 그렇게 퍼져나가면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숲과 들을 그 찔레가 점령하면 사람들은 숲과 들에 출입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그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찔레가 숲 속에는 없다. 숲과 들의 경계가 되는 곳이나 들판에만 있다. 햇빛이 강하게 비추는 곳이 아니면 찔레는 살지 못한다. 그늘 진 곳에선 죽어버린다. 찔레의 개량종인 장미도 심어진 곳에 햇빛이 들지 않으면 죽어버린다. 그렇게 가시가 돋친 강한 가지를 가진 것 같아도 햇볕이 없으면 앙상하게 말라죽어 버린다. 사람들이나 홍수가 파 해쳐서 황량하게 죽어버린 땅에 풀들이 자라면 그다음에 그곳 땅에 심겨 땅을 그 뿌리로 기경을 하는 식물이 찔레다. 가시 돋친 식물들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사막의 가시나무나 아카시나무처럼. 그렇게 그 땅을 그 뿌리로 뚫고 들어가 기경을 하고 그곳에 유기질의 양분을 축척을 한다. 수분을 뿌리로 받아들여 땅에 머금게 한다. 그렇게 땅이 기경이 되면 조금 더 키가 크고 뿌리가 깊이 내리는 나무들이 살 수 있게 된다. 큰 나무들이 자라서 햇빛을 가리고 그늘을 만들면 찔레는 죽는다. 뜨거운 태양 아래 목마름을 참고 황무지를 많은 물의 땅이 되게 하는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죽음을 맞는다. 어느 나사렛 목수가 생명수가 흐르는 땅을 사람들에게 주려고 자신은 죽음을 맞이했듯이.
그는 척박하고 황량한 들녘 작은 참새들의 거처가 되다, 가을이면 그 잎을 한 없이 붉게 물들여 피 흘려 땅에 떨어진다. 그 붉음은 열매에 가득 모이고 그 가시 돋친 줄기조차 붉어진다. 그렇게 그는 주검으로 우리에게 영원히 말한다. 그리고 봄이면 그는 다시 부활해 푸르르다. 그 푸름으로 영원히 시들지 않는 젊음의 이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