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책하는 것이 도대체 누구에게 필요한 것인가?
1. 코로나 시대에 바뀐 강아지의 습성
3년 전에 키우던 웰시코기는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 외출복을 입는 옷방으로 가기 시작하면 흥분해서 제자리를 뱅글뱅글 돈다. 산책 가는 것을 안 것이다. 양말을 신기 시작하면 온갖 아양을 다 떤다. “나 데려가는 거 맞지?”라는 표정이다. “산책 갈까?” 물으면 웃는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그 표정. 지금 키우는 블랙 시츄는 겁도 많고 의심이 많다. 웬만해선 나대지 않는다. 내가 외출복을 입는 방으로 발걸음을 돌려도 본 척 만 척한다. ‘혹시나’해서 곁눈질한다. 양말을 신으려고 하면 와서 냄새 맡고, 물어보고 그래도 괜찮다 싶으면 침 묻혀보고 한다. 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산책 갈까?”라고 물어도 심드렁하다. ‘아직 확신이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그런데 내가 마스크를 쓰면 그제야 방방 뛴다. “이건 찐이다”라는 표정으로 뱅글뱅글 돈다. 코로나 시대에 바뀐 강아지의 습성이다.
2. 도대체 질책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3년 전 내 생애 처음으로 웰시코기를 키울 때 나는 엄청 많은 잔소리와 질책을 했다. 산책할 때 나랑 나란히 걷지 않는다고 뭐라 하고 다른 강아지를 만나면 마구 짖는다고 뭐라 하고 퇴근하고 돌아오면 거실 한가운데 온갖 잡동사니를 다 모아놓은 것을 보고 잡들이를 했다. 밥을 안 먹으면 “안 먹는다”라고 뭐라 하고 산책하다가 한눈파는 사이 뭔가를 주워 먹으면 “네가 거지냐”라고 길거리에 서서 훈계하고 질책했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자기가 거지 일리 없고 누가 봐도 개인데 개가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런 거 같고 난리냐”라는 표정이다. 실내에서는 죽어도 배변을 안 하니 비가 계속 오는 장마철에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데 안 되겠다 싶어 강아지 비옷을 사 입히고 매일 산책을 했다. 하루는 서로 비를 엄청 맞고 신나게 산책하며 볼 일 보고, 할 거 다 하고 들어와 씻으려고 욕조에 잠시 넣어두고 머리를 수건으로 닦고 있는데 점프 탈출하여 거실을 어슬렁 거리는 게 아닌가? 헐. 나는 이성을 잃고 얼른 잡아 들어 욕조에 던져 넣고 그때부터 씻기는 내내 온갖 질책을 퍼부었다. 분노의 질책을 퍼부으며 씻기니 부드럽고 릴랙스 한 샤워 일리 없다. 폭력에 가까운 손길로 거칠게 씻기며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목청과 과격한 언어로 훈계하며 견성 교육을 했다. 그 웰시코기는 본래 누군가로부터 유기된 아이였는데 그때 받은 상처 때문인지, 아니면 학대 때문인지 주인에게 대들거나 짖거나 반항하는 법이 없었다. 그냥 아무 말 없이 그 모든 말과 거친 손길과 질책을 묵묵히 온몸으로 받으며 견뎠다. 표정은 슬픈 표정도 당황한 표정도 느껴지지 않고 그냥 담담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서 더 슬프다. 내가 그 애를 견뎌야만 하게 했다는 사실이 슬프다.
3. 결국 이해의 문제, 시간의 문제이다.
지금 두 번째 키우는 블랙 시츄에게는 질책하지 않는다. 첫째 웰시코기에게 배운 바가 있어서 일 것이다. 내 질책이 사실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강아지 생애에서 가르쳐야 할 것은 그때그때 몇 가지 되지 않는다. 배변, 배뇨, 식사예절, 소파에 함부로 올라오지 않기, 엘리베이터에서 조용히 앉아있기 같은 것은 반복하면 질책 없이 모두 가르칠 수 있고 시간 지나면 스스로 다 깨우친다. 첫째를 키우고 나니 둘째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도 없고 서로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어 질책할 일도 없다. 결국 이해의 문제이고 시간의 문제이고 기다림의 문제였던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었다.
4. 질책과 짜증은 구분되어야 한다.
살다 보면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질책하는 경우를 가끔 본다. 질책을 한다고 하면 일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호 위계가 명확할 때 질책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질책을 하는 사람은 대상에 대해서 사랑하는 마음, 아끼는 마음, 염려하는 마음이 있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질책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 마음 없이 나오는 질책은 짜증이다. 그런데 짜증과 질책은 가만히 듣다 보면 구분이 된다. 그게 질책이다 싶으면 사랑, 염려, 관심이 본질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때 하는 질책은 그 내용이 다르다. 보통 자신의 사례, 경험 등을 들어 차분하게 설명하듯이 한다. 간절함이 배어 있다. “그가 내 얘기를 듣고 제발 다시는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이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없는 질책, 즉 짜증은 사실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 내가 뭔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거나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 때 하는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의 질책은 ‘그의 잘못된 행동의 재발 방지’보다 ‘내 욕구와 의지의 관철’이 더 중요한 것이 되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태도와 행동, 언행이 점점 폭력스러워지며 과격하게 된다. 그는 그것을 가르침, 질책이라고 말하고 강조하지만 그 질책을 받는 사람은 그게 질책이 아니라 짜증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안다. 개도 안다.
5. 질책하고 싶을 때
지금 갑자기 짜증이 나고 질책하고 싶다면 스스로 중단하고 멈춰 서서 자신을 먼저 되돌아보면 어떨까. 기다려주고 스스로 깨닫도록 은근한 안내와 조언으로 유도하는 게 어떨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스스로 알게 되고, 느끼게 되며, 깨달아 조정해 가는 게 삶이다. 중요한 것은 서로 이해하는 마음과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적절한 힌트 정도는 대화를 통해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질책에 상대가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다면, 견뎌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 순간 그만두고 잠시 떨어져 서로를 이해하고 읽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