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첫 땡땡이
우당탕탕 뭔가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복도에 울리더니, 맞은편에 사는 리사가 문을 열고 나온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Hallo!"
독일인 리사는 심리학 석사 과정을 밟다가 지겨워서 머리 식힐 겸 왔다고 했다.
서양인에게는 한자가 더 머리 아픈 게 아닌가 싶지만 그런 것치고는 꽤 즐기는 눈치였다.
종종 마주칠 때마다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곤 했는데, 어느 날 리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번 중추절에 화롄 같이 갈래?"
가고 싶은 투어가 있는데, 2인 단위로만 예약이 가능해서 혼자라 아쉽다고 덧붙였다.
룸메이트도 없어 무료했던 나는 바로 수락했고 그날 기차표까지 예매했다.
다만 명절이라 기차표가 없어서, 개강 8일 만에 첫 결석을 감행해야만 했다.
학창 시절 내내 결석은 절대 안 하던 나만의 신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여행 당일, 늘 지나쳐만 가던 타이베이 메인 스테이션에서 처음으로 발을 내디뎠다.
학교 대신 기차역이라니. 괜히 낭만적인 기분에 뿌듯해졌다.
검표는 옛날 한국 지하철 개찰구처럼 표를 넣어 구멍을 뚫는 방식이었다. 플랫폼 입장 후 화롄까지는 약 2-3시간 걸리니 뭐라도 사가자 싶어 편의점에 들르려고 했더니 아뿔싸, 편의점은 개찰구 밖에만 있는 거였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검표원에게 물었다.
"혹시 편의점에만 잠깐 들렀다 와도 괜찮을까요? 검표를 이미 해버렸어요."
"외국인이에요? 잠시만요... 저기 아가씨!"
난데없이 역 안을 잘 걷고 있는 젊은 여성을 붙잡더니 나를 근처 편의점으로 데려다 주라는 것이었다.
내가 오히려 더 당황하고 있었는데, 그 여자분은 그냥 별말 없이 나를 편의점으로 데려다주었다.
이게 대만인의 친절함인가! 를 몸소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똑같은 개찰구로 돌아오라는 검표원에 당부에 따라 돌아가니 그는 이미 문을 활짝 열고 손짓하고 있었다.
감사인사를 전하니 웃음으로 답해주신 그 친절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화롄역 앞은 택시 기사들의 호객으로 북적였다.
"택시 타실 분-!"
호객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역 앞 정류장에서 커다란 버스를 타고 예약해 둔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리사와 나는 같은 숙소를 예약하고, 같은 투어를 신청했지만 일정은 각자 다르게 짰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자 나는 자전거를 빌렸다.
대만은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일상화된 나라답게, 대부분의 숙소에서 무료로 대여가 가능했다.
오늘 나의 일정은 딱 하나였다.
'자전거 타고 치싱탄 갔다 오기'!
북두칠성모양의 호수를 뜻하는 치싱탄은 화롄에 왔다면 꼭 가봐야 하는 곳이다.
시내와 가까워서 접근성도 좋고, 무엇보다도 너무 예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겐 꼭 당부하고 싶다—제발 택시나 버스를 타길 바란다.
분명 출발할 때까지는 좋았는데 점점 엉덩이가 아파오기 시작하더니 나중에 가서는 자전거 타고 오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심지어 중간에 자전거 도로도 없어져서 차도로만 달렸는데 지금 생각해 봐도 가슴이 섬찟해지는 경험이다.
하지만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자, 그 모든 고생은 눈 녹듯 사라졌다.
모래 한 톨없이 자갈로만 이루어진 해변, 솔솔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 그리고 은은하게 내리쬐는 햇볕.
그야말로 완벽한 순간이었다.
주변 사람들도 해변에 누워 눈을 감고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나도 그들처럼 몸을 뉘이고 조용히 낮잠을 청했다.
‘낮잠’이라고 예쁘게 포장했지만, 실은 20분 정도 길바닥에서 노숙한 셈이다.
힘겹게 숙소로 돌아와서, 이미 와 있던 리사와 동대문 야시장에서 군옥수수를 뜯었다. 톡톡 터지는 옥수수 알갱이처럼, 기대에 부푼 마음이 영글어가는 밤이었다.
다시 자전거를 밟아 해지기 전 숙소로 힘겹게 돌아오니, 리사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우리는 동대문 야시장에서 산 군옥수수를 나눠 먹었다.
톡톡 터지는 옥수수 알갱이처럼, 내 마음도 조그맣게 설렘을 터뜨리고 있었다.
내일이 기다려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