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균질한 감정과 인식을 옹호함
종잡을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대상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진자의 추처럼 왔다 갔다 할 때도 있고 이해가 안 되는 모순된 상황을 스스로에게 이해시켜야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는 자신의 마음이 자기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 죽다」는 이처럼 종잡을 수 없는 마음에 관한 소설입니다. 작가 자신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주인공 아센바흐는 자신의 분야에 업적을 쌓았고 그 기반이 엄격한 도덕주의, 고귀함과 품위에 있다는 것을 인식한 50대의 작가입니다. 그런 그가 ‘창백하면서도 우아하고 내성적 면모가 엿보이는’ 열네 살 미소년을 사랑하면서 느끼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소설입니다.
5개 장으로 구성된 소설은 시간순으로 전개됩니다. 제1장은 아센바흐가 느끼는 작가의 고뇌, 그중 창작의 추동력인 ‘정신의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인한 지나친 피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복의 방법으로 여행을 생각합니다.
제2장은 작가 아센바흐에 대한 설명입니다. 극도의 엄격한 도덕주의자이며, 고귀함과 품위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지요. 몸에 칼과 창이 꽂혀 들어오는 치욕적 순간에도 이를 악물고 의연히, 그리고 묵묵히 서 있는 지성적이고 젊은이다운 ‘기상’의 글을 쓰는 사람이지요. 시인 백석의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함’이 생각납니다.
제3장에서 아센바흐는 베네치아 여행에서 아름다운 소년 타치오를 만납니다. 피 끓는 듯한 감동, 기쁨, 영혼의 고통을 느낀 순간이라는 감각적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제4장은 타치오를 사랑하는 아센바흐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세상의 인정을 받은 대가이자 품위 있는 예술가’이며 ‘아이들은 그의 문체를 모범으로 삼아 교육받고’ 있는 주인공이 사회적 질타와 비도덕적임을 감수해야 하는 이 사랑의 감정을 뭐라 할 수 있을까요? 작가도 이런 비난을 의식했는지 ‘늙어 가는 예술가의 탐욕적 도취’라고 표현합니다. 한편으론, 소크라테스와 파이드로스를 언급하며 늙수그레한 남자와 한 소년의 이야기를 사랑스러운 아이를 대동한 현자(賢者)의 모습으로 표현하며 이런 감정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양가적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혼란스럽지요.
그러나 제5장에서는 이런 혼란스러움도 사랑 앞에서 정리됩니다. ‘그 어떤 비굴한 행위조차 사랑하는 이에게는 치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찬사를 받았다’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아센바흐는 더 이상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고귀하고 품위의 사람인 그는 고백하듯 말합니다. ‘우리 시인들이 어리석을 수도, 품위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 우리가 필연적으로 잘못된 길에 빠져들고, 방종해지고, 감정의 모험에 휘말린다는 사실, 우리가 구사하는 문체에서 엿보이는 거장다운 태도는 모두 허위이고 어릿광대짓일 뿐이야.’라고 말이지요. 어찌 보면 나이나 환경을 초월한 사랑 앞에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함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신적 존재라고 말할 정도이니 이해가 되긴 합니다.
종국에 아센바흐는 타치오가 있어 머물렀던, 전염병이 도는 베네치아의 해변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움직임을 멀리에서 천천히 좇으며 잠자듯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마도 전염병으로 죽은 것 같습니다.) 행복한 죽음이었을까요? 아니면 이루지 못한 미망이었을까요?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 죽다」는 단편이지만 그 무게는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글쓰는 사람의 고뇌와 창작의 고통에 대한 서술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글은 매우 철학적입니다. 거기에 주인공의 심리 표현은 작가가 글에서 언급했듯 대중이 찬사를 보내는 진정한 이유인, ‘눈금으로 잴 수 없는 어떤 것, 바로 「공감」’을 끌어내고 있습니다.
종잡을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그 괴로움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