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난다’는 건 ‘끝에서 난다’는 것
그러니 이 이야기가 끝난 후 내 앞에 나타난 게 천국으로 직진하는 길이 아니었음을 당신도 알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모든 헛디딤과 뒤틀림이 적절히 예비된 옳은 길로 들어섰다고 믿는다. (357쪽)
1980년대 조그만 시골에서 나고 자란 친구가 있습니다. 문화생활은 학교에서 실시하는 단체영화 관람과 늦은 저녁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전부였지요. 가끔 사람구경하러 인근 도시로 가곤 했습니다. 그 친구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유는 작은 마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었지요. 도시로 대학을 진학하면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답답함이었을까요? 살던 마을에서 벗어나려는 그 친구의 속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있잖아요. 이심전심 전해지는 마음의 소리 같은 것 말입니다,
오테사 모시페그의 소설 ‘아일린’에서 주인공 아일린은 ‘인생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살던 X빌을 떠나려 합니다. 원만하지 않은 가족과의 관계, 외모에 대한 열등감, 사랑받고 싶은 마음, 세상에 대한 냉소와 허무 혹은 적대감 등 많은 것들이 아일린의 마음을 흔들고 있지요.
처음에는 불안해서 겁먹었다가 절망으로부터 힘을 얻어 절벽에서 뛰어내렸으나 결국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만 사람 같았다. 정신이 여기저기 배회했다.(32쪽)
1964년, 24세 아일린의 마음입니다. 흔들리고 넘어지는 청춘의 모습이 엿보여 안타깝기도 하고 아슬아슬하기도 합니다. 소설은 아일린이 살던 마을인 X빌을 떠나기 전 크리스마스까지 7일 동안의 이야기이며 요일별로 전개됩니다. 매일매일 직장과 집에서 만나는 사람과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아일린이 X빌을 떠나게 되는 마음이 드러나지요. 살던 곳을 떠나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두고 온 곳에 대한 미련도 있을 것이고 도착할 곳에 대한 불안함도 있을 터입니다. 그래도 떠나는 건 단절의 시간을 통한 성장 때문이 아닐까요? 마치 씨앗이 죽어야만 싹이 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소설의 절정은 ‘크리스마스이브’라는 장입니다. 아일린의 욕망과 분노가 스릴러 형식으로 전개되면서 속도감 있게 읽힙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행복해야 할 크리스마스에 가장 비참함을 머금고 마을을 떠나는 아일린, 하지만 그녀에게 그날은 새로운 시작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자신을 본 날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문장이 눈에 띄네요.
모든 방들, 모든 의자와 선반과 전등, 벽과 찌걱거리는 나무바닥, 닳아빠진 난간이 전부 내게 의미가 있었다. 그 후 몇 주, 몇 달을 그곳을 생각하며 눈이 빠지도록 울었지만 그날은 그저 엄숙하게 작별을 고했다. 그 밤 처음으로 진정한 나 자신을 보았다.(360쪽)
소설 속 아일린은 상처받은 영혼입니다. 가족으로부터, 직장 동료로부터 말이지요. 타인으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고, 그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아일린은 우리 인생에서 한 번쯤 만나는 우리의 데스마스크일 수 있습니다. 젊은 날, 나는 왜 그럴까? 내 인생은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되돌아보면 인생이란 게 부침이 있는 것이니, 길게 보면 지금의 상처가 인생의 한 면임을 알게 된다면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설 아일린은 그런 의미에서 독자에게 위로를 주는 것 같습니다.
박노해 시인의 글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려 합니다.
‘끝난다’는 건 ‘끝에서 난다’는 것
끝에서 둥근 새로운 시작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