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 환하게 빛나는 삶. 오늘이 그날이야
(폴 오스터, ‘바움가트너'를 읽고)
지난달 아이유와 박보검이라는 배우가 출연한 ‘폭싹 속았수다’라는 드라마를 눈물과 웃음으로 보았습니다. 노년에 이른 주인공이 살아온 날들을 회상하는 내용입니다. 목숨을 건 사랑과 자식을 가슴에 묻는 고통과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그리고 이 모든 걸 안고 살아낸 삶에 대한 오마주 같은 드라마입니다. 드라마 말미에 죽음을 맞이하는 남편이 남겨진 아내를 걱정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눈물로 떠나보내지요. 서로에 대한 마음이 절절합니다. 그 마음이 살아있는 자나 죽은 자 모두를 따뜻하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마음에 대한 소설로 폴 오스터의 ‘바움가트너’가 있습니다. 10여 년 전 아내를 사고로 잃은 주인공 바움가트너가 삶을 반추하면서 써 내려간 잠언 같은 소설인데요. 폴 오스터는 이 ‘마음’을 ‘감정적 진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가 그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알고 있는, 그녀 생각을 하고 있는 그를 그녀가 느낄 수 있는, 그녀 생각을 하고 있는 그를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대안 세계를 그가 떠올렸다면 거기에 어떤 진실이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과학적 진실은 아니겠지만, 입증 가능한 진실은 아니겠지만, 감정적 진실은 있을 것인데, 결국 중요한 건 오직 그것뿐이다.(81쪽)
아내를 잃은 바움가트너의 어수선한 일상이 소설 첫 장면에 나옵니다. 아침으로 먹을 달걀 두 개를 태우고, 달걀을 담은 뜨거운 냄비를 맨손으로 들어 올리다 데고, 계량기 검침원이 방문한다는 사실을 잊고, 계량기가 있는 지하실로 가다 계단에서 구르기까지 합니다. 몇 년간 아내를 잃은 상실감은 바움가트너의 삶을 부정적으로 지배하지요. 그런데 꿈속 아내와의 조우에서 바움가트너는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앞서 말한 ‘감정적 진실’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이런 감정적 진실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소설은 아내 애나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그녀의 어린 시절과 그녀를 만나게 된 일, 그리고 결혼하는 것,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직장을 얻게 된 날 등등을 매우 긴 문장으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이 결국 우리의 삶이 되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 근거가 됨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런 일상을 함께한 누군가가 있다면, 그리고 그와 함께한 지나온 날이 환하게 빛나는 기억으로 남는다면, 소소하지만 자주 이런 기억들로 삶이 채워진다면,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번지는 기억이 많아진다면, 사실관계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저 행복했다는 느낌만 남는다하더라도 삶은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이제 세부적인 것은 기억에 없지만, 한 가지, 어딘가에서 차를 세우고 피크닉 점심을 먹었던 일, 모래가 많은 땅에 담요를 펼치고 애나의 아름답게 빛나는 얼굴을 건너다보았던 일은 떠오른다. 그때 그는 강렬한 행복감이 큰 물처럼 밀려오는 바람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자신에게 말했다. 이 순간을 기억하도록 해, 얘야, 남은 평생 기억해, 앞으로 너한테 일어날 어떤 일도 지금 이것보다 중요하진 않을 테니까.(242쪽)
그러니 이제 감정적 진실을 위해 인간은 홀로 살 수 없으니 서로 사랑하되, 상실의 순간을 버틸 소중한 기억을 많이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후 ‘마침내 더 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일어나 떠나면 그뿐’인 삶을 받아들이면 될 듯합니다. 미련 없이 후련하게 떠나는 삶 말입니다. 폭싹 속았수다의 주인공들의 삶도 그런 듯하여 부러웠습니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분들에게 폴 오스터의 ‘바움가트너’는 한 가지 방향을 제시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며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 말입니다. 폴 오스터의 유언 같은 소설이니 한번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