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담하는 딸이다

with 글 쓰는 딸들

by sunshine

나는 나를 그린다.

나는 자주 혼자이고,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프리다 칼로-

내 직업은 심리상담사다. 나는 마음을 상담하는 딸이 되어있다. 처음부터 심리상담을 전공한 것은 아니다. 40대에 갖게 된 두 번째 일이다. 어려서부터 취미도 다양하고 좋아하는 것도 다양했지만 지속하는 힘이 부족한 내가 어떻게 상담사가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너무도 많이 우려내어 이제는 껍데기만 남아 너덜너덜해진 어머니 이야기를 다시 해야겠다.


함께 한 시간만큼 관계도 깊어지고 있는 책 읽는 모임에서 함께 읽은 ‘글 쓰는 딸들’은, 20세기 최고의 여류작가 세 명의 이야기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르그리트 뒤라스, 시몬 보봐르, 가브리엘 콜레트와 그녀들의 어머니 이야기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나는 딸들을 만났다. 그녀들은 빅 마더를 둔 나와 같은 딸이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평소에 좋아하던 작가여서 그녀의 작품과 일생을 알고 있었다. 뒤라스의 작품을 읽을 때면 작가에 대한 해설에서 그녀의 어머니 이야기에 머물곤 했었다. 나의 어머니와 중첩되어 보이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글 쓰는 딸들’의 작가인 소피 카르캥은 뒤라스, 시몬, 콜레트가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어머니에게 파괴당하지 않고 유일하게 자기를 지킬 수 있었던 방법을 찾은 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녀들은 글을 써야만 했을까. ‘글 쓰는 딸들’을 읽으면 어머니, 즉 빅 마더의 미해결 된 문제가 자녀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상담하는 딸이 된 과정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결혼에 대한 엉뚱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직업과 나이, 인물 등을 결혼 조건으로 따지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나는 결혼 후 고향을 떠나 소련에서 사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친구들에게도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으며 어떤 남자랑 결혼해야 소련에서 살 수 있을지를 고민했었다. 소련은 지금은 러시아로 불리고 있지만 그때는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이었다. 우리나라와 왕래도 적었고 지금처럼 정보도 없던 때, 어린 내 생각에 그곳은 멀고도 먼 곳이어서 한 번 가면 아무도 찾을 수 없고 왕래도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닥터 지바고’라는 영화를 보고 그 생각은 더 확실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우스운 발상이지만, 그 당시 나는 엄마로부터의 분리는 결혼 후에야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결혼을 하고 소련으로 간다는 것은 어머니와의 단절을 원했던 나의 욕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서사였다. 지금은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남아 강의 중에 종종 이야깃거리로 소개하고 있지만, 그때는 정말 절실했다. 글 쓰는 딸이 된 세 명의 딸처럼 나는 빅 마더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온전한 자유를 위해 상담하는 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무의식을 탐구하고 나의 미해결 된 문제를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임을 알기에 상담사가 된 것이다. 나는 지금 충분히 나의 무의식을 탐구하고 실혐하며 지내고 있다. 나 또한 엄마처럼 빅 마더가 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빅마더를 둔 아이들은 영원한 아이로 살 가능성이 높다. 칼 융은 영원한 어린이를 언급했다. 영원한 어린이로 산다는 것은 심리학적인 어린아이로 궁극적으로는 태아로 산다는 것을 뜻한다. 스스로를 어린이 원형과 동일시하는 사람은 결국 미성숙한 사람으로 자기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어린이 인격을 가진 사람들을 종종 본다. 사회적 나이는 분명 어른인데 내면에 엄마가 살고 있으며 세상을 엄마의 눈을 통해 보는 것이다.

나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자연스럽게 30대에 접어들었고 경력은 단절되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보다 일찍 중년기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고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30대 초반부터 정신적인 위기가 있었다. 20대 후반 안정애착 유형인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비교적 행복한 생활을 유지했지만,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많았다. 외현적으로는 매우 평온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청년기 시도한 적 없는 무절제한 생활로 죄책감과 자기 실망감에 방황하였다. 일반적 기준에서 보면 술을 마시고 사람들과 밤늦게 어울려 노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즐겁고 행복하지 않음에도 지속했다. 결국 ‘나는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맞는가.’라는 자신을 향한 질문을 계속 던지며 괴로워하며 지냈다. 정서적인 안정을 주는 삶을 주체하지 못하고 나는 오히려 방황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에너지 방향의 갈피를 잡지 못해 혼란했던 것이다. 에너지의 흐름이 새로운 정신적 가치를 탐구하는 쪽으로 향하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혼란이 멈췄다. 그리고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기 시작하면서 안정이 되었다. 제대로 에너지의 방향이 흐르기 시작하자 창조적인 내가 발현하기 시작했고 충분히 나다운 모습이 될 수 있었다. 한참을 자신과의 지난한 대립을 하며 상담사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가지 않은 길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중년에야 가능하다는 것을. 청년기에 우리는 그 삶에 집중해야 하기에 앞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다. 숨을 고르며 쉬기도 하고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살피며 나아가도록 세상은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칼 융은 35세에서 40대 후반에 이르는 시기를 중년기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시기로 보았다. 이것은 융의 경험과 중요한 연관성이 있다. 융이 만났던 사회적으로 성공한 중년기의 사람들의 삶의 통찰에 관한 질문을 통해 외부 세계의 적응에 사용되었던 에너지가 새롭게 정신적 내면의 가치로 향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또한 중년기의 정신적 위기를 겪으며 중년기야말로 무의식의 깊은 곳을 탐험하며 개성화를 실현하는 시기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중년의 위기는 일종의 자기 치유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성장하면서 나는 늘 변두리였다. 여자이기에, 둘째이기에 가정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객관화하지 못했다. 나는 진심을 감추고 말을 삼가면서 살아왔다. 그런 거짓된 삶은 나를 괴롭게 했으며 나 자신조차도 나를 수용하지 못하고 비난해 왔다. 중년 이후 나는 주체가 되어 살아가고자 했고 지금 그 과정에 있다. 나를 수용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매번 느낀다. 나를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사랑하기를 매일 연습한다. 돌봄 받지 못했던 나를 돌보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그것만이 나를 인간답게 세우는 방법이다. 나를 비난하지 않고 나에게 친절하기는 오늘도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