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shine Mar 28. 2024

아빠하고 나하고

with 아빠의 밭

     

가끔 콧소리로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다. 마치 나의 몸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무심결에 내 안으로부터 흘러나와 어딘가로 나를 데리고 떠나는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과 같은 노래다. 음악 사이트의 플레이리스트에 저장된 것도 아니고 자주 듣는 노래도 아닌데, 뜬금없이 부르고 있는 나를 종종 발견한다. 그 노래는 바로 ‘아빠하고 나하고’라는 동요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봉숭아도 채송화도 한창입니다.’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가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노래와 더불어 한 장면도 떠오르는데 쪼그려 앉아 화단을 돌보는 아버지의 뒷모습이다. 목장갑을 끼고 모종삽을 들고 있는 모습은 아버지의 시그니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집에 계실 때는 언제나 화단의 나무와 꽃을 돌보셨다. 사실 화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적은 세 평도 안 되는 공간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나무를 돌보는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눈빛이 질투가 장 정도로 애지중지하셨다. 어떤 날은 나뭇가지를 전지하고 어떤 날은 돌들을 이리저리 옮기고 어떤 날은 꽃을 사다 심고 잡초를 뽑으셨다. 어쩌다 나는 은근슬쩍 다가가 “아빠, 이 꽃 이름은 뭐예요? 왜 해마다 나뭇가지를 자르는 거예요?” 하고 말을 걸곤 했다. 나무와 꽃이 궁금했다기보다는 아버지와 이야기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평소에 말씀이 없었던 아버지는 내 질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시곤 하셨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아버지와 마음이 통한다는 생각에 행복하고 편안했다. 


내가 결혼 전까지 살았던 집은 중학교 3학년 때 이사 온 집이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이사를 하면서 부모님이 계속 싸우셨다. 이유는 이러했다. 이사에 제반되는 모든 비용은 엄마가 지출했는데, 막상 집을 계약한 것은 아버지였다. 엄마는 동네도 집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아버지를 타박하셨다. 우리 형편에 형편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하는 그 집이 그냥 싫으신 것처럼 보였다. 온전히 아버지의 취향이었던 그 집을 엄마는 정말 싫어하셨다. 그런데 어린 나는 작은 기와집에서 살다가 단층이지만 양옥이었던 새집이 좋았다. 그리고 좁고 작지만, 회양목과 단풍나무, 목단, 장미 등이 정갈하게 심어진 화단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화단을 가꾸는 그 모습이 정말 좋았다. 가끔 화단 앞에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셨다. 자식들에게 무뚝뚝한 아버지였지만 화단을 가꾸는 그 손길이 부드러워 나는 아버지를 마음이 따뜻한 분으로 기억했다.  


아버지의 정서는 무형의 유산이 되어 나로 하여금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게 했다. 나는 형편상 발코니가 없는 작은 집에 살 때도 화분 몇 개는 늘 책상 위나 주방 옆에 놓았다. 마당이 있는 주택에서 마음껏 꽃과 나무를 가꾸고 싶었다. 그렇다고 요즘 식집사라 불리는 사람들처럼 식물 기르기에 몰입하지는 않는다. 또한 화려하거나 많은 식물을 가꾸지도 않는다. 하지만 식물이 없는 집이란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식물을 돌보는 곳이 나의 숨구멍과 같은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곰곰이 생각해 볼 때 내가 식물을 꼭 집에 두고자 하는 무의식적 행동은 어릴 적 평일에는 엄마의 돌봄 아래 지내면서 주말이면 외지에서 집으로 돌아오시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시간으로의 회귀처럼 생각된다. 두 분이 싸우더라도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마음이 편안했는데, 아버지가 나를 이해하고 좋아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소영 작가의 ‘아빠의 밭’ 그림책을 보다가 울컥했다. 노년의 아버지가 삶의 터전으로 지내고 싶어 했던 곳은 시내 근교였다. 그림책의 첫 장에 그려진 먼 산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꼭 내 아버지 같았다. 작은 텃밭을 일구고 들판을 바라보며 담배 한 대 입에 물었을 아버지가 기억났기 때문이다. 엄마의 반대로 아버지의 꿈은 결국 꿈으로 남았다. 그런데 ‘아빠의 밭’에서 마치 꿈을 이룬 아버지를 만난 듯했다. 그래서일까, 그림책을 통해 어릴 적 나에게 내어주셨던 아버지의 등을 넘어 그 시선을 따라가본다. 전소영 작가는 은퇴하고 청주 근교에서 텃밭을 일구는 아버지를 보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쓰시던 농기구로 할아버지가 일구던 밭을 일구는 아버지를 한 장 한 장 그림에 남겼다고 하는데 참 부러웠다.  


2년 전, 집에서 1시간 정도의 거리에 작은 텃밭을 장만했다. 나는 오랫동안 마당을 갖고 싶어 여기저기 기웃거렸었다. 경제적 여유가 없었지만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작은 정원 갖기의 꿈을 실현하고 싶어서였다. 아내의 꿈을 존중하는 남편의 도움으로 우리 형편에 적당한 가격의 공간을 만났다. 70대의 남자 어르신이 소유했던 땅이었는데 그곳을 들어선 순간 아버지의 정원이 생각났다. 사실 집에서 거리가 멀어 계약을 고민했지만, 단풍나무, 향나무, 회양목, 대추나무, 철쭉 등이 얌전하게 가꾸어진 작은 정원이, 집으로 돌아와서도 자꾸 눈에 아른거려 그곳을 계약했다. 대금을 지불하고 정원에 서서 먼 산을 바라보는데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의 꿈과 더불어서 말이다. 그러다 보니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아버지가 살아계셔서 이곳에 오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밀짚모자 눌러쓰고 꽃과 나무를 가꾸다가 평상에 누워 하늘도 바라보고 손주들 준다고 사과나무도 심었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아버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미안하고 속상했다. 

내가 아버지와 친밀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가정적이지도 않았고 따뜻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를 화난 얼굴로 바라보거나 자신의 화를 푸는 대상으로 대하지 않으셨다. 매우 개관적이었으며 합리적이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 아버지는 정당하고 공평한 분이라고 받아들여졌다. 나는 종종 말한다. 내가 아버지를 좋아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가족을 떠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사랑이 너무 많았지만 잘못된 사랑을 한 엄마와 대조되는 모습이다. 대상관계 심리학자 로널드 위니컷은 대상 추구를 인간의 기본 동기로 보았다. 모성 경험을 중요하게 여긴 그는, 아기에게는 안아주는 환경이 필요하며 그 환경은 아기의 요구에 반응하는 대상으로서의 어머니와 아이가 고요히 있을 때 침범하거나 요구하지 않는 환경으로서의 어머니라고 말했다. 요구하고 침범하던 어머니와 환경으로서 있어주던 아버지와 함께 한 나의 유아기 경험은 결국 통합되지 않고 분리되어 있다고 말하고 싶다. 


아버지는 평생을 엄마와 다투셨지만, 죽을 때까지 엄마 곁에 있고 싶어 하셨다. 돌아가시기 3년 전쯤 인지장애가 왔을 때 2주간 우리 집에 모신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내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엄마 언제 오니?” 묻고 또 물으셨다. 아버지가 싫다고 아들 집으로 피하신 어머니를 찾아 혼자 나서기까지 하셨다. 아픈 아버지를 피하는 엄마가 더 미워진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엄마 곁에 있기를 원하셨다. 아버지에게 엄마는 집이었나 보다. 남편과 아이들이 나를 집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정원을 좋아하는 이유가 진짜 나의 욕구인지, 아버지의 욕구가 반영된 것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그리고 정원을 소유하고자 하는 내 무의식의 근원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저 아버지도 좋아했고 나도 좋아하는 공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일상생활을 하는 공간인 집이 있고 일터인 사무실 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또 다른 공간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나를 좀 더 잘 바라보기 위해 현실의 공간에서 떨어져 나와야 했던 것은 아닐까. 현실과 이상 사이의 틈새 공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 공간에서 나는 낯선 일을 하고 있다. 나물을 캐고, 나무를 돌보고 감자를 심고 캔다. 책과 그림 도구를 싸들고 정원을 향하지만 언제나 내 손에는 모종삽과 호미가 들려있는 것이다. 


이제 아버지의 정원이기도 한 나의 정원은 봄을 기다리고 있다. 어둡고 추운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은 나를 환대한다. 나의 정원에는 올해도 채송화가 활짝 필 것이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 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애들하고 재밌게 뛰어놀다가

아빠 생각나서 꽃을 봅니다

아빠는 꽃 보며 살자 그랬죠

날 보고 꽃같이 살자 그랬죠     

(꽃밭에서/ 어효선 작사, 권길상 작곡)

작가의 이전글 내 안에 공주가 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