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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hine Apr 13. 2024

심리상담사의 신화 읽기

with북유럽 신화

나는 텍스트를 보면 무엇에 홀린 듯 무작정 읽어버리는 습관이 있다. 병원이나 은행 등 일상에서 방문하는 곳마다 비치되어 있는 작은 책자를 짧은 대기 시간에 읽곤 한다. 세계문학을 가장 좋아하지만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는 편인데 그리스 로마 신화는 그다지 손이 가지 않았었다. 딸아이가 어렸을 적 만화로 된 그리스로마 신화를 참 좋아했었다. 그때 나는 신화에 대해 지금처럼 관심이 없어서 아이가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왜 좋아하는지 알려하지 않고 그저 만화책을 읽는 것이 탐탁지 않았었다. 지금이라면 나의 반응이 좀 달랐을 텐데 아쉽다. 

사실 나는 어린 시절 해모수 신화를 참 좋아했었다. 남성 중심의 영웅신화가 대부분이었는데 유화의 이야기는 서정적이면서도 마음을 끌어당기는 무엇인가 있었다.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땅에 내려와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는 이야기를 나는 왜 좋아했었을까. 내 마음의 무엇과 맞닿았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해와 물은 꼭 필요한 원소이지만 성질이 매우 다르기에 섞이지 않는다. 해를 상징하는 해모수와 물을 상징하는 하백을 유화는 동시에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유화가 해모수를 만나 그녀만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뿌리인 아버지를 떠나야 했던 것이다. 그 길은 결코 싶지 않다. 더구나 해모수는 끝까지 유화의 곁에 있지 않는다. 혼자 남은 유화는 고난과 고통을 홀로 견디며 주몽을 낳아 새 시대의 문을 연다. 부모로부터의 독립과 분리를 원하고 진정한 자기의 삶을 꿈꾸던 나의 무의식이 반영된 이야기가 바로 유화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내가 신화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심리학과 연관이 있다. 나는 심리 이론 중 정신분석 이론을 가장 좋아한다. 정신분석을 대표하는 학자로 지그문 프로이트와 칼 융을 뽑는데, 그 둘은 신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프로이트의 오이디 콤플렉스와 융의 원형은 너무도 유명한 개념이다. 무의식이 인간의 본능을 억압한 결과로 본 프로이트는 상징적인 신화를 통해서 인간의 욕망 발산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신화는 대체로 무의식적이며 인간의 본능을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신화에 숨겨진 내재적 차원은 우리 모두의 자전적 이야기가 될 수 있다. 

하나, 둘 읽기 시작한 신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제대로 즐기고 싶어졌다. 그리스 로마신화는 열두 신을 주축으로 정말 많은 이야기가 있으며 그와 관련된 책들이 많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부터 최근의 책까지 다양하다. 몇 권을 선정해 읽고나니 다른 신화에도 관심이 생겼다. 북유럽 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비하면 익숙하지 않았다. 북유럽 신화는 기독교가 북유럽에 널리 전파되기 이전에 수많은 게르만족들이 발원했던 스칸디나비아반도와 덴마크 지역을 중심으로 아이슬란드, 독일, 브리튼 섬, 프랑스 등 광범위한 지역에 퍼졌고 또 그곳을 발판으로 삼고 있다(안인희의 북유럽 신화에서 인용). 그동안 북유럽 신화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이미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우리 곁에 있었으나 모르고 있었다.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영화, 반지의 제왕. 드라마, 왕좌의 게임이 대표적인 북유럽 신화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최근 영화의 메카 할리우드는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영웅에 주목하면서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OTT(over the top) 디즈니플러스에서 로키 시리즈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가까이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닐 게이먼/나무의 철학

책모임에서 함께 읽은 닐 게이먼의 ‘북유럽 신화’는 에시르 족 천둥의 신 토르를 중심으로 오딘과 로키, 프레이야, 헤임달, 티르 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토르와 로키는 같은 에시르 족은 아니지만 오딘에 의해 형제처럼 자랐다. 토르는 로키를 신뢰하지 않지만, 어려운 문제를 당면하면 그에게 먼저 조언을 구한다. 로키는 술에 취해,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책임을 지는 과정에서도 싸움을 부추기고 그것을 즐기는 등 토르의 분노를 유발하는 담당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토르의 강력한 망치, 뮬니르는 아이러니하게도 로키의 사악함에서 만들어졌다. 

토르와 로키를 보면서 그 둘이 힘을 합쳤을 때, 신들의 세상에서도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직하고 성실하며 강력한 힘을 지닌 토르는 신들의 세계를 잘 이끌기 위해 애쓰는 이타적인 신이다. 하지만 그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변덕스럽고 의심이 많고 이기적이지만 상황을 다양하게 보는 로키가 곁에 있을 때 신들의 세계는 더 견고해지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일까 로키는 사라지지 않고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며 토르의 곁에 머문다. 하지만 북유럽 신화에서 로키는 전면에 등장하지 않으며 주류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림자를 담당하기 때문이다. 로키는 변신의 귀재다. 본래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일이 적다. 그대로는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변신해서 나타나는 무의식처럼 말이다. 로키의 자식 중에는 신들의 세상을 집어삼키는 요르문간드(미드가르드의 뱀), 늘 허기진 펜리르, 지옥을 지키는 헬이 있다. 그들을 보면 로키가 빛과 대극에 있는 그림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 라그나로크를 몰고 온 자식들이다. 신들의 세계나 인간의 세계나 언제나 평온하지만은 않다. 그런 세상에서 대극은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림자는 전면으로 나서도 안 되지만, 억압하면 안 되는 것이다. 신화를 읽다 보면 신이나 인간이나 어찌 보면 같은 고통 속에 살아간다는 것에 위로가 된다.   

북유럽 신화 중, 시인의 꿀술 이야기는 운문과 시의 재능을 갖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를 재미있게 풀어내었다.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신이 프로메테우스라면 크바시르는 인간에게 행복을 주고자 했다고 말하고 싶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크바시르가 죽음으로써 만들어진 꿀술은 마음을 표현하고 기록할 수 있는 노래를 하게 한다. 즉 영감을 받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감동으로 전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꿀술을 혼자 독차지하려던 수퉁은 죽고 오딘에 의해 모두 함께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아마도 운문과 시를 잘 쓰는 작가 친구들 생각에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책 속에 몇 개의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생각보다 빨리 달릴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빨리 달리는 티알피이지만 경주에서 진 대상은 생각이었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를 가진 순간의 생각을 붙잡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되새겨보는 문장이었다. 또 하나는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토르조차도 노년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알고 있지만 잊고 사는 것,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사는 삶을 살고자 하면서도 내가 우주라는 큰 세계의 일원이라는 것을 가끔 잊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사진출처: 네이버

누군가는 신화를 가족 갈등의 원형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에 공감한다. 결국 신들 또한 인간처럼 부모에 의해 태어나고 자녀를 낳으며 그 안에서 사랑하고 미워하고 후회하고 깨닫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반복된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미니시리즈 ‘루시퍼’를 흥미롭게 시청했다. '루시퍼'라는 제목에 이끌려 보게 되었는데, 루시퍼는 실낙원에 등장하는 타락천사로, 드라마의 세계관은 이러하다. 신의 자녀로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던 루시퍼가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반란을 일으키고 쫓겨나 지옥을 지키는 악마로 살아간다. 루시퍼는 지옥의 왕으로 군림하며 죄를 짓고 지옥으로 내려오는 인간이 지옥의 굴레에서 살아가는 것을 지킨다. 그러다 루시퍼는 자신이 결국은 신인 아버지의 통제 하에 살아가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고 아버지를 향한 분노에 그동안 살아왔던 삶을 벗어나고자 한다. 그는 인간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자유의지로 선택한다. 6개의 시즌은 지루한 면도 있었지만, 조종당하지 않고 진짜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루시퍼의 삶의 여정을 그려낸다. 흥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픽션이다 보니 여자, 마약, 사랑, 범죄 등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지만 나는 드라마를 보면서 루시퍼의 자기 삶을 실현해나가고자 하는 것에 공감이 갔다. 운명을 거부하면서도 자신의 소명을 찾는 것을 자유의지로 해내고 싶은 욕망을 말이다. 결론은 루시퍼가 지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버지와 연관된 삶이 아닌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고자 했지만 그가 자유의지로 선택한 일은 지옥을 지키는 일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어머니의 조종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나의 삶을 보았다. 그리고 지옥에서 자신의 소명을 다하며 살아가는 루시퍼에게 위로를 받았다. 

신화는 매우 판타지적 요소를 가지고 있어 표면적으로는 현실성이 없어 보이지만, 우리 삶의 원형이 신화라는 것에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인간의 원형적 상황, 즉 욕망, 질투, 사랑, 부모, 형제로 인한 아픔 등을 잘 보여주는 장르가 신화다. 신화는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수천 년에 걸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동안 걸러지고 걸러져 끝까지 살아남은 이야기이기에 원형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신화 읽기는 단순히 과거를 읽는 작업이 아니라고 신화학자들은 말한다. 옛것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도 하지만 지금 현실에서의 나를 점검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잊혀가는 신화에서 심리적 비밀을 하나하나 캐내는 재미가 있다. 모든 이야기가 그러했듯이 신화 또한 내 삶에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의 친구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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