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끼 사건

by 황훈영

나는 결혼이 늦었다. 두 살 터울이었던 여동생이 먼저 결혼을 했다.

아빠는 맏딸인 나보다 둘째가 먼저 결혼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동생에게 결혼식을 미루거나 동거를 권했다.


나는 그때 아빠의 고루한 가부장 의식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동생 앞길을 가로막는 언니가 되느니 집을 나가 살겠노라고 말했다.

말이 독립이지 두 번째 가출을 선언한 것이다.


결국 나의 독립선언은 아빠의 고집을 꺾었다.

그렇게 내 동생은 1995년 5월 어느 날, 아빠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날 시골에서 올라온 친척들은 결혼식장에 도착해서 신부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 기염을 토했다.

아빠는 친척들에게 맏딸인 내가 결혼한다고 알렸던 것이다.


그해 나는 신문사 기자로 일하면서 저녁에 언론대학원에 다녔다.

거기서 대학원 선배였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아빠에게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아빠는 “그런 사람이 왜 이제야 나타났냐”며 만면의 미소를 지었다.

아빠는 그 자리에서 남편을 아빠 형제들에게 소개하는 ‘상견례’날짜를 잡아버렸다.


그런데 사단은 며칠 뒤에 벌어졌다. 아빠가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그때서야 예비사위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진 것이다.

직장이 어디냐? 몇 살이냐? 부모님과 형제는? 고향은 어디냐?

아빠에게 예비 사위의 나이, 직업, 홀어머니, 심지어 경상도가 고향이라는 것까지 모든 것이 기준 미달이었다. 아니 최악의 조건을 갖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빠의 한숨 소리가 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아빠와 나는 침묵의 며칠을 보냈다.

아빠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이왕 늦은 거 좀 더 신중하게 사람을 찾아보는 게 어떠냐.”

아빠가 고민 끝에 어렵게 꺼낸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빠가 느낀 실망감을 위로할 여유도 말주변도 없었다.

냅다 돌직구를 날려 또 아빠에게 정면으로 맞섰다.

“어차피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건데,

반대하시면 감정만 상하니까 그냥 허락해주세요,”

아빠는 불같이 화를 내고 전화를 끊었다.

내 싹수없는 말투가 늘 화근이었다.


드디어 아빠가 잡아놓은 친척들과의 상견례 날짜가 돌아왔다.

일찌감치 큰댁, 작은댁 어른들까지 모두 도착했는데, 아빠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아빠는 그때 건물 리모델링 공사를 하고 있었다.

아빠가 일하는 공사장 근처 한식집을 상견례 장소로 예약해두었다.


나와 남편은 아빠를 모시러 공사장으로 향했다.

불 꺼진 공사장에는 천 가림막만 펄럭이고 있었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엄마는 큰댁 작은댁 어른들께 죄송하다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큰아버지는 오히려 예비사위에게 면목이 없다며 동생의 실례를 부끄러워하셨다.

그 순간 나는 아빠가 몹시 걱정되어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속상한 마음에 어디가서 혼자 술을 드시다가 사고라도 난 게 아닐까 싶었다.


반 시간이 좀 지났을까.

술에 취해서 아빠가 나타났다.

흙먼지가 내려앉은 작업복 차림이었다.

아빠는 공사장 인부들과 저녁식사를 하느라 늦었다고 했지만,

예비사위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었다.


아빠는 그 자리에서 남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맥주잔에 한가득 소주를 부었다.

아빠는 남편과 함께 연거푸 2잔을 마셨다.

그리고 속내를 털어놨다.

“자네, 내 딸 데려가서 눈물나게 한다든지, 처갓집에 돈을 꾸러 온다든지 하면

오비끼로 자네 데갈통을 날려버릴게야. 알겠나?”


친척분들과 엄마는 모두가 기겁했다.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아빠의 거친 말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때였다. “장인어른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남편은 아빠가 따라준 소주를 벌컥 들이킨 뒤, 아빠에게 잔을 건넸다.

남편은 오비끼가 무슨 물건인지도 몰랐을텐데,

아빠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넙죽넙죽 술잔을 받아 마셨다.


상견례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물었다.

아빠가 우리 결혼을 끝까지 반대했으면 어쩌려고 했냐고?

남편은 “그럼 못하는 거지”라며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또 오비끼로 데갈통을 박살내겠다는 게 무슨 말인지는 알았냐고 물었다.

남편은 “그런 일 없게 살아야지”하며 피식 웃었다.


우리는 그렇게 살벌한 상견례를 마치고 속성으로 결혼했다.

물론 시댁과의 상견례는 화기애애하게 이루어졌다.


우리가 결혼한 뒤에 아빠는 맏사위에 대한 애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셨다.

아빠의 화법은 꾸밈이 없었다. 너무 직설적이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아빠에게 사위는 자식이었다.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넘치게 보여주셨다.


아빠는 매주 토요일 아침마다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홍어탕을 맛있게 끓여놨으니 먹으러 오너라.

오늘은 김포로 매운탕을 먹으러 가자.

싸리골 보신탕이 그렇게 잘한다는 데....


주말 아침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남편은 안절부절이었다.

남편은 처가댁과 뒷간은 멀리 있을수록 좋다는 말을 신조처럼 생각했다.

내 생각에는 상견례 때 오비끼 사건이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아빠는 오비끼 사건에 대한 미안함을 만회하고 싶었던 걸까?

늘 먼저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물었고, 우리를 자주 집으로 호출했다.

아빠는 김장김치를 싣고 산비탈에 있었던 우리 신혼집으로 올라왔다.

80kg나 되는 쌀가마를 오토바이에 싣고 올라온 적도 있었다.


아빠는 늘 나의 눈물샘을 터트리는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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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시골에서 부쳐온 쌀가마를 오토바이에 싣고 산비탈에 있었던 우리 신혼집으로 올라왔다. 퇴근 후에 집앞 대문앞에 놓여있는 쌀가마는 또 내 눈물샘을 터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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