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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Dec 10. 2024

돈을 벌어야만 했다. 그냥 살았다.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연예는 뒷전이었다.

다들 20대에 아름다운 연예를 한다고 하지만 나는 달랐다.

우선은 당장에 내가 상환해야 하는 자금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 생활비등을 충당하고 위해서는 일을 쉴 수가 없었다. 공부도 꿈도 다 허상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우선 꾸역꾸역 일을 했고 결근도 조퇴도 절대 하지 않았다.

돈관리는 이때부터 엄마가 관리했다.

엄마는 월급날 아침이면 전화가 온다,

"너 오늘 월급이자?" 어마 통장으로 바로 입금하던지 아니면 그대로 가지고 오라고 말이다.

난 이 말이 너무나 싫었다.

이때 나는 지금 생각하면 나를 믿어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심정은 이해한다. 

또 친구들에게 다 퍼줄까 봐 그런다는 것도 이해하겠다.

하지만 나의 21살은 이러한 엄마의 월급날의 전화가 그리 달갑지 않았다.

" 아..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월급날이 즐거워야 하는데 "또 엄마 전화 오겠네"라는 생각만 많이 했다.


집에서 따로 내가 빗을 상환하는데 보태어 준 돈은 단 한 푼도 없다.

다 내가 스스로 상환했고, 엄마는 돈에 대한 관리만 해주었고, 지금 이 나이까지도 집에 도움을 받은 적은 없다. 나는 지금까지 나 스스로 어떻게 보면 맨땅에 헤딩하는 인생을 살아오고 있다.


나의 20대도 마찬가지이다.

난 이때도 세상에 나 혼자 남은 기분이 들었다.

친구도 배신하고, 남자 친구도 떠나고 나에게는 남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에 세상에 나 혼자이구나. 가족도 내편이 아니야라고 말이다.

진심으로 세상에 뚝 떨어져서 돈만 버는 기계 같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이때를 회상하면 눈물이 나려고 하기도 한다.


그때 울고 싶었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눈물이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부분을 알수도 없을 만큼 내 맘은 엉망이 되어있었다.

마치 거미줄에 얽히고설킨 것처럼 말이다.

누가 내 맘 속에 들어와서 이 거미줄을 다 제거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없다.

친구들은 나름대로 사회생활을 잘하는 것 같다. 그들이 참 부러웠다.

"난 왜 저렇게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없을까?"

" 난 왜 대학도 가지 못할까?'

" 난 왜 꿈을 포기해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만 내 머릿속에 가득했다.

월급날의 엄마의 전화는 마치 사채업자의 독촉 전화와도 같았다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회사 월급날은 어디도 가지 못한다 바로 집으로 가서 엄마에게 현금뭉치르 들고 간다.

엄마는 내가 받은 월급을 정확히 알고 있다.

난 이 순간이 너무 싫다.

[순서]

1. 월급날 엄마가 전화가 온다.

2. 월급날은 지옥 같은 기분으로 하루를 보낸다.

3. 집에 가는 길에 현금인출기에서 통장의 돈을 모두 인출한다.

4. 인출한 돈을 집으로 가지고 가서 엄마에게 준다.

5. 엄마와 계산을 시작한다.


[계산절차]

1. 엄마는 우선 신용회복 위원회에 상환할 돈을 세어서 바닥에 놓는다.

2. 이제 성인이고 집에 보태야 한다며 집세를 받는다.

3. 핸드폰 요금에 대한 금액을 영수증과 함께 확인하고 바닥에 놓는다.

4 집에 나오는 공과금을 집에 거주하는 이유로 언니와 나는 3등분 하여 주어야 한다.

5. 나머지 남은 돈으로는 조금의 용돈을 받는다.

6. 이렇게 제하고 나면 20마 원가량 남는다. 이것은 저축한다.


이렇게 계산을 끝난다. 어떤 날은 돈이 모자랄 대도 있다, 공과금이 여름이나 겨울에는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전기세와 수도세 그리고 집세를 제하고 나면 어떨대는 저축할 기본금도 남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엄마가 돈을 가불 해준다. 가불 된 돈으로 적금이 들어가고 엄마는 가계부에 적어놓고 다음 달 급여에서 상계 처리 한다.


이런 상황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다 보니, 엄마에게 단돈만원도 빌리기 힘들었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냥 모든 것이 귀찮고, 이 집에서 급기야 "탈출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성인이 되어서야 하게 되었다.

나는 이런 상황이 너무나 싫었다. 

언니도 힘들었던 것 같다.

하나뿐인 남동생은 아무것도 내지 않았다.

이건 불공평한 것이다.

남동생이 생활비등을 내지 않은 것은 단 하나뿐,

"귀한자손이기 때문에 대학을 보내야 한다. 그래서 남동생에게 우리는 희생하여야 한다"

" 남동생의 대학교 비용을 우리가 벌어서 함께 보태어야 한다"

이것은 당시 우리 부모님의 생각이었다.


이때는 따져 물었다.

"우리는? 우리는 상관없고? 남동생만 대학을? 이건 아니지 않아?"라고 말이다.

돌아오는 답은 하나.

"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

" 너네는 시집을 잘 가면 되는 거 아니냐" 이거다.

참으로 화가 나고 어이가 없다. 난 부모님을 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때의 시절에는 그럴 수밖에 없던 시절이기도 했다.

남아 선호사상이 아주 아주 강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미안해하시지만 , 그때는 나와 나의 언니는 가슴에 상처를 심하게 입었다.

그렇게 나의 21살이 계속 지나가고 있다.


아.. 자유롭고 싶다. 그냥 사라져 버리고 싶다.

이 상황이 너무 힘들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루하루 했다.

아직 살아있지만 이때부터 나의 우울증은 조금씩 시작되었고, 가족과의 대화도 친구들과의 만남도 거의 가지지 않았다. 그냥 시간이 나면 멍하니 누워서 눈을 감고 잠을 하루종일 자거나 먹지 않았다.

그게 유일한 나에 대한 벌이었다.


그렇게 나의 우울한 21살이 시작되었고 나는 살기도 죽기도 그 아무것도 의미도 없이 살아갔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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