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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마님 Jul 09. 2022

펭귄을 만나려고 배를 놓쳤나 보다

파워 긍정론자의 여행일기


Friday, January 8, 2016

사실 펭귄섬이 예정된 여행지는 아니었다. 나는 어제 칠레치꼬로 가는 12시간짜리 밤배를 놓쳤다.


오전 8시 출발하는 배라고 해서 승선을 위해 2시간 전에 도착했는데, 오피스로 가니 배는 이미 출항을 했단다. 그것도 이틀 전에 말이다! 뭐라고? 내 얼굴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설명을 듣고 나서 다시 읽어보니, 내가 예약한 온라인 바우처의 맨 하단에 아주 작은 글씨로 "배 스케줄은 변동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틀 전에 오피스로 와서 실제 티켓으로 발권을 해야 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아니 이것이 보험약관인가 페리 티켓인가... 이렇게 중요한 것을 회색 글씨로 폰트 5로 써둔다고?!

이 배를 타려고 푸에르토 바라스에서 4일을 미적거렸는데?!


다음 배는 3일 후 출발한다고 해서, 변경 수수료를 내고 배표를 발권했다. 허망하게 일정을 강제 조율당했으나, 긍정 회로를 잠시 굴리며 합리화를 해본다. <그간 무전취식했고, 칠레 친구들도 사귀었고, 살사도 한 번 추러 갔으니, 배 하나쯤 놓칠 수 있지...> 그래도 등에 한짐을 싣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 숨겨지지 않는 멍청함이 고단하다.


안 그래도 파타고니아는 낮이 길어 하루만 있어도 3일 같은데 3일이나 더 기다려야 하다니. 나는 먼저 크리스티앙에게 연락해 무전취식이 3일 연장된다는 것 알렸다.(그는 속상해하며 배 스케줄을 검토해 주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다음으론 민 언니에게 연락했다.  


민 언니와는 바라스에 온 첫날, 오소르노 화산 정상에서 만났다. 젊은 한국인 부부가 보여서 내가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니 몹시 신기해한다. 남미에서 몇 년 살면서 인사를 건네는 한국인은 정말 드물다며 반가워했다. 다들 ‘한국인이네’라고 서로 알아보기는 해도 말은 잘 안 나눈다면서, 여기서 오래 머물 거면 집에 한번 놀러 오라고 했다. 언니는 이곳에선 유일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거실 창으로 바다와 화산섬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파트 공지로 된장국을 끓이지 말라는 경고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 된장 냄새에 익숙하지 않은 칠레인이나 이민자들이 냄새에 놀라 불쾌했나 보다) 나에게 미역국과 김치 밥상을 차려주고, 떡도 구워주었다. 인사만 잘해도 김치와 떡이 나온다.


[언니, 저 배를 놓쳤어요.]

[아이고... 그럼, 펭귄 보러 가자. 마침 딱 펭귄을 볼 수 있는 때야,]

언니는 고맙게도 칠로에 섬의 펭귀네라 투어를 제안하고 동행해주었다.


그렇게 파타고니아에 사는 마젤란 펭귄들을 볼 수 있었다. 펭귄들이 작은 바위섬 위에서부터 줄지어 내려온다. 뒤뚱뒤뚱 부지런히 걸어서 바위섬 끝에 도달하면, 일부러 중심을 잃고 툭, 바다로 떨어진다. 섬 자락에는 3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해초들이 넘실거렸다.


펭귄들은 바닷속으로 쏘옥 미끄러져 들어간 후에는 한참을 보이지 않다가, 뭍으로 걸어올라와 젖은 털을 손질한다.

 

현재 이곳은 얇은 패딩을 입는 한국의 초겨울 날씨다. 펭귄들은 날이 더 따뜻해지기 전에 추운 바다를 헤엄쳐 남극을 향해 갈 것이다. 조만간이다. 이렇게 따뜻한 기온에서 펭귄을 볼 수 있는 시기는 딱 이때뿐이다. , 내가 이 펭귄들을 만나려고 그 배를 놓쳤나 보다!


내가 배를 타고 12시간, 다시 버스를 타고 18시간 가야 하는 거리를 펭귄은 부단히 헤엄쳐서 이동할 것이다. 저 작은 몸으로. 새삼 그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너네는 배 놓치고 그러지 말고, 미리미리 체크인하렴.

그리고 모두 무사히 도착하자! 남극으로 가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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