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와 줄 수 있어? 내과 왔는데 엄마 피가 부족하다고...큰 병원 가서 수혈받아야 한대."
봄이 스멀스멀 다가오던 어느 날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전화했구나 싶었는데, 빈혈수치가 5.5라고 했다.
이 날은 엄마가 암진단을 받기 전, 지옥의 서사가 시작된 날이다. 감기증세로내과에 들렀던 엄마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고연락한 것이다. 잠시 후 엄마와 병원에 도착했다.병원직원에게 엄마 상태를 설명하고 빠른 접수를 부탁했다.
"혈액종양내과대기실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혈액종양내과라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그땐 빈혈수치든 십이지장암이든 모든 것이 백지상태였다. 수혈만 받으면 괜찮을 줄 알았다. 그날 이후로 빈혈수치는 7을 넘지 못했다. 수혈받고 며칠만 지나면 수치는 6, 5, 4로 떨어졌다.
뇌졸중이 발병한 무렵에는 3.7까지 내려갔다. 엄마 몸에 피가 줄어들수록 죽음의 공포는 죽죽 늘어 갔다.
엄마는 수혈 전후 컨디션이 확연히 달랐다. 수치가 떨어지면 축 늘어졌고 피를 공급받으면 컨디션이 일시적으로 돌아왔다. 암덩어리는 어찌할 수 없지만 수혈이라도 할수 있음에 감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밑 빠진 독에 물이 새듯 피는 꾸준히 새어 나갔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1~2주 전이었다.재입원을 위해 노인요양병원 의사와 면담을 가질 때였다.
" 혈액은행에 피가 많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가능성 있는 환자에게 혈액이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통사고로 과다출혈인 분이 있다고 칩시다. 그분은 수혈만 받으면 생명을 구할 수 있지만 어머니는 수혈자체가의미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컨디션만 회복되고 고통만 줄 뿐입니다. 이제 그만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할 수 있는 치료가 아무것도 없는데 수혈마저 하지 말라니. 어차피 죽을 거니까 엄한데 힘 빼지 말란 소린가. 물론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의료진의 한마디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던 때였으니까. 온몸에 맥이 풀렸다. 수혈마저 포기하면 엄마가 당장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의사는 이성적으로 판단했고 나는 감성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 그래도... 마지막까지 수혈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수혈이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했다. 그것마저 하지 않는다면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수혈을 두고 의사와 양보 없는 줄다리기를 계속했다.넋 놓고 죽음을 기다리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사랑보다 미움을 먼저 가르쳐 준 엄마지만 그녀는 나의 하나뿐인 엄마였으니까.
병원 응급실로 이송되던 날 또 한 번 혈액 부족사태가 터졌다. 혈액은행에서 하루에 지급되는 혈액의 양은 정해져 있었는데 엄마에게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마비증세와 고통이 심해지자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 엄마와 혈액형이 같아요. 제 피라도 뽑아주세요."
혈액공급과정에 무지했던 나는 심장이 가리키는 대로 내뱉었다.
"그건 안 됩니다. 혈액공급 과정과 절차가 있어서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가슴이 타들어 갔다. 모든 과정과 절차를 생략하고서라도 피를 나누고 싶었다. 그 후 엄마는 최소한의 수혈만 받고 1주일 만에 퇴원해야 했다.
한계선도 정지선도 알지 못했다. 엄마를 위해 어디까지 해야 최선인지 어디서 멈추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정답이 있다면 누군가 속시원히 대답해 주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