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조각케이크 먹을 만큼 어른이 되었다
회색카페 넋두리
필라테스를 끝내고 들여다본 하늘은 회색빛이다. 사람목소리, 커피 향이 유리창 너머 묻어난다. 주차장은 만석이다. 아침 속 자리한 카페는 활기가 넘친다. 이 시간 이 공간에 이십여 개 삶이 모였다. 저들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우리는 어떤 선을 긋다가 마주친 걸까. 시작은 알 수 없으나 오늘, 여기서 교점을 남긴다.
글감을 혹 낚을 수 있을까. 무채색 하늘을 캔버스 삼아 붓을 그러쥔다. 글을 시작했으면 끝까지 완성하라고 했다. 완성만이 의미 있다고. 나는 어떤 완성을 하려는 걸까.
바늘구멍보다 작은 이 틈을 어떻게 통과해 왔을까. 그들은 내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상처 입고 처참하게 찢긴 중년 여자를 봤을까. 오로지 활자에 새겨진 언어를 읽었을까.
물 흐르듯 글을 써내는 저들은 언제부터 실을 뽑아냈을까. 우리는 거미인가. 몸 안의 실을 뽑아 언어라는 집을 짓는다. 제 몸에서 뽑아낼 언어를 다 뽑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무로 돌아가는 걸까.
안에 가득 찬 언어를 토해내고 나면 텅 비게 되는 걸까.
머릿속에 물음표가 자꾸 돋아난다. 글을 터덜터덜 흘리고 가다 보면 헨젤과 그레텔처럼 떠나온 집을 찾을 수 있을까. 애초 나의 집은 어디인가. 엄마, 딸, 며느리, 아내이기 전 순수결정체로서 나는 누구인가.
불혹을 넘기면 세상이 명확해질 줄 알았다. 갈수록 의문만 뚜렷해진다.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가는 길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은 실체일까.
쓰기 위해 글을 쓴다는, 그냥 써야 하니까 쓴다는 모 작가처럼 사니까 살아가는 걸까. 살아있으니 그저 살아가는 걸까. 사는 대로 살아지는 대로 살아가는 게 맞는 걸까. 무엇을 성취하려 발버둥 치고 잠을 줄여가며 혹독하게 자신을 틀어쥐어야 하나.
아직도 쓴 커피 한잔 오롯이 마시지 못한다. 커피 양만큼 물을 희석시켜야 마실 수 있다. 내 삶은 진한 아메리카노다. 오늘도 살아온 횟수만큼 물을 퍼 나른다.
나는 겨우 조각케이크를 주문하고 혼자 먹을 수 있는 만큼의 어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