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아 Aug 11. 2024

좋아해야 하나요, 슬퍼해야 하나요?

허당며느리 사고일지

시댁방문한 지 까마득해질 무렵, 버럭씨(남편)가 말했다.

"너희들 방학한 지도 제법 됐는데 할머니댁에 한 번은 가야지"

시선은 아이들을 향해 있었지만 나 들으라고 한 말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안부인사는 가끔 했지만 방문한 지는 제법 된 것 같다. 날은 덥고 농작물은 쑥쑥 커가고 손자손녀 얼굴이 아른아른 눈에 밟히실게 분명했다.


"얘들아, 옷 입고 준비해. 할머니가자."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섰다. 주차장은 벌겋게 달아오른 가마솥같이 끓고 있었다.

몇 주만의 방문인데 빈손은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다. 무엇을 사갈버럭씨와 의논하다가 복숭아로 결정했다. 


시댁 가는 길 도로가에는 사시사철 제철과일 판매하는 할머니가 계신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뙤약볕도 괘념치 않고 계절마다 수확한 과일을 팔고 계신다. 오늘은 수줍은 소녀의 발그레한 볼 같은 복숭아가 풍년이다. 향긋한 복숭아 두 봉지를 사들고 다시 시댁으로 출발했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방문한 아들내외와 손주들을 위해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국수를 준비할거라 하셨다. 거실에 들어서자 맛깔스러운 멸치육수 향이 은은하게 났다. 손주들을 얼싸안고 반가워하시는 어머니를 보니 그간 자주 찾아뵙니 못한 날들이 죄송스러웠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어머니는 국수에 넣을 고명과 나물을 준비하셨다. 나도 어머니를 뒤따라 쫄랑쫄랑 부엌으로 향했다.

막내며느리는 야무(?) 겉모습과 달리 소문난 허당이다. 오늘은 또 어떤 사고를 칠까 두근두근. 무탈하게 열심히 어머니 보조를 하느라고 했는데... 역시! 부추를 데치려고 펄펄 끓여놓은 물에 국수면을 자신 있게 투하했다. 놀란 어머니 차마 짜증은 못 내시고

"아... 아니, 그 물은 부추 데치려고 했는데..."

조용히 말씀하셨지만 불편한 기색과 화를 누르는 ~한 느낌공기로 피부로 느껴졌다.

"... 어머니... 그럼 국수면부터 고 부추 데치면 안 될까요?"

궁색하게 말해보지만 이미 어머니의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실수를 만회해 보고자 후다닥 달걀지단을 부치고 상차림을 준비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시골 국수 한상차림이 완성됐다.

푸짐한 상차림에 뿌듯해하며 어머니를 불렀지만.

"아니다, 너희 먼저 먹어라, 나는 마무리 좀 마저  해놓고."

이럴 땐 진짜 먼저 먹어야 하나, 아님 부엌으로 쪼르르 달려가 애교와 살가움을 장착하고 어머니 곁을 지켜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때 버럭씨가 먼저 먹으면 된다 보내왔다. 버럭씨도 나만큼 눈치 없는 일인자인데. 그 중요한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앞에 앉아 열심히 면발 치기를 했다. 국수맛은 최고였다. 여느 국수맛집 비교도 안될 만큼 육수맛이 끝내줬다. 어머니도 잊고 며느리 정체성도 잊고 국수삼매경에 빠져 후루룩거리는데 왠지 뒤통수가 따갑다. 이건 나만의 착각일까.


식사 후 다시 실수를 만회해 보리라 다짐하 기회를 엿보았다.

"어머니. 제가 커피 탈게요."

2회 차 도전이다.

 '이번엔 웬만한 커피맛집 못지 않은 맛난 커피를 타리라.'

두 주먹 불끈 쥐고 비장한 마음으로 커피포트 물을 끓였다. 컵에 믹스커피 가루를 무탈하게 넣고  뜨거운 물만 붓고 저으면 끝이다. 흐흐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물을 붓고 커피포트를 제자리에 둔다는 게 그만...

우당탕탕! 좌르륵~~~ 콸콸콸~~~

식탁 위에 있어야 할 커피포트가 남은 물을 토하며 부엌바닥으로 장렬히 전사했다!

우당탕탕 부엌살림 다 때려 부는 소리에 어머니와 버럭씨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부엌바닥은 뜨끈한 온천이 되어 있고 커피포트는 만신창이가 되어 부엌바닥을 쓸쓸히 뒹굴고 있다.

입술을 꽉 깨문듯한 어머니가 흥건한 바닥을 훔치다. 허당 막내며느리는 허둥거리다 부랴부랴 뜨끈한 온천물 제거에 합류했다. 히잉~


'아, 오늘은 사고 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려 했는데.'

죄송하고 민망한 마음 어찌할 모르고... 손발이 안 보이도록 빠르게 물기제거에 열을 올렸다. 빛의 속도로 어째 저째 마무리했지만...


다시 만회할 기회를 엿보다 거실 한쪽에 새초롬하게 누워있는 고구마줄기 발견했다.

'그래, 예쁨 받는 막내며느리 필살기, 너희로 정했다.'

고무재질의 위생장갑을 끼고 나름 능숙한(?) 손놀림으로 고구마 줄기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위생장갑이 손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안 들어간 것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서 턱 걸다. 삶다 만 닭발은 흐물거리는 위생장갑을 끼고 열심히 고구마줄기 껍질을 벗겼다.

"장갑이 좀 크네. 저기 보면 작은 사이즈 있으니까 그걸 쓰거라."

하시며 어머니가 작은 위생장갑을 손수 가져다주셨다. 아, 이제야 어머니마음이 풀리셨나. 황송한 마음으로 장갑을 바꿔려고 했다. 그런데 웬걸 땀이 찬 고무장갑이 벗겨지지 않는다. 어랏, 왜 이리 안 벗겨지지? 조금... 더... 힘을 줘서 벗기는데

 '좌~~ 아악!'

고무위생장갑이 처참하게 찢어져버렸다. 너덜너덜해진 장갑 사이로 눈치 없는 허당며느리 손바닥이 수줍게 웃고 있다. 끙.

"..."

어머니는 고요히 시선을 돌리셨다.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열심히 머리 굴리며 버럭씨에게 SOS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나보다 더 눈치 없는 버럭씨는 사온 숭아를 저 혼자 아작아작 맛있게 먹고 앉아 있다.

하~~ 당분간 어머니는 막내며느리를 찾지 않으시겠구나.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눈치 없고 요령 없는 막내며느리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출처: 네이버 '며느라기'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