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고 싱그러웠던 엄마는 온데간데없고 늙고 병든 노인이 나타났다. 딸들 곁에 있어주러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보호자가 되어달라면서.
내 삶에 있어서 더 이상 엄마가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기어코 들어오려는 당신은 불청객일 뿐이야.' 밀어내는 딸들을 모른척하며 뻔뻔하게 천연덕스럽게 엄마는 우리 곁을 맴돌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끈질기게.
엄마는 변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딸자식이 새 생명을 잉태한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골절로 인한 자신의 고통이 세상 무엇보다 컸으니까.
엄마의 수술, 입퇴원, 그 후 크고 작은 경제적 지원. 무엇하나 달갑지 않았다. 우리는 윤리적 도리와 어릴 적 트라우마속에서 매일 허우적거렸다. 매정하게 끊지도 자비를 품을 수도 없었다. 모녀의 거리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피로 맺어진 인연은 질기고도 질척거렸다.
엄마는 자신을 배신한 남편에게, 냉대하는 자식에게, 한 순간의 행복도 허락하지 않은 냉담한 세상을 향해 복수를 결행했다. 당뇨와 각종 합병증이 자신을 갉아먹도록 방치하는 것. 어쩌면 우리의 무관심과 애증이 병마를 키웠는지도 모른다.
당뇨진단 후 엄마체중이 줄기 시작했다. 미미하게 살이 빠지고 있던 참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술에 절어 살던 당신이 괜찮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믿고 싶었다.
지속된 무관심과 방치는 수명을 뭉텅뭉텅 잘라먹었다.
혼자 병원을 전전하다 이상함을 느낀 엄마가 나를 불렀다.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병원을 향했다.
몇십 년 만에 피보호자(被保護者)에서 엄마의 보호자로 섰다. 혈액검사에 이어 각종 정밀검사를 병행했다.
낯선 검사실로 비틀비틀 걸어가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부축할까 망설이다 몇 걸음 떨어져 걸었다. 이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거리라고 지금의 관계라고 보여주고 싶었다.
'어서 똑바로 걸어보라고. 자식을 두고 당당하게 떠났던 그날처럼.'
단독으로 생활할 때가 많은 뻐꾸기(출처: NAVER 지식백과)
엄마를 떠올리면 뻐꾸기가 생각났다.
뻐꾸기는 스스로 둥지를 틀지 않고 멧새, 종달새 등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아 탁란 한다. 새끼 뻐꾸기는 태어난 직후 얼마 동안은 본능적으로 몸에 무언가 닿는 순간, 무조건 밀치려는 습성이 있다. (출처: 네이버 나무위키)
뻐꾸기를 닮은 엄마, 새끼 뻐꾸기를 닮은 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우리 인연은 비극적 운명이 아니라 뻐꾸기의 본능처럼 선천적인 습성일지도 몰랐다.
검사결과는 1시간~2시간 사이에 나온다고 했다. 대기실에 앉아 멍하니 결과를 기다렸다. 각기 다른 질병과 다양한 사유를 가진 사람들이 지나간다. 젊음을 탕진한 엄마와 마음을 탕진한 딸이 나란히 앉았다.
얼마 후 현실감 없는 진단결과가 나왔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던 일들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