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엄마 따위 필요 없어

사랑은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by 진아

엄마는 남편의 잦은 바람과 폭력을 견디지 못했다. 덜너덜 찢긴 채 결국 집을 나섰다. 어린 자매는 덩그러니 남겨져 할머니 품에 자랐다. 어미품이 그리우면 쭈글쭈글한 살을 만지작거리며 형체 없는 허기를 달랬다. 할머니는 어린 손녀가 안쓰러워 전전긍긍하셨다.

세상 이치를 어렴풋이 깨달아갈 때쯤, 친척집을 전전하며 보냈다. 보잘것없는 뻔한 살림에 조카라는 짐도 더했으니 속 편할리 없었다. 서로의 눈치를 밥 먹듯 주고받으며 무수한 날들이 지나갔다.



엄마는 불쑥불쑥 나타나 꿈처럼 사라졌다.

유치원 정문에, 하교 길에 등장해선 안 되는 인물이 나타났다. 오늘 아침에 다정하게 인사를 나눈 여느 엄마처럼 태연하게 나타났다.

그때는 엄마품이 너무 절실해 미움보다 그리움이, 절절함이 더 컸다. 엄마냄새를 기억하기도 전에 사라질 한여름 밤 꿈인 줄도 모르고.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엄마. 그녀에 대한 갈증은 불안으로 자라났다.



상처는 감추고 모른 척한다고 잊히는 게 아니다.

형체가 보이지 않을 뿐 마음속에서 덩치를 부풀리고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땐 심장을 뚫고 나온다는 사실을 몰랐다.

미성년의 허물을 벗고 사회로 날아갈 때쯤이었다. 엄마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잊힐만하면 전화를 했다.

자신의 생일과 우리 자매의 생일을 축복하며

" 생일 축하해, 올해도 건강하고. 사랑해."

" 엄마생일인데 축하 좀 해줘. 냉면 먹고 싶은데 생일선물로 냉면값 좀 보내줘."

사랑은 무슨. 자식도 버린 주제에. 속으로 욕을 한 바지가 쏟아부었지만 사랑한다는 낯설고 생경한 단어가 마음을 간지럽혔다.

매번 자신의 생일을 꼬박꼬박 잊지 않고 챙겨달라는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무슨 낯짝으로 자식에게 자신의 탄생을 축하해 달라는 건지.

아이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엄마의 맑음에 화가 났다. 주름진 얼굴과 상반된 천진난만함은 엄마를 더욱 외진 섬으로 이끌었다.


젊은 날 부부의 치기는 평생 씻지 못할 주홍글씨가 되었다. 불안정한 가정은 바다 위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곪아버린 상처는 엄마의 뇌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내 상처만 들여다보느라 엄마가 가진 상처는 안중에 없었다. 그녀가 엄마이기 전, 사랑받고 자라야 할 아이였고 믿음직한 남편을 갈망한 아내였고 삶의 행복을 바란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늦게 깨달았다.

엄마를 떠나보낸 후에야 그녀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부모사랑 없이 자란 허기를 남은 혈육에게 채우려 했다는 것을 이제야 깨우친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축복받고 싶었다는 것을.

매년 규칙처럼 이어지던 안부전화는 지겹고 거추장스러운 행사 같았다. 엄마가 표현한 최대치의 사랑인 줄도 모르고.

어린 시절 어미의 사랑을 갈구했던 날들이 지나가고, 더 이상 엄마손길이 필요 없을 무렵, 그녀가 온전히 돌아왔다. 늙고 병든 육체를 이끌고서.


이제 엄마 따위 필요 없다고.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