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너 참 예쁘다- 26
밤새 올려놓은 지퍼를 내리면 빛이 들어온다. 목 끝까지 채워놓은 지퍼는 갓 태어난 새벽만이 풀 수 있다. 닫힌 밤이 열리고 서서히 들어선 아침.
낮의 기장은 턱없이 짧아 발목이 껑충 드러난다. 밤의 기장은 아득하게 길어 아직도 땅을 훑으며 지나간다. 까만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밤은 눈이 보이지 않으니 저 밤을 끝까지 틀어 올려야지. 흰 목덜미같이 환한 아침이 오도록.
세상을 담기 위한 눈은
낡은 지 오래
할머니의 눈은
보고 싶은 과거만 기다리는
정류장으로 남았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훌쩍 커버린 사람을 기다리며
저 산만큼 거대해진
시간의 두께 속에
반쯤 잃은 구멍 속에
그리움만 남겨놨다
메마른 땅에 남은 눈은
삶과 죽음 사일 엿보는 틈
몇 안 되는 열망, 기공, 옹이
지방이 빠진 삶은 헐렁하고
붙잡지 않으면 이내 주르륵
흘러내리고 말아
언제 닫힐지 모를 구멍 사이로
부피만 불리는 시간
지팡이에 힘을 줘봐도
생생하게 움직이는 건
그리움의 무게뿐
글은 쓰는 사람의 지문이다. 마주하지 않아도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다. 글 속에 고스란히 남은 흔적은 뼈대를 세우고 스스로 살을 채워 나간다. 얼굴 없이 마주한 우리는, 늘 그렇듯 활자를 가르는 공기같이 인사를 나눈다.
시는 쓰는 사람의 마음사진이다. 어떤 감정도 판박이처럼 박혀 나온다. 뼈가 고스란히 드러난 사진처럼 영혼의 형태가 찍힌다. 슬픔 눈물 기쁨 행복의 선이 도드라진다. 어떤 날은 복받치는 눈물이, 어떤 날은 터질듯한 설렘이 발자국같이 찍힌다. 수만 가지 감정과 마음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며, 청사진은 지금도 인화 중이다. 아직 인화되지 않은 씨앗은 여기저기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
내일은 삶요일 오늘은 빛요일. 일주일에 요일 하나를 더 추가한다. 딱딱한 일곱 개 일상에 말랑한 젤리 같은 요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겨울에는 마시멜로 같은 여백을, 여름에는 탄산수 같은 숨을 더하기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