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에서 바로 꺼낸 사진처럼

구름이랑 얘기해 본 적 있니 | EP.04

by 마리엘 로즈


비도 오는데 우리 재밌는 이야기나 할까


이럴 때는 말이지,

짝사랑 얘기가 최고 아니겠어.




중학교 때였어.
교복 치마가 아직 어색했고
가방은 늘 몸보다 커 보이던 때였지.

비 오는 날이면
버스 안은 유난히 좁아졌어.
젖은 우산 냄새, 김 서린 창문,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그저 어깨를 맡긴 채 서 있던 시간.


그 오빠는 말이지...

늘 같은 자리에 서 있었어.



대학생이라고 부르기엔
나에게는 너무 어른 같고,
그래서 더 멀게 느껴지던 사람.

이어폰을 한쪽만 꽂은 채
창밖을 보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해.
비가 유리에 닿을 때마다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이던 습관까지.

말을 건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이름도, 학교도 몰랐고
그저 같은 시간대, 같은 노선을
타고 가는 사람일 뿐이었는데.

이상하게 어느날부터

그 오빠만 타면 긴장이 되기 시작하는 거야.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젖지 않게 가방을 안고
내릴 정류장을 한 정거장쯤 지나쳐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

그 오빠가 먼저 내리고 나면
버스가 갑자기 너무 밝아 보여서
괜히 창밖을 더 오래 바라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혹시라도 같이 탄 날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집에 돌아와서도
하루종일 마음이 들떠있었지.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잃지 않은 짝사랑.

그래서 아직도
비 오는 날 버스 창문을 보면
그 시절의 내가 먼저 떠오르는건지도 모르지.


좋아했던 사람보다
좋아하던 내가 더 선명한 기억.




그 오빠는 항상 나보다 늦게 탔고
늘 나보다 먼저 내렸어.

나는 학교를 멀리 다녀서
좌석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출근 시간대라 늘 사람이 많았거든.


좌석버스인데도
앉을 자리는 좀처럼 없어서
대부분 좁은 통로에 서서 갔지.

그날도 그렇게 서 있었는데,
그 오빠가 내 바로 옆에 선 거야.

그것만으로도
이미 심장이 조금 빨라졌는데,
거짓말처럼
우리 앞쪽 자리가 동시에 비어버렸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정말 자연스럽게
나란히 앉게 됐어.

...
그때 그 두근거림은
지금 생각해도 좀 웃겨.

아무 일도 안 했고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괜히 손 둘 곳을 찾게 되고,
다리가 닿을까 봐
괜히 자세를 고쳐 앉고.

버스는 평소처럼 달리고 있었는데
나 혼자만
큰 사건 속에 있는 사람처럼
심장이 정신없이 뛰고 있었어.

그 오빠는 늘 그랬듯
나보다 먼저 내렸고,
나는 그 뒤를 이어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학교에 갔지.

그날은
수업 내내
조금 붕 떠 있었던 것 같아.




이 이야기의 좋은 이유가 뭔지 알아?


아무 일도 없어서...

그래서 좋아.

민망하지도 않고,
후회할 것도 없고,
지금 꺼내도
마음이 어색해지지 않아.



사람들은 말야
꼭 인생에 특별한 일이 있기를 바라잖아.

그런데 나는
특별한 기억보다
아무 때나 꺼내볼 수 있는
이 정도의 기억이 더 좋더라.

오늘 같은 비 오는 날엔
이 정도 기억이 딱이거든.


마치 앨범에서 바로 꺼낸 사진처럼,


설명할 필요가 없잖아.

덧붙일 말도
정리해야 할 감정도 없이
그냥 그대로 보면 되는 기억.


나를 알지도 못하는 그 오빠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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